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 12일만에 퇴원하여 집에 돌아왔다. 아직 치료기간이 3주가량 남았지만 여러 가지 일정상 남은 기간은 통원치료를 하기로 해서다. 밀린 책짐들을 다 풀고 책상맡에 앉으니 없던 만감도 생겨난다. 마치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온 기분이다(그렇잖아도 병원비가 저렴한 해외여행비 정도는 된다). 바깥구경 대신에 누워서 TV만 본 게 좀 다르지만. 아직 정상 컨디션이 아니지만 밀린 일들이 적잖아서 조금씩 시간을 내기로 한다. 아마도 입원하지 않았더라면 12일 전에 올렸을 포스팅부터. 이달 출판문화(596호)에 실은 '이현우의 책읽는 세상'으로 하퍼 리의 신작 <파수꾼>(열린책들, 2015)을 다룬 글이다.

 

 

출판문화(15년 8월)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군 하퍼 리의 신작 <파수꾼>

 

올해 미국 출판계의 최대 화제작은 하퍼 리의 <파수꾼>이다. <앵무새 죽이기>(1960)라는 기념비적 소설의 저자가 무려 55년만에 발표한 ‘신작’이어서다. 1926년생으로 아흔을 바라보고 있는 작가가 이전까지 발표한 작품은 <앵무새 죽이기> 단 한편이었다. 1964년의 한 인터뷰에서 글쓰기를 너무 좋아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이며 언제 어디서건 글을 쓸 거라고 고백한 작가의 소출로서는 기이한 수준이었다. 젊은 하퍼 리는 자신의 소망이 “남부 앨라배마의 제인 오스틴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절반의 생애도 살지 못하고 마흔둘에 세상을 떠난 오스틴조차도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쓰지 않았던가. 심지어 은둔 작가의 대명사 제롬 샐린저도 <호밀밭의 파수꾼> 외에 세 권의 작품집을 남겼다. 하퍼 리가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면 거의 전무후무한 기록감이었다. 그런 작가가 신작을 발표하다니!


정확하게 말하면 신작은 아니다. 오히려 구작이다. <앵무새 죽이기>보다 먼저 쓰인 작품으로 순서상 먼저 발표될 뻔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이 호호프라는 베테랑 편집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운명의 여신은 작품의 운명을, 혹은 순서를 뒤바꿔놓았다. <파수꾼>이 1950년대 말 당시 시대적 상황에 너무 밀착된 뜨거운 이슈(인종차별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판단한 편집자는 작품의 회상 장면에 주목하여 차라리 주인공 진 루이즈(스카웃)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확장해볼 것을 권한다. 그녀의 조언에 따라 하퍼 리는 2년에 걸쳐 어린아이 시점의 일인칭 소설을 다시 쓰는데, 그것이 바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라이브러리 저널)로 꼽히기도 한 <앵무새 죽이기>다.


그렇게 출간 순서가 뒤바뀌었다 하더라도 이미 완성된 작품이기에 <파수꾼>을 <앵무새 죽이기>에 뒤이어 발표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찌된 영문인지 하퍼 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덤속에까지 가지고 가려고 했는지 아니면 작가 스스로 출간을 포기했는지는 수수께끼다. 그렇게 50여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뀐 것은 하퍼 리의 보호자였던 언니 앨리스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다. 그 뒤를 이어 보호자 역할을 맡은 변호사 토냐 카터가 하퍼 리의 금고에서 <파수꾼>의 원고를 발견하고 저자의 동의를 얻어 마침내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다. 무엇이 하퍼 리의 마음을 바꾸게 한 것인지 현재로써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제 하퍼 리는 <앵무새 죽이기>의 작가이면서 동시에 <파수꾼>의 작가가 되었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파수꾼>이 갖는 문제성은 아무래도 <앵무새 죽이기>의 주인공 스카웃의 뒷이야기라는 점에 놓인다. 뉴욕에서 생활하며 이제는 스물여섯 살이 된 진 루이즈 핀치는 잠시 고향인 앨라배마의 메이콤으로 돌아온다. <앵무새 죽이기>의 배경이기도 한 메이콤은 하퍼 리가 그녀의 고향 먼로빌을 모델로 삼은 곳이다. 절친했던 오빠 젬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인 변호사 애티커스는 일흔두 살의 노인이 되었다. 남편과 별거중인 고모 알렉산드라가 애티커스와 함께 살면서 안주인 역할을 하고 있고, 진 루이즈보다 네 살 많은 청년 헨리 클린턴(행크)이 애티커스의 일을 돕고 있다. 아들 젬을 잃은 뒤에 애티커스는 헨리를 아들처럼 여긴다. 진 루이즈는 고향에 들를 때마다 헨리와 데이트를 즐기며 그와의 결혼도 고려하지만 알렉산드라는 ‘백인 하층민 쓰레기’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탐탁찮아 한다. 그러던 차에 진 루이즈는 아버지 애티커스와 헨리가 인종차별주의 성격이 강한 주민협의회에 나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받는다. 어째서 충격인가.

 


<앵무새 죽이기>에 등장하는 변호사 애티커스는 ‘깜둥이 애인’이라고 조롱당하면서도 강간혐의로 기소된 흑인 팀 로빈슨을 구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비록 백인 남성으로만 구성된 배심원단은 유죄를 선고하지만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믿으며 정의에 헌신하는 애티커스의 모습은 스카웃과 젬, 두 남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곧 애티커스는 진 루이즈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이자 신이었다. 작품 바깥에서도 1962년에 영화 <앵무새 죽이기>가 개봉되고 나서 그레고리 펙이 배역을 맡을 애티커스는 정의의 대명사이자 백인의 양심을 상징하는 인물로 간주되었다. 이런 전력이 <파수꾼>에서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지만, 그가 강간 혐의로 기소된 흑인 청년에게 무죄 선고를 얻어내는 ‘전무후무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사실은 언급된다. 사실 당시 시대적 배경상 백인 변호사가 흑인을 변호하여 법정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파수꾼>에서는 그렇게 기술된다(나중에 쓰인 <앵무새 죽이기>와의 사소한 차이점이다).


바로 그런 존재였던 아버지 애티커스의 ‘변신’은 진 루이즈에게 큰 실망과 배신감을 안겨준다. <앵무새 죽이기>의 독자로서 <파수꾼>을 계기로 애티커스와 ‘재회’하게 되는 많은 이들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연이어 쓴 두 편의 소설, 연작소설로도 읽을 수 있는 <파수꾼>과 <앵무새 죽이기>에서 하퍼 리는 두 명의 애티커스를 그려놓은 것일까. 아니면 ‘영웅’의 이면을 그의 딸도, 그리고 독자들도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일까. 


당연하게도 <파수꾼>의 하이라이트는 두 부녀의 충돌 장면이다. 이제 성인이 된 진 루이즈는 지금까지 자기 존재의 지주이자 파수꾼이었던 아버지를 매섭게 비판한다. 애티커스는 어째서 주민협의회에 참석하여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터무니없는 연설을 듣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연방정부와 NAACP(흑인지위향상협회)가 원인이라고 말한다. 도화선이 된 건 1954년 연방 대법원의 판결이다. 브라운대 교육위원회 소송 사건에서 연방 대법원은 공립학교의 인종 분리가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린다. 분리교육을 채택하고 있던 남부에서 이 판결은 주정부의 자치권을 연방정부가 짓밟은 것으로 받아들여져 남부 백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애티커스 또한 이러한 백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 루이즈에게 “만인에게 평등권을, 특권은 없습니다”라는 생각을 주입한 장본인인 애티커스는 정작 그러한 평등을 인정하지 않는 위선자란 말인가.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진 루이즈는 “만인에게 평등권을, 특권은 없습니다”라는 제퍼슨의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제퍼슨 민주주의 옹호자’를 자처하는 애티커스는 달리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제퍼슨은 시민권이란 각자가 획득해야 하는 특권으로 결코 가볍게 주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단지 사람이라는 이유로 투표권이 허락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민의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시민권이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애티커스가 보기에 흑인은 시민의 신분에 따르는 책임을 충분히 나눌 만한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그의 경험은 백인은 백인이고 흑인은 흑인이라고 말해준다.


그런 면에서 애티커스는 분명 백인우월주의자이지만 한편으로 시민에게는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요구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공화주의자이기도 하다. 그가 흑인 청년을 법정에서 변호한 것은 평등하게 재판받을 수 있는 권리가 동등하게 주어져야 한다고 믿어서였지만, 그에게 사법상의 평등권이 곧바로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의미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을 뒤늦게 깨달은 진 루이즈는 애티커스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시는 아빠가 하는 말을 믿지 않을 거예요. 아빠와 아빠가 지지하는 모든 것을 경멸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렇게 분명한 차이를 확인하게 된 이상 상황은 애티커스와 진 루이즈 부녀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퍼 리는 애티커스의 동생 핀치 박사를 중재자로 내세움으로써 진 루이즈에게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을 갖게끔 한다. 핀치 박사에 따르면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의지하며 아버지의 답이 곧 자신의 답이라고 생각해온 진 루이즈는 정서적 불구자였다. 그래서 아버지 애티커스를 하나님으로 혼동하면서 그가 가진 인간적 결점들을 미처 보지 못한 것이다. 그가 이렇게 충고한다. “각자의 파수꾼은 각자의 양심이야. 집단의 양심이란 것은 없어.”


<파수꾼>의 원제는 성경의 이사야서에 나오는 ‘가서 파수꾼을 세우라’란 구절이다. 진 루이즈에게는 그동안 아버지 애티커스라는 듬직한 파수꾼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만의 양심을 갖게 된 이상 이전의 파수꾼과는 작별할 시간이 되었다. 아버지라는 우상을 무너뜨리고 그녀는 이제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할 나이가 된 것이다. <앵무새 죽이기>가 어린 스카웃의 성장소설이었다면 <파수꾼>은 스물여섯 살 진 루이즈의 성장소설이다. 스카웃이 진 루이즈로 성장하기까지 십수년이 걸린 걸 고려하면, <앵무새 죽이기>의 출간으로부터 55년이 지난 뒤에야 <파수꾼>이 빛을 보게 된 것은 너무 과도한 ‘성장 지체’로 여겨진다.

 

15. 0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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