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지젝과 관련한 칼럼들이 눈에 띄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지젝'이란 이름이 칼럼에 등장하는 빈도수가 친숙도의 척도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공역자로 참여한 지젝의 <폭력>(난장이, 2011)이 내달에 출간되는데, 그의 문제의식이 더 많이 공유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겨레(10. 09. 13) [홍세화칼럼] ‘배제된 자’들을 위한 정치

지난 9월3일 취임 인사차 민주노총을 방문하여 환대를 받은 박재완 고용노동부 장관은 “위원장이 고용노동부를 ‘우리 부’라고 해 너무 감사하다. 우리도 민주노총을 ‘우리 민주노총’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화답했다. 한국 사회에서 조합원들이나 현장 활동가들 위에 군림하는 시민사회단체나 조직의 지도층이 공권력 앞에서 주눅들거나 황송해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지만, 한국노총과 자리바꿈을 한 듯한 민주노총 위원장의 이번 행보는 슬라보이 지제크가 말한 “‘배제된 자’에 적대적인 ‘포함된 자’”에서 ‘포함된 자’의 그것에 가까워 보인다.

행정자치부를 행정안전부로 바꾼 것처럼 노동부를 고용노동부로 바꾼 것도 이명박 정권의 지향을 오롯이 드러낸다. 가령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은 노동허가제가 아닌 고용허가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노동의 주체는 노동자이지만 고용의 주체는 고용주라는 점에서 노동허가제와 고용허가제는 전혀 상반된 노동관에 기초하고 있다. 그동안 실질에 있어서는 ‘노동통제부’에 가까웠다고 하더라도 이름만큼은 그래도 노동부였던 것을 고용노동부라고 바꾼 것인데, 민주노총 지도부가 ‘비정규직 철폐’라는 구호에 맞게 실제로 ‘배제된 자’들과 연대하여 싸운다면 고용노동부를 ‘우리 부’라고 일컬을 수는 없는 일이다.

배제된 자들 중에는 오늘도 농성 투쟁을 벌이고 있는 기륭전자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현대기아자동차 본사 앞에서 두 달째 노숙 투쟁을 벌이는 동희오토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있다. 충남 서산에 있는 이 공장의 생산직 노동자 900여명은 모두 기아자동차 ‘모닝’을 생산하지만 기아자동차 노동자가 아닌, 17개 외주하청업체에 소속된 유령과 같은 존재들이다. 아이엠에프 환란 직후인 1998년, 정치권과 자본의 전방위 압력을 받은 현대자동차 노조가 가장 약한 고리인 식당 여성노동자들을 비정규직화하는 데 합의했던 과정과 그에 따른 투쟁을 형상화한 게 <밥·꽃·양>인데, 일단 물꼬가 터진 뒤 ‘전 생산노동자의 비정규직화’라는, 사용자에게 억만금의 이윤을 챙기게 해주는 ‘멋진 신세계’가 펼쳐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실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의 개념은 지제크에게서 빌려올 필요 없이 쌍용자동차 사태를 돌이켜보면 더 분명하게 다가온다. 배제된 자들의 위험으로부터 체제를 지키는 게 공권력의 역할임을, 또한 ‘포함된 자’가 자칫 ‘배제된 자’들과 연대하여 싸우면 그 또한 ‘배제된 자’가 되어야 함을 쌍용자동차 사태는 가르쳐주었다. 복종하여 포함될 것이냐, 싸우다 배제될 것이냐의 선택 앞에서 노동계가 그간 보인 대응은 전자 우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고용노동부는 지난 7월22일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해 대법원이 내린 ‘불법파견, 정규직 지위 확인’ 판결의 현장파급효과를 최소화하려고 애쓰는 한편 타임오프제를 빌미로 사용자들에게 단체협약을 바꾸도록 압박하고 있다. 대법 판결 이후 현장에서 그나마 되살아나고 있는 연대 동력을 무력화하면서 지금까지처럼 노동을 순치시키려는 것이다. 그런데 워낙 포함된 자들 사이의 싸움에만 눈길을 주는 게 관성이 된 탓인가, <한겨레>를 포함하여 진보매체에서조차 의미 있는 변곡점이 될 수 있는 대법 판결 이후 현장의 움직임을 기사화하는 데 인색하다.

여야 정치권 사이의 싸움이 아무리 요란해도 결국 이건희의 품 안에 포함된 자들 사이의 싸움이며, 민주당이 4대강 사업을 반대한다지만 새만금을 밀어붙였던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더욱 오늘 통합을 주장하는 진보 정치인들은 무엇을 위해 누구와 통합할 것인지 분명히 밝혀야 마땅하다. 조직되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고 그래서 표로 계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 편에 서지 않는다면 진보는 거추장스런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홍세화 기획위원)    

한겨레(10. 12. 18) [세상 읽기] 지제크식 이웃사랑

네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님 말씀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 역시 예수님 말씀이다. 말은 쉬운데, 행동은 참 어렵다. 혹자는 원수까진 몰라도 이웃은 이미 사랑하고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일손이 부족하면 가서 도와주고, 명절이면 음식을 나눠먹고, 상을 당하면 함께 울어준다고…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이웃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누가 한번 선을 그어보라. 그 경계 안에 몇 명이나 있는가?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사랑하지 말잔 얘긴가? 박애주의자인 예수님이 그런 명령을 했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보편적인 윤리적 명령이 되려면 이웃의 특정한 경계를 가정해서는 안 된다. 각기 다른 이웃사랑이 충돌해서 원수로 만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면 어쩌라고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윤리를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의 견해를 참조해 보자. 지제크는 윤리의 관건을 ‘이웃사랑’이라고 단언한다. 그에게 이웃은 근처에 사는 존재가 아니다. 이웃은 이해관계로 얽힌 경쟁하는 존재들이다. 주차공간을 다투는 상가 주민, 승진을 겨루는 입사동기, 임금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는 노사가 모두 이웃이다. 가장 직설적인 삶의 현실이 존재하는 곳에서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웃인 것이다. 그래서 이웃은 원수가 되기 쉽기 때문에 이웃사랑이 윤리의 핵심이라는 거다. 결국 ‘이웃사랑’은 가장 적나라한 삶의 진실이 드러나는 생산의 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식의 ‘이웃사랑’은 쉽지 않다. 대개는 거꾸로 간다. 최철원 사건을 떠올려보자. 그는 1인 시위를 하는 노동자를 맷값을 주고 야구방망이로 구타했다. 그런 그가 모교에는 15억원을 기부했다. 이웃은 원수로, 남은 이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 사례는 극단적이지만 유사한 행태는 흔하다. 임금을 대폭 삭감해 얻은 이윤으로 교회의 불우이웃돕기에 기부한 경우를 가정해 보자. 임금삭감의 이득은 다수의 이웃에게 고통을 주지만 가치중립적인 ‘경제적 행위’로 치부되면서 윤리적 비판을 피해갈 수 있다. 반면 이렇게 남은 이득의 일부를 기부하면 선행으로 칭송받으며 단번에 윤리적 영예를 가질 수 있다. 계산에 밝은 인간이라면 어찌 이 방법이 가진 효율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지제크는 이런 행태, 다수의 이웃을 괴롭혀 남에게 조금 집어주고 윤리적 행위의 영예는 자신이 갖는 것을 ‘물신주의적 부인’으로 규정한다. 진정한 이웃의 고통은 부인하고 희생과 헌신의 제스처만을 윤리의 특권적 형식으로 물신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예수님이 ‘이웃을 사랑하라’란 명령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친절하게 각주까지 붙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진정한 이웃은 원수의 모습을 하기 쉬우니 남을 끌어들여 이웃을 외면하는 잔머리를 경계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희생과 헌신의 제스처를 받아주는 무력한 존재만 이웃으로 경계 짓지 말고 상처받은 얼굴로 노려보는 진정한 이웃의 요구에 정직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연말이면 어김없이 불우이웃돕기 구호가 등장한다. 소녀가장이나 독거노인 같은 무력한 존재들이 그 대상이다. 이런 식의 ‘이웃사랑’은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이벤트로 이웃을 불우하게 만드는 일상을 가린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죽어나간 노동자들에 대해 세계 일류기업이 보여주는 일관된 외면을 보라. 북한의 포사격으로 시민들이 불안에 떠는 사이 이웃의 권리를 분배하는 예산안을 당파의 권리로 날치기 통과시킨 집권세력은 또 어떠한가. 이해관계로 뭉친 패거리만 이웃으로 경계 짓고 진정한 이웃의 고통을 양식으로 삼는 것이 그들의 ‘이웃사랑’인가. 불우해지기 전에 이웃을 돕는 것, 이웃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왜 그리 어려운가?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10. 12. 19.  

P.S. 두 칼럼에서 '슬라보예 지젝'이 '슬라보이 지제크'로 표기됐다. 현행 외국어표기법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슬라보이'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Slavoj'가 '슬라보예'로 소개된 것은 우연한 착오 때문이었을 것이다. 발음은 '슬라보이'니까. 최근의 어느 기사는 '슬라보즈'라고 독창적으로 읽었지만), '지젝'을 '지제크'로 읽는 건 소모적으로 보인다. '지젝'은 이미 통용 표기이기 때문이다(하긴 '벤야민'은 '베냐민'으로 고집하는 것도 여전하니 '지제크'만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지제크'가 무슨 비스킷 이름처럼 들리는 게 나뿐일까?). 나의 지론은 적어도 외국어 고유명사 표기는 일관적인 표기원칙을 따르기 곤란하며 관행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지젝의 <폭력>의 핵심 요지에 대해서는 동영상 시리즈를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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