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무늬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올 한 해 읽은 책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를 읽은 밤엔 흥분으로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 잠이 안 왔다. 이제껏 "국어"에 대해 들은 수많은 말 중에 그의 것만큼 나를 매혹시킨 것은 없었다. 얼마 전 올해 대학생이 된 어린 친구가 '추천 도서'를 물었을 때, 나는 "내가 스무살 때 이글을 읽었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 것 같아."라는 말을 붙여 <감염된 언어>를 소개해 주었다. (실은 <감염된 언어>에 대한 서평을 쓰고 싶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반 년전 읽었을 때 바로 써 두지 않은 게 후회된다.)

오늘 읽은 두 권의 책 <바리에떼>와 <자유의 무늬>에는 <감염된 언어>만큼의 감동은 없었다. <바리에떼>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1부에 잠깐 나온 독도 얘기였는데 겁많은 그답게 신변잡기 사이에 눈에 안 띄게 숨겨 놓아 흥분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어지는 술 얘기 여자 얘기는 그냥저냥이었고, 3부의 시인 얘기에 이르러서는  워낙 내 관심 영역을 벗어나서  휙휙 넘길 도리밖에 없었다. 신문과 주간지 컬럼을 모은 <자유의 무늬>는 소재가 평이해서 이해하기 쉬웠지만, 매체의 성격상 글들이 다 짧아 확 빨려들어갈만한 데가 없었다. <토지>가 너무 길어진 대중소설에 불과하고 <태백산맥>이 좌익집단주의고 하는 대목에서 눈이 번쩍 뜨였지만, "이런 소리 하는 사람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가 결론이어서는 피식 웃고 넘어갈 수밖에. 역시 이 아저씬 겁이 많아. 그 외에 기억에 남은 건 장애인 얘기랑 국어선생이라면... 이라는 글이랑(애들의 지적 수준을 대단히 크게 오해하고 있는 실현불가능한 판타지지만) '인터네셔널 가'에 대한 것. <바리에떼>보다는 <자유의 무늬>가 나았다 싶어 이쪽으로 서평을 쓰러 들어왔지만, 별점 세 개를 줘야 하나 네 개를 줘야 하나 한참 망설였다.

그럼에도 결국 네 개 클릭을 결심한 이유는 이  아저씨가 '좋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는 이쁜 소리를 한다. 그는 자유의 적들을 민감하게 분별해 내는 정치적 안목과 묻혀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골라내는 심미적 안목을 가지고 있으며, 지성과 교양을 추구하면서도 소수자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는 사람이다. 때때로 그가 하는 얘기에 동의하지 못할지라도 (예를 들어 책표지에서 저자 약력을 빼는 게 좋다는 생각에 나는 동의 못하겠다. 나는 내가 읽은 책의 저자가 어느 학교에서 무슨 공부를 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매우 궁금해 하는 사람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고, 성균과대 법대를 나와 서울대에서 언어학 석사, 파리대학에서 언어학 박사를 했고, 한국일보, 시사저널, 한겨레에서 일했다는 고종석의 경력은 고종석을 이해하는 데 퍽 도움이 된다.) 그런 말을 하는 그의 마음은 이해가 간다. 그의 주장에는 일관성이 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그 이쁜 소리들을 이쁘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의 책은 독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 햇살 좋은 오후 예쁜 서양식 테라스에서 달콤한 케이크를 곁들여 낸 차 한 잔 같은 서비스 말이다. 그는 예의 바른 주인이어서 웬만해서는 손님들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다. 지적이고 우아하고 솔직하면서도 마음이 따뜻한 이런 사람과의 수다는 설령 그의 주장이 상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라 해도 충분히 기쁘고 즐거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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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09-27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읽고 있는 책이고, 거의 다 읽었고, 매우 공감되는 서평입니다, 저도 이 아저씨가 참 좋아요 ^^

mizuaki 2007-09-27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싫어하기 힘든 사람인가 봅니다. 방금 웬디양 님의 서재에 다녀왔는데, 리뷰하신 많은 책 중 제가 읽은 책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재미있었어요. 다른 취향의 두 사람이 만나는 접점이 되는 사람이 고종석이군요. ㅎㅎ
찾아 주시고 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

웽스북스 2007-09-28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izuaki님, 제가 책도 별로 안읽으면서 불성실하기까지 해서 읽은 책들의 리뷰를 다 남기지는 못하고 있답니다 ^^ mizuaki님 서재를 토대로 제가 파악한 결과 접점이 아주 없지는 않았답니다~ ^^

마늘빵 2009-09-11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염된 언어>는 저도 처음 접했을 때 가슴이 쿵쾅쿵쾅 거렸답니다. 지금의 제 한국어관에 기초하고 있는 것도 고종석의 그 글이고요. ^^

mizuaki 2010-01-25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 님도 그러셨다니 반갑습니다. 좋은 책에는 여러 사람을 바꿔놓는 힘이 있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