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대해서는 여러 모로 '인연'을 갖고 있고 강의에서도 자주 다루게 된다. 이번 학기에는 특히나 오랫동안 자세히 읽기를 시도했는데, 그렇다고 아직 연구서 한권 낼 만한 형편은 안되기에(석달 정도의 자유시간이 필요하다) 이런저런 읽을 거리들을 참고자료로 제시하곤 한다. 가장 최근 자료로 참고할 만한 것은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웅진지식하우스, 2006)의 저자 김용규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통해서 본 ‘죄’와 ‘벌’의 의미'로 얼마전 한겨레에 2회 걸쳐서 분재됐다. 아마도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의 속편에 포함될 듯하다.

 

한겨레(07. 05. 19) 인간의 경계 뛰어넘은 ‘자만의 죄’ 고발

1849년 12월 22일, 러시아 세묘노프스키 광장에서는 사형이 집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황제의 특사가 내려 사형 직전의 한 청년이 살아났다. 그는 시베리아에 있는 수용소로 보내져 4년간 혹독한 강제노동을 했다. 간질발작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날들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청년이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자신의 신념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다.

수용소에 갇히기 전, 청년은 무신론적 사회주의자과 어울렸다. 그들과 함께 황제를 모독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생각이 변했다. 왠지 사회개혁을 위해 무릎을 세우고 일어서는 혁명가들보다 쓰러진 자들을 일으키려고 허리를 굽히는 사람들이 더 선하게 여겨졌다. 이성과 과학을 숭배하는 합리적 지식인들보다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바보 같은 민중들이 더 지혜롭게 생각되었다. 그는 그 이유를 스스로 알지 못했다. 그런데 청년은 소설가였다. 그래서 남은 생애동안 바로 이 문제, 오직 이 문제와 싸우며 글을 썼다. 그 결과 위대한 작가가 되었다. 청년의 이름이 도스토예프스키이고, 바로 그 문제를 다룬 첫 장편소설이 <죄와 벌>이다.

이제부터 ‘죄’와 ‘벌’ 둘로 나누어 살펴볼 이 작품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상트페테르부르그에 사는 법학생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우연히 알게 된 창녀 소냐의 권고를 받아 자수하게 된다는 게 전부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불후의 명작이 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심리학자들마저 격찬할 만큼 뛰어나게 인간의 심리를 그려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에게 죄와 벌이 과연 무엇인가를 신학자들마저 경탄할 만큼 심오하게 파헤쳐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우선 죄를 보자. 라스콜리니코프는 죄인이다. 이견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왜 죄인인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아니다. 바로 여기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각은 달랐다. 그리고 이 다른 생각이 이 작품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그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기 이전부터 이미 죄인이었다고 생각했다. 무슨 소리인가 보자.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동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심리적 억압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연구가인 모출스키의 주장처럼, 상트페테르부르그의 무더운 날씨, 어머니와 여동생마저 돌보지 못하는 가난한 자신의 처지가 분명 그를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을까? 아니다. 더 중요한 동기가 따로 있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가 나쁜 방법으로 모은 재산을 자신이 인류를 위해 봉사하게끔 학비로 사용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사회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와 같이 <비범한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법률을 위반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솔로몬과 마호메트, 그리고 나폴레옹을 예로 들어 자기를 정당화했다. 이들이 그랬듯이 새로운 사회와 법률을 위해서는 낡은 것들을 파괴해야만 하는데, 희생이 불가피하다면 그것이 당연히 허용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라스콜리니코프는 한 점 죄의식조차 없이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을 도끼로 살해했다. ‘초인사상’으로 일컬어지는 이런 생각을 도스토예프스키는 “공기 중에 유유히 떠다니는 이상하고 온전치 못한 사상”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인간이 이런 생각을 갖는 것 자체가 ‘범죄 이전의 죄’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사실인즉 <죄와 벌>을 썼다.

그는 ‘범죄 이전의 죄’라는 개념을 기독교 종파인 러시아 정교에서 얻었다. <구약 성서>에 서 아담은 뱀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고 해서 그것을 따먹었다. 그리고 죄인이 되어 낙원에서 쫓겨났다. 원인은 “하나님같이 되리라”였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신처럼 되려고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자만’이라고 부른다. 자만이 곧 ‘범죄 이전의 죄’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진 죄가 바로 이것이다.

<죄와 벌>에서 ‘죄’라는 의미로 사용된 러시아어 ‘prestuplenie’는 본래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뜻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단어를 ‘법률의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인간이 자신의 경계를 뛰어넘는 경우 그의 죄에는 죄의식이 없다. 그의 이성이 모든 것을 스스로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이 무참한 죄를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고발하고 또 경고했다. 그런데 돌아보자. 우리가 그로부터 과연 무엇인가 배웠는가를. 20세기 들어 수백만 명을 학살한 독일 나치나 러시아 공산당이 어땠는가를. 그리고 생각해보자. 21세기인 오늘날에는 이처럼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를. “공기 중에 유유히 떠다니는 이상하고 온전치 못한 사상”이 없는가를. 한번 생각해보자.  

한겨레(07. 06. 02) 죽음보다 끔찍한 벌 벗는 길은 희생

<죄와 벌>은 죄보다 벌에 관한 작품이다. 분량만 보아도 그렇다. 에필로그를 포함하여 모두 7부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죄는 1부에 다 드러난다. 나머지는 모두 지옥 같은 벌에 대한 설명이다. “단테처럼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지옥의 모든 단계를 통과한다. 그런데 이 지옥은 〈신곡〉의 중세적 지옥보다 더 끔찍하다.” 모출스키의 말이다. 돌아보자. 죄가 무엇이었는지. 그래야 벌을 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죄는 자만이었다. 그것은 원초적 죄로서 모든 악행과 범죄가 여기에서 나온다. 기독교적 사변이다. 그럼 벌은 무엇인가? <구약성서>에서 신은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그 벌로 “정녕 죽으리라”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막상 선악과를 따먹자 죽이지 않았다. 추방했다. 그럼 성서는 처음부터 신의 거짓말로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학자들의 생각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생명이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죽음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빛이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어둠에 속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진리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거짓에 서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선함이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악함에 머무는 것이다. 신은 이러한 벌들로 자신의 약속을 어김없이 지켰다. 이것이 성서에 나오는,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던 벌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에서 총 6부에 걸쳐 고발한 그 벌이다. 모출스키가 <신곡>의 지옥보다 더 끔찍하다는 그 지옥 체험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받은 바로 그 벌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벌을 살인이라는 범죄로, 그 범죄에서 오는 심리적 어둠으로, 그 범죄를 숨기려는 거짓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악행을 차례로 체험함으로써 받았다. 그것이 얼마나 무겁고 괴로운지를,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지옥 체험인지를, 오직 그것만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수백 쪽에 걸쳐 묘사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수를 한 것은 결코 양심의 가책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괴로워한 것은 단지 악을 체험하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고통 때문이었다.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 때문이었다. 이 벌의 성격을 예심판사 포르피리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도망가면 어쩌죠?”라고 묻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자넨 도망가지 않을 거야. (…) 자네가 도망간다 해도 아마 스스로 되돌아올걸? 자넨 우리 없이 지낼 수 없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단지 이 끔찍한 지옥에서 벗어나려고 차라리 자수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에는 같은 벌을 받는 인물이 하나 더 등장한다. 스비드리가일로프다. 그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다른 악의 짝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사회주의 이상을 내세워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죄를 지었다면,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유주의 이상을 내세워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죄를 짓는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기 부인을 살해하고, 하인을 학대하여 자살하게 하고, 14살 어린 소녀를 능욕하여 자살하게 했다. 그의 범죄는 개인적인 정욕과 쾌락에서 나왔다. 범죄 동기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와 다르지만, 원인은 같다. 그에게도 욕망과 쾌락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자만이 있었다.

결국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려는 것은 단순하다. 개인적 이익과 욕망을 위해서든, 사회적 이익과 개혁을 위해서든,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자만이 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지옥보다 더 끔찍한 지옥에 갇힌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라스콜리니코프는 차라리 수용소에 가려고 자수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권총으로 제 머리를 쏘았다. 그가 한 마지막 말은 “미국에 가기 위해서야”였다.

그렇다면 이 죄와 그 벌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는가? 있다. 의외로 간단하다. 자만이 원인이면 겸손이 해법이다. 날 세운 이성이 원인이면 바보 같은 신앙이 해법이다. 타인 희생이 원인이면 자기 희생이 해법이다. 창녀 소냐가 그 일을 맡았다. 그녀는 비참하게 살아가지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며 자기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인간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를 ‘유로지비’라고 불렀다. 러시아 정교에서 ‘성스러운 바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죽은 나무에 수년 동안 물을 길어다 부어 마침내 어느 날 푸른 잎을 피워낸 어떤 수도사를 일컬은 말이다. 눈뜬 이기주의와 눈 먼 합리주의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이 속한 시대와 사회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성스러운 자유를 가졌던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이다. 소냐가 바로 그다. 소냐는 이 방법으로 라스콜리니코프를 구했다.

그럼 생각해보자. 오늘을 사는 라스콜리니코프와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누군가를. 그리고 우리가 속한 시대와 사회를 구할 진정한 방법이 무엇인가를. 한번 생각해보자.(김용규/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07. 06. 09.

P.S. '유로지비'는 '성스러운 바보'를 뜻하지만 작품에서는 문맥상 '광신도', 곧 '신에 미친 여자'란 뜻도 내포한다.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를 대립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형식논리적이며 이 작품의 역동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감이 있다. '날 세운 이성'뿐만 아니라 '바보 같은 신앙' 또한 인류사에서 많은 죄의 근원이지 않았던가. 이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물론 '새로운 이야기'에 속하는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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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그 2007-06-10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처럼 주 독자층을 청소년으로 생각하고 쓴 글이라 구도가 좀 더 단순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자"도 같은 맥락일 것 같고요.^^

로쟈 2007-06-11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자층에 대한 고려도 있겠도 분량 제한도 있겠지요. 한데, 모든 해설이 갖는 함정이지만 작품읽기를 대체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어서요...
 
왕가위와 레르몬토프

러시아 시인 레르몬토프의 시에 곡을 붙인 '나 홀로 길을 나선다'를 그냥 흥얼거리다가 문득 예전 모스크바 통신에서 '레르몬토프의 고독'이란 페이퍼만 유독 정리해놓지 않은 걸 알게 됐다(이것도 그의 고독에 대한 배려였을까?). 바쁠 때일수록 이렇게 딴짓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의 고독에 대해서 다시 정리해놓는다(모스크바통신에서는 푸슈킨 시와의 비교도 다루었었는데 그건 생략하도록 한다). 참고로, 시 '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대해서는 링크해놓은 '왕가위와 레르몬토프'를 참조하실 수 있다. 러시아 가수 올렉 포구진이 부르는 노래는 http://www.youtube.com/watch?v=DcNMQIT-FCo 에서 들어보실 수 있고(예전에 국내 드라마에서는 여자가수가 부른 버전이 주제가로 쓰였었다).

 

지난번 통신문에서 레르몬토프의 마지막 <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대해서 몇 마디 언급했는데, 나는 이 50번째 통신문에서도 그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한다. 유리 미하일로비치 레르몬토프(1814-1841)에 대해서 말이다. 푸슈킨에게서는 기념비란 테마가 시인 자신에게서조차 주제화되며, 그의 예언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탄생 100주년(1899), 사망 100주년(1937), 탄생 200주년(1999) 등이 매번 성대하게 치러진 반면에, 고독의 시인 레르몬토프는 그의 문학적 유언(<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걸맞게 언제나 혼자였다(*이 시마저도 종종 푸슈킨의 시로 오해받는다고 한다!)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 되던 1914년에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사망 100주년이 되던 1941년엔 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2차대전은 1939년에 발발하지만, 소련은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던 독일의 공격을 받고 나서야 뒤늦게 비로소 참전한다). 해서, 러시아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시인/작가이자 러시아 낭만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국 러시아에서 한번도 제대로 기념되지 못했다(그의 지명도에 비추어보면, 거의 미스터리한 일이다). 그리고 올해(*2004년)는 그의 탄생 190주년이 되는 해였지만, 역시나 그와 관련된 행사들은 (내가 아는 한) 치러지지 않았다(체홉 사망 100주년에 묻혀서). 그저 문학신문의 기념 기사 한 자락 정도.

하다못해 2주전 일요일에는 그의 탄생 190주년을 기념하여 대표작인 <우리시대의 영웅>(1964) 등이 문화채널에서 영화로 방송됐지만, 그날 따라 나는 저녁 늦게야 TV프로그램을 확인했다(그의 탄생일은 1814 10 3일이다. 2일 밤인데, 보통 3일로 기록한다. 이게 구력일 것이기 때문에, 지난 17일이 신력에 따른 생일이었을 것이다. 결투로 인한 사망은 1841 7 15. 황제 니콜라이 1세는 그의 죽음에 대해서 개죽음이로군!이라고 간단히 언급했다. 한편 최초의 레르몬토프 전기는 파벨 비스코바트이의 것이며 1891년에 나왔다. 이 책은 올해 재출간됐다). 나는 레르몬토프를 전공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쳐버린 일이 한동안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사실 그에 대한 본의 아닌 홀대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 나의 조국 한국에서는 레르몬토프를 거의 읽을 수가 없다. 지난 1999년에 전집이 간행된 푸슈킨과 다르게 그나마 우리말로 번역/출간된 레르몬토프의 시집과 소설 <우리시대의 영웅>(한길사, 조선대출판부)은 진작에 품절되었다(<우리시대의 영웅>은 영어 중역본도 나와 있었지만 역시 품절. 참고로 영역본 <우리시대의 영웅>은 나보코프가 그의 아들과 함께 옮긴 것이다). 그의 드라마 <가면무도회> <러시아희곡1>(열린책들)에 들어가 있지만, 이 책 또한 품절인 걸로 안다(그의 <가면무도회>는 지금도 모스크바의 무대에 올려지고 있으며 이번 시즌에 포킨이 연출한 고골의 <외투>와 함께 내가 가장 보고 싶어하는 레퍼토리이다).

 

해서, 아마도 당장에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레르몬토프는 내가 아는 한 없을 듯하다(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건대출판부에서 나온 작가론 <레르몬토프>를 소략한 대로 참조할 수 있다). 요컨대, 그는 우리말로 쉽게는 읽을 수 없는 시인/작가인 셈이다(참고로, 레르몬토프의 러시아어 전집은 2권짜리에서 10권짜리까지 다양하며, 보통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은 4권짜리 전집이다(*이미지는 단행본 <우리시대의 영웅>).

 

 

한편, 푸슈킨과 마찬가지로 그는 장교시절에 포르노그라피적인 시들도 썼는데, 그런 시들만을 따로 묶은 <성인을 위한 레르몬토프>도 올해 출간됐다. <성인을 위한 푸슈킨>과 함께. 두 책 모두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도색화보들이 잔뜩 들어가 있어서, 한국에서라면 도색잡지로 분류돼 판금될 만한 책들이다).

 

해서, 생전에나 사후에나 고독한 그의 운명과는 비록 다소 걸맞지 않아 보일지라도, 약소하지만 이 50회 통신문은 (무심코 지나친 그의 생일을 기념하여 뒤늦게) 그에게 바치고자 한다(이런 걸 뒷북이라고 한다. 하지만, 마음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뒷북이라도 치는 것이다). 이건 며칠 전에 작정한 것인데, 좀 전에 혼자 저녁을 먹으면서 오늘 해치우기로 했다. 그렇다고 새로 무슨 글을 쓰는 건 아니고(그럴 형편이 안되므로), 이전에 쓴 글을 약간 편집하는 정도이다(휴식시간 동안 그 일이 끝나기를 바란다).

 

글은 주로 레르몬토프의 연애시에 대한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푸슈킨과의 대비 속에서 레르몬토프를 이해하기 때문에, 푸슈킨의 연애시에 대해서도 언급될 것이다(*이번엔 생략한다). 사실 레르몬토프가 시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는 것은 1837년 푸슈킨을 죽음을 권력층의 음모로 비판한 시 <시인의 죽음>을 발표하면서이다. 푸슈킨의 죽음에 부친 시이면서도 정작 푸슈킨이란 이름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시인이 죽었다! - 명예의 노예 -

헛소문과 비방으로 쓰러졌다,

가슴에 복수의 열망과 총알을 박은 채,

당당한 머리를 숙이고 쓰러졌다!

시인의 영혼은 사소한 모욕의

불명예를 참지 못하고,

그는 세상의 소문에 대항하여 일어섰다

혼자서, 예전처럼... 그리고 살해당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이 일로 유배당하며, 그에 대한 황제의 미움은 거기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이후에 불과 4년을 더 살았을 뿐이다.

 

레르몬토프 전공자들이 흔히 하는 얘기지만, (레르몬토프와 마찬가지로) 27살에 죽었다면 역시나 총각으로 죽었을 시인 푸슈킨(1799-1837)의 문학적 명성이 레르몬토프를 크게 앞지르진 못했을 것이며, 고골(1809-1852) <검찰관>(1836) 공연의 스캔들로 아마 상심해서 죽었을 것인바 아주 재미있고 재능 있는 괴짜 정도로 기억됐을 것이고, 톨스토이(1828-1910)는 자전 3부작이나 끄적거리다가 문학사의 여백으로 사라져버렸을 것이며,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 또한 페트라셰프스키 사건(1849)으로 말미암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렸을 것인바 고골의 아류 작가 정도로 기억됐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런 것도 다 팔자인 걸 어떡하랴   

 

04. 10. 26/ 07. 06.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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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21 23:50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은 부제이고, 제목은 '푸시킨 VS. 레르몬토프'이다. 러시아 두 낭만주의 시인의 사랑시(실연시)를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으로 비교한 글이다. 개인적으론 '푸슈킨'이란 표기를 선호하지만 지면에는 외국어 표기안에 따라 '푸시킨'으로 표기됐다.     고교 독서평설(09년 3월호) 푸시킨 VS.
  2. 레르몬토프와 페초린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1-19 00:39 
    아트앤스터디에서 러시아문학 강의에서 어제(라고는 하지만 몇 시간 전이다)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민음사, 2009)을 다루었다. 책이 절판되어서 한동안 다루지 못하다가 작년 가을에 새 번역판이 나온 덕분에 강의 커리에 포함시키고 있고, 어제는 두 번째 강의였다(아무래도 푸슈킨보다는 입에 덜 익었다).    사실 레르몬토프(1814-1841)는 내가 20대 시절에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Joule 2007-06-09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저기 위에 턱에 손 괴고 얼짱 각도로 나온 사진이 레르몬토프인가요?... 흠, 음...그러니까...이건...뭐랄까...다음에 만나면 손 각도가 틀렸다고 전해주세요. (후다닥)

로쟈 2007-06-09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지는 못했지만 영화 <우리시대의 영웅>의 주인공 페초린 같습니다. 자전적인 부분도 있지만 레르몬토프는 아니죠...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세기 마지막 편이다.  가장 음울한 내용은 담고 있는데, 타이틀부터가 '사회주의의 죽음'이다. 소위 '현실 사회주의'의 죽음을 증언하는 사진들이다.

한겨레(07. 05. 28)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 ⑥ 사회주의의 죽음

»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죽음의 현장. <북폴리오> 제공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죽음의 현장 = 남자들이 먼저 죽고, 그 다음에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여자들이 죽었다. “가장 끔찍한 광경은 꼬마들이었다.”고 한 당 활동가는 썼다. “굶주림은 아이들의 얼굴에서 어린아이의 자취를 깡그리 앗아갔고 그들은 고통받는 괴물을 닮아갔다. 두 눈에만 아이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가는 곳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엎드려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얼굴과 배는 부풀어 오르고 두 눈은 멍했다.”

» 부랑아의 작별. <북폴리오> 제공
부랑아의 작별 = 1921년 볼가 강 유역에서 끔찍한 기근이 발생했다. 신생 소련과 교역한 미국인 공업자본가 아먼드 해머는 “팔다리가 막대기처럼 시들고 풀을 뜯어 먹어 배가 끔찍하게 부풀어 오른 아이들”에 대해 기록했다. 미국의 원조에도 불구하고―볼셰비키는 그 후 되풀이된 대규모 기아 사태에서와는 달리 이 기근을 부인하지 않았다―수백만 명이 아사했다. 탐보프 주에서 볼셰비키 통치에 맞서 궐기한 농민들이 무더기로 총살당했다.

» 블라소프와 동지들. <북폴리오> 제공
블라소프와 동지들 = 블라소프와 동지들은 1946년 8월 1일 루뱐카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제일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블라소프다. 그와 함께 11명이 교수되었다. 이 사진은 스탈린과 고위 지휘부를 위해 특별히 찍은 것이다. 이 사진은 루뱐카에서 행해진 교수형과 관련해 유일하게 알려진 사진이며 블라소프의 KGB 파일에서 나왔다. 전쟁이 끝난 뒤 독일 협력자들 수천 명이 소련으로 송환되어 총살당했다. 1941년의 키예프 포위와 모스크바 전투의 영웅이었던 블라소프만이 스탈린의 관심을 끌었다.

» 모스크바에서 장보기. 사진/가브릴로프. <북폴리오> 제공
모스크바에서 장보기 = 1970년대 중반 사람들은 소도시에서는 구할 수 없는 식품과 옷가지를 사기 위해 소련 전역에서 모스크바를 비롯한 대도시로 몰려들었다. 열차가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보조금 덕분에 비행기표가 엄청나게 저렴해 비행기도 주부와 물건으로 미어터진 가방으로 꽉 찼다.

» 빵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진/B. 미할료프킨. <북폴리오> 제공
빵을 기다리는 사람들 = 1980년대 초. 사진에서 마을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마을 생활은 야만적이었던 집단화와 숙청에 대한 기억 때문에 여전히 왜곡되어 있었다. 밀고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공동체 의식이 파괴되었다. 농업은 집단농장으로 인해 여전히 망가진 상태였다. 차르 시대 곡물 수출국이었던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가 이제는 자급자족이 불가능하고 충분한 빵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과 캐나다, 아르헨티나에서 수입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공산주의의 몰락 1991년 8월 공산주의 쿠데타가 실패한 뒤 잘려나간 마르크스와 레닌의 두상. 사진/G. 보드로프. <북폴리오> 제공

07. 0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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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슈킨(1799-1837)의 시 한편이 생각나서 옮겨놓는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제목이 따로 붙어 있는 시가 아니어서 그냥 첫행을 제목으로 쓴다. 그리고 이 시는 아마도 국내 독자들에겐 가장 잘 알려진 시일 것이다(나는 '이발소 그림'에 대응하여 '이발소 시'라고 부른다). 시가 씌어진 건 1825년, 그러니까 시인의 나이 26살 때이고, 정치적인 이유로 남방(카프카즈 지역) 유배중이었다.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지내야만 했던 생활이 5년차였는지라 자신의 처지에 대해 슬픔과 노여움을 품음 직했다. 그런 스스로를 달래고 다독이는 시인 셈.  

 

Если жизнь тебя обманет,
Не печалься, не сердись!
В день уныния смирись:
День веселья, верь, настанет.

Сердце в будущем живет;
Настоящее уныло:
Все мгновенно, все пройдет;
Что пройдет, то будет мило.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언제나 우울한 것
모든 것은 순간이고 지나가며
지나간 것은 또 그리워지나니.

 

 

 

 

Should this life sometime deceive you,
Don't be sad or mad at it!
On a gloomy day, submit:
Trust -- fair day will come, why grieve you?

Heart lives in the future, so
What if gloom pervades the present?
All is fleeting, all will go;
What is gone will then be pleasant.

갑자기 이 시를 떠올리게 된 건 '현재는 언제나 우울한 것'에서 나 또한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침 어제는 (구력으로 치자면) 푸슈킨의 생일이었고, 오늘은 절친했던 친구의 4주기가 되는 기일이다. 해서, 이러구러 답답하고 우울하다(우울함의 어처구니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요즘 마음놓고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이라는 위안마저 없다면 어찌 견디겠는가.

Night View on Tverskaya Street , Moscow, 2003-09 (C) Seiji Yoshimoto

모스크바의 밤거리를 거닐어본 지도 오래되었군...

07. 0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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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7-05-28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그대는 영영 모르리라.

술을 마시다가 이미 넉 달 전에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린 제 개가 생각나서 말이죠. 사람도 아니고 개가요. 언제부턴가 이상하게 이유없이 조증과 울증이 반복되어 나름대로 열심히 근거를 잘 대어갔는데 친구가 그러더군요. 그러고보니 너의 조울증은 그러니까 개가 떠나고 난 다음부터인 것 같다고. 물론, 예의상 버럭 해줬습지요. 예의상.

로쟈 2007-05-28 0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울증도 다 관리대상이지요. 그 경우엔 떠나는 게 아니라 덮치는 게 문제이지만...

비로그인 2007-05-28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조울증 환자 한명 더 대령했습니다. :)
저만 조울증 환자인줄 알았더니 ㅎㅎ 뭐야뭐야, 요상한 안도감을 느끼고 있네요~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 마지막 회이다. 20세기의 정치가들과 예술가들 편에 이어서 인민들(러시아어로는 '나로드'), 곧 노동자와 농민들의 삶이 사진에 담겼다. 대개 노동자/농민이라고 통칭하지만 사실 노동자와 농민의 이해관계는 같지 않다. 러시아 혁명에 힘을 합쳤지만 이후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주로 농민들이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한 일은 현실 사회주의에서 국유화된 토지를 경작해야 했던 농민들의 삶이 과연 이전 시대보다 얼만큼 나아진 것인지 되묻게 한다. 작년에 본 레프 도진의 연극 <형제자매들>이 다시 생각난다...  

 

한겨레(07. 05. 23)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 ⑤ 노동자와 농민의 삶

» 체르노빌의 노동자들. 사진/ I. 가브릴로프. <북폴리오> 제공
체르노빌의 노동자들 = 1986년 체르노빌이 폭발 사고로 황폐화된 지 8일이 지난 뒤 노동자들이 핵발전소의 파괴된 원자로에서 자신들을 밖으로 실어 나를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수습팀이 훈련도 받지 않고 허술한 얼굴 가리개만 쓴 채 체르노빌에 투입되었다. 방사능 수준이 너무 높아서 버스 운전사들은 발전소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고 했다. 수습팀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위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고향지역으로 돌아와 아파 드러누웠지만 연락이 잘 안 되어 지역 병원들은 자신들이 방사능 오염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 소년 피오네르들. <북폴리오> 제공
소년 피오네르들 = 이들은 “콜호스 수확의 최우수 전사”가 되어 부상으로 배지를 받았다. 당은 예전에 교회가 그랬듯이 아주 어린 아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볼가 강의 짐꾼들. <북폴리오> 제공
볼가 강의 짐꾼들 = 볼가 강의 짐꾼들이 차와 빵을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차는 각설탕에 적셔 빨아 마셨다. 전쟁 전 차르 시대의 기준에서 볼 때 음식과 신발이 형편없던 이들은 볼셰비키 체제하에서 이와 같은 배급품을 받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일인당 곡물 생산은 1960년대 중반에 이르도록 1913년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 바쿠 유전지대. <북폴리오> 제공
바쿠 유전지대 = 1933년에도 지금처럼 환경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스탈린은 외국 석유회사들이 이권을 착취하던 제1차 세계대전 전에 바쿠에서 볼셰비키 선동가로 활동했다. 이 나라의 거대한 석유 및 광물 자원은 당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이후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석유와 가스 생산국이 된다.

» 아버지와 아들. <북폴리오> 제공
아버지와 아들 = 러시아의 지방 거리에서. 지방에서는 달 표면처럼 어떤 사건이나 변화도 없었다. 봄이나 가을에 진흙을 피하려고 깔개를 깔았다. 여름에는 모든 행인들이 뒤에 작은 흙먼지 구름을 달고 다녔다. 겨울이면 거리는 온통 얼음투성이었다.

» 여성 농민. <북폴리오> 제공
여성 농민 = 경제가 붕괴하면서 식량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많은 여성들 중 한 명. “해방자”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1861년 농노를 해방했다. 70년 뒤 스탈린이 새로운 형태의 농노제를 도입했으며, 이에 따라 러시아 농촌 여성은 “노예의 딸, 노예의 어머니, 남편의 노예라는 삼중 노예 상태”의 전통적인 운명을 다시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집단농장의 점호. <북폴리오> 제공
집단농장의 점호 = 모스크바지역의 한 농장. 집단농장들이 과학적으로 경영되고 고도로 기계화되었다고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착취당하는 여성 농민들의 원시적인 힘에 의존했다.

» 낙천적인 러시아인들. 사진/F. 구바예프. <북폴리오> 제공
낙천적인 러시아인들 = 러시아인들이 결혼식 피로연에서 집에서 만든 보드카로 미래를 위해 건배하고 있다.

» 운하 노동자인 T. 벨리코바. <북폴리오> 제공

운하 노동자인 T. 벨리코바 =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말 백해 운하 프로젝트 현장에서 끔찍한 조건하에 일한 수많은 여성 노동자 중 한 명을 찍은 희귀한 사진이다. 발트 함대를 위해 운하를 설계했으나 함정이 통과하기에는 수심이 너무 얕았다.(<북폴리오> 제공)

07. 0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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