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자크 라캉의 세미나 시리즈가 출간되기 시작했다. 세미나 11권이 제일 먼저 나왔는데,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새물결, 2008)이 타이틀이다. 출간일자는 작년으로 돼 있지만 배본은 최근에 된 듯싶다. 사실 이 세미나 시리즈는 수년 전부터 예고돼 있던 터이므로 출간 소식 자체가 놀랍진 않지만 과연 나오는 것인가란 의혹을 불식시켜준 것은 평가할 만하다. 물꼬가 트인 만큼 나머지 세미나와 <에크리>까지도 곧 한국어본을 얻으면 좋겠다. 이걸 어떻게 읽고 소화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이제 숙제로 남는다. 

 

자세한 책소개는 상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출판사 소개를 참조하면 되겠다. 일부만 발췌하여 옮기면 이렇다.  

라캉의 세미나는 1953년 시작되어 그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행해졌으며, 매 해의 세미나를 제자이자 사위인 자크­알랭 밀레가 편집해 책으로 발간하고 있다. 출간되어야 할 권수는 27권이고 프랑스에서도 아직 모든 세미나가 출간되지 않고 계속 발간 중이다. 그렇다면 총 27권의 라캉 세미나들 중에서 ‘세미나 11권‘이 최초로 번역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1973년에 발간된 ’세미나 11권’은 프랑스에서도 라캉의 세미나 가운데 최초로 출간된 것으로서, 1963~1964년에 행한 열한번째 ‘구술’ 세미나를 책으로 옮긴 것이다.(...) 말하자면 ‘세미나 11권’은 라캉의 정신분석이 프랑스 정신분석학계뿐 아니라 프랑스 사상계 전반에 걸쳐 본격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출발점에 위치한 세미나이다. 

다른 한편 ‘세미나 11권’은 1950년대의 라캉과 일종의 ‘단절’을 시도하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로의 회귀’를 외치면서 언어, 주체, 기표, 상징적인 것 등에 관심을 기울였던 그가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상징적인 것을 넘어서는 것들을 구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완전한 구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1950년대만 해도 라캉은 자신의 이론을 구축하면서 구조주의와 언어학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세미나 11권’에서 라캉은 ‘구조의 완결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더욱더 많은 노력을 할애하게 되고, 그러면서 ‘실재’와 ‘대상 a’ 개념을 정립하기 시작한다. 이런 의미에서 ‘세미나 11권’은 라캉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무의식을 개념화하고, 상징적인 것 너머의 것을 이론적으로 구성하고자 한 중요한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세미나 11권은 진작에 영어로 번역돼 있으며 <세미나 11권 읽기>(1995)까지 출간돼 있다. 한국어본이 출간되었다고는 하나 사실 여러 번역본과 주석을 참조하여 '교차적 읽기'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부득이 라캉의 미로를 헤맬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20세기의 가장 난해하면서 가장 중요한 이론가의 한 사람을 한국어로 읽는 '모험'은 도전해볼 만하다.  

 

 

 

 

 

 

  

특히 이번 번역은 이미 <라캉과 정신의학>(민음사, 2002)과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2) 번역을 통해서 라캉주의에 대한 이해를 선보인 역자들이 맡고 있어서 안정감을 준다(짐작에 라캉의 언어를 우리말로 옮길 수 있는 역자는 손에 꼽을 정도다). 여하튼, 간만에 이론 읽기의 독서욕을 부추기는 '물건'이 나와서 반갑다(지난 연말에 나온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문학동네, 2008) 정도가 이에 견줄 수 있다)... 

09. 01. 07.  

Лакан Ж. Четыре основные понятия психоанализа. Семинары: Книга XI (1964). Кн.11

P.S. 참고로 러시아어로는 라캉의 세미나가 현재 여섯 권이 번역돼 있다. 그 중 11권은 지난 2004년에 출간됐다. 모스크바의 서점에서 기쁜 마음으로 집어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 책도 책상맡으로 옮겨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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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9-01-08 04:00   좋아요 0 | URL
오호, 드디어 나왔군요!!! 멀리서 반가운 소식 접하니 그 반가움이 더욱 배가됩니다.^^

로쟈 2009-01-08 22:52   좋아요 0 | URL
'멀리' 나가 계신가요?^^

푸른바다 2009-01-08 21:43   좋아요 0 | URL
전 개인적으로 인간의 정신을 설명하는 라깡의 다양한 개념들이 상당히 흥미롭기는 하지만 지적인 유희가 너무 심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라깡은 물론 알튀세르, 푸코, 데리다 등이 폭로하는 즉물적 현실 이면에 놓여 있는 또 다른 진실에 물론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만 과연 이들이 주장하는 대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늘 아리송할 따름입니다.

로쟈 2009-01-08 22:52   좋아요 0 | URL
저도 라캉의 매력은 잘 모르겠지만(그는 자신을 직접 교주처럼 신비화하기도 했지요)지젝이 읽은 라캉이 흥미로워서, 그리고 '생산적'이어서 관심을 갖습니다..

yoonta 2009-01-08 23:55   좋아요 0 | URL
읽을수있는 리캉인지 아닌지..궁금하네요.
러시아에서는 라캉이 벌써 많이 번역되었나 봐요? 러시아어의 라캉이나 지젝번역들은 어떤가요?

로쟈 2009-01-08 23:59   좋아요 0 | URL
현재로선 최선의 번역이라고 봐야죠. 최상은 아니더라도. 라캉의 <에크리>도 아직 러시아어판이 없습니다. 세미나 6권과 <텔레비전>, <로마강연> 등이 소개돼 있어요. 지젝은 한국에서 더 많이 소개됐구요. 다만 <시차적 관점>은 러시아어판이 먼저 나와 있습니다. 러시아어 번역을 제가 품평할 정도는 안되고요, 영어나 한국어가 막힐 때 독해에 도움은 줍니다...

Poissondavril 2009-01-09 09:11   좋아요 0 | URL
이 책의 교정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저의 본업은 번역이지만 워낙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서 (사실은 역자들의 지명을 받아서...-_-;;) 교정에 참여했었습니다.
저 역시 현재 기대할 수 있는 번역으로서는 최선... 이라고 생각하고, 저 자신도 불어판, 영문판, 일어판을 모두 비교해가며 교정 작업을 했습니다. 제 작업 이후에도 몇 년 동안 수정과 검토가 이루어진 것으로 압니다.
다만, 자크 알랭 밀레가 굉장히 까다로운 번역 원칙을 부과하고 있기 때문에 독해가 녹록치 않을 겁니다. 문화적 차이 때문에 반드시 설명해야 하는 용어가 아니면 역주를 달 수도 없고, 정신분석학적 주요 개념에 대해 설명하거나 역자의 해설을 달 수도 없도록 모든 번역본들에 대해 엄격한 원칙을 세우고 있거든요. 독자들은 좀 답답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건 역자나 출판사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부분입니다. 라캉의 세미나는 원래 그런 책이니까요.

로쟈 2009-01-09 21:37   좋아요 0 | URL
저도 <에크리> 교정에 참여할 뻔했습니다.^^ 그래도 <세미나>는 구술이어서 <에크리>보다는 사정이 나을 듯싶은데, 이게 계기가 되어 한국어 라캉이 연착륙하면 좋겠네요...

푸른바다 2009-01-09 00:13   좋아요 0 | URL
저도 한 동안 아주 머얼리 있었습니다. 한동안 한국 소식도 끊고 살았는데, 다시 접속한 순간 아니나 다를까 더 악화되 있어 모르는게 약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암튼 로쟈님 덕분에 저도 지젝이라는 인물에 관심을 갖게 되긴 했으나 아직 가진 책이라곤 '삐딱하게 보기'밖에 없군요. 지젝이 기본 입장이 잘 기술되어 있다는 '이데올로기라는(의) 숭고한 대상'은 이미 절판되어 구할 수 없고, 다른 책들은 번역이 미심쩍다 하니 손이 안가고...

제 생각에 고전적인 사상들, 예를들어 유교, 불교, 플라톤 사상 등등은 비교적 뚜렷한 목적성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유교는 성인되기를 추구하고, 불교는 해탈을, 플라톤 역시 단견(doxa)을 초월하는 에피스테메에 이르를 것을 주장합니다. 헤겔의 매력도 아마 '절대지'에 이르는 여정을 투박하나마 제시한 데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맑스를 존경하지만, 그는 물질적이고 객관적인 삶의 여건의 개선에만 집중했을 뿐 인간이 가지는 궁극적인 관심에 대해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투박한 질문인지는 모르나 지젝이 철학하는 목적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로쟈 2009-01-09 00:22   좋아요 0 | URL
그가 한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문제를 다시 정의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http://blog.aladdin.co.kr/mramor/1545343 참조하시길...

글샘 2009-01-15 04:03   좋아요 0 | URL
제가 요즘 하우투리드 시리즈의 지젝이 쓴 라캉을 읽고 있는데요...
라캉은 너무 다양한 데서 개념들을 빌려다 혼용하는 통에...
저는 프로이트의 성도착적 개념도 맘에 안들지만, 거기서 더 나간 라캉을 읽기란 만만치가 않군요. 휴... 라캉을 제대로 읽을 날이 오긴 할까 모르겠습니다.

로쟈 2009-01-15 09:19   좋아요 0 | URL
뭔가 도움이 된다면 읽는 것이죠. 누구 말대로 책이란 기계장치 같아서, 작동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 '제대로'보다 중요한 건 그 작동 유무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