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마일 카다레와 토니 모리슨의 절판됐던 작품이 다시 나왔다. 카다레는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이고 모리슨은 기 수상자다(노벨상 시즌도 코앞이다). 이번에 나온 <돌의 연대기>(문학동네, 2015)와 <술라>(문학동네, 2015)는 모두 두 거장의 초기작으로 두 작가에 대한 '연대기적' 독서의 공백을 채워준다.

 

 

먼저, 카다레의 <돌의 연대기>는 1971년작으로 데뷔작인 <죽은 군대의 장군>(1963)과 대표작 <부서진 사월>(1980) 사이에 발표됐다(카다레는 나름 다작의 작가여서 <죽은 군대의 장군>과 <부서진 사월> 사이에 10편의 작품을 발표했고, <돌의 연대기>는 그 가운데 하나다). 번역본은 <돌에 새긴 연대기>(오늘, 1995)란 제목으로 나왔었다. 초기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만큼 재출간이 반갑다.

<돌의 연대기>는 작가의 어린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로, 그의 고향인 지로카스트라를 모델로 한 익명의 '돌의 도시'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역사적 비극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속에서 무력하지만 동시에 강인한 삶의 의지를 지닌 개인들이 세계의 폭력에 맞서 끈질긴 투쟁을 이어나가는 과정을 특유의 유머러스하면서 거침없는 필치로 그려냈다. '유머러스한 비극과 기괴한 웃음'이라는 카다레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가장 잘 드러난 소설이라는 평과 함께 그의 대표작을 꼽을 때 반드시 거론되는 작품이다.

 

카다레의 작품을 연대기적으로 읽는다면 <죽은 군대의 작품>에 이어서 <돌의 연대기>, <부서진 사월>, <꿈의 궁전>(1981) 순으로 읽으면 되겠다. 이후 80년대의 주요 작품은 <콘서트>(1988)와 <H 서류>(1989)인데, <콘서트>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고 <H 서류>(문학동네, 2000)는 절판된 상태다. 국내에 번역된 나머지 작품들은 대부분  2000년대 이후 발표작이다.

 

 

토니 모리슨의 <술라>는 1973년작으로 작가의 두번째 소설이다. 데뷔작은 <가장 푸른 눈>(1970)인데, 이 또한 현재는 절판 상태다. 이어 <솔로몬의 노래>와 <빌러비드>를 연이어 발표하면서 모리슨은 미국 흑인 여성문학의 대표 작가가 된다.

흑인 여성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작가인 토니 모리슨의 소설 <술라>가 문학동네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토니 모리슨의 두번째 소설인 <술라>는 1973년 전미도서상 후보에 오르며 호평을 이끌어낸,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술라>에서 토니 모리슨은 1920년대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오하이오 주 메달리언 보텀 흑인들의 삶을 단짝 친구인 술라와 넬, 두 여성의 삶과 사랑, 우정을 중심으로 그려냈다. 토니 모리슨만의 유려한 시적 언어가 자아내는 리드미컬한 선율 위로, 신화적 상상력 위에 세워진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솔로몬의 노래>나 <빌러비드>를 먼저 읽은 독자라면 그 전사에 해당하는 작품들에도 눈길을 줄 만하다(<빌러비드> 이후의 대표작이 <재즈>다). (번역된 한도 내에서이긴 하지만) '전작주의자'라면 더더구나...

 

15. 0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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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5 1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5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의 공지다. 내달 1일부터 5주에 걸쳐서 매주 목요일 저녁 7시-9시에 남산도서관에서 '노벨문학상 작가들을 찾아서' 강의를 진행한다. 다섯 작가의 대표작 다섯 편을 읽어보는 강의다. 노벨상 시즌을 맞아 기획한 것인데,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15. 0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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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 12일만에 퇴원하여 집에 돌아왔다. 아직 치료기간이 3주가량 남았지만 여러 가지 일정상 남은 기간은 통원치료를 하기로 해서다. 밀린 책짐들을 다 풀고 책상맡에 앉으니 없던 만감도 생겨난다. 마치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온 기분이다(그렇잖아도 병원비가 저렴한 해외여행비 정도는 된다). 바깥구경 대신에 누워서 TV만 본 게 좀 다르지만. 아직 정상 컨디션이 아니지만 밀린 일들이 적잖아서 조금씩 시간을 내기로 한다. 아마도 입원하지 않았더라면 12일 전에 올렸을 포스팅부터. 이달 출판문화(596호)에 실은 '이현우의 책읽는 세상'으로 하퍼 리의 신작 <파수꾼>(열린책들, 2015)을 다룬 글이다.

 

 

출판문화(15년 8월)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군 하퍼 리의 신작 <파수꾼>

 

올해 미국 출판계의 최대 화제작은 하퍼 리의 <파수꾼>이다. <앵무새 죽이기>(1960)라는 기념비적 소설의 저자가 무려 55년만에 발표한 ‘신작’이어서다. 1926년생으로 아흔을 바라보고 있는 작가가 이전까지 발표한 작품은 <앵무새 죽이기> 단 한편이었다. 1964년의 한 인터뷰에서 글쓰기를 너무 좋아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이며 언제 어디서건 글을 쓸 거라고 고백한 작가의 소출로서는 기이한 수준이었다. 젊은 하퍼 리는 자신의 소망이 “남부 앨라배마의 제인 오스틴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절반의 생애도 살지 못하고 마흔둘에 세상을 떠난 오스틴조차도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쓰지 않았던가. 심지어 은둔 작가의 대명사 제롬 샐린저도 <호밀밭의 파수꾼> 외에 세 권의 작품집을 남겼다. 하퍼 리가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면 거의 전무후무한 기록감이었다. 그런 작가가 신작을 발표하다니!


정확하게 말하면 신작은 아니다. 오히려 구작이다. <앵무새 죽이기>보다 먼저 쓰인 작품으로 순서상 먼저 발표될 뻔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이 호호프라는 베테랑 편집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운명의 여신은 작품의 운명을, 혹은 순서를 뒤바꿔놓았다. <파수꾼>이 1950년대 말 당시 시대적 상황에 너무 밀착된 뜨거운 이슈(인종차별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판단한 편집자는 작품의 회상 장면에 주목하여 차라리 주인공 진 루이즈(스카웃)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확장해볼 것을 권한다. 그녀의 조언에 따라 하퍼 리는 2년에 걸쳐 어린아이 시점의 일인칭 소설을 다시 쓰는데, 그것이 바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라이브러리 저널)로 꼽히기도 한 <앵무새 죽이기>다.


그렇게 출간 순서가 뒤바뀌었다 하더라도 이미 완성된 작품이기에 <파수꾼>을 <앵무새 죽이기>에 뒤이어 발표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찌된 영문인지 하퍼 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덤속에까지 가지고 가려고 했는지 아니면 작가 스스로 출간을 포기했는지는 수수께끼다. 그렇게 50여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뀐 것은 하퍼 리의 보호자였던 언니 앨리스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다. 그 뒤를 이어 보호자 역할을 맡은 변호사 토냐 카터가 하퍼 리의 금고에서 <파수꾼>의 원고를 발견하고 저자의 동의를 얻어 마침내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다. 무엇이 하퍼 리의 마음을 바꾸게 한 것인지 현재로써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제 하퍼 리는 <앵무새 죽이기>의 작가이면서 동시에 <파수꾼>의 작가가 되었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파수꾼>이 갖는 문제성은 아무래도 <앵무새 죽이기>의 주인공 스카웃의 뒷이야기라는 점에 놓인다. 뉴욕에서 생활하며 이제는 스물여섯 살이 된 진 루이즈 핀치는 잠시 고향인 앨라배마의 메이콤으로 돌아온다. <앵무새 죽이기>의 배경이기도 한 메이콤은 하퍼 리가 그녀의 고향 먼로빌을 모델로 삼은 곳이다. 절친했던 오빠 젬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인 변호사 애티커스는 일흔두 살의 노인이 되었다. 남편과 별거중인 고모 알렉산드라가 애티커스와 함께 살면서 안주인 역할을 하고 있고, 진 루이즈보다 네 살 많은 청년 헨리 클린턴(행크)이 애티커스의 일을 돕고 있다. 아들 젬을 잃은 뒤에 애티커스는 헨리를 아들처럼 여긴다. 진 루이즈는 고향에 들를 때마다 헨리와 데이트를 즐기며 그와의 결혼도 고려하지만 알렉산드라는 ‘백인 하층민 쓰레기’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탐탁찮아 한다. 그러던 차에 진 루이즈는 아버지 애티커스와 헨리가 인종차별주의 성격이 강한 주민협의회에 나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받는다. 어째서 충격인가.

 


<앵무새 죽이기>에 등장하는 변호사 애티커스는 ‘깜둥이 애인’이라고 조롱당하면서도 강간혐의로 기소된 흑인 팀 로빈슨을 구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비록 백인 남성으로만 구성된 배심원단은 유죄를 선고하지만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믿으며 정의에 헌신하는 애티커스의 모습은 스카웃과 젬, 두 남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곧 애티커스는 진 루이즈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이자 신이었다. 작품 바깥에서도 1962년에 영화 <앵무새 죽이기>가 개봉되고 나서 그레고리 펙이 배역을 맡을 애티커스는 정의의 대명사이자 백인의 양심을 상징하는 인물로 간주되었다. 이런 전력이 <파수꾼>에서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지만, 그가 강간 혐의로 기소된 흑인 청년에게 무죄 선고를 얻어내는 ‘전무후무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사실은 언급된다. 사실 당시 시대적 배경상 백인 변호사가 흑인을 변호하여 법정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파수꾼>에서는 그렇게 기술된다(나중에 쓰인 <앵무새 죽이기>와의 사소한 차이점이다).


바로 그런 존재였던 아버지 애티커스의 ‘변신’은 진 루이즈에게 큰 실망과 배신감을 안겨준다. <앵무새 죽이기>의 독자로서 <파수꾼>을 계기로 애티커스와 ‘재회’하게 되는 많은 이들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연이어 쓴 두 편의 소설, 연작소설로도 읽을 수 있는 <파수꾼>과 <앵무새 죽이기>에서 하퍼 리는 두 명의 애티커스를 그려놓은 것일까. 아니면 ‘영웅’의 이면을 그의 딸도, 그리고 독자들도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일까. 


당연하게도 <파수꾼>의 하이라이트는 두 부녀의 충돌 장면이다. 이제 성인이 된 진 루이즈는 지금까지 자기 존재의 지주이자 파수꾼이었던 아버지를 매섭게 비판한다. 애티커스는 어째서 주민협의회에 참석하여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터무니없는 연설을 듣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연방정부와 NAACP(흑인지위향상협회)가 원인이라고 말한다. 도화선이 된 건 1954년 연방 대법원의 판결이다. 브라운대 교육위원회 소송 사건에서 연방 대법원은 공립학교의 인종 분리가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린다. 분리교육을 채택하고 있던 남부에서 이 판결은 주정부의 자치권을 연방정부가 짓밟은 것으로 받아들여져 남부 백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애티커스 또한 이러한 백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 루이즈에게 “만인에게 평등권을, 특권은 없습니다”라는 생각을 주입한 장본인인 애티커스는 정작 그러한 평등을 인정하지 않는 위선자란 말인가.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진 루이즈는 “만인에게 평등권을, 특권은 없습니다”라는 제퍼슨의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제퍼슨 민주주의 옹호자’를 자처하는 애티커스는 달리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제퍼슨은 시민권이란 각자가 획득해야 하는 특권으로 결코 가볍게 주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단지 사람이라는 이유로 투표권이 허락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민의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시민권이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애티커스가 보기에 흑인은 시민의 신분에 따르는 책임을 충분히 나눌 만한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그의 경험은 백인은 백인이고 흑인은 흑인이라고 말해준다.


그런 면에서 애티커스는 분명 백인우월주의자이지만 한편으로 시민에게는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요구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공화주의자이기도 하다. 그가 흑인 청년을 법정에서 변호한 것은 평등하게 재판받을 수 있는 권리가 동등하게 주어져야 한다고 믿어서였지만, 그에게 사법상의 평등권이 곧바로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의미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을 뒤늦게 깨달은 진 루이즈는 애티커스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시는 아빠가 하는 말을 믿지 않을 거예요. 아빠와 아빠가 지지하는 모든 것을 경멸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렇게 분명한 차이를 확인하게 된 이상 상황은 애티커스와 진 루이즈 부녀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퍼 리는 애티커스의 동생 핀치 박사를 중재자로 내세움으로써 진 루이즈에게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을 갖게끔 한다. 핀치 박사에 따르면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의지하며 아버지의 답이 곧 자신의 답이라고 생각해온 진 루이즈는 정서적 불구자였다. 그래서 아버지 애티커스를 하나님으로 혼동하면서 그가 가진 인간적 결점들을 미처 보지 못한 것이다. 그가 이렇게 충고한다. “각자의 파수꾼은 각자의 양심이야. 집단의 양심이란 것은 없어.”


<파수꾼>의 원제는 성경의 이사야서에 나오는 ‘가서 파수꾼을 세우라’란 구절이다. 진 루이즈에게는 그동안 아버지 애티커스라는 듬직한 파수꾼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만의 양심을 갖게 된 이상 이전의 파수꾼과는 작별할 시간이 되었다. 아버지라는 우상을 무너뜨리고 그녀는 이제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할 나이가 된 것이다. <앵무새 죽이기>가 어린 스카웃의 성장소설이었다면 <파수꾼>은 스물여섯 살 진 루이즈의 성장소설이다. 스카웃이 진 루이즈로 성장하기까지 십수년이 걸린 걸 고려하면, <앵무새 죽이기>의 출간으로부터 55년이 지난 뒤에야 <파수꾼>이 빛을 보게 된 것은 너무 과도한 ‘성장 지체’로 여겨진다.

 

15. 0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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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밀러의 <위험한 독서의 해>(책세상, 2015)를 읽으며, 역시 독서록 종류의 책인 만큼 안 읽은 책들을 눈여겨 보게 되는데, 초반에 눈에 밟히는 책은 로버트 트레슬의 <누더기 바지 박애주의자>다. 저자가 부코스키의 <우체국>,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선언>과 같이 묶고 있는 책인데, 그 중에서도 압권은 <누더기 바지 박애주의자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하기야 분량으로 그 두 권의 두 배 이상이다. 무삭제판은 600쪽이 넘어가니 말이다(옥스포드판으로는 649쪽이다. 해설이 포함돼 그럴 수 있다).

 

 

<우체국>도 노동을 다룬 소설이지만 "<누더기 바지 박애주의자>에 담긴 투쟁과 절망에 비하면 <우체국>은 거의 휴가 여행 광고물 같았다"라는 게 밀러의 평. 로버트 트레슬은 로버트 누넌(1870-1911)의 필명인데, 그가 쓴 '역사상 최초의 노동계급 소설'이 <누더기 바지 박애주의자>라고(러시아문학에 견주자면 고리키의 <어머니> 같은 급?).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고 신랄하면서도 진솔한 묘사로 노동계급의 삶을 그려 보였다"는 격찬이 이어진다.

 

그래서 번역되면 좋겠다 싶어 '세계의 책' 카테고리에서 다루려고 했더니, 앗, 뜻밖에도 번역된 적이 있다. 안정효 역의 <누더기 바지 박애주의자들>(실천문학사, 1988). 다만 분량이 388쪽인 걸로 보아 무삭제판으로 옮긴 게 아니고 저자 사후에 책이 나오는 과정에서 편집자가 상당 분량을 축약했는데, 그 축약판을 옮긴 게 아닌가 싶다. 친필 원고는 25만 단어 분량인데, 1914년에 나온 초판이 10만 단어를 쳐낸, 그러니까 15만 단어 분량이었고, 4년 뒤 1918년에 나온 재판은 거기서 6만 단어를 더 쳐낸 9만 단어 분량. 원래 원고의 1/3로 줄어든 셈. 1955년에야 무삭제판이 대중에게 소개될 수 있었다 한다(초판이나 재판의 편집자들로선 책을 더 많이 읽히게끔 하려는 고육지책이었다. 특히 노동자 대중에게).

 

600쪽 넘는 분량의 영어 원서가 388쪽의 한국어판으로 옮겨질 수는 없으므로 축약판의 번역이거나 역자의 재량에 따른 또다른 축약본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그래도 귀한 자료다 싶어서 구해놓기로 했다. 이왕이면 무삭제판의 새번역본이 나오면 좋겠다. 그보다 더 두꺼운 대작들도 곧잘 번역되는 게 출판계니까. 그러길 기대해본다...

 

15. 0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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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발견'으로 미국 작가 제임스 에이지(1909-1955)의 <가족의 죽음>(테오리아, 2015)을 고른다. 1957년, 작가 사후에 출간된 유작이며 1958년 퓰리처상 수상작이다. 상당히 뒤늦게 소개되는 작품인데, '타임'지가 선정한 100대 영문소설에도 포함된 작품이라고 하니까 우리에게 생소한 게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진다. 작가나 작품이나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나만 과문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작품인가.

 

제임스 에이지가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소설로 쓴 자전적 추도사이다. 에이지의 아버지는 그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 트라우마적인 사건을 이야기의 뼈대로 삼은 이 책은 한 가족에게 찾아 온 예기치 않은 비극을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가 어떻게 바라보며 어떻게 견뎌내는가를 그려 낸 작품이다.

 

작가 제임스 에이지는 영화비평이나 르포르타주 등 다방면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데, 별명이 '문단의 제임스 딘'이었다고 한다(반항의 아이콘?). 작가에 대한 소개는 로버트 콜스의 <하버드 문학 강의>(이순, 2012)에서 읽을 수 있다. <마이클 더다의 고전 읽기의 즐거움>(을유문화사, 2009)에도 제임스 에이지의 <유명한 사람들을 칭송합시다>(혹은 <이제 훌륭한 사람들을 찬양하자>)에 대한 평이 실려 있다. 아마도 제임스 에이지의 대표작 두 편이 아닌가 싶다. 

 

 

이미지를 찾아봤는데, '문단의 제임스 딘'이란 별명이 허황하지만은 않다. 눈매에 반항과 슬픔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흠, 이런 표정의 작가라면 작품도 읽고 싶어지는군...

 

15. 0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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