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백야

'라캉'으로 검색을 하니 제일 먼저 뜨는 기사가 이번주에 개봉하는 영화 <카페 느와르>에 대한 소개평이다. 안 그래도 뒤늦은 개봉 소식을 접하고 한번 보고 싶던 차였다(지난주에 언론시사회가 있었고, 오늘은 VIP시사회가 열렸다고 한다). 이 참에 스크랩해놓는다.      

무비스트(10. 12. 27) 영화를 통해 완성된 책의 리얼리즘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감독으로 데뷔를 했다? 아마도 많은 평론가들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영화를 만드는 일일 테지만, 동시에 가장 부담스러운 일도 영화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과거 프랑소와 트뤼포 감독은 이런 얘기를 했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방법은 영화를 평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아마도 평론가 정성일은 그런 이유로 감독이 되었고, <카페 느와르>를 만들었을 것이다.

중학교 음악교사인 영수(신하균)는 같은 학교 선생인 미연(김혜나)과 연인이다. 하지만 학부모인 또 다른 미연(문정희)과 첫눈에 반해 사랑을 시작한다. 둘의 불륜이 계속되던 어느 날, 영수는 학부모 미연으로부터 이별을 통보받는다.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는 영수는 학부모 미연의 남편을 죽이려고도 하지만 결국 미연을 놓아준다. 실의에 빠져 청계천을 걷던 영수는 우연힌 선화(정유미)를 구해주고 선화의 사랑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선화로부터 자신을 사랑하지 말라는 당부를 받는다. 선화와 선화의 옛 사랑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게 된 영수는 선물을 배달하는 퀵 서비스 여인 은하(요조-신수진)로부터 자신에게 배달된 선물을 전해 받는다.

<카페 느와르>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연인이 있는 남자가 불륜을 저지르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을 모두 잃고 외로워한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정리를 하면 영화는 TV 통속극처럼 간단해 진다. 하지만 <카페 느와르>는 3시간 18분에 이르는 긴 러닝타임을 지니고 있다. 짐작했겠지만 영화는 단순히 내용을 전달하는 데에만 급급하지 않는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한 명의 여자를 찾아 헤매는 영수를 중심으로 익숙하지만 낯선, 서울이라는 공간을 끊임없이 돌아다닌다. 또한 대사는 구어체가 아닌 문어체로 이루어져 있고, 지나간 사랑 이야기는 엄청나게 긴 대사량으로 처리되기도 한다. 분명 <카페 느와르>는 지금까지 우리가 봐 온 영화들과는 스타일이나 의미 전달 방법에서 다른 길을 택했다. 굉장히 낯설지만 그렇기 때문에 흥미롭다.  



우선 이 영화가 선택한 가장 핵심적인 정체성은 책이다. 영화의 중심 이야기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백야’와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들이 모두 이 책들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게다가 대화법 역시 책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문어체로 이루어져 있다. 정성일 감독은 ‘책의 리얼리즘’이라는 말로 이들의 ‘사실성’에 대해 얘기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가 완벽히 책의 모습을 하고 있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접근법에는 약간의 의문도 있다. 과연 책을 읽지 않은 이들에게 이들의 행위는 어떻게 ‘읽힐’ 것인가? 마치 영화를 볼 수 있는 자격 조건을 제시한 듯한 뉘앙스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외에도 <카페 느와르>는 다양한 영화들의 인용으로도 관심이 간다. 아예 대놓고 장면과 대사를 따온 <극장전>부터 <괴물>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행복> 등의 우리 영화가 여러 방식으로 인용된다. 또한 브레히트, 체호프, 라캉 등은 물론 고다르, 오즈 야스지로 등의 고전 영화감독들의 스타일도 묻어난다. 저 장면은 어느 영화의 어떤 장면! 이라고 똑 부러지게 밝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영화를 즐겨온 이들에게 <카페 느와르>의 장면 장면들은 남다른 재미를 준다. 게다가 그 장면들이 서울이라는 지독하게 낯익은 공간에서 느껴지는 특별함이라는 점에서 생각할 바를 준다.

정성일 감독은 영화의 길이에 대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인용하며 “죽음을 늦추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백야’를 가져왔고, 덕분에 베르테르는 죽음을 조금 더 연기했다. 영화가 6시간, 8시간이었다면 그 죽음은 조금 더 연기됐을 거다. 하지만 사랑과 죽음이라는 근본적인 설정은, 설정 그 자체로는 한계가 보이기도 한다. 하여 정성일 감독은 이러한 태생적인 설정을 현실에 대입하기도 한다. 우리 시대가 우리에게 가져온 죽은 시간들, 변화된 모습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됐던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현실은 또 다른 ‘극사실주의’를 드러낸다. 책의 리얼리즘은 영화를 관통하며 삶의 리얼리즘으로 변모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 감독으로서의 정성일이 얼마나 드러났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영화에 드러나 많은 가치와 의도가 선배 영화인들, 고전 감독들이 만들어놓은 토대에서 그들을 인용하거나 거부하거나 비웃기도 한다. 영화를 향한 순수한 예술적 접근이 한 영화광으로 하여금 영화를 만들게 했고, 그것이 <카페 느와르>라는 결과물을 낳았다면, 정성일은 감독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아직 드러내지 않은 셈이다. 그의 말대로 두 번째 영화가 만들어졌을 때, 감독 정성일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다.(김도형기자)  

10. 12. 27.   

P.S. 지난주에 읽은 감독 인터뷰기사도 옮겨놓는다. '세계문학전집'을 차례로 영화화하고 싶으며 다음 영화로 <마담 보바리>를 지목한 것이 인상적이다(의외로 '소박한' 야심 아닌가?). 전집이라! 그는 몇 편까지 찍어볼 생각인지 궁금하다...

 

경향신문(10. 12. 23) “수많은 예술 도둑질한 영화, 이제 문학과 우정 나눠야죠”

한국에서 누구보다 많이 영화를 사랑하고 보고 글을 쓴 평론가 정성일. 그가 지천명에 접어들어 내놓은 장편 데뷔작 <카페 느와르>는 놀랍게도 책을 위한 헌사다. 이 영화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를 원작으로 한다. 영화 도입부엔 ‘세계소년소녀 교양문학전집’이라는 부제가 나오고, 등장 인물들은 해외문학 번역서에서 뽑아낸 듯한 문어체 대사를 읊는다.

정성일 감독은 “책의 문자들이 배우들의 육신을 통과해서 어떻게 피와 살을 얻고 말하여지는지, 어떤 방식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지 보고 듣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는 “책을 찍고 싶었다”며 이 영화가 ‘책의 리얼리즘’을 구현한다고 말했다.

“영화는 종합예술입니다. 그 이유는 영화가 오랫동안 수많은 예술들을 도둑질했기 때문이지요. 이제 도둑질한 재산을 두고 우정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카페 느와르>는 문학에 대한 영화의 우정입니다.” 

 

<카페 느와르>는 초등학교 음악 교사인 영수(신하균)의 이야기다. 그는 같은 학교 교사 미연(김혜나)과 연인이지만, 같은 이름의 학부모 미연(문정희)과 불륜에 빠진다. 결국 학부모 미연은 이별을 선언하고, 괴로워하던 영수는 우연히 선화(정유미)를 만나 호감을 느낀다. 전반부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후반부는 <백야>에 기초했다. 상영시간은 3시간18분이다.

그가 오랫동안 영화를 보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부딪힌 가장 큰 문제는 “(영화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올해 흥행한 몇 편의 영화를 예로 들며 “그 얘기가 말이 되느냐”고 되물었다. 결국 믿을 만한 얘기가 어디있는지 고민한 끝에 100년 이상 버티면서 읽히고 또 읽힌 이야기는 믿을 만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왜 하필 괴테와 도스토예프스키인가. 그는 길게 설명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처음 읽은 건 12살 때였습니다. 아무도 제게 그 책이 권총 자살로 끝난다는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너무 충격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폭력영화를 본 독자에겐 놀랍지 않겠지만, 제가 그 책을 읽은 건 60년대였다는 사실을 환기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무수한 죽음을 보았습니다. 80~9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에선 죽어도 너무 많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살아남았고요. 저는 어떤 사람을 ‘열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저항감이 있습니다. 죽음을 기려서는 안됩니다. ‘죽으면 안돼’라고 외치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영화로 옮기기로 결심했지만 베르테르의 죽음만은 막고 싶었다. 괴테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도스토예프스키라면 막지는 못할망정 연기시킬 수는 있지 않을까. 영화가 늘어난 것은 그 때문이다. 베르테르의 자살을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카페 느와르>에는 책만 나오는 건 아니다. <극장전>, <괴물>, <올드보이> 등 동시대 한국영화, <빨간 풍선>, <주말> 등 해외 고전영화가 인용된다. 정 감독은 최근 자신이 낸 책 제목이기도 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고 그 이유를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올드보이>의 최민식이 망치로 내려치다가 너무 힘들어 한강에 놀러나와요. 그러면 <괴물>의 송강호가 있는 매점에 오는 거예요. 아이 잃은 <밀양>의 전도연과 아이를 지키려는 <마더>의 김혜자가 나란히 앉는 거예요. 모든 영화들이 모여서 만드는 하나의 세상을 비유하고 싶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출구를 열고 나가면 다른 영화의 입구가 있는 식으로 신(scene)을 생각하면 어떻겠느냐는 말이죠.”

영화엔 동시대 한국 사회를 직접적으로 환기시키는 장치들이 많다. 영화의 프롤로그에서 한 소녀는 미국의 대표적인 햄버거 가게에 앉아 “하나님 아버지 부디 저를 보살펴 주세요”라고 말한 뒤 햄버거를 먹는다. 정 감독은 이를 두고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이라고 말했다. 햄버거 안에 든 미국산 쇠고기, 이를 통한 광우병을 은유한 것이다.

“이 장면을 보고 ‘햄버거를 먹고 죽는다는 게 말이 되어요?’라고 묻는 거예요. 전 당황했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촛불시위에 나왔는데, 그때 나왔던 한국 사람들조차 다 잊은 것인가. 2년 지났는데 잊었다면 5년 뒤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쓸쓸하고 스산해졌어요.”

평론가로서 엄청난 영화를 보고 숱한 영화 촬영장을 누볐지만, 장편 연출자로서 나선 건 처음이다. 그는 영화를 찍으면서 “영화의 성질에 대해서,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긍정하고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 영화를 부정하는가를 배웠다”고 말했다. 아울러 100% 동시녹음으로 영화를 찍으면서 서울이 이토록 소음과 공사가 많은 곳인지 처음 알았다고도 했다. 사전에 장소를 섭외한 뒤 막상 촬영하러 가면 10곳 중 4곳은 공사중이었다. 이것이 세계가 영화에 주는 부정성이다. 영화는 그 부정성을 도리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언론시사회 내내 극장 뒤편에 선 채 영화를 봤다. 그는 “느껴보고 싶었다. 객석에 앉은 사람들이 내가 만든 영화, 내가 생각한 이야기, 만들어낸 인물을 어떻게 느끼는지. 그 즉각적인 한숨소리와 웃음소리, 호의와 저항감, 휴대폰의 불빛까지. 그걸 객석에 앉아 느낄 수는 없었다. 극장 안의 풍향계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카페 느와르>에 대해 스스로 평을 하면 어떨까. 그는 “별점을 매기면 다섯 개, 20자평을 쓴다면 ‘휘몰아치는 감동,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가 있을까’라고 쓸 것”이라며 “지구상 모든 감독들이 그렇듯 자기 영화에 대해선 눈이 먼다”고 말했다.

“자기 영화는 무조건 긍정해야죠. 그건 스태프와 배우에 대한 예의입니다. 자기가 의미있는 작업을 했다는 태도가 없으면 누가 그 영화를 사랑해주겠습니까.”

그는 기회가 된다면 세계문학전집을 차례로 영화화하고 싶다고 했다. 다음에 찍어보고 싶은 작품은 <보바리 부인>이다. <카페 느와르>는 30일 개봉한다.(백승찬기자)  

감독의 말  

영화와 인생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프랑소와 트뤼포가 대답했습니다. 당연히 영화가 더 중요하지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는 결국 사라질 것이고 영화는 여기 남을 것입니다.  

영화를 만들 결심을 하면서 작은 계획을 하나 세웠습니다. 그건 ‘세계소년소녀 교양문학전집’이라는 이름 아래 연작을 만드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꺼내든 책은 내가 14살 때 처음 읽은 요한 볼프강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습니다. 이 책은 괴테가 25살이 되던 해 1774년에 썼습니다. 이 영화의 첫 번째 제목은 그 책에서 가져온 <슬픔(Die Leiden )>이었습니다.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아무도 내게 그 책이 그렇게 끝난다는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무 방어도 하지 못한 채 그 책의 마지막 대목에서 베르테르가 자기 머리에 권총 자살을 하는 대목을 읽었습니다. 구식 권총은 아마도 단번에 베르테르의 생명을 빼앗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대목은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의사가 도착했을 때 불쌍한 베르테르는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방바닥에 쓰러진 채 맥은 아직도 뛰고 있었으나, 그의 손발은 모두 마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른쪽 눈 위에서 머리를 관통하여 쏘아서 뇌수가 밖으로 터져 나와 있었습니다. 별 효과가 없는 줄 알면서도 팔의 정맥을 째고 방혈을 시켰습니다.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 숨은 간신히나마 아직 쉬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아팠을까요, 젊은 베르테르는. 나는 이 책을 읽은 다음 나이를 먹으면서 많은 죽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운명이 다하는 것은 슬프기는 하지만 놀라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 자기의 숨을 거두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1980년대를 살아남았고 그런 다음에도 한참을 더 살고 있습니다. 간절하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제발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니 그저 거기서 멈춰 주세요. 나의 힘으로 괴테의 소설 속의 죽음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곁에 한 편의 소설을 더 가져다 놓기로 하였습니다. 오로지 그걸 미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때 내가 서가에서 뽑아든 건 표드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가 그의 나이 27살인 1848년에 쓴 <백야 혹은 감상적 소설, 어느 몽상가의 회상 중에서>입니다.  

그 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썼습니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그 죽음을 미루고 싶었습니다. 그저 나흘 밤이라도 좋으니 그걸 미루고 싶었습니다. 거인 괴테가 베르테르의 관자놀이에 총을 쏘았을 때 그 죽음을 감히 내 힘으로는 미룰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라면, 네 그렇습니다, 도스또예프스끼라면 그렇게 잠시라도 미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 죽음을 미루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영화의 상영시간이 긴 것도 오로지 내 마음 속의 간절한 호소의 일부입니다. 차라리 나는 그것을 영화가 내게 요구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영화가(*영화를?) 끝내지 않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1944년에 쓴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입니다.  

2010년 11월 오늘 첫 눈이 올지도 모른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정성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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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8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8 0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꾸때리다 2010-12-28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제 눈엔 정유미 누나 밖에 안 보여요. 사랑해요 유미 눈화 ㅜㅜ ♥

로쟈 2010-12-30 07:56   좋아요 0 | URL
정유미론을 하나 쓰시죠.^^

푸른바다 2010-12-28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일씨의 특성을 볼때 왠지 의식/지식 과잉의 헐리우드 키드 같은 영화가 아닐까 하는 선입견이 드네요.^^ 물론 선입견이길 바라고 저도 기회가 되면 영화를 보고 싶습니다.^^

로쟈 2010-12-30 07:55   좋아요 0 | URL
인터뷰들이 나오고 있는데, 역시나 열정적인 달변입니다.^^

귀족온달 2011-02-05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동안 정성일씨의 영화평을 읽어왔는데요, 찬찬히 읽다보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고 봅니다. 뛰어난 작곡가가 절창이 아니듯 뛰어난 영화평론가가 좋은 영화감독이 될 수는 없겠죠. 영화는 어떻게 이미지화 하는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성실의 덕목만으로는 안되는 감각과 재능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정성일씨 영화를 보면서 느낀건 힘을 빼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노래를 부를때도 목에 힘을 주지않는단계를 가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너무 많은 생각은 영화를 만들때 좋은 덕목은 아닌듯 합니다. 예전에 이문열씨가 그런말을 하더군요. 소설의 구조와 상징과 모든 이론적인 걸 생각하고 있으면 한편도 쓸수가 없다고요...영화창작도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요...

로쟈 2011-02-06 12:11   좋아요 0 | URL
네, 영화는 저도 실망스러웠습니다. 기대를 너무 많인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아는 게 병'일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었어요. 혹은 그가 '현실'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모르는 게 아닌가도 싶었어요. '세계명작'이란 외피를 고집하는 것도 미심쩍은 부분입니다. 그는 자신의 시나리오를 쓸 자신이 없는 건가 싶어서요...

예브 2011-03-12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스키대로를 떠올리며 읽었던 백야를 청계천에서 다시 눈으로 보는 재미도 있던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