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의 최신작인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b, 2006)의 표제 강연문을 나는 이미 <문학동네>(2004년 겨울호) 버전으로 읽은 바 있지만, 저자 자신이 단행본에 수록하면서 전면적인 개정을 가했다고 하므로 다시 읽어봄 직하다는 생각에 제일 먼저 펼쳐놓는다. 원래는 2003년 10월, 고진이 몸담고 있던 긴키대학의 한 연속강연에서 행한 강의록인데, 출간을 위해서 꼼꼼하게 다시 가필을 한 듯하다.

재작년에 이 글이 번역/소개되면서 언론의 주목과 함께 문단에도 잠시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는데, 당시 한겨레 신문(2004. 11. 26)의 최재봉 기자는 '혁명을 팽개친... 문학은 끝장났다'라는 제목으로 그 내용을 정리/소개했었다. 새롭게 고진의 이야기를 따라가보기 전에 먼저 기사를 읽어본다(*를 한 코멘트와 강조는 나의 것이다).

-‘문학이 죽었다’는 말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오래 전에 확인된 사실이라는 뜻이 아니다. 문학의 의연한 생존을 확신하는 이들에게 그런 선언은 양치기 소년의 되풀이되는 거짓말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심지어는 문학의 죽음에 관한 풍문이야말로 거꾸로 문학의 생존 근거이자 양식이라는 주장조차 나오는 판이다. 그렇다면 문학은 살아 있는가. 여기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선언하는 글이 있다. <문학동네> 겨울호에 실린 일본의 문학평론가 겸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63)의 <근대문학의 종말>이 그것이다. 이 글은 지난해 10월 일본에서 행한 강연을 풀어 쓴 것이다.

 

 

 

 

-가라타니의 논리는 ‘문학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영구혁명중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주관성)’이라는 사르트르의 정의에서 출발한다. 쉽게 말하자면 정치가 감당하지 못하는 혁명의 핵심을 문학이 담당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해체적 비평과 포스트모던 문학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근대문학’은 이런 혁명적 역할을 담당했지만, 그것은 일본의 경우에 ‘1980년대에 끝났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미국은 더 일러서 1950년대로 시점이 올라간다.

(*)엄밀하게 말하면, 고진은 (가령 앨빈 커넌처럼) '문학의 죽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근대문학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근대문학'이란 (근대)소설과 동의어이다. "따라서 근대문학이 끝났다는 것은 소설 또는 소설가가 중요했던 시대가 끝났다"는 뜻이다. 그러한 소설/소설가의 전범으로 고진의 들고 있는 인물이 바로 그가 '근본적으로 소설가'라고 간주하는 사르트르이다. 그는 문학이 "영구혁명중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이라고 주장했던 것. 그런 (과잉)부담으로부터 문학이 자유로울 때, 그건 곧 (근대)문학의 죽음/종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고진이 보기에) 프랑스의 경우에는 1960년대 들어서 사르트르의 시대가 끝나고, '소설' 대신에 '에크리튀르' 같은 개념이 보급되면서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미국의 경우엔 1950년대이고, 일본의 경우엔 1980년대라는 것. 이러한 현상을 고진은 대중문화(텔레비전)의 보급/발달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 제도적 상관물은 대학에서 문예창작학과, 즉 문창과의 등장과 급증이다. 가령, 포크너는 작가가 되고 싶다면 사창가의 포주가 돼 보라고 권유했지만, 요즘에 등단하는 작가들은 사창가 출신들이 아니라 대개가 문창과 출신들인 것. 하지만, 정작 고진이 문학의 종언을 실감한 것은 한국의 경우를 목도하면서라고.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가라타니 고진은 지난 2000년 서울에서 열린 한 문학행사에 참석해 ‘일본에서 문학은 죽었다’고 발언해 충격을 준 바 있다. 그는 문학평론가인 자신이 평론을 그만둔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런 발언을 했던 것인데, 그러면서도 한국에서만은 문학의 역할이 점점 강해질 것이라고 전망해 대조를 보였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 그는 한국에서도, 미국이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문학은 끝장이 났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문학이 사소해졌다는 것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일본문학의 죽음에 대한 고진의 선언과 짝을 이루었던 것은 (문학이 아닌) '상품'으로서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브랜드의 세계화였다. 고진이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것은 90년대 이후 하루키는 한국 독자들도 열성적으로 읽기 시작했다는 사실. "한국에서는 문학의 역할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을 거라고" 예견했지만, 그건 오판이었던 것이다. 문학코너의 진열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하루키의 작품들을 이런 관점에서 다시 읽자면, '문학 상실의 시대', '문학의 유령', '문학의 저편', '문학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식이 될 것이다. 하루키로선 그게 별로 유감스러운 게 아닌데, 그에겐 문학 대신에 위스키가 있으며, 게다가 브래지어 위를 흐르는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이 있기 때문이다(하루키의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

 

 

 

 

(*)한국에서 문학의 급속한 쇠퇴는 1990년대 말에 일어나게 되는데, 그걸 징후적으로 드러내주는 작가는 김영하가 아닌가 싶다(그는 신경숙이나 윤대녕, 공지영 같은 '진지한' 작가들과 경향/유형을 달리하며 등장했다). '우리는 문학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 '나(문학)의 죽음을 알리지 말아다오', '엘리베이터에 낀 문학은 어떻게 되었나', '문학은 왜 (아직도 버티고 있나)' 등등. 문학의 죽음 이후의 문학? 그건 '포스트잇'으로서의 문학이며, '랄랄라 하우스'이다.

-가라타니는 문학은 자신에게 부여되는 지적·도덕적 요구를 감당할 수 있을 때만 문학으로서 존립할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러한 과제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진다면, 문학은 단지 오락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어떤 ‘문학’은 오락이 될 수도 있다. 그는 나아가 일본 만화처럼 세계적인 상품으로 팔리는 문학을 권장하기조차 한다. 다만, 거기에다 본디 의미의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말자는 것이다.

(*)고진의 표현을 빌자면, "문학으로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보이던 시대가 끝났다고 한다면,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소설을 쓴다는 것도 소설가라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소설가는 그저 직업적 직함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물론 여전히 1억원 고료, 5천만원 고료의 소설을 쓰는 일은 가능하다. 더불어 가능한 것은 소설가가 미국과 일본에서처럼 문창과 교수가 되고 문화센터의 강사가 되고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도 되는 일이다(잘 나가는 소설가에 국한된 일이긴 하지만). 그걸 '사회적 책임'으로 용인하는 태도가 가능하듯이. 하지만, '문학'이 윤리적/지적인 과제를 짊어지기 때문에 영향력을 갖는 시대는 기본적으로 끝났다. 그 잔영만이 있을 뿐이다, 라는 게 고진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고진의 말을 직접 옮기자면, "나는 작가에게 '문학'을 되찾으라고 말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또 작가가 오락작품을 쓰는 것을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열심히 잘 써서 세계적인 상품을 만을어 주시기 바랍니다.(*우리의 처지에서 보자면, '한류'에 한몫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화가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 그것이 가능한 작가는 미스터리계 등에 상당히 있습니다(*한국에서 팔리는 일본 소설의 경우를 고려해보면, 멜로계에도 상당히 있다). 한편, 순수문학이라고 칭하고 일본에서만 읽히는 통속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잘난 척을 해서는 안됩니다."

 

 

 

 

(*)즉, 작가가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 건지, 어떤 종류의 '문학'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고나 쓰라는 것이다. 지금의 시점에서는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이지만, 90년대 중반 <문학동네>의 창간은 한국문단에서 '문학의 종언'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기록됨 직하다. '창작과 비평'이니 '문학과 지성'이니 하는 '문학시대'의 거창한 타이틀을 그들은 내걸지 않았다(그들은 잘난 체하지 않았다). 그냥 '문학동네'이다. 그리고 성공했다. 그들은 변화된 시대에 걸맞는 문학이 무엇인지 감지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때문에 창간 10주년이 되는 해에 게재된 고진의 평문 '근대문학의 종말'은 일면 '문학동네'의 뒤늦은 마니페스토로도 읽힌다. 문학동네 여러분, 열심히 잘 써서 세계적인 상품을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본디 의미의 문학에 충실한 사례로서 그는 역설적이게도 ‘문학을 그만둔’ 두 사람의 사례를 든다. 부커상 수상작인 <작은 것들의 신>의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 그리고 <녹색평론> 발행인인 ‘전직’ 평론가 김종철씨가 그들이다. “위기의 시대에 한가롭게 소설 따위를 쓸 수는 없다”는 로이,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문학이 지극히 협소한 것만 다루게 되었”기 때문에 문학을 그만두었다는 김종철씨야말로 “‘문학’을 정통적으로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반대로, “순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밖에는 읽히지 못할 통속적인 작품을 쓰고 있는 작가”나 “그 존재가 문학의 죽음을 역력하게 증명할 뿐인 패거리”는 문학의 생존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 그는 일갈한다. 그는 “역사적 이념도 지적·도덕적인 내용도 없이 공허한 형식적 게임에 목숨을 거는” ‘일본적 스노비즘’이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면서 “문학을 떠나서 생각하라”고 결론 삼아 제안한다.(*기사는 여기까지이다.)

 

 

 

 

(*)먼저, 로이 이야기: "그녀는 처녀작으로 (부커)상을 받은 후, 소설은 쓰지 않고 인도에서 댐건설 반대운동, 반전운동 등으로 분주합니다. 발표하는 저작도 그런 종류의 에세이뿐입니다. 구미에서 인기를 얻은 인도 작가는 아메리카나 영국으로 이주하여 화려한 문단생활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왜 소설을 쓰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로이는 자신은 소설가이기 때문에 소설을 쓰지는 않는다, 쓸 것이 있을 때만 쓰며, 이런 위기의 시대에 무사태평하게 소설 따위를 쓰고 있을 수는 없다는 식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로이의 언동은 문학이 책임지고 있던 사회적 역할이 끝났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김종철 이야기: "김종철이라는 고명한 문학비평가는 문학을 그만두고 생태운동을 시작하며, <녹색평론>이라는 잡지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할까봐 하는 말이지만, 그는 최근도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을 읽었는데, 이번이 네번째라고 말하는 타입의 인물입니다(*즉 대단한 문학애호가라는 것). 나는 왜 문학을 그만 두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동감을 표했습니다."

(*)문학비평가 김종철의 경우를 사례로 제시하기 이전에 고진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한국에서의 학생운동이다. 노동운동이 탄압받던 독재시대에 강렬한 정치운동으로서의 역량을 보여주었언 한국에서의  학생운동도 실제의 정치운동,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자연스레 종언을 고하지 않았느냐고(물론 이건 고진의 탁견이 아니라 그냥 상식이다). "한국에서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것은 그것이 노동운동이 불가능한 시대, 일반적으로 정치운동이 불가능한 시대의 대리적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정치운동이나 노동운동이 가능하게 되면, 학생운동은 쇠퇴하기 마련입니다. 문학도 그것과 닮았습니다. 실제 한국에서 문학은 학생운동과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학이 모든 것을 떠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시대가 지나갔고, (문학으로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적어도 현저하게).

(*)이미 대학의 총학생회가 비운동권에 의해 장악되고 있다는 건 뉴스거리도 되지 않지만, 투표율 저조로 투표기간을 연장하면서까지 겨우겨우 당선자를 낸 올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당선된 이는 노골적으로 反운동권을 표방하고 나선 '30대 인디밴드 가수'였다('학생운동의 종언'이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동아일보(06. 04. 15)의 분석기사는 이렇다. 강조는 나의 것이다.

 

-대학 총학생회(총학)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12일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된 황라열(30) 씨의 독특한 이력이 알려진 뒤부터다. 현실적인 공약을 내세운 인디밴드 가수 출신의 황 씨는 거대담론을 외쳤던 운동권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탈(脫)이념’ 현상 가속화=이번 서울대 총학 선거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대학 총학 선거에서도 비운동권 출신 후보가 당선됐다. 이는 몇 년 전부터 급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한 ‘탈이념’ 현상이 갈수록 강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각 대학의 동아리들도 대체로 이 같은 현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치적, 이념적 이슈보다는 학교생활이나 취업 등과 관련된 학내 활동에 학생들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 여기에 특히 올해 들어 두드러진 현상은 총학 구성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총학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도가 급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대 총학은 지난해 11월 ‘총학 선거에서 투표율이 50%를 넘겨야 한다’는 규정에 걸려 구성이 무산됐다. 이후 이달 4일부터 재선거를 한 뒤 투표 기간과 시간까지 연장하면서 결국 최종 투표율 50.6%로 가까스로 구성됐다. 고려대 총학도 지난해 투표율 저조로 총학 선거가 무산되자 재선거를 하고서야 투표율이 커트라인을 통과한 경우다. 52.7%라는 투표율 역시 학교 측에서 투표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병설 보건대 2, 3학년생 표를 제외하면 51.1%로 떨어진다. 서울시립대와 동국대의 경우 지난해 저조한 투표율로 총학 선거가 무산돼 총학 없이 1년을 보낸 바 있다. 이에 대해 “학생들이 이념 추구든 현실적 공약이든 총학 선거 자체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黃相旻) 교수는 “학생들이 자신의 정치적 관심사와 개별 사안에 따라 ‘∼빠’, ‘∼안티’ 등의 형태로 자신의 주장을 펴고 있다”며 “자기 관심사에 따라 조직하고 어울리는 대학생들이 굳이 총학 조직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대학 학생회, 대안 찾기에 나섰지만…=이에 따라 아직 뚜렷한 지향점은 없지만 일부에서는 운동권도, 비운동권도 아닌 ‘제3의 대안’을 찾자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2001년 이후 ‘명예혁명’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비운동권을 자처한 한양대의 경우 5년째 총학을 이어가고 있다. 이 대학 총학생회장인 신재웅(23) 씨는 “당초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에 대항하며 비운동권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운동권도 비운동권도 아니다”라며 “기존 학생회의 신뢰를 바탕으로 사회봉사, 학내 복지 개선 활동 등이 학생들의 지지를 받는 주요 요소”라고 설명했다.

 

-건국대 손석호(26) 총학 집행위원장은 “학생운동 1세대가 정치투쟁이 목적이었다면 2세대는 학내 문제에 집중했다”며 “이제 3세대 학생회는 학생들과 소통하고 학내 문제를 해결한 뒤 학생들과 관련된 정치 문제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송호근(宋虎根) 교수는 “투표율은 떨어지고 선거 형태도 다양해지는 것은 자기 계발, 개성을 형성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요즘 학생들의 특성이 집단운동 형태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라며 “소집단과 집단운동의 정체성이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날씨도 궂은 날이지만, 대학가에서는 (오늘) 4.19 기념행사도 대거 취소하거나 축소하고 있는 형편이라고(중간고사 기간과 겹치기 때문에!).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은 지난 17일부터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등록금 동결 등의 이슈르 내세우며 단식농성중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런 게 대학가의 현실이다. 요는 정치와 정치참여 방식이 변화된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으며, 예전과 같은 학생운동은 더이상 그러한 시대의 주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건 문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근대문학은 끝났다." 이건 오버가 아니다.

한국문학의 경우 4.19세대와 함께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했어야 하지만, (일본과 달리) 얼마간 연장된 것은 학생운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80년 광주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80년대 한국문학은 '위대한' 문학이다. 이건 그 문학의 퀄리티와는 다소 무관하다. 문학의 위대함은 문학성과 같은 내적 자질이나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의 '외부'에 의해 규정된다. 시대가 위대한 인물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시대는 위대한 문학을 요청한다. 이런 시대에는 문학에 '과부하'가 걸린다. 우리의 80년대가 그러했다.

 

 

 

 

역설적인 것은 그러한 '과부하'로부터 도망가는 문학까지도 위대함의 아우라를 나눠갖는다는 점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문학시대'의 마지막 비평가라 할 고 김현(1942-1990)의 비평이 위대했다고 생각한다(그는 자신이 생의 마지막까지 4.19세대로서 사고하고 글을 썼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적 요구에 복무하는 문학에 맞서 문학의 자율성을 끝까지 옹호하고자 했지만, 그러한 긴장관계 바깥의 '통속적인' 문학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자신의 문학주의적 태도를 '식물성의 저항'으로 요약하고 있는 작가 이인성도 그의 문학적 성취와 무관하게 대단한 작가이다. '낯선 문학 속으로', '문학의 한없이 낮은 숨결', '마지막 문학의 상상' 등이 그가 문학시대, 더 구체적으로는 '정치운동으로서의 문학시대'에 고집스레 지켜내고자 했던 것이었다. 이인성의 소설들이 맥이 풀리게 되는 것은 90년대 접어들면서 문학에 대한 시대적, 정치적 과부하가 더이상 걸리지 않게 되면서부터이다. '미쳐버리고 싶은' 시대, 하지만 '미쳐지지 않는' 시대에, 그의 문학은 그냥 '강 어귀에 섬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그와는 대비되는 것이 80년대의 대표작가에서 <그 섬에 가고 싶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시나리오 작가/조감독을 거치면서 영화계에 입문하게 되는 이창동이다. 그는 문학의 시대가 곧 물건너간다는 걸 예감했던 것일까?(최근의 사례로는 역시나 작가에서 영화감독으로 변신한 재중 감독 장률이 있다.)

 

 

 

 

고진에 따르면, 과거 네이션 형성에 기반이 되었던 근대소설은 더 이상 그러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 해서,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면, 소설을 쓰는 것보다 영화를 만드는 쪽이 빠르겠죠. 혹은 만화가 좋을 것입니다. 요컨대, 활자문화가 아니라, 시청각으로 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쪽이 대중이 접근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라고 충고한다. 가령, 새로운 시대의 도스토예프스키를 이젠 영화나 만화에서나 기대해볼 수 있다는 게 억측만은 아닌 것. 만화를 좀 아는 지인은 우라사와 나오키,  미우라 켄타로, 후루야 미노루 등을 내게 권했다(일찍이 루카치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단 한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고 공언한 바 있으니, 그는 소설의 언어로 만화를 그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만화의 시대인가?(물론 올해는 축구의 해이지만.)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의 문제가 문학이나 소설의 차원에서만 사고될 수 없으며, 그렇게 돼서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문학이나 소설만을 생각하면 잘 이해되지 않으며 의미도 없습니다. 원래 근대라는 개념만 해도 매우 불명료한 개념입니다. 그래서 근대비판이나 포스트모던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더욱 불명료해질 뿐입니다. 이런 문제는 세계자본주의의 전개 속에서 사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66쪽) 하지만, 그의 사고를 따라가는 건 다음으로 미루어야겠다. 분량상/시간상 '근대문학의 종언'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한다.

06. 04.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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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4-18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아룬타티 로이나 김종철의 태도가 방관자의 태도(더러운 거 몸에 묻히고 싶지않은)처럼 보입니다. 문학이야말로 "협소"한 것들의 설왕설래는 아닌지... 김영하의 경우 오히려 저홀로 발랄해지려는 게 안쓰러울때도 있습니다. [검은꽃]은 그이의 "발광"이었다는 생각이...

로쟈 2006-04-19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관자적 태도'라는 건 좀 모호한 표현 아닐까요? 두 사람 다 문학에 기대했던 사회적 역할이 막혀버리자 다른 방식으로 개입하고자 하는 것인 텐데요. 더불어, '협소한 것들의 설왕설래'라는 건 문학 이후의 문학 아닐까요? 역사적으로 문학이 대단했던 시대가 있었고(문학이 잘 나서가 아니라 다만 시대적 조건이 그러한 문학을 요구했었던 것이지만), 다만 그 시대가 이제는 '과거'라는 게 문학종말론의 요지입니다...

twoshot 2006-04-19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관자의 태도'가 모호한 표현이긴 합니다. 헌데 제가 보기에 아룬다티 로이나 김종철이나(저 '녹색문학'으로 가버린) 어째 '문학'을 떠나버린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투철함'을 비하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정치적으로 저도 충분히 동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사소함'들을 애써 '괄호'치려는 것처럼 보일때가 있었습니다.

로쟈 2006-04-19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떠나버린 사람'처럼'이 아니라 (잠정적으로라도) 떠난 사람들 아닌가요? 그리고, 그들이 반대하는 것은, 더불어 고진이 문제삼는 것은 문학의 사소화, 오락화이구요(그에 대한 호오를 떠나서)...

twoshot 2006-04-19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횡설수설한 김에 마저 적겠습니다. 문학의 종언이다...그렇다면 영화도 마찬가지..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시대가 다시 오지않을 것 같은 것처럼 타르코프스키나 베리만의 시대도 끝났다..는 식의 표현은 그저 탄식이나 안타까움으로 충분하다는 거죠.고진이 " 한국에서도, 미국이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문학은 끝장이 났다는 견해를 내놓"았다고 하는데(여기서 제가 꼬였습니다) 이런 표현은 그저 오만으로만 보입니다. 그 사람 한국말 할 줄아나요? 그럼 한국문학은? 한국문학에 대한 상찬은 그럼 그저 '주례사'였던건가요? 무슨 '종언'을 말할 게 아니라 누구처럼 꾸준히 '월평'을 쓰는게 더 생산적으로 보입니다.

yoonta 2006-04-19 0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진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문학이 "자신에게 부여되는 지적·도덕적 요구를 감당할 수 있을 때만 문학으로서 존립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2000년대 작가?는 바로 귀여니가 아닐까요? ..그의 글들을 보면 정말 저게 문학인지 일기장인지 혼동스럽죠..
그런데 제가 궁금한게 뭐냐면 문학이 죽었다면 그 이후에 나오는 글들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오락거리로서 심심풀이로서 기능하는 문학이 (근대)문학이 아니라면 그러한 (근대)문학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고 하더라도 문학이라는 자기표현행위자체가 아예 사라지지는 않을것이라는 점에서 문학은 "죽었다"기 보다는 단지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일 뿐이라고 보는게 정확하지 않을까요? 때문에 문학의 사회적 문화적 기능이 변화되는 것일 뿐인데 그것을 보고 "문학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좀 오바스럽다는 생각이 드네요..비록 그가 문학종말론을 이야기함으로써 강조하고자하는 "시대의 변화"에 대해 상당부분 동의하긴 하지만요.
그리고 앞으로 김영하나 하루키나 귀여니같은 작가들이 점점 더 늘고 문학의 주류로 자리잡는다고 하더라도 사르트르와 같은 글쓰기를 하는 사람도 여전히 존재하리라고 봅니다. 물론 그처럼 사회적 대중적 파급력을 발휘하지는 못하더라도요.

p.s.아참 그리고 한가지 제안을 드리면 페이퍼를 읽을때 로쟈님 코멘트와 인용글이 혼동될때가 많거든요? 두가지를 글자체를 달리하던가 색을 바꿔서 써주시는게 어떨까요?..로쟈님글을 즐겨보는 애독자로서 종종느끼는 불편함이 있어 한번 말씀드려봅니다. ^^

로쟈 2006-04-19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분 다 문학에 대해서 '진지한' 태도를 견지하고 계시군요. 이미 철학의 종말, 역사의 종말, 인간의 종말까지 다 유행담론처럼 지나가 버린 상황에서 '문학의 종말' 정도 언급되는 게 기이할 것도 없지 않을까요? 문학의 시대-영화의 시대-TV의 시대-멀티미디어 시대-모바일시대(?) 등으로 이행해가고 있다는 게 억지일까요? 보다 자세한 제 의견은 본문에서 개진하겠습니다.

yoonta님/ 불편을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한데, 인용과 코멘트에 대한 제 구분은 (-)와 (*)입니다. 최소한의 구분이지만, 눈에는 띄게 해놓고 있습니다. 글에 칼라는 입히는 건 제가 좋아하지 않는 일이라...

그리고, "제가 궁금한게 뭐냐면 문학이 죽었다면 그 이후에 나오는 글들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오락거리로서 심심풀이로서 기능하는 문학이 (근대)문학이 아니라면 그러한 (근대)문학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고 하더라도 문학이라는 자기표현행위자체가 아예 사라지지는 않을것이라는 점에서 문학은 "죽었다"기 보다는 단지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일 뿐이라고 보는게 정확하지 않을까요?"라고 하신 건 고진의 주장과 배치되지 않습니다. 고진이 말하는 건 '정치운동으로서의 근대문학의 종언'일 뿐이니까. 덧붙이지면, 그 종언 이후의 '오락거리로서, 심심풀이로서 기능하는 문학'이 이전의 후광을 자기것인 양 잘난 체하지 말라는 것뿐입니다...

니브리티 2006-04-19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진이 잘난체 하지 마라! 라고 말했다면 아마 하루키는 꼰대의 훈계 정도로 흘려버리지 싶네요. 같은 맥락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진정성의 소비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어요. 다만 그것이 적어도 두 가지 다른 제스처(이미 죽은 근대문학식 제스처vs쿨한 제스처)의 형태로 나타날 뿐이지 둘 모두 '삶의 진정성'을 옹호하긴 마찬가지죠. 근데 그들이 옹호하는 '삶의 진정성'이라는 것이 사실 허구라면? 아니 그들이 말하는 진정성이 사실은 발화와 동시에 소비되는 방식(그러나 문화적 축적과 성장이라는 생산적 소비양식으로서의 소비)일 뿐이라면... 말이죠.

니브리티 2006-04-19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로쟈님 지인께서 권한 만화는 그 세계의 입문용으로 꽤 괜찮아 보이네요. 세 명 모두 일정정도의 꽤 큰 범위의 매니아를 거느리고 있죠. 요즘 저는 <충사>라는 만화를 다른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기생수>나 <에덴>같은 중급고전들도 대단한 포스를 가지고 있죠. 만화의 세계는 정말 무궁무진해요...^^

로쟈 2006-04-19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브리티님마저 무궁무진한 만화의 세계에 빠져계시다면, '근대문학의 종언'은 그냥 사실 확인 정도의 의미만 갖겠습니다(아무런 센세이션 없이).^^ 제가 고진에게 공감하는 것은 제스처나 진정성의 문제가 아닌 객관적 정세(=역사성)에 근거하고 있어서입니다. 저는 그게 고진의 파워라고 생각합니다.

사량 2006-04-19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플랭카드... 어이없네요. '탈이념'이란 게 몰상식, 몰염치, 무례 등등과 같은 뜻일까요.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혐오가 요즘에는 너무 지나치지 않나 싶어요. 대학에서든 인터넷에서든 비아냥거릴 수 있는 자유도 사실 어느 날 하늘에서 문득 떨어졌던 게 아닌데 말입니다.

로쟈 2006-04-20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연대에 정치가 '현실'이었던 만큼 요즘의 反정치, 혹은 '다른 정치'도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80년대 문학과 2000년대 문학이 다른 것처럼...(그리고 플랜카드가 걸린 곳은 고대 같은데, 일부 총학 학생들의 점거농성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들이 출교' 처분을 받았다고 뉴스에 크게 뜨는군요. 교권을 무시했다고.)

니브리티 2006-04-19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문학하는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는 경우가 있어요. 특히 서사적 틀 안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영상매체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안(그렇지만 그 불안이 어떤 경로로 유포된 것인지는 뻔히 보이는 그런 것)과 불만 말이죠. 그런데 들뢰즈가 영화와 철학을 함께 펼쳐낼 때 저는 거기서 어떤 장르적 우위나 우월감을 보지 못했습니다. 만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정말 고진이 정세판단을 했다면 문학의 종언이 아니라 근대의 종언이었겠죠. 학부에서 사학을 전공했었는데 거기서 배운 것이라곤 역사=진실이라는 등식의 허구였습니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실망)과 주관적 보상을 넘어선, 진리라고만 말할 수 없는 어떤 근본에 대한 강력한 주장 같은 것을 저는 믿습니다. 아직 그의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판단컨대 고진이 말하는 <근대문학의 종언>은 <문학의 죽음>이 아니라 '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혁명을 해 본적도 없는데 혁명의 시대가 가버렸다는 말이 씁쓸하게 들리는 것만큼이나, 제가 종언을 선언으로 읽고자 하는 저를 문학근본주의자로 이끌고 갈 수도 있고 그에 따라 끌려가고 싶기도 하는 욕망을, 또한 부인하지는 않지만... 이라고 써놓고보니 대책없는 낭만주의자로 보이는군용...ㅜ.ㅜ

로쟈 2006-04-20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직접 읽어보시는 편이 빠를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브리핑'은 얼마간 축약하고 단순화시키니까요. 고진의 주장은 특정한 한 종류의 문학, 하지만 역사적 근대에 지배적이었던 그 문학이 종언을 고했다는 것이므로, 문학 일반의 죽음과는 무관합니다. 물론 그때의 '문학'이 일반적으로는 '근대문학'을 가리키는 것이었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그리고, 이때의 종언은 애도할 만한 것이긴 하지만, 비관적인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문학이 해오던 것을 영화니 만화니 뭐니 하는 다른 영역, 다른 매체가 대신한다고 해서 크게 억울하거나 분할 것은 없다고 봅니다(물론 그때도 어떤 영화인가, 만화인가가 문제가 되겠죠. '통속적인' 영화/만화를 우리가 위대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영화하는 친구들의 오해처럼). '늙으면 죽어야지'란 속된 표현도 있는데, 현장에선 뛰기엔 (근대)문학은 충분히 늙었습니다. 지금 교태를 부리며 번성하는 건 다른 문학이죠. 아직 '잔영'으로 일부 남아있는 근대문학, 즉 '정치'나 '종교'로서의 문학을 약간 빼면...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고진이 말하는 근대문학은 '문학은 위대하다' '문학은 전부다'라고 말할 때의 그 문학입니다. 요즘은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학이 뭐 별거나' 아니면, '고게 좀 재미있네, 귀엽네' 수준이죠. 후자를 전자와 동일시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나어릴때 2006-04-22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어려워라. 저는 조용히 추천하고 퍼갑니다. 늘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