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은 하루의 끝이 아니다‘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민음사)에 실린 작품해설의 제목이다. 이시구로의 작품을 다수 번역한 김남주 번역가의 해설인데, 작품을 강의한 뒤의 소감으로는 동의하기 어렵다. 역자는 달링턴 홀의 집사로 평생 충직하게 일해온 스티븐스가 마지막에 도달하는 깨달음을 특이하게 과대평가한다.
˝이제 스티븐스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상호소통의 길로 나아갈 것이라고 독자는 믿고 싶다. 그것은 성공 가능성이 낮은 길이지만, 그 힘든 발걸음을 스티븐스의 장기인 긍지와 성실이 도와줄 것이다. 그런 그에게서 독자는 희망을 본다. 남아있는 시간은 많지 않지만 저녁은 아직 끝이 아니다.˝
역자 개인의 믿음과 희망을 독자 일반의 믿음과 희망으로 지레 넘겨짚는 일에 공감하기 어렵다. 작품에서 결국 문제가 된 것은, 곧 스티븐스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든 것은 ˝장기인 긍지와 성실˝이었다. 사고와 판단을 동반하지 않은 긍지와 성실이 결국 어떻게 삶을 마모시키고 불행하게 만드는가를 보여주는 게 이 소설 아닌가.
작품의 결말에서도 미국인 주인의 농담 취향에 맞추기 위해 농담의 기술 연마에 더 애쓰겠다고 다짐하는 스티븐스의 모습은 작가의 짓궂은 아이러니의 절정으로 읽힐 뿐이다. 번역본의 뒤표지에까지도 ˝젊은 날의 사랑은 지나갔지만 남아있는 날들에도 희망은 있다˝는 문구를 박아넣은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다. 작품을 오도하고 있기 때문인데, 최대한 양보하더라도 작품에 대한 별로 공감하기 어려운 견해를 마치 핵심인 양 제시하고 있는 게 된다.
이런 해설이 유감인 것은 자칫 청소년 독자처럼 미숙한 독자에게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되기 때문이다.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작품의 해석을 한정하면서 섣부른 견해를 표준적인 해석처럼 제시하는 것은 월권이다. 차라리 여백으로 비워놓는 것만 못하다.
아주 잘 쓰인 문제적인 소설이면서 대단히 ‘정치적인‘ 소설을 ‘저녁은 하루의 끝이 아니다‘ 정도의 메시지를 전하는 소설로 ‘격하‘하는 해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견과 유감을 적는다. 이시구로는 그보다 훨씬 심오한 소설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