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고전 <향연>(문학동네, 2006)이 새롭게 번역돼 나왔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만화가 조안 스파르의 그림과 낙서가 보태져 있다는 것. 그러니까 좀 특이한 '일러스트레이트' 버전의 <향연>이고 그런 만큼 가장 접근하기 쉬운 '플라톤'이 될 듯하다. 게다가 재기발랄한 우리말로 옮겨져 있다고도 하니까 '고전 멀미증'을 가진 독자들에게 희소식이 될 듯하다. 물론 고전으로의 여행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에 한에서. 참고로, 자세한 리뷰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문화일보(06. 12. 08) 그림-낙서와 만난 향연, 플라톤이 술∼술 읽히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향연’은 그의 대화편 중 가장 아름다운 문체와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향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숙독한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고전이란 것이 항용 그렇듯이 ‘누구나 다 좋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면 ‘향연’ 역시 그런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 책은 전혀 다르다. 우리가 고전에 대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선입견들, 즉 딱딱하고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한순간에 날려버린다. 그럼, 기존의 ‘향연’과는 텍스트 자체가 다른가. 그렇지도 않다. 플라톤의 ‘향연’을 우리말로 옮긴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어떻게 손에 잡는 즉시 놓기 힘들 정도로 읽는 이를 빨아들이는 것일까.
그 답은, 조안 스파르가 거의 매 장마다 그려넣은 ‘그림과 낙서’ 때문이다. 유럽 만화계에서 뛰어난 아티스트로 주목 받는 조안 스파르는 프랑스의 니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에콜데보자르(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한 인물. 그의 기발한 독법(讀法)이 담긴 그림과 낙서가 2500여년 전의 ‘향연’을 고색창연한 고전에서 생기발랄한 ‘오늘의 책’으로 되살려놓았다.
‘향연’은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당시 그리스 사회의 유명인사들이 술잔을 기울이면서 각자 돌아가며 ‘사랑의 신 에로스’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전설 같은 이야기, 즉 원래 인간은 네 개의 손과 네 개의 발, 하나의 머리에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우스의 번갯불에 몸이 두 동강 나서 지금과 같은 신체를 갖게 됐다는 이야기도 ‘향연’에 나오는 것이다.
‘향연’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아리스토파네스는 “따라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게 됐는데 그 욕망이 바로 인간의 사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인가. 하지만 ‘향연’에선 너무나 진지하게 이에 대한 논증을 거듭 늘어놓는다. 그 중 하나는 ‘원래 남성과 남성이 한 몸이었다가 반으로 나뉜 남성은 남성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대목이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성인 남성과 소년의 관계가 단순한 사제지간 이상이었으며, 성적인 면모도 내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심지어 ‘향연’의 핵심인 소크라테스의 연설에서는 이같은 관계를 통해서만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까지 이야기한다. 아마도 ‘향연’처럼 동성애에 대해 편견 없이 다루는 고전도 없을 것이다.
‘향연’은 이어 기술의 원리로서의 사랑, 진리에 이르는 길로서의 사랑, 쾌락으로서의 사랑, 사랑 받는 이의 사랑, 사랑을 주는 이의 사랑에 대해 각 등장인물들이 장황하리만큼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예외없이 조안 스파르의 기발한 그림과 낙서가 따라붙는다. 조안 스파르는 플라톤 철학에 대한 어떠한 이론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시각으로서만 텍스트를 이해한다. 그는 등장인물들을 벌거벗은 채 엉켜 있는 동성애자로 그리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다. 또 소크라테스를 능수능란한 언변으로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의뭉스러운 늙은이’로 묘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같은 해석에 단순히 비아냥만 깔려 있는 게 아니다. 그의 기발하면서도 솔직한 발상은, ‘향연’의 등장인물들을 마치 우리가 바로 어젯밤 술자리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인물들인 것처럼 생생하게 되살려 놓고 있다. 또 하나, 이 책의 흡인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역자의 탁월한 번역이다. ‘향연’의 원 텍스트뿐 아니라 조안 스파르의 그림에 붙은 ‘낙서’까지 얼마나 재기발랄하게 우리말로 옮겨 놓았는지 절로 감탄하게 된다. 한마디로, 이 책에서 독자들은 딱딱하고 지루한 철학이 아닌, 부담없이 즐기고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철학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김영번 기자)
06. 12. 10.
P.S. 그간에 가장 많이 읽히던 <향연>은 박희영 역의 <향연>(문학과지성사, 2003)이다. 문고본에다가 최신 번역이어서 손에 들기 가장 좋다. 한데, 부분적으로는 번역이 정확하지 않다는 지적도 감안해야겠다(일반 독자에게는 크게 대수롭지 않겠지만). 더불어 만화책 <플라톤>(김영사, 2001)이나 <30분에 읽는 플라톤>(랜덤하우스코리아, 2004) 등도 부담없는 입문서. 부담을 원한다면, 남경희 교수의 <플라톤>(아카넷, 2006)을 손에 들어도 좋겠다.
새 <향연>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플라톤, 조안 스파르를 만나다'가 될 텐데, 만화를 잘 안 읽는 탓에 생소한 이름이지만 스파르의 책들은 국내에 다수 소개돼 있다.
그 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금붕어, 죽음을 택하다>(현실문화연구, 2002). 왠지 '철학적'이지 않은가? 품절된 걸로 나오는데, 다시 판을 찍으면 좋겠다. 22쪽 1000원짜리 책으로 '철학'을 떠올려볼 수 있는 물건은 흔하지 않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