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 시인의 시집 <베누스 푸디카>(2017)에서 표제시를 읽는다. 제목의 라틴어 뜻은 각주를 보고 일았는데 비너스상이 취하고 있는 자세, 곧 한손으로는 가슴을, 다른 손으로는 음부를 가리키는 자세를 의미한다. ‘베누스 푸디카‘는 표제시이자 시집의 첫 시이기에 시집 전체의 일러두기이자 길라잡이다.

비너스상의 자세란 말에서 섣부르게 의미를 끌어내자면 박연준의 시세계는 ‘정숙한 노출‘의 세계다. 마음의 누드(보들레르의 ‘벌거벗은 마음‘?)를 보여주지만 한편으로 가릴 곳은 가린다(정숙한 관능!). 가슴과 음부는 빼고 노출하기에 정숙한 노출이다. 시는 두 파트로 나뉘는데, 시 전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시도하려는 건 아니기에 나는 후반부만 음미해보려 한다. ‘베누스 푸디카‘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실마리로서.

어느 여름 옥상에서 어떤 감정을 알게 되었는데
떠난 사람의 길고, 축축한, 잠옷이
펄럭이는 걸 보았지

사랑이 길어져 극단까지 밀고 가다
견디지 못하면
지구 밖으로 밀려나는구나
피가 솟구치다 한꺼번에
증발하는구나

시적 화자가 어느 여름 옥상에서 알게 된 감정과 깨달음을 적고 있는데, 손으로 가린 부분들 때문에, 곧 말하지 않는 부분들 때문에 추정만 가능하다. 아마도 누군가 실연으로 자살했을 거라는 것. 지구밖으로 밀려났다거나 증발했다는 이미지에 상응하는 건 보통 죽음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길고, 축축한, 잠옷‘이 옥상 빨랫줄에 널려 있다는 것. 자살한 사람의 잠옷을 태우지 않고 계속 입고 빨고 한다는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가족 가운데 누군가일 그(녀)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말 그대로 ‘떠난 사람‘이다. 혹은 사라진(증발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시인을 말하지 않고 숨긴다.

지나가는 김에 밀하자면 ˝펄럭이는 걸 보았지˝라는 진술은 부자연스럽다. 길고 축축한 잠옷이 펄럭일 정도라면 바람이 상당히 셌다는 뜻인데 실제를 묘사한 것인지 느낌을 적은 것인지 모호하다. 나머지 세 연.

후에 책상 위에서 하는 몽정이 시,라고 생각했다가
나중엔 그의 얼굴을 감싼 채 그늘로 밀려나는 게
사랑,이라고 믿었지만

일곱살 옥상에서 본 펄럭이는 잠옷만큼은
무엇도 더 슬프진 않았고

그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모든 면에서 가난해졌다

두 번 반복되는 ‘옥상에서 펄럭이는 잠옷‘ 이미지는 이 시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박연준 시의 기원이다. 그건 몽정과 사랑을 능가하는 슬픔을 아직 어린 나이의 화자에게 각인시킨다. 그때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면 기원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도 없다.

‘펄럭이는 잠옷‘만이 남게 된 원인을 ‘나‘는 사랑이 길어져 극단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일곱 살짜리의 추정인가에 대해서는 의구심도 있지만 일단 조숙했다고 해두자. 이제 시인에겐 옥상에서 펄럭이던 잠옷이 시다. 박연준의 시는 오래도록 ‘길고, 축축한, 잠옷‘을 환기하고 흉내낼 것이다(길고 축축한 시!). 독자가 따라가볼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나는 시인의 가슴과 음모에는 이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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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지방강의와 주말의 특강까지 남아있지만 목요일 저녁이면 한주간의 강의 일정이 일단락됐다는 느낌을 갖는다. 한편에는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이, 다른 한편으론 기력이 다했다는 탈진감이 그 느낌과 같이 한다. 잠시 팟캐스트 뉴스를 들으며 망중한의 시간을 갖다가 다시금 읽을 책들을 가늠해보는데, 일단 내일 지방으로 내려가는 기차에서 읽을 책은 게르하르트 노이만의 <실패한 시작과 열린 결말: 프란츠 카프카의 시적 인류학>(에디투스)이다.

카프카문학기행을 소개하는 강의를 하러 가는지라 관련도서에 들어간다. 저자는 독일대학에서 독문학 교수로 오래 봉직했고 카프카 비평판에도 공동편자로 관여했다. 대표적인 카프카 전문가의 한 명인 것. 제목도 끌리지만 독일의 전문가가 카프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도 궁금하다.

개인적으로는 카프카의 주요작들에 대해 여러 차례 강의했고 내년에도 올해 완간된 카프카 전집을 바탕으로 주요작 강의를 한 차례 진행할까 계획중인데, 주요한 연구성과들을 이 참에 두루 읽고 나의 관점과 비교해보고픈 욕심도 갖는다. 카프가 전문가들뿐 아니라 벤야민과 들뢰즈, 블랑쇼와 아감벤 등의 카프카론도 검토대상이다. 그렇게 두루 살펴보고 나대로의 카프카론을 내년중에 출간하는 것도 목표 가운데 하나다. 많은 날들이 남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바짝 분투해야겠다. 망중한이라고 해놓고 이렇게 적으니 뭔가 멋쩍긴 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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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준비 중에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시집 ‘서핑‘을 하다가 읽은 건 이희중의 ‘짜증론‘이다. <나는 나를 간질일 수 없다>(문학동네)에 수록된 시. 전문이 책소개에 실린 것으로 보아 시집의 간판시 가운데 하나다. 제목이 흥미로워서라도 읽어볼 만하다.

모름지기 짜증은 아무한테나 내는 것이 아니다 짜증은 아주 만만한 사람한테나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짜증을 받아줄 마지막 사람은 제 엄마다 엄마들은 보통 자식의 마음과 제 마음속을 분간 못하는 불구, 자식들은 엄마에게 어떤 원죄가 있다고 믿는다 어떤 빚이 있음을 본능으로 안다 짜증이 심한 사람은 엄마만 아니라 다른 식구들한테도 짜증을 낸다 필시 이 사람은 제 식구를 아주 만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달리 보면 식구를 예사롭지 않게 믿고 사랑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더 심한 사람은 남한테도 짜증을 낸다 이 사람은 아주 힘있는 놈 아니면 망나니임에 틀림없다 짜증낼 사람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저 자신한테 짜증을 부린다 이 사람은 저 자신을 만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니면 저 말고는 아무도 안 믿거나 못 믿는 사람이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이 사람은 필시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

글쎄 어디서 감탄을 해야 할지, 아니면 짜증을 내야 할지 헷갈리는 시다. 정말 놀라운 건 놀라게 하는 대목이 한 군데도 없다는 점이다. ˝모름지기 짜증은 아무한테나 내는 것이 아니다 짜증은 아주 만만한 사람한테나 내는 것이다˝ 같은 예사로운 서두가 돌이켜보면 결코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독자를 결코 놀라게 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결심이 아니고서야 이런 시를 쓰기 어렵다. 짜증이 뭔지 제대로 아는 시인이라고 할 수밖에. 짜증은 아무한테나 내는 게 아니라고 하므로, 게다가 안면도 없는 시인이 내게 만만할 수도 없으므로 나는 그냥 입이 다물어지 않는다고만 적는다. 세상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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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하루의 끝이 아니다‘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민음사)에 실린 작품해설의 제목이다. 이시구로의 작품을 다수 번역한 김남주 번역가의 해설인데, 작품을 강의한 뒤의 소감으로는 동의하기 어렵다. 역자는 달링턴 홀의 집사로 평생 충직하게 일해온 스티븐스가 마지막에 도달하는 깨달음을 특이하게 과대평가한다.

˝이제 스티븐스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상호소통의 길로 나아갈 것이라고 독자는 믿고 싶다. 그것은 성공 가능성이 낮은 길이지만, 그 힘든 발걸음을 스티븐스의 장기인 긍지와 성실이 도와줄 것이다. 그런 그에게서 독자는 희망을 본다. 남아있는 시간은 많지 않지만 저녁은 아직 끝이 아니다.˝

역자 개인의 믿음과 희망을 독자 일반의 믿음과 희망으로 지레 넘겨짚는 일에 공감하기 어렵다. 작품에서 결국 문제가 된 것은, 곧 스티븐스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든 것은 ˝장기인 긍지와 성실˝이었다. 사고와 판단을 동반하지 않은 긍지와 성실이 결국 어떻게 삶을 마모시키고 불행하게 만드는가를 보여주는 게 이 소설 아닌가.

작품의 결말에서도 미국인 주인의 농담 취향에 맞추기 위해 농담의 기술 연마에 더 애쓰겠다고 다짐하는 스티븐스의 모습은 작가의 짓궂은 아이러니의 절정으로 읽힐 뿐이다. 번역본의 뒤표지에까지도 ˝젊은 날의 사랑은 지나갔지만 남아있는 날들에도 희망은 있다˝는 문구를 박아넣은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다. 작품을 오도하고 있기 때문인데, 최대한 양보하더라도 작품에 대한 별로 공감하기 어려운 견해를 마치 핵심인 양 제시하고 있는 게 된다.

이런 해설이 유감인 것은 자칫 청소년 독자처럼 미숙한 독자에게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되기 때문이다.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작품의 해석을 한정하면서 섣부른 견해를 표준적인 해석처럼 제시하는 것은 월권이다. 차라리 여백으로 비워놓는 것만 못하다.

아주 잘 쓰인 문제적인 소설이면서 대단히 ‘정치적인‘ 소설을 ‘저녁은 하루의 끝이 아니다‘ 정도의 메시지를 전하는 소설로 ‘격하‘하는 해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견과 유감을 적는다. 이시구로는 그보다 훨씬 심오한 소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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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난 김에 적는 페이퍼다. 원래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다룬 페이퍼에서 언급하려 했으나 자리가 나지 않았다. 시의 대중성과 관련하여 적으려던 것인데, 내게는 조병화 시인(1921-2003)이 대중성의 표본이다. 오랜 기간 동안 다작의 시를 통해 다수의 사랑을 받은 시인을 대중 시인의 요건으로 꼽자면 그에 해당한다.

워낙에 많은 시집을 남겼지만 내 기억에 각인된 건 <남남>이다. 20대에 읽었기 때문이리라. <남남>은 연작시집인데 한편만 읽어도 전체가 가늠이 된다. 한 가지 주제를 반복, 변주하고 있어서다(이생진의 <섬>도 그러하군). ‘남남1‘은 이렇게 시작한다.

푸른 바람이고 싶었다
푸른 강이고 싶었다
푸른 초원이고 싶었다
푸른 산맥이고 싶었다
푸른 구름
푸른 하늘
푸른 네 대륙이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대목인데 누구라도 이 호방한 상상력에 끌릴 만하다. 하지만 이런 상상력은 곧 여느 연애시의 상상력으로 수축된다.

남남의 자리
좁히며
가까이
네 살 닿는 곳
따사로이

네 입김이고 싶었다
네 이야기이고 싶었다
네 소망이고 싶었다

네가 깃들이는
마지막
고요한 기도의 둥우리이고 싶었다

˝고요한 기도의 둥우리이고 싶었다˝까지 오게 되면 사실 나 같은 독자는 낭패감을 느낀다. 1연이 아까워서다. 어찌보면 이건 시의 한계라기보다는 유한한 목숨으로 살아가는 인간 실존의 한계일는지도 모른다(서정주의 ‘추천사‘에서도 ˝나는 서으로 가는 달같이는 갈 수가 없다˝는 춘향의 체념이 떠오른다). 그래서 시는 이렇게 주저앉는다.

흙바람 개인 날 없는
어지러운 너와 나의 세월
마른 내 목소리

푸른 네 가슴이고 싶었다
푸른 네 목숨이고 싶었다
너와 날 묻을
푸른 대륙이고 싶었다

이 시는 상상력의 이륙과 착지의 좋은 사례다. 더불어 이런 종류의 착지가 불가피한가 따져보게 한다는 점에서 좋은 공부거리다. 내가 읽고 싶은 건 조병화 시인이 서두만 떼고 쓰지 못한, 혹은 쓰지 않은 다른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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