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교수신문에서 프랑스의 국제철학학교를 다룬 다큐영화 <철학의 권리>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국내 상영소식은 접했지만, 시간은 낼 수 없었는데, 기사는 현장의 분위기를 전해주고 있다. 맛보기 영상도 같이 옮겨놓는다.
(왼쪽부터) 국제철학학교를 설립한 자크 데리다, 「철학의 권리」 의 니시야마 유지 감독, 백영서 연세대 국학연구원 원장.
교수신문(10. 10. 04) 思惟의 장에 던진 지적 자극 … 새로운 목소리는 무엇인가
1983년 프랑스 파리 제5구역에 위치한 데카르트 거리. 그곳에서 꺼져가던 68혁명의 소산, 실험대학을 되살리려는 시도가 일어난다. 국제철학학교의 시작이다. 자크 데리다, 도미니크 르쿠르 등이 세운 이 학교는 국가지원금을 재원삼아 비영리로 운영되기 때문에 학비는 무료다.
철학 교육의 새로운 방식 제도화
다양한 학문 간의 대화를 실천하고, 철학과의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이 학교를 담은 다큐멘터리 「철학의 권리」가 지난달 28일 연세대 국학연구원(원장 백영서 사학과) 초청으로 연세대 학술정보관에서 상영회를 가졌다. 상영 후에는 감독인 니시야마 유지 일본 도쿄메트로폴리탄대 교수(철학)와 김홍중 서울대 교수(사회학), 나종석 연세대 연구교수(철학), 후지타 히사시 큐슈산업대 교수 그리고 70여명의 관객이 참여해 국제철학학교와 오늘날 철학의 역할에 관해 논의를 펼쳤다.
「철학의 권리」는 국제철학학교를 취재한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는 지난해 9월부터 일본을 비롯해 중국, 미국, 프랑스 등지에서 30회가 넘는 상영회를 개최했다. 2011에는 영국과 독일, 불가리아 등지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배경은 데리다가 창설한 국제철학학교지만 단순히 데리다 철학이나 학교를 소개하는 영화는 아니다. 니시야마 유지 감독은 철학자로서 대학 및 인문학과 연관된 여러 문제들을 미셸 드기, 프랑소와 누들만, 브뤼노 끌레망 등 역대 국제철학학교의 총장과 보얀 만체프 부총장, 그리고 국제철학학교의 전·현직 디렉터들과 만나 인터뷰 형식으로 담담히 풀어간다. 특히 니시야마 감독은 글로벌한 자본주의 시대에서 효율성과 수익성의 논리에 밀려 퇴출 위기에 처한 철학과 문학, 그리고 예술의 존재 이유와 그것들의 새로운 존재 방식을 국제철학학교의 사례를 통해 모색했다.
국제철학학교는 프로그램 디렉터 50명의 합의제로 운영된다. 50명의 디렉터 중 10명은 외국인이다. 초등학교 교사부터 대학 교수까지 누구나 디렉터가 될 수 있으며 그만큼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교사들의 관계는 평등하다. 국제철학학교는 대학이나 공공연구기관과는 다른 시민단체 혹은 시민들의 결사체다. 여러 정부 기관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지만 연구자들에게 급여를 지급하지는 않는다. 국제철학학교의 교육 역시 무상이며, 학위제도도 없다.
국제철학학교는 이런 ‘특별한 방식’의 제도화를 지향한다. 데리다의 말을 빌리자면 철학학교는 제도란 이념을 해체 또는 탈구축하려는 활동의 장이다. 즉, 기존 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기존 제도권 인문학에 의해 질식당했던 철학적, 인문학적 사유를 무한하고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에 개방하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가 주는 울림이 클수록 영화를 보는 국내연구자들과 관객들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예정보다 30여분 가량 길어진 토론회에서는 새로운 소통방식으로서 국제철학학교가 던지는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대학의 안과 밖에서 철학은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지 등 논의가 이어졌다. 또한 국제철학학교 관계자들의 진술로만 진행되는 영화의 진행방식이 오히려 국제철학학교의 실체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됐다.
학문적 결과를 대학밖 시민과 공유하기
이 같은 비판에 대해 니시야마 감독은 이미 이전 상영회들을 통해 인터뷰만으로 진행되는 영화의 전개방식이 여러 번 지적됐었다고 운을 땐 뒤, “영화의 목적이 국제철학학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학과 인문학의 미래를 고민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굳이 학교의 모습을 찍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인터뷰이들의 진술이 가진 보편적인 힘을 믿었다”고 답했다.
후지타 히사시 교수는 「철학의 권리」의 내용과 의의, 상영 모두를 하나의 ‘여행 과정’에 비유했다. 또한 철학자인 니시야마 감독이 영화 제작에 도전함으로써 그 동안 수동적이었던 일본 인문학 연구의 방법을 표현운동 등으로 다양화했다고 평가했다.
참여연대에서 시민교육프로그램을 운영 중인 주은경 부원장은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으면서도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국제철학학교의 운영방식에 주목했다. 더불어 “국학연구원처럼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고 있는 대학 기관이 그 학문적 결과를 대학 내에서 뿐 아니라 대학 밖의 시민들과 어떻게 나눌 것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회를 맡은 김항 고려대 연구교수(철학)는 그에 대한 답을 플로어에 앉아있던 백영서 원장에게 돌렸다. 백 원장은 “사실 대학 내 연구자들 대부분은 대학을 벗어난 사고에 익숙치 않다. 그러다보니 제도 안에서 인문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고 인정하며 “대학 구성원들의 사고부터 다양화 하자”고 촉구했다. 일반 대학의 철학 강의가 고정된 캠퍼스 안에서 이뤄진다면 심포지엄, 세미나, 워크숍을 포함한 국제철학학교의 강의는 대학의 안과 밖, 국내와 국외의 구분 없이 이뤄진다. 대학에서의 세미나와 시민 강좌의 형식이 이중적으로 중첩돼 있는 형태다.
니시야마 감독은 영화 제목인 「철학의 권리」는 정확히 말하자면 ‘철학을 향한 권리’라고 부연했다. 그렇다면 철학의 권리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철학은 대학, 철학 텍스트, 철학사 등 제도에 의해 보호를 받아왔다. 그런데 데리다는 지식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이 제도에 의해 보호 받아왔다는 사실 사이에서 사고를 정리한다.”
영화 내내 데리다가 주장한 ‘탈구축’이 주요 화두로 언급됐다. 이 때, 탈구축은 ‘제도라는 개념을 끊임없이 문제 삼아야 하는 제도적 실천’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철학의 권리」는 철학과 인문학이 본래의 사회성을 회복하기 위해선 적절한 만남의 공간이 창출돼야 한다는 의미 있는 대안을 던졌다. 오랜 기간 위기에 빠져 있던 인문학은 「철학의 권리」에서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우주영 기자)
10. 10.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