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준비 중에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시집 ‘서핑‘을 하다가 읽은 건 이희중의 ‘짜증론‘이다. <나는 나를 간질일 수 없다>(문학동네)에 수록된 시. 전문이 책소개에 실린 것으로 보아 시집의 간판시 가운데 하나다. 제목이 흥미로워서라도 읽어볼 만하다.
모름지기 짜증은 아무한테나 내는 것이 아니다 짜증은 아주 만만한 사람한테나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짜증을 받아줄 마지막 사람은 제 엄마다 엄마들은 보통 자식의 마음과 제 마음속을 분간 못하는 불구, 자식들은 엄마에게 어떤 원죄가 있다고 믿는다 어떤 빚이 있음을 본능으로 안다 짜증이 심한 사람은 엄마만 아니라 다른 식구들한테도 짜증을 낸다 필시 이 사람은 제 식구를 아주 만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달리 보면 식구를 예사롭지 않게 믿고 사랑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더 심한 사람은 남한테도 짜증을 낸다 이 사람은 아주 힘있는 놈 아니면 망나니임에 틀림없다 짜증낼 사람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저 자신한테 짜증을 부린다 이 사람은 저 자신을 만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니면 저 말고는 아무도 안 믿거나 못 믿는 사람이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이 사람은 필시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
글쎄 어디서 감탄을 해야 할지, 아니면 짜증을 내야 할지 헷갈리는 시다. 정말 놀라운 건 놀라게 하는 대목이 한 군데도 없다는 점이다. ˝모름지기 짜증은 아무한테나 내는 것이 아니다 짜증은 아주 만만한 사람한테나 내는 것이다˝ 같은 예사로운 서두가 돌이켜보면 결코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독자를 결코 놀라게 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결심이 아니고서야 이런 시를 쓰기 어렵다. 짜증이 뭔지 제대로 아는 시인이라고 할 수밖에. 짜증은 아무한테나 내는 게 아니라고 하므로, 게다가 안면도 없는 시인이 내게 만만할 수도 없으므로 나는 그냥 입이 다물어지 않는다고만 적는다. 세상에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