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대학원신문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번역문제와 관련한 에세이를 주문받고 쓴 것이다. 아직 신문을 받아보지 못해서 편집상 수정이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이 글은 초고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주인공 햄릿은 처음부터 등장하지 않고 1막 2장에서야 등장한다. 죽은 부왕의 유령이 등장하는 1막 1장에 이어지는 이 궁중 장면에서다. 덴마크의 새 국왕 클로디어스는 선왕의 죽음을 추모하고 형수였던 거트루드를 왕비로 삼는 데 동의해준 신하들을 치하한다. 그리고는 여러 국사를 처리하고 재상 폴로니어스의 아들 레어티즈의 유학을 허락하는 일까지 마무리한 뒤에야 햄릿을 찾는다. “그건 그렇고, 자, 나의 조카 햄릿, 이젠 나의 아들-(But now, my cousin Hamlet, and my son,-)”이 햄릿을 부르는 그의 대사다. 그리고 그 부름에 답하는 햄릿의 방백이 우리가 이 연극에서 듣게 되는 햄릿의 첫 대사다. 햄릿은 이렇게 말한다. “A little more than kin, and less than kind.”

대사로 처리되기도 하고 방백으로 처리되기도 하는 이 문장이 내가 여러 종의 <햄릿> 번역본을 들춰볼 때마다, 그리고 새 번역본이 나올 때마다 한번쯤 확인해보는 대목이다. 다수의 번역본이 있는 만큼 이미 다양한 번역이 제시되었다. 아니 다양하게 ‘연주’되었다. “숙질 이상의 관계가 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부자 취급은 싫습니다.”(김재남) “조카보다야 가깝지, 하지만 부자취급은 어림없어.”(여석기) “핏줄은 통한다마는 마음은 구만리 밖이라.”(신정옥) “동족보단 좀 가깝고 동류라긴 좀 멀구나.”(최종철) “친척보단 조금 더 친하고, 자식보단 조금 덜 친한.”(김정환) 등이 그 사례다.

클로디어스는 아버지의 동생이니 햄릿에게는 숙부가 되지만 어머니와 결혼하였으니 새 아버지(계부)이기도 하다. 클로디어스에게 햄릿이 조카이자 아들인 것처럼. 하지만 이 병행적이면서도 이행적인 관계를 햄릿은 선뜻 수용하지 못한다. 햄릿의 kin/kind는 클로디어스의 cousin/son만큼 자연스럽게 양립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정체성은 불확실하며 불확정적이다. 한 노래 가사를 비틀어서 말하자면 “숙질도 아닌 그렇게 부자도 아닌 어색한 사이”가 클로디어스와 햄릿의 관계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몇 가지 번역 사례를 평해 보자면, 김재남역은 ‘숙질’과 ‘부자’를 대비시킴으로써 명료하게 의미를 전달하고 있지만 좀 투박하다. 원문의 간결한 리듬을 살리지 못한 탓이다. 여석기역은 ‘조카’와 ‘부자’를 대비시키고 리듬감도 살렸지만 ‘어림없어’란 말이 좀 걸린다. 왠지 유약하다기보다는 강인한 햄릿이 연상돼서다. 신정옥역은 의역의 최대치를 보여준다. 하지만 ‘핏줄’과 ‘마음’의 대비는 정체성에 대한 햄릿의 고민을 전달하지 못한다. 최종철역의 ‘동족’과 ‘동류’는 거꾸로 직역의 최대치를 보여주지만 역시나 햄릿의 고민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 김정환역은 두루 만족시키고 있지만 개인적으론 불완전하게 끝난 문장이 마음에 걸린다. ‘자식간’이란 말은 쓸 수 없기에 ‘친척’과 ‘자식’도 정확한 대비는 아니다. 김정환은 클로디어스의 대사에서도 ‘cousin’을 ‘친척’이라고 옮겼는데, 원래의 의미를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좀 부자연스럽다. 물론 이런 평은 주관적인 것이고 독자로선 각자의 취향에 맞는 연주를 고르면 될 터이다.

자신의 취향과 기대에 맞는 번역을 만날 때의 즐거움은 원작을 읽는 즐거움과는 사뭇 다르다. “A little more than kin, and less than kind.”란 셰익스피어의 문장이 ‘주어진 것’으로서 ‘자연’에 해당한다면 번역은 이 자연의 모방이자 재현이다. 각기 다른 번역은 이 모방․재현의 기예를 겨루는 경연이자 모험이며 좋은 번역은 말 그대로 예술이다. 이런 경연의 사례를 하나 더 들어보자. <햄릿>의 2막 2장에서 폴로니어스는 미친 척하는 햄릿의 광기가 자신의 딸 오필리아 때문이 아닌가 떠보기 위해 말을 붙인다. 햄릿은 그에게 딸이 있는가 묻고는 이렇게 충고한다. “Let her not walk in the sun: conception is a blessing: but not as your daughter may conceive. Friend, look to it.”

이 대목에 대한 몇 가지 번역을 소개하면 이렇다. “햇볕을 너무 쬐지 않도록 해. 지혜가 부푸는 건 좋지만 배가 부풀면 큰일이니까, 아주 조심해야 하네 친구.”(신정옥) “딸이 태양 아래 걷지 않도록 하게. 머릿속의 착상은 축복이네만, 자네 딸 몸속의 착상은- 친구여, 조심해.”(최종철) “햇빛 속을 걷게 하지 말게. 생각을 잉태하는 건 축복이지. 하지만 자네 딸은 다른 걸 잉태할지 모르잖아. 친구. 조심하게.”(김정환)

셰익스피어의 원문에서 핵심은 ‘conception(착상)’과 ‘conceive(임신하다)’의 의미연관성이 갖는 말장난이다. 이것을 신정옥역은 ‘지혜가 부푸는 것’과 ‘배가 부푸는 것’으로 풀었고, 최종철역은 ‘머릿속의 착상’과 ‘몸속의 착상’으로 대비시켰다. 그리고 김정환역은 이 말장난을 ‘생각의 잉태’와 ‘다른 것의 잉태’로 변주했다. 이 모두가 저마다의 연주이며 경연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햄릿>은 한번 읽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그것도 여러 번역본으로 읽는 것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그렇게 여러 번 읽어도 좋을 만한 번역서가 많이 나오고 또 그런 번역서를 독자들이 많이 찾아서 읽는 문화적 풍토가 마련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번역비평 또한 오역에 관한 시비로 얼룩지기보다는 훌륭한 번역에 대한 품평으로 채워지는 것이 이상적이라 할 만하다. 예컨대 번역에 대한 평가기준이 ‘맞는 번역 vs 틀린 번역’이 아니라 ‘좋은 번역 vs 더 좋은 번역’이라면 얼마나 바람직할 것인가.

우리 번역문화의 열악한 현실에 대한 비판과 고발은 그동안 적잖게 제기되었다. 중언부언은 피하고자 한다. 대신에 최근에 나온 한 번역서에서 읽은 문장을 인용하고 싶다. “세상이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 속에 이미 낙관주의가 존재한다.” 원문은 “There is an optimism that consists in saying that things couldn't be better.”이고 보통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말하는 게 낙관주의다.” 정도로 번역될 듯싶다. 하지만 나는 이 ‘특이한’ 번역 덕분에 우리의 번역문화에 대해 낙관하게 되었다. “이보다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낙관주의도 있는 것이니까.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좋은 낙관주의’다.

08.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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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febvre 2008-11-14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사라 밀즈의 책 같군요...... ^^;;

로쟈 2008-11-14 07:15   좋아요 0 | URL
밀즈의 책은 아닙니다.^^;

lefebvre 2008-11-14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푸코의 문장이 맞는 거 같아서 찍었는데 아니었군요 ^^;;

로쟈 2008-11-14 15:47   좋아요 0 | URL
푸코의 말이 맞을 거 같은데요. 책만 다른 책입니다.^^

파란흙 2008-11-15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를 나누었으되, 종류가 다른...뭐 이런 의미로 느껴집니다만. 그 공교로움과 아니러니컬함, 비애가 전달되지 않고 말이죠. 제각기 번역자들이 왜 저런 글을 동원했는지, 그 심경이 잡히는 듯, 무척 재미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운을 맞출 수 없는 부분은 접고 들어가야 하나요? 동족, 동류가 그 시도로 보이고 제겐 가장 어울리는 번역으로 느껴지네요. 하지만 읽을 땐 그 의미가 씹히지 않는 단점이 있군요. 아, 이래도 저래도 어렵습니다.

로쟈 2008-11-15 16:43   좋아요 0 | URL
<햄릿>의 대사들이 시이기도 하지만 무대언어라는 점이 중요한데, 많은 번역본들에서 간과되고 있습니다. 최종철역은 시라는 점은 강조하다 보니 특히 그렇고요...

lefebvre 2008-11-15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 책이 맞군요! 일전에 제본 부탁드렸던 책. 야, 이거 알아맞추기 게임이 은근히 재미 있는데요?! ^^ 그나저나 그 "오래된"(?) 책을 어인 일로 들추셨나요? *^^* 그 책의 개정판이 나왔나보죠?

2008-11-15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16 0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16 1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8-11-17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정환의 책에서 원문 냄새가 나서 좋았는데, 원문과 함께 보면 더 재밌을 것 같네요.. 지를까 말까 고민됩니다~ 또 ㅎㅎ

로쟈 2008-11-17 21:57   좋아요 0 | URL
어떤 고전이건 같이 보는 게 더 재밌지요.^^

승주나무 2008-11-27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 이 글을 퍼가도 될까요? 출처 밝혀서... 너무 좋네요^^

로쟈 2008-11-27 18:11   좋아요 0 | URL
오픈된 자료인데요 뭐. 한데 위의 댓글과는인터발이 있네요. '열흘' 동안 고민하셨나요?^^

승주나무 2008-11-27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제가 좀 소심한 편이라.. 원문+알파로 페이퍼를 만들어보고 싶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