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구판) 2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지음, 남수인 옮김 / 열림원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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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좋아하는 책을 여러 번 다시 읽는 편이다. 거의 아무런 자의식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작가에 몰입하면서 읽게 되는 것이 최초의 독서라면, 감탄할 만한 표현들 앞에서 적절히 시간을 두고 음미하고 나의 느낌들을 정리해가면서 읽는 것이 두 번째 독서이다. 내 경우, 일반적으로 두 번째 독서가 여러 가지 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편이다. 최초의 독서는 재미라는 것을 실감도 못할 만큼 성급하게, 피가 마르는 것 같은 조바심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는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나는 이 책을 가능한 한 천천히, 조금은 떨면서 읽어나갔다. 이 얇은 책의 마지막 장이 넘어갈 그 시각을 조금이라도 더 늦추어보기 위해, 그리고 처음부터 예상되었던, 비극적이면서도 어쩌면 최선이라고 할 만한 그 결말을 유예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끝날 때까지 내 눈이 발견할 수 있는 모든 보물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담고 싶었다.

<세 사람>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이 책은 에릭과 콘라드, 그리고 콘라드의 여동생 소피, 이 세 젊은이의 사랑 이야기이다. 아주 간략한 바깥 이야기를 제외하면, 소설은 대체로 에릭의 일인칭 회상으로 이루어진다. 에릭이 사랑했던 친구 콘라드, 그리고 자신에게 더할 수 없는 '한계선상의' 사랑으로 부딪혀오던 소피, 그리고 그러한 소피를 (어느 정도는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으면서도)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에릭 자신의 이야기가 주축을 이룬다.

소설 안에서는 에릭과 소피 사이의 감정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특히 부각되고 있다. 그 감정이란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를 모르겠는데, 일단 단순히 애증이라고 하기는 곤란하고 자기 파괴적인 욕구라는 말도… 썩 적합하지는 않다. 묘한 것은, 사랑하는 여자는 자기 자신을 다 주려고 하면서도 남자에게 남겨질 착잡함을 거의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사랑을 주는 것이 거부된다면, 영원히 잊히지 않을 정도의 상처라도 주겠다는 태세이다. 반면 이 여자를 외면하는 남자는 잔혹한 듯하면서도 그녀에게 배려의 모습을 보인다. 그 여자가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친구의 여동생이기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완전한 설명이 못 된다. 그녀, 친구의 여동생이 아닌 독립적인 한 여자로서의 그녀에 대한 미묘한 감정이 군데군데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남자의 배려는 전쟁에서의 적으로 돌아서버린 그녀에게 '자비의 일격'(이 소설의 원제이기도 한)을 가하게 되는 역할로 나타난다.

결국 에릭은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비록 그 사랑의 형태는 매우 달랐지만) 전쟁통에 잃게 된다. 콘라드와의 관계나 감정은 비록 소피와의 감정적 전쟁처럼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시종일관 어떤 분위기로서 존재하고 있다. 사실 독자들에게는 콘라드에 대한 어떤 직접적인 판단을 할 만한 정보가 주어지지 않는다. 오로지 사랑하는 자의 눈에 비친, 사랑 받을 만한 이의 분위기를 전달받을 뿐이다. 에릭은 콘라드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에 대한 사랑이 에릭에게 있어서 일종의 마지막 구원 같은 것이리라는 확신은 독자들에게 뚜렷이 전해져온다. 그래서 에릭이 콘라드의 임종을 지켜보는 장면은 무엇을 잃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엄청난 것을 잃어버렸구나 싶은, 해명되기 힘든 상실감을 전달해준다.

이 소설은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그 감정적 여운은 몹시 길고 치열하다. 아마도 소설 속의 세 사람 중에서 가장 자비의 일격을 원했던 사람은 소피가 아니라 에릭이 아니었을까. 소피는 사랑했던 이의 손으로 생을 마감하는, 어떻게 보면 그녀 자신의 집요한 욕망을 이루면서 죽어갔다. 하지만 어떤 자비의 일격도 기대할 수 없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단지 죽은 자들을 회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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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찬 예찬 시리즈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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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투르니에의 책이, 그것도 김화영 교수의 번역으로 나왔다면, 선택에 주저함이 별로 없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런 상황에서 이 책을 구입했다. 그리고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초교 상태를 그대로 책으로 찍어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에 거슬리는 오자와 잘못된 표기가 많았다. 그리스 신화나 비극에 자주 나오는 고유명사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불어식 발음으로 표기해놓질 않나... 예수의 제자 이름은 '마테오'라고 했다가 '마태오'라고 했다가... '숱한'을 '숫한'이라고 쓰질 않나, '자신을'이라고 추정되는 부분에는 '사신을'이라고 해놓질 않나(난데없이 웬 죽음의 신?)

가장 코미디였던 부분은 안데르센의 동화 <백설공주> 운운하는 부분이었다. 악마의 거울 조각이 소년의 눈에 들어갔다느니 그래서 그 소년이 심술궂어졌다느니 하는 문맥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건 <백설공주>가 아니라 <눈의 여왕>이다. (아마도 원어에 다같이 '눈'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고 '공주'나 '여왕'이나 거기서 거기니까 제대로 확인도 안해보고 <백설공주>라고 했으리라. 하지만 문맥만 읽어보면 금방 알 텐데, 아무도 이 원고를 검토도 하지 않은 채 독자들에게 내놓았단 말인가?)

지금 대충 생각나는 것만 해도 이 정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표지는 또 왜 그리 예쁜지, 처음 책을 받아들었을 때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그러던 것이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다가 분노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저자의 풍부한 사념들과 역자의 수려한 문장들로도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 책 <예찬> 안에는 책을 만드는 식자공들과 교정사원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는 이러한 사람들을 장인정신을 갖춘 '먹물'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한국에 번역된 그의 책은 과연 그러한 장인정신에 의해 만들어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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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사용법 - 소설들(Romans)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책세상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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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 골몰할 대상을 찾지 못할 때 인생의 시간을 보내기란 더없이 지루한 것이다. 학문과 예술의 효용은 단지 그것뿐이다.' 장 그르니에의 책에서 대강 이런 내용의 문장을 읽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문장에 보라색 색연필로 밑줄을 그었던 것까지 기억한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이 문장이 더없는 울림을 가지고 기억 속에 되살아난 것은 <인생 사용법>이라는 책을 다 읽고 났을 때였다. 그것은 녹녹치 않은 책의 두께만큼이나 깊고 무거운 울림이었다. 그처럼 이 작품 안에는 더없이 사소한 것에 그야말로 목숨을 건 사람들, 단순한 시간 죽이기처럼 보이는 행위를 무거운 침묵 속에서 심각하게 수행해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담겨 있다. 그러나 이들의 보여주는 삶의 양상은 결코 우스꽝스럽거나 경박하지 않다. 어찌 보면 상당히 '고결한' 인생 사용법이라는 인상을 주기까지 한다.

'소설들'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이 작품 안에는 100에서 하나 모자라는 99개의 장에 걸쳐 다양한 일화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작품은 이러한 갖가지 일화들이 결국 퍼즐 조각들처럼 맞물려 세 명의 중심인물에 대한 이야기로 수렴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 이야기에는 퍼즐이라는 놀이가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즉 퍼즐에 대한 이야기가 퍼즐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퍼즐이란 바로 주인공인 퍼시발 바틀부스의 인생을 소진시키기 위해 마련된 퍼즐이다. 그는 퍼즐로 만들 수채화를 그리기 위해 10년 동안 발렌이라는 화가에게 수채화 기법을 배운다. 그리고 20년 동안 세계 일주를 하면서 500점의 수채화를 그린다. 이 그림들은 윙클레라는 제작자에게 보내져 퍼즐로 제작된다. 그리고 바틀부스는 세계 일주를 마치고 돌아와 20년 동안 그 퍼즐들을 다시 맞추는 데 골몰한다. 그는 퍼즐이 완성되면 특수한 용액에 담그어 수채화를 완전히 지워버릴 계획을 갖고 있다. 즉 그는 약 50년에 걸친 그의 삶과 활동을 완전히 소멸시키려는, '무위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는 것이다.

퍼즐은 그의 결코 야심적이지 않은 야심이 응축되어 있는 사물인 동시에 작품 속의 인물들이 살고 있는 건물 그 자체이기도 하다. 바틀부스, 노화가 발렌, 윙클레는 모두 시몽크뤼벨리에 가의 한 건물에 살고 있다. 그리고 99장에 걸친 일화들도 모두 이 건물에 얽혀 있는 사연들, 이 건물의 입주자들의 인생 이야기이다. 결국 건물은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귀착되는 공간이며, 그들의 인생에 의해 짜맞추어지는 퍼즐과 같다.

이처럼 직품은 거의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의 치밀한 구성과 계산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게다가 군데군데 온갖 문학적 실험이 삽입되어 있어서 기존의 '소설적인' 무엇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상당히 혼란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작품은 이렇게 잘 짜여진, 규칙과 규칙 사이의 유희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결국은 인생의 수많은 우연과 반전, 삶의 의외성에 대해 감동을 느끼게 하고 있다.

작품 속의 수많은 이야기들은 책을 덮었을 때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바틀부스가 그렇게 꿈꾸었던 완전한 무로의 회귀, 그리고 발렌이 죽었을 때 남긴 백지 상태의 캔버스와도 같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는 <백년 동안의 고독>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읽을 때는 그렇게 두꺼웠던 책이 스르르 공기 중으로 사라져버릴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그렇게 이 책은 독서의 즐거움, 그 외에는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다. 심각한 의미나 교훈이 먼저 두드러지는 작품과는 달리 문학 그 자체도 무위의 활동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문학의 위대함, 인생의 위대함을 느끼게 하니 또 얼마나 역설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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