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유예됐지만 이 서재 또한 다른 곳으로 이사할 즈음이라 '다른 곳'이란 어구에 눈길이 갔다. 니콜 라피에르의 <다른 곳을 사유하자>(푸른숲, 2007)을 엊저녁 서점에서 보고 바로 손에 든 이유이다. 저자는 "다문화연구에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프랑스의 여성 사회학자라고 한다. 하지만 책은 딱딱한 사회학과는 다소 무관해 보이며 내가 가끔씩 손에 드는 전형적인 '프랑스산 에세이'이다.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라고 정의되는 우리식 '수필'보다는 훨씬 길고 무겁지만 동시에 활달한 사변을 자랑하는 장르로서의 에세이.
'길을 내며'란 서문에서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것은 "우리는 항상 다른 곳을 사유한다"는 몽테뉴의 문장이다. <수상록>(이 책의 원제가 바로 '에세이'이다!)의 '기분전환에 대하여'란 장에 나온다고(국역본 <나는 무엇을 아는가>에 수록돼 있으며 발췌본 <수상록>에는 빠져 있다). 그 장의 요지는 이렇단다.
"슬픔을 그대로 표출하는 것은 무모하고 괴로울 뿐 아니라 정작 슬픔을 덜어내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비탄에 잠긴 마음을 살며시 다른 데로 돌리는 편이 낫다. 슬쩍 다른 화제를 꺼내 생각을 유도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1563년 절친한 친구 라 보에티가 사망한 후로 오랫동안 슬픔에 잠겨 있던 몽테뉴는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학문과 여행에 더욱 몰두함으로써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기분전환을 '영혼의 병을 치료하는 가장 일반적인 처방'이요, 강박관념과 고정관념과 치명적인 열정에서 빠져나오는 데 특효라고 말한다."(9-10쪽)
그에 대한 저자 라피에르의 촌평. "몽테뉴는 불행에서 해방되기를 갈구하는 금욕적인 인물과는 딴판이다. 그에게서는 침울한 면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그저 상황이 호전되기를 바라고, 살 사람은 어찌 됐든 살자는 주의다.(...) 몽테뉴는 사고와 감정의 유연성이 인간 조건에 있어서 일종의 행운이자 묘수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유연성은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런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존재를 그리지 않는다. 단지 그 행보를 그릴 뿐."
책은 그러한 몽테뉴적 정신으로 충전된 저자의 지식인 유람기처럼 보인다. 뒷표지에 실린 김용석 교수의 추천사에 따르면, "몸의 이동으로 '실천의 사유'와 '사유의 실천'이 가능했던 '학문적 떠돌이'들의 역사적 사례들을 세심하게 짚어간다." 표지를 보면 그런 '학문적 떠돌이'로 발터 벤야민도 다루어지는 모양이고(찾아보기를 보면 250명 이상의 지식인들이 이 책에서 언급되는 듯하다).
흔한 유행어로 하자면 '유목'이고 '탈주'고 하겠지만, 차이라면 이건 '앉아서 하는 유목'이 아니라 실제로 '움직이면서 하는 사유'의 궤적이다. 그리고 '정주하지 않는 지식인의 삶과 사유'을 다루면서 그 모델/전거를 들뢰즈의 철학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몽테뉴의 에세이에서 찾는다는 것이 특징적이다(우리가 보기에 그렇다는 얘기다). 그 점이 마음에 든다(오늘 생일을 맞은 러시아 작가 푸슈킨 또한 몽테뉴주의자였다).
이 여름의 초입에, 호젓한 해변에 가보는 것은 아직 엄두도 못낼 형편이지만 '멀리 떠나자!'라는 유혹만은, 기분전환으로의 초대만큼은 거부하고 싶지 않다(그게 고작 '서재2.0'인가에 대해선 생각해볼 문제이지만). 나는 무엇을 아는가를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떠나야 할 필요가 있다. 사유는 언제나 다른 곳에서 시작한다...
07. 06. 06.
P.S. 책은 요즘 보기 드물게 가독성이 좋다. 우리말이 깔끔하고 안정감이 있다. 옥에 티라면 역자도 토로한 바대로 학술용어나 고유명사에 관련된 것들이다. "특히 이 책의 경우 옮긴이를 곤혹스럽게 한 부분은 학술 언어, 특히 학자들이 만들어낸 신조어의 번역 문제였다.(...) 이 문제는 책이 출간된 이후에 독자들의 지적과 재번역의 가능성으로 열어두고자 한다."(316쪽)에 기대어 내가 읽은 서문에서 지적하자면, 22쪽에서 벤야민의 대작 <이행의 책 Passagen-Werks>은 음역해서 <파사젠-베르크>라고 하거나 국역본을 따라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라고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의 남편은 '하인리히 불뤼커 Heinrich Blucher'는 그녀의 전기들에서 '하인리히 블뤼허'라고 표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