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제이북스, 2007)의 머리말을 읽다가 흥미로운 '오역'이 있어서 적어둔다. '오역'이라기보다는 '실수'라고 해야 할 텐데, 벤야민의 에세이 제목인 '번역자의 과제'가 갖는 중의성에 빗대자면 '번역가의 과제'에 충실하다 빚어진 '번역자의 실패'라고 할 만하다. 어제 잠시 들춰본 <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앨피, 2007)에 나오는 한 대목은 이렇다.
"드 만에 따르면 '번역자는 그 정의상 실패하기 마련이다.' 어떤 번역도 늘 원 텍스트에 부차적인 것이고, 번역이 원전과 마찬가지의 일을 수행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번역자는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실패하고 있다. 벤야민의 독일어 텍스트 제목은 '번역자의 과제Die Aufgabe des Ubersetzers'이다. 여기서 '과제Aufgabe'는 '과제'와 '포기하는 자'(프랑스 투어를 포기하는 사이클 선수는 '아우프가베aufgabe'라고 불린다)를 동시에 의미한다. 따라서 벤야민의 텍스트 제목은 '번역자의 실패'로 옮길 수 있다. 달리 말해서 번역자는 원전을 옮기는 일에서 늘 실패한다. 그리고 번역 자체는 늘 불가능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번역자는 원전을 제공하는 시인이나 예술가와는 다르다."(117쪽)
원론적으로 말해서 "번역자는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실패"한다고 하니까 역자가 머리말에서 실패하는 일이 이상한 것은 아니겠다. 그것이 거꾸로 말해주는 것은 '번역자의 과제'를 현재 수행중이라는 것일 테니까(모든 번역자가 갖는 느낌이겠지만 번역은 마치 장거리 사이클링처럼 고단하고도 지리한 자기와의 싸움인지라 언제라도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렇다면 데리다의 머리말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여러분들이나 나 가운데 어떤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말한다. 저는 마지막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시작이 이렇다. 데리다는 이 두번째 문장 "저는 마지막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je voudrais apprendre à vivre enfin)"에 대한 자세한 검토(내가 '뜯어읽기'라고 부르는 것)로부터 자신의 발언을 시작한다(이건 거의 그의 스타일이다).
"사는 법을 배우기. 이상한 표어이다. 누가 배우는가? 누구에게? 사는 법을 배우기, 그러나 누구에게? 우리가 정말 알게 될까? 우리가 정말 사는 법을, 그 전에 먼저 '사는 법을 배우기'가 의미하는 것을 알게 될까? 그리고 왜 '마지막으로'인가?"(9쪽)
'사는 법을 배우기'라고 옮겨진 불어의 '이상한 표어'는 'apprendre à vivre'를 옮긴 것인데, 특이하게도 불어에서 이 문구는 사는 법을 가르치다와 배우다,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할 수 있다(며칠 전에 '공부'에 대한 짤막한 원고를 썼는데, 불어의 이 표현이 아주 적절할 뻔했다. 가르치기와 배우기의 변증법!). 이것은 역자도 각주2)에서 설명해놓은 것이다(영역본에서는 첫번째 각주로 나온다) "프랑스어에서 'apprendre'는 '-을 배우다'는 뜻과 함께 '-을 가르치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번역 가능성에 대한 데리다의 언급은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용문을 옮길 때 역자는 그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다른 번역서들에서도 중의적인 의미는 모두 병기해주던 역자가 왜 이 대목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사는 법을 배우기. 이상한 표어이다. 누가 배우는가? 누구에게? 사는 법을 배우기, 그러나 누구에게?"란 시작을 우리말로는 동어반복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불어본을 찾아보니 실상 원문 자체가 '동어반복'이긴 하다.
"Apprendre à vivre. Etrange mot d'ordre. Qui apprendrait? de qui? Apprendre à vivre, mais à qui?.." 하는 식으로 'Apprendre à vivre'가 그대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맥상 둘은 의미가 같지 않다. 첫번째 'Apprendre à vivre'는 뒤에 '누가 배우는가? 누구에게(서)?(Qui apprendrait? de qui?)'가 따르므로 '사는 법을 배우기'라고 옮겨야겠지만, 두번째 'Apprendre à vivre'에 뒤따르는 'à qui?'는 나를 가르칠 사람이 아니라(de qui?) 내가 가르쳐야 할 사람을 가리키는 '누구에게?'이다. 즉, 이렇게 돼야 한다.
"사는 법을 배우기. 이상한 표어이다. 누가 배우는가? 누구에게서? 사는 법을 가르치기, 그러나 누구에게? 우리가 정말 알게 될까? 우리가 정말 사는 법을, 그 전에 먼저 '사는 법을 배우기/가르치기'가 의미하는 것을 알게 될까? 그리고 왜 '마지막으로'인가?"
영역본은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To learn to live: a strange watchword. Who would learn? From whom? To teach to live, but to whom?.."(역자는 왜 영역본을 참조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요점은 불어의 Apprendre à vivre란 관용어가 To learn to live와 To teach to live란 의미를 둘 다 가지며 우리말 번역에서도 불가불 그렇게 따로 옮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문맥에서 독립적인 Apprendre à vivre는 의미를 확정할 수 없다(데리다가 애용하는 '결정불가능성'의 또 다른 사례이겠다). 이 점은 데리다가 곧바로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맥락 바깥에서 그것 자체만 놓고 볼 때, 문장이 없는 이 표어는 거의 이해불가능한 문구를 이룬다. 더욱이 그 관용어는 어느 정도까지나 번역될 수 있을까?"
'문장이 없는 이 표어'는 'ce mot d'ordre sans phrase'를 옮긴 것인데, 사전을 찾아보니 'sans phrase'는 '쓸데없는 말은 빼고' '간단 명료하게'란 뜻도 갖고 있다(영역본은 'sans phrase'를 따로 옮기지 않았다). '이 표어 자체로는' 정도의 뜻이면 충분할 듯하다('Apprendre à vivre'는 하나의 문장이기 때문에 '문장이 없는 이 표어'란 번역은 어색하다. '앞뒤로 따라붙는 문장이 없는'이라고 풀어준다면 모를까). 즉, 문맥 바깥에서(out of context) 'Apprendre à vivre'란 이 문구(관용어)는 거의 이해불가능하다(의미를 확정지을 수 없다).
한 가지 더 역자의 실수라고 할 만한 것은 인용문 안의 ('문맥'이란 말을 보충하는) 삽입절을 누락한 것. 원문으로는 "mais un context, toujour, reste ouvert, donc faillible et insuffisant'이 번역에서 빠졌다. 영역으로는 "but a context , always remains open, thus fallible and insufficient"이고 우리말로는 "하지만 이 문맥이란 것은 언제나 열려있기 때문에 틀리기 쉽고 불충분하다" 쯤이다. 다시 말해서 문맥이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의미의 불확정성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읽어나가야 한다. 서로에게 배움/가르침을 주고 받으며(누가 가르치고 누가 배우는가?) 아무리 험한 길이더라도,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07. 10. 13.
P.S. 집에 돌아와 예전 번역본 <마르크스의 유령들>(한뜻, 1996)에서 같은 대목을 찾으니 이렇게 옮겨져 있다: "사는 법을 배움: 이상한 구호이다. 누가 그것을 배웠는가? 누구에게?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라면 누구에게 배운다는 말인가? 누가 그것을 알고 있었던가? 우리가 사는 법을 알고 무엇보다도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나 하는가? 그리고 왜 '궁극적으로'인가?.." 사는 법을 배우기 전에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이런 대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나 하는 것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