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북리뷰들을 둘러보았는데 지갑을 열 만한(아니 카드를 그을 만한) 책들이 다행히 눈에 띄지 않았다. 소장도서로 분류할 책이 없지는 않지만 당장에 구매할 필요는 없는 책들이다(도서관련 지출이 많아진 즈음이라 다행스럽다). 막간에 민족주의에 대한 책 두 권의 리뷰나 챙겨둔다. 그 두 권이란, 하나는 최근 출간된 장문석의 <민족주의 길들이기>(지식의풍경, 2007)이고 다른 하나는 지난 4월에 출간된 한스 울리히 벨러의 <허구의 민족주의>(푸른역사, 2007)이다(특이하게도 조선일보의 리뷰밖에 눈에 띄지 않는다). 벨러의 책은 얇은 분량이지만 (서구)민족주의 입문서로 적절해 보인다(한국 민족주의와는 사정이 다르다는 반론들을 고려하자면. 가령 http://blog.aladin.co.kr/mramor/839351). 벨러의 책은 어제 구내서점에서 손에 들었다가 약간 파손된 상태여서 다시 내려놓았던 책이다.

경향신문(07. 07. 07) '두 얼굴’의 민족주의와 공존하기

“억눌린 것이 돌아왔다. 그 이름은 민족주의다.” 캐나다의 역사가인 마이클 이그나티에프는 1993년 이같이 선언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집을 나갔던 ‘탕아’인 민족주의가 귀환했다. 냉전이 끝나면 세계화 물결이 지구촌을 뒤덮을 것이라는 석학들의 예언은 빗나갔다. 인종과 종교, 문화를 구심점으로 한 민족주의라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유럽을 휘감고 있다. 오늘날 서구 세계에서 ‘민족주의’는 불길한 이름이다. 민족주의는, 곳곳에서 터지고 있는 폭탄 테러와 피의 보복을 일삼는 분리주의자들의 이념이며, 끔찍한 전쟁과 국지전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러나 과연 민족주의는 나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민족주의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저자는 “민족주의는 팽창과 정복에 따른 억압, 나치즘과 파시즘에 의한 대량학살을 가져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 속에서 민족주의는 같은 구성원이라는 민족의 정의와 삶을 일치시키려는 부단한 노력 속에서 평등과 민주주의의 폭을 넓혀왔다”고 말한다. 그는 특히 민족주의에 대한 서구의 시각을 강하게 비판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합리적이고 시민적인 데 반해 ‘서양 속의 동양’인 독일과 이탈리아는 감정적이고 종족적이라는 이분법은 서유럽 중심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틀에서 이해한 민족주의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영국이나 프랑스에도 종족적 민족주의의 요소는 존재했다. 영국의 한 총리는 “신께서 어려운 일을 행하고자 하실 때는 영국인이 아니라 잉글랜드인을 부르신다”고 말해 뿌리 깊은 잉글랜드 중심주의를 드러냈다. 이와는 달리 감정적이고 후진적인 민족주의 국가로 지목된 독일의 사회민주당 정권은 프랑스의 이민정책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통합적인 이민정책을 펼쳤다. 이 것은 종족적이지 않은 민족주의이다.

또 민족주의는 특정 국가의 고유한 성격에서 비롯됐다기보다 국제관계의 산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근대 초기 영국에서는 에스파니아, 프랑스 등과의 대립을 통해 민족주의가 형성됐다. 한국의 민족주의가 대한제국의 위기와 식민지 경험을 거치면서 또렷해진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민족의 종족적 뿌리를 강조하는 입장에서 보면 민족주의는 오랜 역사를 지닌 자생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종족과 민족의 근원적 차이를 지적하는 입장에서 보면 민족주의는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지난 근대적인 현상이다. 민족에는 전 근대 시대의 종족에 담긴 문화적 논리와 근대국가 시민에 담긴 정치적 논리가 공존하는 셈이다.

저자는 근대의 시작과 함께 형성된 민족주의는 국적과 상관없이 종족적인 성격과 공민적 성격을 모두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미 만성질환이 돼 버린 민족주의를 당장 버릴 수도 껴안을 수도 없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당뇨병 같은 만성질환을 달래며 살아가는 것과 같이 민족주의를 길들여 인류의 미래에 기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결론내린다. ‘민족주의의 민주적 속성을 최대한 발화시켜 스스로 연소하게끔 하자’는 것이 이 책에 담겨있는 실천적 문제의식이다.(예진수기자)

조선일보(07. 04. 28) "민족주의는 근대 서양의 잘못된 발명품”

근대세계사의 주역은 민족과 민족국가다. 산업화와 국가간 교섭의 확대가 특징인 근대사에서 민족과 민족국가는 내적인 근대화와 외적인 국가간 경쟁의 주체였다. 그리고 민족이 역사의 기본단위라는 민족주의는 민족과 민족국가를 이끌고 가는 기관차였다. 이는 민족국가가 먼저 태동한 유럽과 북미는 물론 그들의 침략을 받으며 뒤를 따른 중남미·아시아·아프리카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민족주의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민족간 갈등을 유발할 뿐 아니라 세계화가 급속히 진전되는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민족국가간의 극심한 충돌로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은 더하다. 지난 50년 유럽연합을 건설하며 초(超)민족국가를 실험해온 유럽에서 민족주의는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다. 세계대전들의 도발자였던 독일은 이런 경향이 특히 심하다.

독일의 저명한 역사학자 한스-울리히 벨러(Hans-Ulrich Wehler)가 쓴 이 책은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저자는 민족이 근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먼저 지적한다. 민족주의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고안된 질서’라는 것이다. 하지만 민족이 무(無)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종족(種族)에 기반한 통치체제의 전통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강조한다. 이는 민족을 불변의 실재로 보는 1980년대 이전의 민족주의 연구와 가변적인 것으로 보는 그 이후의 민족주의 연구를 결합한 것이다.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직후인 1871년 1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빌헬름 1세의‘독일 황제 즉위식’은 독일 민족국가 수립의 상징적인 의식이었다. 가운데 흰 옷을 입은 사람은 비스마르크다. 푸른역사 제공

민족주의는 서구문화권의 발명품이다. 근대초기 구미(歐美)가 당면한 정치적 혁명, 종교적 갈등, 위계질서의 동요 등 구조적 위기들에 대한 해법으로 민족주의가 등장했다. 민족과 민족국가를 통해 통치질서를 재확립하고 대중을 통합하려는 것이었다. 스페인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일으킨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이런 움직임은 영국·미국·프랑스에서 모범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 세 나라의 근대화는 19세기 중반 이후 다른 나라들의 모방을 가져왔다.

이렇게 시작된 민족주의는 네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영국·미국·프랑스의 ‘통합민족주의’,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민족주의’, 동유럽·러시아·오스만제국의 ‘분리민족주의’,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독립한 나라들의 ‘전이(轉移)민족주의’가 그것이다. 뒤의 세가지는 상대적인 낙후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어적 근대화의 이념이었다. 이런 고통스런 근대화의 경험은 민족주의의 극단화를 낳았다. 민족과 민족국가를 상실할 수 있다는 위기감은 내·외부의 적(敵)과 이방인에 대한 적대를 가져왔다. 더구나 민족주의에 내재한 소명의식과 형제애는 타자(他者)를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것은 때로 ‘원수’에 대한 폭력의 행사를 정당화했다.

독일근대사에 대한 분석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독일에서 민족주의는 프랑스혁명의 여파로 1790년대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프로이센의 팽창 정책으로 독일 민족국가가 탄생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독일 민족주의는 공격성을 띠고 있었다. “프랑스를 때려 죽여라”는 선동이 지식인의 입에서 나올 정도였다. 1차 대전의 패배는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그 결과는 히틀러라는 극단적 민족주의자의 집권이었다. 2차 대전 패전 후 독일이 민족주의의 주술로부터 풀려나서야 독일의 번영은 찾아왔다.

저자는 근대세계의 성공, 즉 경제성장·입헌-법치국가·사회복지 등을 민족국가와 연결시키는 분석을 거부한다. 그것은 우연에 불과하며, 민족국가에 부당한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내부적으로 평화로운 시민공동체와 외부적으로 민족국가들끼리 협력하는 평화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따라서 이제는 민족주의 개념을 걷어내고 대신 헌법국가, 법치국가, 사회복지국가라는 보편적인 토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비(非)서구의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별로 비중을 두지 않는다. 일본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 민족주의의 토대가 되는 종족적 전통이 없었다. 이 때문에 정치지배 시스템이 불안정하게 됐고, 그 결과 개발도상국은 근대화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안정된 민족국가는 서양에만 존재한다”는 주장에서 비서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한국은 종족적 전통에서 출발한 민족주의를 토대로 근대국가 건설에 성공했다. 그러면서도 독일과 같은 공격성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이제 중국과 인도 등 다른 비서구 국가들도 한국이 걸은 길을 뒤따르고 있다. 이들의 역사적 경험까지 포괄하는 더 폭넓은 민족주의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원제 Nationalismus.(이선민 논설위원)


 
더 읽을 만한 책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책 중에서 시기적으로 앞서고 널리 알려진 것은 프랑스 철학자 에르네스트 르낭의 ‘민족이란 무엇인가’(책세상, 신행선 옮김)이다.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전한 여파가 가라앉지 않은 1882년 ‘이성(理性)의 사도(使徒)’ 르낭이 소르본 대학에서 강연한 내용을 담은 이 책은 민족을 종족적·언어적 실체가 아니라 주관적 귀속의식을 토대로 한 정치적 실재로 파악했다. “민족의 존재는 매일매일의 국민투표”라는 유명한 구절은 이 주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민족주의란 무엇인가’(창비, 백낙청 엮음)는 민족주의에 대한 세계 학계의 학문 연구 중 주요 성과들을 한데 담았다. 한스 콘, E H 카 등 민족주의 연구의 선구자로부터 어네스트 겔너, 앤터니 스미스, 톰 네언 등 현재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연구자, 그리고 제3세계의 민족주의론까지 망라하고 있다.



민족주의에 대한 대표적인 단행본은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창비, 강명세 옮김)와 인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나남출판, 윤형숙 옮김)다. 홉스봄은 민족과 민족주의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는 프랑스대혁명에 의해 처음 등장한 민족주의를 발전단계에 따라 태동기(1780~1870), 발전기(1870~1918), 극성기(1918~1950), 쇠퇴기(1950~)의 네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앤더슨의 책은 민족을 왕조국가가 쇠퇴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시기에 나타나는 문화적 조형물로 본다. 그는 민족주의가 중남미의 지배층이었던 크리올(유럽 이민자의 후예)에서 기원하여 유럽과 다른 지역으로 전파됐다고 주장한다. 

07. 07. 07.

О русском национализме

P.S. 개인적으로 민족주의 일반론 이상으로 러시아 민족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러시아에서는 종교철학자 이반 일리인(1883-1954)의 <러시아 민족주의에 대하여>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로 뜬다.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만큼이나 고려되어야 할 것은 '종교로서의 민족주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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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7-07 10:57   좋아요 0 | URL
저도 오늘 한겨레 보면서 윗 책 찜해놨어요. 두번째 책은 조선일보에만 소개된거군요. 민족주의에 관련된 몇몇 책들을 사놨었는데 아직 필을 못받아 못보고 있습니다. 아직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탁석산의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 외에는 살펴본게 없네요. -_-

로쟈 2007-07-07 11:25   좋아요 0 | URL
논란이 되는 주제이지만 저로서도 당장 흥미를 갖는 주제는 아닙니다.^^;

yoonta 2007-07-07 13:33   좋아요 0 | URL
rss로 로쟈님글을 바로 확인해서 보니 너무 편리하네요 ^^

비로그인 2007-07-07 14:35   좋아요 0 | URL
제국이 쓰러져간 자리에 미친 민족주의만 죽순처럼 나부껴! 제게는 가장 와닿는 말이군요. 근데 FTA적 전횡으로 치닿는 또 다른 제국의 형상 앞에 우리는 과연 어떤 평화의 제국을 꿈꿔야할런지, 꿈꿀수나 있을지 암담합니다.

로쟈 2007-07-07 22:41   좋아요 0 | URL
yoonta님/ 그게 뭔가요?^^;
쏠다님/ 꿈과 악몽은 때로 구별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더불어 우리가 그 '제국'과 '민족주의' 바깥에 놓여 있지 않다는 인식이 우선적이어야 한다고 보고요...

드팀전 2007-07-08 12:26   좋아요 0 | URL
장벽이 무너진 자리엔 모든 것이 장벽이다...라는 시인의 말이 생각납니다.^^

yoonta 2007-07-08 13:03   좋아요 0 | URL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dir_id=10801&eid=PwlZ4j4c2aKivflHiSlZl/iQyeHxRu5g&qb=cnNz

이글 읽어보시면 될듯합니다. 저는 설치형으로 했는데 컴퓨터 부팅하자마자 바로 로쟈님글 업데이트를 확인할수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