보통 절판됐다가 다시 나온 책을 '오래된 새책'으로 소개하곤 하는데(혹은 고전들도 이 카테고리에 들어간다), 요즘은 별로 '오래되지 않은 새책'도 등장하고 있다. 이번주에 나온 <언어의 정원>(알마, 2015)과 <대학의 위선>(알마, 2015) 같은 경우다. 아마도 도서정가제의 영향인 듯싶은데, 구간본의 정가를 다시 매긴 재정가본이나 표지/제목을 바꿔서 다시 펴낸 재간본 등이 '도정제' 이후 더 많아진 느낌이다(통계를 갖고 있지 않으나 느낌으로는 그렇다). 제목이나 표지에 '현혹'될 수 있으니 나름 주의해야 할까.

 

 

프랑스의 고고학자 파스칼 피크 외 3인이 언어를 주제로 나눈 대담집 <언어의 정원>은 당초 <가장 아름다운 언어 이야기>(알마, 2011)라고 나왔던 책이다. 꽤 흥미로운 내용이 담긴 교양서지만, 저자가 생소하고(비록 피크는 콜레즈 드 프랑스의 교수라고 해도) 더구나 '언어'를 주제로 하고 있기에 독자들의 반응이 기대에 못 미쳤던 것 같다(국내에서 언어학 독자는 해양 생물학 독자 수준이지 않을까). 파스칼 피크는 '과학과 사회' 시리즈의 하나인 <언어의 기원>(알마, 2009)을 비롯해 여러 권의 책이 소개돼 있는 학자. 하지만 국내에는 다 가벼운 책만 번역돼 있다. 콜레즈 드 프랑스의 교수를 할 정도로 역량 있는 학자라면 더 묵직한 주저가 있을 듯한데 그런 책들이 소개되면 좋겠다. 아무려나 <언어의 정원>은 가벼운 언어학 입문서로도 삼을 만하다.

이 책에서는 이를 위해 고고인류학자와 언어학자 그리고 소아과의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의 지식과 통찰을 들어본다. 어린이 같은 단순하고 꾸밈없는 태도로 언어에 관해 묻고, 머리를 맞대고, 답을 찾아나간다. 또한 본문이 대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난해하거나 추상적인 용어로 독자를 주눅 들게 하지 않는다. 전문용어를 최소화하고, 알기 쉽고 명쾌하게 주제에 접근해나간다. 특히 다양한 학문 배경을 바탕으로 풍부한 사례를 들어, 멀게만 느껴졌던 언어학을 대중 독자들의 코앞에 맛깔나게 제시한다. 이 책은 언어학에 발을 들여놓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 더없이 좋은 입문서 역할을 할 것이다.  

 

스탠퍼드 법대 교수인 데버러 로드의 <대학의 위선>(알마, 2015)도 <언어의 정원>과 사정이 비슷한 책이다. 원래는 <대학이 말해주지 않는 그들만의 진실>(알마, 2011)이라는 다소 긴 제목이었다. 원제는 <지식의 추구>. 제목으로 어림하자면 대학 사회의 요지경을 비판한 책이다. 실제는 어떤가.

누구나 짐작은 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던 대학 내부의 문제를 들춰 보여준다. 고등교육, 역사, 법, 사회학, 경제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면서 대학교수들의 ‘지위의 추구’가 어떻게 ‘지식의 추구’를 훼손하는지 고발한다. 교수들은 “내가 똑똑한가? 나는 정말 똑똑한가? 내가 제일 똑똑한 사람인가?”를 놓고 끊임없이 경쟁하는데, 이는 대학이나 학부생들에게 실질적으로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실적을 높여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아무도 읽지 않고 읽히지도 않는 논문이나 책을 출간하거나, 연구 활동에 집중한다면서 학부 수업에는 교수법에 대해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대학원생이나 시간강사를 들여보낸다. ‘학문의 자유’라는 울타리를 배경으로 아무런 제재 없이 검증되지도 않은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치는 경우도 빈번히 발생한다. 저자는 이러한 모습이 학문에서의 우선순위를 왜곡하고, 좋은 수업을 제공하려는 의지를 저해하며, 공적 지식인의 역할을 훼손하고, 효과적인 행정 업무를 방해한다고 비판한다.

물론 저자가 다루는 건 미국 대학의 현실이지만, 요지경 속이란 점에서 한국 대학도 크게 다르지 않으며(오히려 더한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장담한다) 그래서 꽤 실감이 나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생각하는 대책은 어떤 것인지도 궁금하다. 저자의 다른 책으로 <아름다움이란 이름의 편견>(베가북스, 2011)도 구입한 지 꽤 오래된 책인데,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찾아봐야겠다. 방안 어디에 있을 텐데...

 

15. 05. 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학자 김도련 선생이 풀어쓴 <주주금석 논어>(웅진지식하우스, 2015) 개정판이 나왔다. 1990년에 초판이 나왔었다는데, 논어에 대해 관심을 갖기 이전이라 기억에 없는 책이다. 개정판이 나와서 알게 된 사실인데, "<논어> 이해를 한 단계 끌어올린 획기적 저술로 평가 받으며, 이후 숨은 명저로 끊임없이 사랑 받아왔다"는 책이다. 어떤 책인가.

 

인문학 특히 고전 공부의 첫 걸음이라 하면 누구나 <논어> 를 떠올린다. 하지만 논어 공부가 생각처럼 쉽지 않은 것은, 옛 공부에는 옛 해석의 깊이까지 더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주주금석 논어> 는 가장 기본이 되는 주자의 해석에 다산의 해석을 아우른 유일한 저서이다. 이번에 새롭게 선을 보이는 <주주금석 논어> 는 오늘의 독자들에 맞춰 표기법과 옛 말투를 손보고 우리말로 풀어 더 읽기 쉽도록 했으며, 원음에 독음을 달아 편의를 더했다. 깊이 있게, 제대로,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는 책. 수세기를 이어온 <논어> 를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면서도, 새로운 눈으로 읽을 수 있는 단 한 권의 책이다. 

주자의 해석에다 다산의 해석을 아울렀다는 게 강점인데, 다산의 <논어고금주>는 워낙 방대한 책이기도 해서 나 같은 독자는 엄두를 내기 어렵다. 두 권 분량으로 갈무리돼 있으니 <논어> 읽기의 표준으로 삼아도 좋겠다.

 

 

인문 독자라면 대개 그렇겠지만 나도 꽤 여러 종의 <논어> 번역본을 갖고 있다. 기본은 김용옥의 <논어한글역주1,2,3>(통나무, 2008)인데, 이사를 하면서 따로 챙기지 않아서 어디에 꽂혀 있는지 모르겠지만, 눈에 띄는 대로 비교해서 읽어봄직하다. <김도련 논어> VS <도올 논어>라고 할까. 

 

 

거기에다 두 종을 더한다면, 배병삼 교수의 <한글세대가 본 논어 1,2>(문학동네, 2002)와 심경호 교수의 <논어1,2,3>(민음사, 2013) 정도를 읽고 싶다. 주자와 다산의 해석을 참고한 건 심경호 교수의 <논어>도 마찬가지다.

 

중국 사상의 원천 <논어>를 한문학자 심경호 고려대학교 교수의 강의로 읽는다.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는 2500여 년에 걸쳐 읽히고 있는 동양 고전의 정수이다. 최근 <논어>에 대한 자기 계발 서적이 범람하고 있으나 정작 신뢰할 만한 해설서는 드문 실정이다. 한문 고전에 대한 폭넓고 깊이 있는 연구로 정평이 난 심경호 교수는 <논어> 읽기에 첫발을 내딛는 초행자를 위해 곧은길을 안내한다. 심경호 교수는 동양 고전 연구의 권위자로 <논어>의 현재적 의미를 쉽고 친절하게 풀이하는 동시에, 주희와 다산의 권위 있는 옛 주석을 바탕으로 매 구절을 정확하게 해설한다.

다시, <주주금석 논어>로 돌아오면, 제자 정민 교수의 머리글 '만 냥짜리 논어'에 흥미로운 일화가 수록돼 있다.

이 책의 서두에 소개된 ‘만 냥짜리 논어’ 이야기는 한양대학교 정민 교수와의 일화로 알려지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정민 교수가 정릉의 김도련 선생 댁으로 한학을 배우러 다닐 당시 선생은 정민 교수에게 낡은 책 두 권을 보여주셨다. 그 책은 일제 말기 공출로 끼니가 어렵던 시절 아버지께서 뒤주의 쌀을 모두 내어 선생에게 사준 책이었다. 옆에서 책값이 비싸다고 타박하던 친구에게 “여보게! 저 아이가 이 책을 만 냥짜리 책으로 읽으면 책값이 만 냥짜리가 될 터이고, 한 냥짜리 책으로 읽으면 그 값밖에 안 될 것일세. 책을 보겠다고 10리 길을 사람을 데려왔는데 책값을 깎겠는가?”라고 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선생은 오랫동안 기억하고 계셨다. 그때 선생은 <논어>를 ‘만 냥짜리 책’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고, 이후 47년 만에 <주주금석 논어>를 펴냈다. 10년에 걸쳐 작업한 역작이었다.

그 '만 냥짜리' 책이 번듯하게 재출간돼 반갑고 다행스럽다...

 

15. 04. 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주의 고전'으로 루쉰의 <중국소설사략>(그린비, 2015)을 고른다. 아주 두툼한 분량의 중국소설사 강의록인데, 몇 차례 번역된 적이 있지만 모두 절판됐었다. 이번에 루쉰 전집판으로 다시 나온 건 조관희 교수의 번역인데, <중국소설사략>(살림, 2000), <중국소설사>(소명출판, 2004)로 나왔었다. 중고본을 구하려고 했으나 여의치가 않았는데, 버젓하게 재출간돼 반갑다. 

 

루쉰이 1920년 무렵에 강의했던 것을 정리한, 중국소설사 연구의 고전 <중국소설사략>을 그린비출판사에서 다시 펴냈다. 중국문학 연구의 대가 조관희(상명대 교수)의 기존 번역본 <중국소설사략>(1판 살림, 2판 소명출판)을 다듬고 보강하여 '루쉰전집' 11권에 포함시킨 것이다. 중국소설사 연구의 기본 골격을 세웠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루쉰의 중국소설사 연구는 후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 한국어판은 중국과 일본의 연구성과가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학술적 영향이 큰 저작이다. 우리는 근대 중국의 작가이자 사상가로서 잘 알려진 루쉰의 또 다른 면모, 즉 고전학자이자 문학이론가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중국소설사만 다룬 저작은 많지 않은데, 진평원의 <중국소설사>(자음과모음, 2004) 정도이고, 문학사로 범위를 확장하면 천쓰허의 <중국당대문학사>(문학동네, 2008)가 소개돼 있다. '당대문학사'가 우리식으론 '현대문학사'이다. 국내 학자의 책으론 김학주 교수의 <중국문학사>(신아사, 2013), 조관희 교수의 <중국소설사론>(차이나하우스, 2010)도 참고해볼 수 있겠다.

 

아무튼 분량 압박이 있긴 하지만 중국소설사에 대한 개관은 루쉰을 강의를 듣는 것으로 대신해보면 좋겠다. 루쉰의 '직강'에 견줄 만한 중국소설사 강의도 드물지 않겠는가.

 

15. 04. 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친숙한 제목일 텐데, 미국의 저명한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와이즈베리, 2015)가 재출간됐다. 그냥 다시 나온 줄 알았더니 전면 개정판이다. "원서 초판 발행 10주년을 맞이하여 총 10장으로 구성된 초판에서 두 장을 삭제하고 여덟 장을 새로 추가하여 절반 이상의 내용이 새로 추가된 전면개정판을 펴냄으로써 인지언어학의 최신 성과와 현재의 뜨거운 쟁점들을 대폭 수록했다." 이 정도면 한번 읽은 독자도 다시 손에 들 만하다. 조국 교수의 추천사는 이렇다.

 

인지언어학계의 거목으로 프레임 이론을 제시하며 미국 진보세력의 전략 혁신을 촉구한 조지 레이코프의 명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10주년 전면개정판이 나왔다. 분량과 내용에서 대대적 보충이 이루어져 책의 의의가 더욱 빛난다. 이 책은 미국은 물론 한국 정치 상황에 대해서도 선명한 지침을 제공한다. 자기주도 프레임이 없이 보수의 프레임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데만 급급한, 자족적이고 따라서 무능한 진보에게 승리는 오지 않는다. 유권자는 자기의 이익보다 정체성과 가치관에 따라 투표한다는 점을 망각하고 ‘탈이념’, ‘중도’ 운운하는 진보는 신기루를 찾는 격이다. 보수 집권 10년을 경험하며 답답함을 느끼는 많은 분들이 이번 10주년 전면개정판을 읽고 새로운 10년을 준비할 수 있기를 강력히 희망한다.

 

이제는 시사상식 용어가 되었는데, 정치에서 프레임이나 프레임 전쟁 같은 말의 용도와 의의를 잘 해설해주는 책으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한편 레이코프의 책은 특이하게도 여러 권이 재출간됐는데, <자유 전쟁>(프레시안북, 2009)이라고 처음 나왔던 책은 원제를 따라서 <자유는 누구의 것인가>(웅진지식하우스, 2010)로 재출간됐었고, <도덕의 정치>(백성, 2004)는 <도덕, 정치를 말하다>(김영사, 2010)으로 다시 나왔었다.

 

 

제목이 바뀌지 않아서 그렇지 <폴리티컬 마인드>(한울, 2014)도 2012년에 나온 책이 판을 달리해 다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정작 언어학자로서 레이코프의 주저들은 <삶으로서의 은유>(박이정, 2006)만 제외하면 절판된 채 다시 나오지 않고 있다. <몸의 철학>(박이정, 2002)와 <인지의미론>(한국문화사, 1994) 등이 그러한데, 한때 언어학도들의 필독서였던 <인지의미론>의 원제는 <여자들, 불, 그리고 위험한 것들>이다...

 

15. 03. 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침부터 피우지도 않는 담배 예찬론을 늘어놓자는 건 아니고, 절판됐던 책이 다시 나왔기에 눈길을 주려고 한다. 리처드 클라인의 <담배는 숭고하다>(페이퍼로드, 2015). 원래는 같은 제목으로 문학세계사(1995)에서 나왔던 책이니까, 딱 20년만이다. '소멸되는 것들의 모든 아름다움'이란 부제가 새로 붙었다.

 

미국 코넬 대학교 불문과 교수인 리처드 클라인이 쓴 담배에 관한 최초의 종합적인 비평서다. 담배에 관한 다른 저서들이 대부분 담배의 기원과 역사, 인체에 미치는 영향 정도만을 다루고 있는 반면에 이 책은 문학과 철학, 정신분석학 등의 광범위한 분야의 학문과 지식을 접목시켜서 담배와 흡연 습관을 해부하고 있다. 저자는 무턱대고 흡연을 장려하지도, 그렇다고 단호히 금연을 권장하지도 않는다. 담배에 대한 저자의 가장 큰 발견은 바로 담배의 숭고미에 있다. ‘숭고하다’는 표현은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쓴 <판단력 비판>의 '숭고의 장'에서 빌려온 것이다. 칸트는 부정적인 경험, 충격, 봉쇄, 죽음과 협박의 순간들을 통해 심리적 만족을 느끼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어두운 미(美)를 ‘숭고’와 연관짓고 있다. 

다시 나왔다는 사실만큼 눈길을 끄는 건 그 타이밍이다. 아마도 출판사 쪽에선 담뱃값 인상 이후에 이 책에 다시 주목한 것은 아닐까. 오랫동안 묻혀 있던 책에. 가격 인상과 더불어 애연가들에겐 두 배 더 숭고해져버렸을 담배. 그렇게 숭고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오히려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 자체가 끽연의 이유가 된다. "‘건강에 좋다고 한다면 담배를 피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저자의 통찰은 ‘건강’이라는 가치로 흡연을 만류하려는 정책들이 왜 허무한 결과를 낳는지를 설명해 준다." 

 

문제는 국민건강 증진이 아니라 세수 증대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보이는 담배값 인상이 이러한 숭고함까지 고려했을 거라는 점이다. 가격을 인상해도 결코 흠연율이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것(따라서 세수가 늘어날 거라는 것). 왜냐면 담배는 숭고하니까...  

 

15. 03. 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