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조선 - 16~18세기 조선.일본 비교
문소영 지음 / 나남출판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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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기와 자기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흙을 굽는 온도다. 도기는 섭씨 800-900도 정도의 낮은 온도에서 굽고 자기는 섭씨 13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굽는다. (중략) 도자기 원조 국가인 중국이 고화도 자기를 굽기 시작한 것은 7세기 무렵이었다. (중략) 신라 말에 장인들이 스스로 터득했든지 아니면 중국의 혼란기에 월주요의 장인들이 흩어져 고려로 들어와 자기기술을 전수했든지 간에 늦어도 10세기 후반에는 고려청자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중략) 16세기까지 자기를 만들 수 있었던 민족은 전세계적으로 중국, 한국, 베트남밖에 없었다고 하니, 10세기 안팎의 고려는 최첨단 과학기술을 소유한 나라였다고 자부해도 된다.-39-42쪽

조선에서 백자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중국 명나라의 백자가 소개된 덕분이었다. 명나라의 백자는 순수한 백자가 아니라 서양에서 ‘블루 앤 화이트’로 부르는 청화백자였다. 푸른색 안료(코발트)로 새하얀 도자기 위에 용이나 새, 중국 산수화 등을 그려 넣은 자기였다. (중략)중국에서 청화백자의 수출을 금지하자 조선 왕실은 직접 백자 생산을 지시했다. (중략) 청화백자의 몸통인 백자 만들기에 성공하자 15세기 중반, 세조 때부터 백자 위에 코발트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 제작에 본격적으로 들어간다. 즉, 조선의 백자는 원래 명나라의 청화백자와 닮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지 단지 하얗게 빛나는 백자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순백자가 많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중략) 코발트를 수입해 청화자기를 생산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조선 왕실은 국산 코발트를 발굴하려고 노력하 정도로 청화백자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 (중략) 그러나 전문가들은 청화자기 안료를 국산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노력은 실패했다고 분석한다. 세조와 예종 때를 지난 뒤에는 기록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아래에 계속)-51-58쪽

(위에서 계속)
조선 왕실과 사대부는 계속 푸른색 그림이 그려진 백자를 구하기 위해서 노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인들의 청화백자 사용을 법으로 금지했다. (중략) 조선 후기 즉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세계적인 도자기의 유행은 청화백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여러 가지 색으로 꽃이나 새 등 도안을 채색한 채색도자기로 진화했다. 일본식 채색도자기의 도약이었다. 18세기에는 채색도자기의 원조인 중국조차도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하기 위해 일본식 채색도자기를 모방해야 할 정도로 유럽에서 인기를 모았다. (중략) 백의민족의 이미지를 강조해주는 조선의 백자는 이런 세계적인 도자기 시장의 흐름에서 완전히 비켜난 결과에 불과하다.
(아래에 계속)-51-58쪽

(위에서 계속)
조선의 사치금지법이 아니었으면 조선에서도 채색자기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한 마디 더 추가하겠다. 일본에서도 1787년에 사치생활 금지법이 발효되었다. (중략) 중국도 명나라 등에서 종종 사치금지법을 내리곤 했다. 중국이나 일본 모두 유교의 세례를 받은 나라였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조선처럼 모두 사치를 금지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사치금지법이 조선에서는 비교적 확실하게 지켜졌던 반면 일본과 중국에서 잘 지켜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의 경제적 수준이 일본의 막부나 중국의 황실에서 백성들의 사치를 금지한다고 해도 지켜지지 않을 정도로 풍족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모든 백성들이 다 사치했다는 것은 아니다. 국가가 사치풍조를 막으려고 해도 상업이 발달하고 수공업의 수준이 향상되는 등 경제적 수준이 높아지면, 문화적으로 한 발짝 진보한 것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사치금지법 등이 일시적으로 상업과 수공업을 위축시킬지라도, 봄날 새싹이 돋아나오듯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51-58쪽

조선은 17세기에 회회청(코발트)을 구할 경제적 외교적 능력이 부족해 청화백자 생산을 중단하고 철화백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일본은 나가사키를 들락거리는 네덜란드와 중국인 상인들을 통해 코발트를 구해 청화백자를 만들고, 그뿐만 아니라 유럽에 수출했다. 일본은 유럽에 중국도자기를 모방한 ‘짝퉁’ 청화백자의 시장을 확보했고, 점차 그 수요를 늘려 나갔다. 그리고 18세기부터는 진정한 의미의 일본 도자기의 유럽 시장을 창출해냈다.(중략)
17세기 전세계적으로 청화백자가 유행이던 시기에 경제적 이유로 철화백자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조선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부터 짝퉁 청화백자를 주문받아 유럽에 수출했던 일본은 이후 완전히 다른 국부의 축적과정을 형성해나갔다. 일본 도자기의 유럽 수출이 메이지유신의 성공을 이끌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이다.17세기 조선의 철화백자는 물론 아름답다. 21세기의 현대적인 시선으로도 꽤나 멋지다. 그러나 철화백자의 아름다움 뒤에는 조선의 가난이 숨겨져 있다. -65-66쪽

신라시대 촌락문서에 기록된 442명의 주민 가운데 노비는 25명뿐으로 5.7%이다. 그때부터 700년쯤 흐른 조선 성종 때인 15세기 말에 이르면 노비의 수는 전체인구의 30%를 넘게 된다. (중략) 17세기 초반 경상도 산음현의 호적을 분석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양반은 23%, 양인은 60%, 천민은 18%였다. 즉 담세자가 60% 수준이었다. 왕실의 친인척과 관리들이 살았던 한성의 경우 신분별 인구비율은 양반 16%, 양인 30%, 노비 53%였다. 노비의 비율이 53%나 되는 것은 한성은 관리와 양반들이 거주하는 특수한 지역이고 이들의 시중을 드는 노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략) 노비가 20-30%에 이르는 인구구성 때문에 미국의 한국사학자 제임스 팔레는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도 노예제 사회(Slave Society)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30%를 넘는 조선의 노비 비율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제국의 수준으로 아시아의 다른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라는 분석이다. 사회의 발전 단계가 서구에서 바라보는 원시-고대-중세로 일률적으로 구성되지는 않겠지만, 팔레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은 중세가 없이 고대 노예제 시대에서 근대로 건너뛰기를 한 것이다. -146-147쪽

노비문제를 두고 조선 왕실과 양반은 대립했다. 조선의 왕실은 양인층이 노비로 몰락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또한 노비를 양인으로 확보하고자 애쓰기도 했다. 양인이 담세자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면 양반은 양인을 노비로 만들기 위해 양천교혼(良賤交婚)을 통해 그들의 자식까지도 노비로 만들고자 애썼다. 조선시대에 양인은 양인끼리만 결혼해야 했다. 그러나 양반들은 자신의 재산을 늘릴 요량으로 양천교혼을 일삼았다. 양반에게 노비는 토지와 더불어 중요한 재산이었던 탓이다. 양인을 확보하려던 조선의 왕실은 양반의 이해관계 때문에 번번히 양반들의 범법행위를 눈감아줘야 했다. 조선 왕실은 양천교혼 금지령을 자주 내렸지만, 양반사회였던 조선에서 양천교혼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양천교혼 금지령을 자주 내렸다는 것은 그만큼 양반들이 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17세기 울산호적을 보면 양반의 노비 중 솔거노비의 94%가 양인 여자와 결혼했다.
-148-149쪽

일본 사학자 사카타 히로시가 경상도 대구 지방의 호적을 분석한 결과 1690년 9.2%에 불과하던 양반은 1858년이 되면 70.3%로 160여년 만에 수직 상승한다. 같은 시기 양인의 인구비율은 53.7%에서 절반 수준인 28.2%로 뚝 떨어진다. 담세자들이 20%대로 줄어든 것이다. 노비 등 천민은 37.1%에서 1.5%로 비중이 떨어졌다. 이는 조선후기 해방노비가 급증한 덕분이다. 드라마 ‘추노’처럼 도망 노비가 속출하기도 했는데,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충분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사회적 경제적 토대가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50쪽

공식적으로 조선은 1886년 노비 세습제 폐지령을 내렸고, 1894년에 노비제도는 종말을 맞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에서야 비인간적인 세습 노비가 사라진 상황은 이웃나라와 비교해 보면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900년대에 이미 노비제를 폐지했다. 다른 형태의 천민제도인 게닌(下人)이 나타나 1871년 해방령이 내려질 때까지 지속됐지만, 공식적으로 노비제는 10세기에 폐지됐다.
중국에서는 노비가 세습되지 않았고 옹정제 때 마지막으로 세습적인 천민집단이 거의 없어졌다. 18세기 초 옹정제가 해방시킨 것이다.
(아래에 계속)-151쪽

(위에서 계속)
옹정제는 1723-1731년에 걸쳐 중국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사회적 법외인’으로 천대받고 차별받았던 집단들을 해방하는 칙령을 잇따라 선포했다. 결혼식이나 상가에서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산시 지방의 노래하는 사람들, 저장 지역의 천민들, 안후이 지역의 세습적 하인들, 장쑤 지역의 세습적 걸인들, 동남 해안지역 뱃사공, 굴채취와 진주조개 어부로 살아가는 사람들, 저장성과 푸젠 성 경계지방에서 삼과 대마와 쪽물 재료들을 모아 살아가는 사람들, 가내 노비들이 그 대상이었다. 옹정제는 이들 천민 집단에도 염치있는 마음을 가지고 스스로 고결한 인간이 되려고 하는 뜻있는 인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신분해방의 기회를 주고, 천업을 그만 둔 자손에 대해 과거응시 자격도 부여했다.-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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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3-10-14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난 조선>이라는 제목은 다분히 필자의 비분강개가 반영된 것이고, 냉정하게 말하면 <가난한 조선>이 적당할 것 같다. 우리들이 가진 낭만적 이미지와 달리 역사적 기록들을 통해 연구한 조선은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는 것과, 그 가난의 원인이 지배계층이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급급하여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데에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때때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비분강개와 애국심이 쓴웃음을 자아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서술된, 한번쯤 읽어볼 만한 좋은 책이다.
 
교과목별로 정리한 직업 백과사전
무라카미 류 지음, 하마노 유카 그림, 김남미 옮김 / 에듀멘토르 / 2013년 2월
품절


옛날부터 시를 쓰는 것으로 생활하는 것은 거의 무리였지만 요즘은 특히 더 어렵다. 기본적으로 시는 상징적인 것이다. 단어의 단순한 조합으로 보편적인 것을 상징한다. 한 국가가 근대화되는 과정에는 전쟁, 내란, 공황 등 반드시 격동기가 있고 민족과 사회에 공통된 슬픔과 기쁨, 어떤 특정한 감정이 생겨난다. 뛰어난 시인은 몇 줄의 시구로 그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표현한다. 격동기에서 완숙기로 접어들면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슬픔과 기쁨을 잃게 된다. 요즘에는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국민 모두가 흥얼거리는 노래가 없지만, 그것은 작곡가와 작사가와 가수들이 태만해서가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공통된 슬픔과 기쁨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즉 노래와 마찬가지로 시를 요구하는 때는 사회의 격동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35-136쪽

소설가로 데뷔하고 나서 텔레비전에 출연할 때마다 언제나 위화감과 경계심을 느꼈다. (중략) 나는 나 자신의 성격과 본래의 내가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 방방곡곡의 거실에 전해지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19380년대의 끝 무렵부터 3년 반 정도 토크 프로그램의 사회를 본 적이 있는데,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중략)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는 아무리 꾸민다고 해도 아무리 연기를 한다고 해도 출연자의 본래 모습이 나오게 마련이다. 즉 그 사람은 정신적으로 알몸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토크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내가 선택한 방법은 할말이 없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텔레비전의 원칙에 위배된다. 텔레비전에서 침묵은 시청자의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것이므로 가장 피해야 할 일이다. 시청자를 어디까지나 수동적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텔레비전이기 때문이다. (중략) 텔레비전은 강력한 미디어이다. 그것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며, 무시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 대단한 정보 전달력을 의식하면서 위화감과 경계심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텔레비전을 대하는 기본 자세이다.-182-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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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 하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2
박지원 지음, 길진숙.고미숙.김풍기 옮김 / 그린비 / 2008년 2월
구판절판


고려보에 도달해 보니 모두 지붕을 이엉으로 엮은 초가집들이라 무척 초라한 느낌이 들었다. 묻지 않고도 이곳이 고려보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병자호란 발발 이듬해인 정축년(1637년)에 끌려 왔던 이들이 마을 하나를 이루었던 것이다. 중국 동쪽 편 천여 리에 논은 없는데, 이곳에서만은 논이 있다. 떡과 엿 등이 조선과 흡사했다. 이전에는 사신 일행이 당도해서 하인배들이 술이나 음식을 사 먹을 때 값을 받지 않는 일도 더러 있었다. 아낙네들도 내외를 하지 않고, 고국 이야기가 나오면 눈물짓는 이도 적지 않았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점차 잇속을 챙기려는 하인들이 생겨나 술과 음식을 먹고도 값을 치르지 않으며, 그릇이며 의복까지 토색(돈이나 물건 등을 억지로 달라고 하는 것)하기도 하였다. 주인이 고국의 옛정을 생각하여 까다롭게 굴지 않으면 틈을 노려 도둑질을 일삼곤 하였다. 이런 탓에 고려보 주민들은 차츰 고국 사람들에 대해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사신 일행을 만나면 술과 음식을 감추어 두고 잘 팔려고 하지 않았고, 사정사정해야만 겨우 팔되 바가지를 씌우거나 선불을 요구했다.
(아래에 계속)-48-49쪽

(위에서 계속)
그럴수록 하인들은 온갖 속임수를 동원해 사기를 침으로써 분풀이를 하고, 그러다 마침내 서로 원수를 대하듯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을 지날 때면 일제히 소리 높여, "이놈들아, 네놈들 할애비가 오셨거든 어찌 나와서 절을 하지 않느냐"고 욕하면, 고려보 사람들 역시 우리들을 향해 맞받아친다. 이런 지경에 도리어 우리는 이곳 고려보 풍속이 틀려먹었다고 욕을 해대니, 이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48-49쪽

호질 후지

연암 박지원이 말한다.
이 글에는 비록 지은이의 성명은 없으나 아마 가까운 시기에 중국 사람이 비분강개를 이기지 못하여 지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운세가 긴밤의 어둠으로 접어들면서 오랑캐의 재앙이 맹수보다도 사납다. 선비들 가운데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는 글귀나 모아서 세상에 아첨을 해대는 형편이다. 이들이 하는 짓이란 무덤을 파헤치는 것과 비슷하여 시랑조차도 잡아먹기를 달게 여기지 않을 정도이다. 이제 이 글을 읽어 보면 말이 대부분 이치에 어긋나고 그 뜻은 거협, 도척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천하의 뜻있는 선비라면 어찌 한시라도 중국을 잊을 수 있겠는가.
(아래에 계속)-63-65쪽

(위에서 계속)
지금 청나라가 세상을 다스린 지 겨우 4대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 통치자들은 모두 문무를 겸비하고 장수를 누렸다. 지난 백 년은 태평스런 시대로서 천하가 두루 편안하고 조용했다. 이런 상황은 한, 당 시절에도 없었던 일이다. 이렇듯 평화를 유지하면서 치적을 이루어가는 뜻을 살펴보니, 이 또한 하늘이 내린 제왕이 아닌가 싶다. 옛날 누군가가 일찍이 하늘이 순순히 명령한다는 말씀에 의문을 느껴 맹자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맹자께서는 분명히 하늘의 뜻을 체득하셔서 말씀하셨다.
"하늘은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과 일로써 보여 주신다."
나는 언젠가 이 대목을 읽다가 강한 의혹이 들어, 감히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행동과 일로써 보여 주신다면, 오랑캐가 중화의 문물을 변개시키는 것은 엄청난 치욕이다. 그러니 저 백성들의 원통함이 어떠하겠는가. 또 향기로운 제물과 비린내 나는 제물은 각기 그 덕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니, 그렇다면 귀신들은 대체 어떤 냄새를 찾아오시겠는가."
(아래에 계속)-63-65쪽

(위에서 계속)
그런 탓에 사람이 처한 입장에서 본다면, 은나라의 우관이든 주나라의 면류관이든 다 나름의 때를 따라 마련된 것일 뿐이다. 유독 청나라 사람의 홍포에 대해서만 꼭 의심을 던질 이유가 없다. 이에 그동안 하늘이 정한다는 입장(天定)과 사람들이 뜻이 우선이라는 견해(人衆)가 유행하였고, 하늘과 사람이 서로 관련이 있다는 원리(人天相與)는 도리어 후퇴해서 기수(氣數)의 형세에 따르게 되었다. 현실 세계를 옛 성현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부합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곧장 천지의 기수가 이렇구나 한다. 슬프다! 이것이 정말 기수의 문제란 말인가.
안타까운 일이다. 명마라의 왕택(王澤)은 이미 메말랐고, 중국의 뜻 있는 선비들도 변발로 머리를 바꾼 지 백 년에 세월이 흘렀다. 그럼에도 자나깨나 가슴을 치며 명나라 황실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인 연유인가. 차마 중국을 잊지 못해서일 것이다.
(아래에 계속)-63-65쪽

(위에서 계속)
그런가 하면, 청나라가 스스로를 도모하는 방식도 어설프기 짝이 없다. 과거 오랑태 출신 왕조의 마지막 임금들이 늘 중화를 본뜨다가 쇠망하고 만 경험을 경계하여, 철비를 새겨서 전정에 묻었다. 그랬으면서도 스스로는 자신들의 의관을 부끄러워하면서 오히려 강약의 형세에 마음을 쏟으니 이 얼마나 어릿거은 일인가. 문왕의 지략과 무왕의 공렬로도 도리어 은나라 말기의 쇠망을 구제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사소한 의관제도를 굳이 고집할 필요가 있읋가. 만약 싸움에 편리한지 여부를 가지고 그 의관을 살핀다면, 북쪽과 서쪽 오랑캐의 복장인들 전투용 복장으로 선택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서북 오랑캐들로 하여금 중국 풍속을 따르게 할 수 있어야 진실로 강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온 천하의 인민들을 욕된 구렁에 몰아넣고 홀로 호령하기를, ‘너희들이 잠깐 수치를 참고 우리의 풍속을 따른다면 진정 강하게 될지니’라고 하지만 그렇게 해서 정말 강해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래에 계속)-63-65쪽

(위에서 계속)
설령 자기 복장을 강요한다고 해서 저 신시, 녹림의 사이에 눈썹을 붉게 물들이거나 머리에 노란 두건을 둘러서 스스로 다른 이들과 구별하고자 한 것처럼 되지는 못할 것이다. 가령 어리석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쓰고 있던 홍모를 벗어 땅에 내팽개친다면, 청나라 황제는 앉은 자리에서 천하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지난날 스스로 강하다고 자부하던 것이 도리어 쇠망의 실마리가 된다면, 철비를 세워 후세에 교훈으로 삼고자 한 일이 참으로 부질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이 글이 원래는 제목이 없었는데, 그 속에서 ‘호질’이란 두 글자를 뽑아 제목으로 삼아 중원의 어지러움이 맑아지는 날을 기다리고자 한다.
-63-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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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시 2 - 석양에 빛나는 감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장세연 옮김 / 손안의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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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가 전속신청서를 냈어. 자네, 모리에게 뭔가 들었나? 전속 희망처는 오오시마(大島), 니이지마(新島), 미야케지마(三宅島), 하치조지마(八丈島), 오가사와라(小笠原)...."
고다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역시’라는 생각이었다. 몇 달 전이었다면 화가 났겠지만, 동료의 심정을 헤아려 줄 마음의 여유가 지금 자신에게 없다는 것이 먼저 절절히 느껴졌다. 그러나 ‘역시’라는 생각 주변을 별다른 형태도 없는 분한 마음이 느릿느릿 소용돌이쳤다. 원래라면 전속신청서는 주임인 고다나 아즈마에게 제출해야 하는데, 모리가 직접 하야시에게 건넸다는 것도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자신보다 어린 부하가 조직 내에서 자신의 몸을 둘 방향을 한 벌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충격이었다. 저 상승지향 덩어리 같았던 모리가 조직의 현재와 자신의 능력이며 성격을 생각하고, 생활의 검소한 안정을 생각하고, 누구와 의논하는 일도 없이 혼자서 고민한 끝에 미래의 승진이라는 길을 버렸다는 건가. 그런가, 저 모리가 섬으로 간다는 건가? 그럼 나는, 히노데 부두에서 종이테이프나 던지며 배웅하는 것인가?-177-179쪽

집이 있는 38동에 도착하니 1층 우편함에 있어야 할 하루치 조간과 석간이 보이지 않아 가노 유스케가 들렀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께 미토에서 본 옛 처남이 일부러 걸음을 했다면, 짐작 가는 용건은 하나였다. 하치오지 서에 들어온 불시 감사에서 들킨 관련조회 부정이, 또다시 전광석화처럼 그의 귀에 들어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전화로 호통을 치면 끝날 것을 옛 처남은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존재 때문에 기요코와 옛 매제의 관계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이미 사라졌을 촛불을 고다가 없는 사이에 다시 피워 올리기 위해서 걸음을 하는 것이었다. 각각의 용건은 전부 그것의 구실이었다. 그것은 이미, 어느 정도는 쌍둥이 중 다른 한쪽이라는 입장에서 발현하는 특별한 심상이라고 해도 태반은 가노 유스케라는 남자의 감정이 어떠한가의 문제였기에, 단적으로는 여자보다 다루기 ‘번거로운’이라는 데서, 고다 자신의 머리도 정지해 버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중략) 불을 켜니 주방 테이블 위에 신문과 복사용지 한 장이 있었다.
(아래에 계속)-181-189쪽

(위에서 계속)
B4사이즈의 용지는 하치오지 서 형사과의 문서건 명부를 복사한 것이었다. 어제 아침, 고다가 거짓 번호를 매긴 문건 중 다이요 정공의 총무부장에 관한 조회처가 실려 있는 부분의 옆에는 "모처로부터 입수. 할 거면 좀더 능숙하게 해"라는 옛 처남의 갈겨쓴 글이 있었다. ‘모처’는 불시 감사를 담당한 1계의, 경찰청과 이어져 있는 누군가인가? 복사물은 하야시에게 전해진 것과는 다른 경로로, 눈짓 한 번으로 몇 군데의 손을 거친 후 봉투에라도 넣어져, 검찰합동청사의 옛 처남의 책상으로 전해졌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고다는 정관계의 거대한 그물망이 쳐진 권력기구의 한 구석에서, 먼 친척의 사소한 죄를 왈가왈부하는 괴문서가 날아다닌다는 시시함에 감명을 받고, 그곳에 있는 가노 대신 어이없어했을 뿐이었다. 확실히 그가 남긴 말대로 ‘할 거면 좀더 능숙하게’ 해야 했다. 준법정신과 함께 지금까지 살았을 남자가 하는 말이니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그에 대한 빈정거림도 실망도 힘없이 끊었다가는 이내 진흙 같은 한숨에 녹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래에 계속)-181-189쪽

(위에서 계속)
아니, 아무리 가노 유스케라도 역시 화가 났을 거라고 잠시 생각을 고쳐 보기도 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제는 교정도 할 수 없는 이해하기 어려운 타인과, 그 타인이 자신의 감정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거듭 실망을 해도 여전히 끊어내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여동생 기요코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그런 불분명함을 타인인 남자에게 말하려다 못했던 자신의 그런 불분명함을 타인인 남자에게 말하려다 이루지 못한 것, 그것을 유스케는 화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直裁인지 韜晦인지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소유자와 지금도 만남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라 생각하자, 마지막에는 또 여자보다 ‘번거로운’ 이라는 것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니 뭔가 실망하고, 단념하고, 어느 날 결단하더니 냉큼 남자 둘을 버리고 간 기요코에 비하면, 남겨진 남자 둘의 미련이나 집착은 눈뜨고 봐줄 수 없다는 얘기일 뿐이다.
(아래에 계속)-181-189쪽

(위에서 계속)
(중략) 고다는 차례차례 떠오르는 기요코의 모습이 굉장히 흐릿해졌다는 사실에 새삼 큰 충격을 받으며, 위스키의 힘을 빌려 계속해 생각했다. 자신은 왜 결혼을 한 것인가? 왜 기요코였나? 왜 파탄이 난 건가? 11년 전 봄, 갑자기 수식이라도 하나 풀렸다는 얼굴로, 우리들 결혼해요 하고 기요코가 말을 꺼냈다. 그때 고다는 너와 난 어울리지 않아 하고 대답했는데, 그것은 본심에 충실한 것이었다. 또한, 신중함이 어느 정도 결여된 기요코의 돌진에는 오빠 유스케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간단히 설명하기 어려운 밀착된 관계로부터 도망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 그래서 상대는 꼭 자신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고다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튼 스물셋의 남자가 보는 인생의 모습에는 한계가 있었고, 친형제도 없는 고독을 메우는 데 결혼은 가장 가까운 선택지였다. 뭔가가 일그러졌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결국 알지 못한 채, 마지막에는 결혼하면 매일 기요코를 안을 수 있다는 정도의 애매한 희망이 이긴 것이다.
(아래에 계속)-181-189쪽

(위에서 계속)
다만 형사과에 배속된 지 얼마 안 된 신참 형사와 석사논문과 박사논문 준비로 바쁜 학생의 조합은, 3일에 한 번 얼굴을 마주칠 수 있을까 말까 한 현실이었고, 거의 생활이라고도 할 수 없는 생활이었다. (중략) 아니, 실제로는 사소한 충돌은 몇 가지나 있었고, 그 하나하나가 서로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더했던 점만은 세상 사람들과 비슷했다고 고다는 생각을 바꾼다. 어떤 계기로 싸움을 하게 되었을 때, 어두운 주방 의자에 돌처럼 앉아있던 기요코의 등. 혹은 며칠 만인가 돌아왔는데 기요코가 없던 한밤의 집의 오싹한 어두움. 부부가 모두 집을 비우기만 해서 곰팡이가 핀 욕실. 거둬들이지 않고 발코니에서 젖어 있던 세탁물. 아니, 어느 순간 자신은 기요코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마음이 끓어오른 그 순간의 구토감이야말로 ‘절정’이었던가. 아니, 절정은 그후 기요코에게 연구자 애인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찾아온 역겨운 안도감 쪽인가. 아니면, 이미 처음부터 무리였다는 술회가 들어갈 여지도 없던, 자신의 냉혹감 쪽인가.
(아래에 계속)-181-189쪽

(위에서 계속)
아니, 냉혹할 뿐이라면 그나마 나았다. 한 여자에 대한 감정이 육체에서 태어나 육체로 끝난 것은 결국 자신이 그것을 바랐다는 얘기라며 고다는 더욱 생각해 보았다. 사실 자신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게 아니라, 오히려 가장 잔혹한 것을 바란 것일지도 모른다. 소극적인 듯이 굴며 자신의 욕정만을 채우고, 그 이상의 것은 거부하며 받아들이지도 베풀지도 않앗다. 그저 자신의 자의식을 지킴으로써 간신히 상식적인 사회인의 얼굴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나라는 남자였다. 그렇다면, 기요코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고, 기요코 도한 빠른 시간에 그렇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어느 순간 스스로 단념하고 떠난 것일지도 모른다.-181-189쪽

요즘 무료하게 <신곡>을 다시 읽으며, 생각한 것이 있어. 단테를 이끄는 것은 베르길리우스이지만, 자네가 어두운 숲에ㅔ서 눈을 떳을 때 만난 것은 사노 미호코였어. 단테가 "당신이 사람이든 그림자이든, 나를 도와주십시오"하고 베르길리우스를 부른 것처럼, 자네는 정신없이 그녀에게 말을 건 거야. 그리고 그 이후부터 그동안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며 방황해 왔던 자네가 지금, 淨化에 대한 의지의 출발로써 통한과 공포의 단계가지 온 것이라면, 거기까지 인도해 준 것은 사노 미호코이자 노다 다쓰오였던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그건 그렇고, 나도 인생의 중반에, 이미 오래 전부터 어두운 숲을 헤매고 있지만, 아직 불러 세울 만한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네.
10월 15일. 가노 유스케(加納祐介).-360-3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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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3-01-28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리야.... ㅠㅠ. 난 모리도 되게 좋았는데, 섬으로 가다니 쇼크. 그래, 수사1과 수라장에서 고생하느니 그게 더 나을 수도 있어. 출세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자연 속에서 맘편히 살려무나.
 
조시 1 - 석양에 빛나는 감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장세연 옮김 / 손안의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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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토까지 약 한 시간 반, 상쾌하다고는 하기 어려운 시간을 보낸 끝에 도착한 옛날 집의 잘 정돈된 넓은 현관 마루에, 가노 유스케는 명주로 만든 우아한 약식 기모노를 입고 서 있다. (중략) 둘 다 모두 18,9세였던 시절부터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몇 달 연장자라든가, 교양이며 가문 같은 사회적 기반의 차이 등을 이유로 들며 고다의 비호자를 맡아 왔고, 지금은 그것이 습성이 된 영원한 귀인이자 형님인 가노 유스케였다. (중략) 잘 닦인 복도와 창, 문의 윤기, 빛바랜 노송나무의 짙은 갈색, 매년 새로 칠하는 장지문의 흰색, 채광창의 조각에 쌓인 먼지의 깊은 색, 안뜰의 이끼와 물그릇의 물 냄새, 서고에 쌓인 장서들의 냄새. 그 어느 것이나, 자신과는 인연이 없는, 삶이나 전통이라든가 혈통이라든가 움직이기 어려운 현실이 있다는 것을 젊은 고다로 하여금 느끼게 했다. 고다 자신은 그것에 대해 어떤 경의를 표한다는 형태로밖에는 반응하지 못했다. 자신이 동화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아래에 계속)-410-422쪽

(위에서 계속)
(중략) 하지만 목욕을 하고 유카타로 갈아입은 무렵에는, 자신도 이제는 어딘가에 정착해야 할 텐데 하는 쪽으로 생각은 옮겨졌고, 이내 그 생각이 너무나 현실성이 없어 질리던 차에, 툇마루 쪽에서 "어이, 토마토를 차게 해 뒀어!" 하고 부르는 옛 처남의 목소리가 울렸다. 옛 처남은 자신의 방에 접한 툇마루를 활짝 열어젖히고 위스키를 준비하고 있었다. 관리인 부부의 밭에서 딴 토마토와 오이가 얼음이 든 통에 담겨 있고, 풍로 위의 석쇠에는 역시 얻은 것이 틀림없는 가자미와 대합이 얹어져 있다.(중략)
"그런데 건설회사 뇌물수수사건 쪽은 여름휴가인가?"
"여름휴가라고 할까, 중간휴가라고 할까. 나가타초를 의심병으로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아래에 계속)-410-422쪽

(위에서 계속)
옛 처남은 너무나도 특수검사다운 말투로 슬쩍 넘겼다. 10년 전에는, 마치 책에 손발이 자란 듯한 모습의 그가 지검 내부에 있는, 소득 없는 권력 다툼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어느새 정체를 알 수 없는 모습은 물론 두꺼운 얼굴까지 어엿하게 몸에 익히고 있다. 적어도 사회적으로는 반석같은 가노 유스케였다.
"그래서, 네 쪽은 아직 하치오지 살인 사건인가?" 하고 물어와, 고다는 "뭐, 그렇지" 하고 대꾸했다.
"막힌 거야? 얘기라면 들어줄게."
"싫어. 위스키가 맛 없어져."
"그보다, 도박장 같은 곳은 나가지 마."
예상했던 말이 나왔다. 지검 내부의 은밀한 권력 다툼 속에서, 한 번은 친척이었던 형사 한 명의 신변까지 이야깃거리가 되어 날아다니고, 옛 처남의 귀에 들어간다. 일상적인 일이기는 했지만, 본 적도 없는 누군가의 악의며 중상보다도 옛 처남에게 알려지는 것이 신경을 거슬렸다.
(아래에 계속)-410-422쪽

(위에서 계속)
(중략)옛 처남은 "그럼 마시자" 하고 새로운 위스키를 두 개의 잔에 부었다. 기요코와 이혼한 이후, 어느 쪽이나 서로의 신경을 서슬리는 곳까지는 건드리지 않는 습관이 들어, 누군가가 그만두자고 하면 그만둔다. 마시자고 하면 마신다. 이 정도면 두 사람은 꽤나 어른이 되었다고 할 만했다. 그렇게 다시 마시기 시작하자 옛 처남은 이번에는 고다의 왼손을 잡고 손금 보기를 시작했다. 잠깐 동안, 그만둬라, 싫다 하며 아이 같은 실랑이가 이어졌다.
"봐, 요전에 봤을 때보다 꽤나 주름이 늘었어.....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뭔가 계속 생각하고, 고민을 담아두면서 가만히 움츠리고 있는 아이의 손이야."
고다는 "원숭이도 고민은 한다" 하고 말하며, 이번에는 그가 옛 처남의 손을 쥐고 들여다보았다. 역시 가는 주름이 가득 한 섬세한 손바닥이었다. 그것도, 기요코와 매우 비슷한 손바닥이다.
(아래에 계속)-410-422쪽

(위에서 계속)
그것 봐라. 남들이 모르는 고민의 깊이라는 의미라면, 이 남자는 자신보다 훨씬 위일 터다. 그리고 그 눈. 기요코와 똑같은 눈. 본가의 깊이 있는 고요함 속에서, 쌍둥이밖에 알 수 없는 은미한 정념을 담고 있던 남매의 눈. 기요코와 고다의 사이에서, 이성의 지휘봉을 휘둘렀지만 실은 남모래 두 사람에 대한 질투의 불꽃을 태우던 남자의 눈. 아무리 이성이라는 덮개를 씌워도, 반드시 애증과 고뇌의 소양이 떠오르는 눈.
고다는 자신과 상대, 서로에 대한 풀어낼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를 인정하며, 비틀어 뭉개고 싶은 마음으로 자신의 손 안에 있던 또 하나의 손을 꽉 쥐고, 그리고 뿌리쳤다. 하지만 그때 처남은 전혀 다른 것을 생각했음에 틀림없는 것이, 조금 사이를 두고 너무나도 그다운 방식으로 마음을 숨겨 보인 것이었다.
(아래에 계속)-410-422쪽

(위에서 계속)
"통한은 改悛의 의식의 시작이니, 기뻐하면 된다. 갑자기 영혼을 덮치는 의지야말로 淨化의 유일한 증거라고 이야기한 단테의....."
"스타티우스가,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에게 한 말이지. 연옥의 몇 번째인가의 회랑에서."
"하지만 정말 의지의 문제일지 어떨지."
옛 처남은 스스로 말을 꺼내 놓고선 그답지 않게 말을 흐렸다. (중략)
"자네에게도, 의지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있나?"
"눈앞에 있는데."
"그런 진지한 얼굴로 말하지 말아 줘. 흠칫하잖아....."
고다는 그다지 정확하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아래에 계속)-410-422쪽

(위에서 계속)
새벽 3시 무렵, 옛 처남은 먼저 침대에 드러누웠다. 툇마루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고다는 스물한 살의 가을에 그 침대에서 기요코를 처음 안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가노 유스케가 사법시험의 3차 구두시험을 위해 도쿄에 남고, 2차에서 떨어진 고다는 기요코가 권하는 대로 이 집에서 연휴를 보냈다. 기요코와 둘만 있게 된 첫 기회였다. 고다가 원하고 기요코가 응하는 형태로 서로를 안았을 때, 둘이서 이제부터 시작될 미래의 정신적 修羅場을 예감한 것은 각자의 입장에서 유스케를 따돌린 것에 대한 통한의 마음과 전혀 상관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남매의 인연이나 남자 사이의 어떤 종류의 친밀한 인연을 단숨에 와해시켰던 그 침대에서, 자신이 설 곳이 없어진 점이나 질투 같은 것과 홀로 타협해 오던 남자가 지금은 느긋하게 팔다리를 내던지고 잠들어 있다. 그리고 그를 도다시 배신하며 이제는 기요코가 아닌 여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410-4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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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3-01-28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꿉친구에게 밀려 이번에는 출연이 적었던 가노 검사님의, 양보다 질로 승부하는 심야의 기모노 씬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