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이스라엘 작가 에프라임 키숀의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마음산책, 2007)은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할 수 있는 책이다. 예전에 같은 제목으로 디자인하우스(1996)에서 출간된 바 있기 때문이다. <개를 위한 스테이크>(디자인하우스, 2001)가 작년말 마음산책에서 다시 출간된 데 이어 이번에는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가 말을 바꿔타게 된 것인데, 디자인하우스의 에프라임 키숀 판권을 마음산책에서 모두 인수한 모양이다.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개를 위한 스테이크>는 오래전에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수준에 맞아서가 아니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학원강사를 하던 시절, 초등학생들의 논술교재로 사용했기 때문. 그때 쓴 교재로 아직 기억에 남는 것이 로알드 달의 <마틸다>와 키숀의 <개를 위한 스테이크>이다. 한두 편씩 읽히고는 줄거리와 감상을 쓰게 한 것이 강사로서 내가 한 일이었다. 언젠가 적은 듯하지만, 고등학생들에겐 고종석의 <코드 훔치기>(마음산책, 2000)를 주로 복사해서 나누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 또한 마음산책에서 나온 책이로군.
이번에 판을 바꾸면서 몇 가지 교정을 가했다고 하니까 새로 구입하시는 분들이야 손해는 없을 듯하지만, 디자인하우스판을 갖고 있는 사람과는 무관한 얘기이다. 다만, 현대미술에 관한 도발적인 문제제기와 연관된 기사('전지현과 낸시 랭 누가 더 예술적인가')가 눈에 띄기에 콜라주를 해보았다.
한겨레(07. 04. 06) 현대미술은 사기다!
현대미술이여, 침을 뱉어라! 유치원생이 긁적거린 듯한 그림을 보며 고등교육을 받았음직한 사람이 꽤 심각한 표정으로 “모든 사람이 좋다고 하니까 필시 저 그림 뒤엔 뭔가가 있을 거야”라고 중얼거린다. 별로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 뒤엔 벽 밖에 없다. 당신은 지적 야바위꾼에게 ‘낚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전람회의 그림’은 관람객의 지적능력을 시험에 들게 하고 인내력의 극한을 체험하게 한 뒤, 이윽고 그 난해함 앞에 “꿇어!”라고 윽박지른다. 풍자가 아니면 자살이다. 조롱과 야유는 끝이 없다. 현대미술 앞에 무력한 개인은 뭔가를 통해 그 답답함과 모욕감을 털어내고 싶어 이를 박박 간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미술 마피아와 작가에게 업신여김 당하는 하나의 ‘오브제’일 뿐이니.
풍자소설 <개를 위한 스테이크>로 널리 알려진 에프라임 키숀은 이 책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를 통해 복잡하고 난해한 현대예술의 죄악에 대해 유쾌하게 까발리며 대중들에게 퍽(!) 쓸 만한 반격무기를 쥐어준다. 1996년 반성완 교수가 같은 이름으로 번역했던 이 책은 그 동안 절판돼, 소수의 알음알이 입소문을 타고 돌려보았다고 한다. 개인 블로그에서도 종종 “00도서관에서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를 드디어 빌렸다”라는 포스트를 볼 수도 있다. 11년만에 잘못된 부분은 바로잡고 잘 읽히게 손질했다고 한다.
피카소전을 보러 가면 그림보다 앞사람 뒤통수를 더 극사실적으로 감상할 만큼 붐비고 피카소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논술시험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저기 길모퉁이를 돌면 바로 피카소 미술학원이 보일 만큼 현대미술은 우리 삶 가까이 있다. 그렇지만 예술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술가 자신이 아니라 좌절된 지식인으로 구성된 작은 국제 마피아조직이라고 지은이는 힘줘 말한다.
그렇게 해서 유명해진 화가들은 엉터리 궁정광대가 되거나 아니면 기성 미술화단의 엉터리 어릿광대가 된다. 지은이는 파카소나 앤디 워홀, 마르셀 뒤샹 등을 앞 뒤 분간 못하는 유머리스트라고 못 박는다. “그들 작품의 오락적 가치를 인식해 마음껏 즐겨라. 실컷 웃음을 터뜨려라.” 이것이 지은이가 말하는 유쾌한 한마디다.
자, 이제 지적 사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마음껏 즐겨’ 보자. 앞의 것은 비평전문용어고 괄호 안은 실제의 예술대상이다. 자기도취적으로 끓어오르는 힘의 유희가 만들어낸 팽창하는 부드러운 구조(왼쪽 모서리의 갈색 얼룩), 리듬을 넣은 선의 아폴론적 완성(두개의 테두리 줄), 시대를 초월한 변용으로 인해 우주적으로 상승하는 세포(무 無), 멜로디의 과잉에 대한 시각적 거리두기로서의 미리 구성한 진테제(뒷면에 작가 사인이 있는 텅 빈 캔버스), 원형적인 비의와 키메라적인 비의의 나선적이고 유동적인 대립(다섯 개의 녹색 사각형), 태아에 근접하는 파괴계수의 폭발을 예고하는 기하학적이고 몽유병자적인 의식의 형태(부풀어 오른 콘돔).
재미있다면, 몰래카메라 얘기 하나 더. 텔레비전은 침팬지 두 마리가 물감으로 뭔가를 마구 그리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이 그림을 ‘제3세계 젊은 미개인전’에 출품한다. 교양있(는 척 하)는 관객들은 추임새 넣듯 주기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참석한 예술전문가들은 최대 찬사를 사용해가며 이 기발한 예술작품을 칭찬하는데 침이 마른다. <디 차이트>에는 “미로의 영향을 부인할 수 없지만 나는 만족과 존경심을 가지고 이 그림을 감상했다”는 평이 실린다. 함부르크 시립미술관장은 “젊음의 신선함과 패기,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작가는 최소한의 도구, 네 가지 색만 사용하는데 처음에는 파란 색만 쓰다가 대칭을 맞추기 위해 위와 아래에 빨간색을 칠했다. 완벽하다.” 몰카임을 알고나서 그들은 카메라를 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을까. 이 소동은 글자 그대로 미술관 옆 동물원이다.(손준현 기자)
컬처뉴스(07. 04. 04) 전지현과 낸시 랭 누가 더 예술적인가
낸시랭을 둘러싼 일련의 소동은 나에게 의아한 사건이었다. 처음에 낸시랭에 대한 언론보도를 봤을 때, 나는 무엇이 그를 “주목할 만한 차세대 예술가”로 비치도록 만드는 건지 정말 궁금했다. 그를 ‘특이한 예술가’라고 규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과문한 탓인지, 내 눈에 그의 행위예술이라는 것에서 그 어떤 ‘특이성’도 발견할 수 없었다. 작년에 그가 발간한 책을 읽어봐도 마찬가지였다. 뭐가 ‘도발적’이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도발적인 걸 꼽자면, 미국 유수대학의 의대생이었다가 플레이보이 잡지 모델이 된 이승희보다 못한 게 아닌가 싶었다. 현상의 측면에서 본다면, 낸시랭은 여러 모로 이승희를 닮았는데,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여성해방을 동일시하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진보적’이라는 언론이나 인사들이 의아할 정도로 그에게 친절한 것도 그랬다. 물론 다른 것도 있었다. 낸시랭은 이승희보다 더 노골적으로 돈을 밝혔는데, 해괴하게도, 한국 화폐가 아니라 ‘달러’만을 돈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래서 그는 “미술은 돈”이라고 말하지 않고 “미술은 달러”라고 말했다. 과연 여기에서 그는 피카소를 패러디하고 싶었을까? 모를 일이다. 다만 확실한 건 그에게 달러는 절대적 가치 또는 지고의 쾌락을 뜻하는 하나의 기호라는 사실이다.
내가 놀라웠던 건, 이런 낸시랭의 천방지축에 대해 거의 누구도 적절한 비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강명석이나 진중권 같은 이들이 낸시랭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긴 했지만, 모두 완곡한 태도로 “좀 더 지켜보자”는 수준에서 주춤한 것처럼 보인다. 무엇이 낸시랭에 대한 비판을 유보하도록 만드는 걸까? 어떤 수컷도 애교 떠는 암컷 앞에서 이빨을 드러낼 수 없다는 동물행동학의 논리를 적용해서 설명한다면, 의외로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다. 어떤 기자 말대로, “애교는 에너지”니까. (참으로 부끄럽지만, 이게 한국의 문화부 기자 수준이다) 그러나 이런 장난이나 치려고 내가 낸시랭을 들먹이고 있는 건 아니다. 정말 낸시랭에 무언가 있는 걸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렇게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낸시랭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본다.
만약 우리가 굳이 낸시랭을 ‘의미 있는 예술가’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이 지점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거다. 그의 작업은 확실히 “예술의 죽음”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세계사적 맥락에서 운위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원에서 그런 게 아니다. 그의 ‘예술’은 예술 따위가 필요 없는, 예술성 같은 건 물 말아 먹어도 시원찮아 할 세계를 드러낸다. 낸시랭에게 ‘예술’은 상품교환체계 속에서만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 낸시랭에게 중요한 건 예술이 아니라, 그 예술이 잘 팔려서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건 예술성이 아니라 “비즈니스 마인드”다. 그냥 쉽게 말하자면, 그에게 예술은 자본의 축적 수단이다. 상품이 되어버린 예술, 이걸 낸시랭은 “진짜 예술”이라고 부른다. 낸시랭은 확실히 예술의 죽음을 보여주는데, 그 죽음의 집행자는 자본주의다. 그러나 낸시랭은 예술의 죽음을 증언하고 이에 항의하는 게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자본주의에 ‘솔직하게’ 투항해버린다. 이런 솔직한 태도가 낸시랭에 대한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지점에서 여러 가지 곤혹스러운 사태가 발생하는 것 같다.
낸시랭에 대한 착시현상은 여러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황우석 사태와 유사한 맥락에서 낸시랭을 둘러싼 일련의 현상들 또한 ‘여론’에 약한 한국 지식사회의 포퓰리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더불어 돈과 쾌락에 대한 낸시랭의 태도는, “즐겨라!”라는 자본주의적 초자아의 명령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따라도 될 것 같은 해방감을 선사한다. 그런데 이는 결국 자본주의로부터 계속 쾌락을 얻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재확인하고 여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낸시랭은 충실한 자본의 전도사다. 왜 건담과 명품을 주제로 작품을 제작하는가 하는 질문에 낸시랭은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세상살이가 로봇의 차가운 갑옷처럼 강한 척 하고 살아야하는 거잖아요. 거기에 조합시키는 기생은 조선시대의 잔 다르크 같은 존재였다는 걸 부각시키고 싶어서예요. 아이의 얼굴을 붙인 건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사람의 모습을 대변하고 싶어서죠. 아,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평론가들의 말이에요. 저는 그냥 좋아하는 이미지들을 모은 거예요. 특히 명품요. I love 명품! 구찌를 특히 사랑하죠.”
낸시랭이 전하는 평론가들이 쏟아낸 그 말들이 민망하기 짝이 없는 건 둘째치고라도, 이 평론조차 ‘너무 심각하다’고, 자기는 아무 생각 없이 좋아하는 이미지를 그냥 모은 것뿐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낸시랭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그러나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낸시랭이 체현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에 내포되어 있는 본질적 특성이다. 자본주의는 원칙적으로 해방에 대한 요구를 내재하고 있고, 권위주의와 에고이즘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한다. 이런 맥락에서 ‘박애’같은 고통에 대한 반응을 도덕적 표준으로 등재하기도 한다. 한미FTA에 대한 현 정부의 집착도 이런 자본주의의 해체적 속성에서 자신의 ‘진보적’ 신념을 추인해줄 어떤 ‘실재의 응답’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한다.
낸시랭이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이런 자본주의의 ‘아방가르드적 특징’ 때문이다. 자본주의만큼 예술과 삶의 일치를 주장했던 아방가르드는 없었다. 현대 자본주의의 광고는 아방가르드적 감수성과 상업주의가 결합한 거다. 예술의 산업화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건 산업의 예술화다. 산업은 부르주아의 예술이고, 기계는 부르주아의 작품이다. 이렇게 자본주의 자체가 ‘예술’이 되어버린 상태, 다시 말해서 ‘예술 없는 자본주의’가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낸시랭은 보여주고 있는 거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바로 낸시랭에게 비극일 수밖에 없다.
모든 예술이 광고이고 상품이라면, 낸시랭과 전지현 중 누가 더 ‘예술적’이겠는가?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 같은 질문이다. 낸시랭을 가능하게 만든 그 조건은 낸시랭의 무가치함을 증명하는 역설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비평의 양심 같은 게 아직 남아 있다면, 이제 ‘이건 아니잖아’를 외칠 시간이 된 것 같다.(이택광_문화평론가)
07. 04. 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