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브레이크에 잠깐 시간을 내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인문학의 갱신과 역할에 대해서 다룬 두 권의 책, <인문학의 즐거움>과 <저항의 인문학>을 뭉뚱그려서 다룬 글이다. 모두 상반기에 나온 책이고 몇 차례 페이퍼에서 다룬 적이 있지만 얼마전 인문주간을 계기로 '인문학 문제'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았다.

한겨레21(08. 11. 03) 시민 가까이의 인문학

지난 10월 6일부터 12일까지 한국학술진흥재단 주최의 인문주간 행사가 열렸다. 2006년 ‘인문학 위기’에 대한 대응의 하나로 마련된 행사가 세 번째를 맞았고, 올해의 주제는 ‘일상으로서의 인문학’이었다. 학술제와 대중 강연, 답사, 문화 체험, 공연·전시 등의 프로그램은 예년과 다르지 않았지만 참여기관수가 늘어나면서 행사의 규모도 조금 커졌다고 한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건 직접 참여해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인문주간’을 보내면서 인문학을 주제로 한 책 두 권을 떠올려보았다. 미국 러트거스대학에서 교양과정의 작문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다는 커트 스펠마이어의 <인문학의 즐거움>(휴먼&북스 펴냄)과 컬럼비아대학에 오래 몸담았던 저명한 문학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항의 인문학>(마티 펴냄)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을 직접 쓰는 게 낫지 않을까

‘21세기 인문학의 재창조를 위하여’란 거창한 부제를 달고 있는 <인문학의 즐거움>은 사실 ‘즐거움’과는 다소 무관한 책이다. 원제 ‘아츠 오브 리빙(Arts of Living)’은 ‘삶의 기술’이나 ‘삶의 예술’로 번역될 수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저자가 제시하려는 바람직한 인문학상일 뿐이고 실제로 그의 초점은 현재의 인문학에 대한 비판에 놓여 있다. 목차에 걸린 ‘거대한 분리 - 시민사회와 전문가’나 ‘이론이 치른 대가 - 인문학의 고립과 지식’ 같은 장 제목이 미리 암시해주는 대로 저자의 비판은 주로 ‘인문학의 엘리트 프로페셔널리즘’을 향한다. 사유의 핵심이 단지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을 바꾸는 데 있다고 믿는 그는 인문학의 목적이 전문지식과 일상적인 생활세계를 연결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인문학은 ‘교양’이 아닌 ‘과학’을 표방하면서, 전문가를 위한 학문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면서 고립과 소외를 자초했다. 인문학자들이 자신의 입지를 고수하기 방책으로 과학에서와 같은 정확성을 모색해왔지만 그 결과는 시민대중과의 단절을 대가로 치른 '유사 과학'이었다. 인문학은 과학의 방법론을 모방함으로써 과학의 경쟁자가 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과연 그러한 상황에서 “나는 인문학 전반이 우리의 실제생활에는 그다지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연구에 너무 많은 자원을 쏟아 붓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저자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을까?

한걸음 더 나아가 저자는 예술의 가치를 존중하기 위해서라면 영문학 같은 학문을 후원할 것이 아니라 예술을 직접 후원하는 게 더 낫지 않으냐고 말한다. 예컨대, 그는 ‘1900년까지의 영국소설’ 같은 과목을 의사, 공학자, 웹마스터 등과 같은 비전공자들에게 문화적 소양을 길러준다는 이유로, 혹은 정치적 견해를 수정하기 위해 가르치는 것보다는 수강생들이 실제로 소설을 ‘쓰고’ 리놀륨 판화를 ‘만들고’ 사진을 ‘찍는’ 경험을 갖게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물론 대부분 대학제도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의 인문학자라면 결코 동의하지 않을 주장이지만 인문학이 더 시민 가까이 다가서고 보다 더 예술 지향적이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음미해볼 만하다.

<인문학의 즐거움>의 저자보다는 전통적인 인문학과 인문주의를 옹호하는 편이지만 <저항의 인문학>에서 사이드가 강조하는 것도 인문학의 사회적 책임과 작가와 지식인의 공적 역할이다. 그 또한 인문학의 토대와 인문학을 둘러싼 정세가 변화했으며 그에 따라서 인문학의 정체성과 역할 또한 도전에 직면해 있음을 인정한다.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한 탈식민주의 이론가로서 사이드가 주로 비판하는 것은 근대 인문학의 유럽중심주의다. 이 점에서는 세계체제론자인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견해를 같이하는데, 그들에 따르면 근대 사회과학과 인문학은 역사적으로 유럽이 전 세계체제를 지배하던 특정 시점에 유럽의 문제, 특히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미국이라는 다섯 나라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반응으로 출현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주제선택이나 이론화방식, 방법론, 인식론 등에서 이들 학문은 그것이 태동했던 시대의 제약을 떠안게 되었다. 그러한 제약과 편견에서 탈피하기 위해 사이드는 교양교육의 주요 과목을 서구 정전으로 제한하는 일, 세계를 이해하는 유럽중심주의적 관점과 태도, 제3세계의 전통과 언어에 대한 무관심 따위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문주의의 새로운 관심과 역할이 요청되는 것이다.   

인문주의와 나란히 가는 '민주적 비판'

사이드에게서 그러한 인문주의와 나란히 가는 것이 ‘민주적 비판’이며, 이것이 작가와 지식인의 공적 역할이다. 그는 지식인을 가리키는 아랍어 단어 두 가지에서 영감을 끌어낸다. 그 두 단어는 ‘무타카프(muthaqqaf)’와 ‘무파키르(mufakir)’인데, 무타카프는 문화/교양을 뜻하는 ‘타카파(thaqafa)’에서, 무파키르는 사유를 뜻하는 ‘키프르(kifr)’에서 온 단어다. 곧 지식인이란 교양을 가진 인간이면서 사유하는 인간이다. 오늘날 지식사회의 전문화가 낳은 부정적인 양상은 이러한 전통적 지식인의 단절이고, 학계와 공적 영역의 분리다. 이러한 현실에서 사이드가 강조하는 작가-지식인의 역할은 사회정의와 경제적 평등, 그리고 ‘자유로서의 발전’(아마티아 센)에 대한 요구다. 그것은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말을 빌면, “현실주의적 유토피아를 집합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사회적 조건의 창출”을 돕는 역할이다.

인문학 위기 담론의 유행 이후에 한국사회에서는 '최고경영자(CEO)인문학' '노숙자인문학'이 새로운 인문학의 희망처럼 번져가고 있다. 하지만, 뭔가 허전하다. 중요한 것은 CEO도 아니고 노숙자도 아닌 ‘CEO와 노숙자 사이’가 아닐까? 바로 민주주의의 주권자로서 일반 시민들이 공부하고 향유해야 할 중간층 인문학의 상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인문학인가? 인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가? ‘인문학의 즐거움’을 맛보기 전에, ‘저항의 인문학’을 실천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통과해야할 질문처럼 보인다.

08. 10. 28.

P.S. 관련페이퍼로는 '음란과 궁상 사이의 인문학'(http://blog.aladin.co.kr/mramor/1616364), '인문학의 즐거움에 대한 아쉬움'(http://blog.aladin.co.kr/mramor/2029908), '에드워드 사이드와 라이오넬 트릴링'(http://blog.aladin.co.kr/mramor/2246701) 등을 더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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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진행형 2008-10-28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한겨레21에서 글 보고, 수업시간에 이 두 권의 책을 추천하고 싶어서
글 퍼갑니다...

물론 출처 표시는 했는데,
그래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먼저 허락받지 못하고 퍼간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양해해주시길 바라면서...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

로쟈 2008-10-29 00:04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한데, 학생들보다는 강사들이 읽어야 할 책인데요.^^; <인문학의 즐거움>은 두툼한 만큼 좀 전문적일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구요, <저항의 인문학>은 번역이 썩 만족스럽진 않습니다. 대학원생쯤 돼야 소화할 수 있을 듯싶습니다...

가시장미 2008-10-29 0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댓글을 보니 두 권 다 제가 읽기에는 어려울 듯 하네요. -_ㅠ 강사들 말고- 학생들이 읽을 수 있을만한.. 쉬운 책도 추천좀 해주시와요. ^^

로쟈 2008-10-29 17:19   좋아요 0 | URL
<희망의 인문학>은 쉬운 편입니다. 다른 고전 읽기들도 비교적...^^;

2008-10-29 1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9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