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 마지막 회이다. 20세기의 정치가들과 예술가들 편에 이어서 인민들(러시아어로는 '나로드'), 곧 노동자와 농민들의 삶이 사진에 담겼다. 대개 노동자/농민이라고 통칭하지만 사실 노동자와 농민의 이해관계는 같지 않다. 러시아 혁명에 힘을 합쳤지만 이후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주로 농민들이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한 일은 현실 사회주의에서 국유화된 토지를 경작해야 했던 농민들의 삶이 과연 이전 시대보다 얼만큼 나아진 것인지 되묻게 한다. 작년에 본 레프 도진의 연극 <형제자매들>이 다시 생각난다...
한겨레(07. 05. 23)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 ⑤ 노동자와 농민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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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르노빌의 노동자들. 사진/ I. 가브릴로프.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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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노동자들 = 1986년 체르노빌이 폭발 사고로 황폐화된 지 8일이 지난 뒤 노동자들이 핵발전소의 파괴된 원자로에서 자신들을 밖으로 실어 나를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수습팀이 훈련도 받지 않고 허술한 얼굴 가리개만 쓴 채 체르노빌에 투입되었다. 방사능 수준이 너무 높아서 버스 운전사들은 발전소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고 했다. 수습팀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위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고향지역으로 돌아와 아파 드러누웠지만 연락이 잘 안 되어 지역 병원들은 자신들이 방사능 오염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소년 피오네르들 = 이들은 “콜호스 수확의 최우수 전사”가 되어 부상으로 배지를 받았다. 당은 예전에 교회가 그랬듯이 아주 어린 아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볼가 강의 짐꾼들 = 볼가 강의 짐꾼들이 차와 빵을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차는 각설탕에 적셔 빨아 마셨다. 전쟁 전 차르 시대의 기준에서 볼 때 음식과 신발이 형편없던 이들은 볼셰비키 체제하에서 이와 같은 배급품을 받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일인당 곡물 생산은 1960년대 중반에 이르도록 1913년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바쿠 유전지대 = 1933년에도 지금처럼 환경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스탈린은 외국 석유회사들이 이권을 착취하던 제1차 세계대전 전에 바쿠에서 볼셰비키 선동가로 활동했다. 이 나라의 거대한 석유 및 광물 자원은 당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이후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석유와 가스 생산국이 된다.
아버지와 아들 = 러시아의 지방 거리에서. 지방에서는 달 표면처럼 어떤 사건이나 변화도 없었다. 봄이나 가을에 진흙을 피하려고 깔개를 깔았다. 여름에는 모든 행인들이 뒤에 작은 흙먼지 구름을 달고 다녔다. 겨울이면 거리는 온통 얼음투성이었다.
여성 농민 = 경제가 붕괴하면서 식량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많은 여성들 중 한 명. “해방자”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1861년 농노를 해방했다. 70년 뒤 스탈린이 새로운 형태의 농노제를 도입했으며, 이에 따라 러시아 농촌 여성은 “노예의 딸, 노예의 어머니, 남편의 노예라는 삼중 노예 상태”의 전통적인 운명을 다시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집단농장의 점호 = 모스크바지역의 한 농장. 집단농장들이 과학적으로 경영되고 고도로 기계화되었다고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착취당하는 여성 농민들의 원시적인 힘에 의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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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천적인 러시아인들. 사진/F. 구바예프.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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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적인 러시아인들 = 러시아인들이 결혼식 피로연에서 집에서 만든 보드카로 미래를 위해 건배하고 있다.
» 운하 노동자인 T. 벨리코바. <북폴리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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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 노동자인 T. 벨리코바 =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말 백해 운하 프로젝트 현장에서 끔찍한 조건하에 일한 수많은 여성 노동자 중 한 명을 찍은 희귀한 사진이다. 발트 함대를 위해 운하를 설계했으나 함정이 통과하기에는 수심이 너무 얕았다.(<북폴리오> 제공)
07. 05.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