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판 경향신문에서 옮겨온 연재이다. 문광훈 교수의 '천천히 사유하기'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인데, 문학/예술의 종언론이 횡행하는 시대에 아직도 문학/예술에 뭔가를 기대한다면 그건 '세계시민적 공동체'(혹은 '세계공화국')에 대한 기여 지분과 관련해서가 아닐까 싶다. 너무 점잖은 글이긴 하나 카스파 프리드리히의 그림도 구경할 겸 스크랩해놓는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얼음바다’(1823년경)는 얼음덩이 아래 가라앉은 배의 잔해를 보여준다. 칼날처럼 치솟은 얼음조각이 보여주듯, 인간의 노력은 자연의 위력 앞에 쉽게 좌초되고 만다. 그러나 가없는 수평선은 지금의 좌절이 한 때의 일일수도 있음을, 그리하여 더 나은 세계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국가적 단위 속에서 이 국가를 넘어 서로 교류하는 이상적 상태-세계시민적 공동체는 이 ‘더 나은 세계’의 한 예가 될지도 모른다.

경향신문(07. 06. 30) [천천히 사유하기]예술과 세계시민적 공동체

거창한 제목은 날 불편하게 한다. 그래서 망설이게 된다. 그러나 길을 가면서도 때로는 주위를 살펴야 하듯, 한 주제도 그 맥락을 고려할 때 온전해진다. 이 지면을 통해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다루건 그 밑에는 늘 심미적 경험의 가능성이 자리했지만, 예술의 좌표를 제대로 짚으려면 그 환경-내외적 현실조건을 살펴야 한다.

2007년 6월의 한국은 몹시 불안정해 보인다. 흔히 말하듯 그것은 지난 40여년에 걸친 압축성장의 결과겠지만, 그래서 그동안 억눌려온 많은 것들이 하나씩 곪아터져 나오는 까닭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더 길게 보면 우리 사회가 정상화되어 가는 징표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단계에서 간과되거나 희생되는 면을 어떻게 최소화하느냐일 것이다. 그러나 당장 치러야 할 소모와 낭비는 너무 커 보인다. 여전히 불안정한 부동산 가격이나 대선을 앞둔 정파들의 이전투구, 아이들의 지옥같은 학교생활, 가계부채의 증가는 그 몇가지 예일 뿐. 사람들의 눈빛은 우리가 전투하듯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고, 그 어깨는 누군가가 만든 대열 속에 이 다음의 전선으로 끌려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런 불안정은 나라 밖에도 있다.

전쟁과 테러, 미국의 일방주의, 국제기관의 무능, 불공정한 노동조건, 종교분쟁과 문화갈등, 그리고 환경오염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당면 문제는 어느 것 하나 간단치 않아 보인다. 다국적 자본은 후진국의 값싼 노동력으로 이윤을 늘리지만, 일하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정당한 몫을 나눠갖지 못한다. 이 불안은 물가상승과 구조조정으로 더 가중되고 있다. 모두가 불안하다면 중간층이라도 튼튼해야 하는데, 이들 역시 허약하다. 이런 상태에서 많은 잠재된 문제는 ‘불균등하게 작용할’ 공산이 크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U. Beck)은 새로운 유토피아-신자유적이거나 복고적이지 않은 ‘세계시민적인 좌파’가 필요하다고 최근에 말했다. 그에 의하면, 이전에는 권력의 획득이 유토피아의 포기로써 가능했다면, 이젠 유토피아의 포기란 곧 권력포기가 된다. 따라서 이 이상을 실행할 새로운 사회민주주의적 시대가 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독일 사민당 당수의 ‘사회적 세계화’를 언급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느 한편의 과제일 수는 없다. 그것이 진보정당이나 시민단체에서 더 본격적으로 논의되겠지만, 보수당이나 일반대중에게도 열려 있다면 더 나을 것이다.

물론 이런 개방성조차 변질될 수 있다. ‘구조조정’이나 ‘노동유연화’에서 드러나듯, 오늘날의 많은 언어는 원래의 함의를 잃어버렸다. 구조조정이란 이름 아래 이 땅의 비정규직은 노동인구의 절반을 넘어섰고, 힘겹게 쟁취한 노동권은 ‘개혁’의 기치 아래 다시 박탈되고 있다. ‘유연화’가 노동권과 인권을 얼마나 경색시키는 것인지 우리는 잘 안다. 위험사회적 조건은, 벡이 지적하듯 오늘날엔 국내외를 막론하고 더욱 철저히 실현되고 있다. 많은 사상적 종교적 문화적 가치들은, 정부의 것이건 민간단체나 세계기관의 것이건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다. 편재화된 ‘정당성 결손(Legitimationsdefizit)’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시작하여야 하는가? 예술의 방법은 무엇일까? 시를 읽고 그림을 보며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무엇보다 ‘느낀다’. 이전에는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 글로 쓰여 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지금껏 눈여겨보지 못한 것이 화면 위에 그려져 있음을 보게 되고, 무덤덤했던 가슴이 어떤 선율로 울렁댐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듯 어떤 건축물에서는 사람 사는 공간이 이렇게 구획되고 구성될 수도 있음을 새삼 겪는다. 예술은 그 나름으로 심정을 어루만지며 감각에 호소한다. 그것은 정서적 인습을 뒤흔들어 세계를 더 본래의 모습으로 느끼게 한다. 이런 감각적 진동은 사고의 변화로 이어진다. 심미적 경험은 삶의 넓이와 깊이를 다시 느끼게 한다.



예술경험에서 중심은 주체-자아-개인이고, 이 개인의 변화 가능성이다. 그것은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조용하고 미묘한 움직임이다. 예술에는 자연의 원형상(Urbild)-본래적 형식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형식은 지금의 많은 것이 화석으로 남을 거라고 말한다. 반대로 버림받는 어떤 것은 언젠가 존중될 것임을 알려준다. 생성의 맥락을 잇는 가운데 그것은 이미 비판적 이미지를 담는다. 예술과 만나면서 자아는 “섬세하게 조율된 영혼”(쉴러)으로 주형될 계기를 얻는 것이다. 이 계기는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것도 아니고, 강제로 해야 될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느끼는 한’ 하는, 느끼지 않으면 안 해도 되는 무엇이다. 심미적 각성은 철저히 개인의 의사에 맡겨진다. 이 점에서 도덕이나 윤리 또는 법률의 구속과는 다르다. 예술에서 나는 나 밖에 선다.

예나 지금이나 물질적 토대는 더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지식과 정보가 그렇듯이, 증가된 재화가 조화된 세계를 보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시대에서도 왜곡과 폭력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현실에의 항소가 멈출 수는 없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감각의 신선함이고, 이 신선함으로 유지되는 깨어있는 의식이다. 예술은 바로 이 신선함을 불러일으킨다. 예술에는 상투성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이다. 상투성이 타성의 반복이라면 예술은 타성의 경계를 넘어 경험의 배후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다시 물러나자. 예술의 새로움도 오늘날에는 대개 오염되어 있다. 시장과 자본의 개입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과 다르게 느낀다면 우리의 자유는 좀더 넓어지고, 새로 생각하는 만큼 더 깊어질 수도 있다. 이 에너지로 우리는 생활세계 안에서 조금 다르게-편견을 줄이고 거짓을 삼가며 서로를 더 배려할 수 있게 될까? 미시적 실천 속에서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예술은 자유와 자율, 그리고 관용을 연습하게 한다. 생기를 잃지 않은 영혼만이 부당함에도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나와 세계 사이에 조율된 심성이 있다면, 예술을 통한 이 길은 이렇듯 에둘러 있다.(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독문학)

07.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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