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시 1 - 석양에 빛나는 감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장세연 옮김 / 손안의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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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토까지 약 한 시간 반, 상쾌하다고는 하기 어려운 시간을 보낸 끝에 도착한 옛날 집의 잘 정돈된 넓은 현관 마루에, 가노 유스케는 명주로 만든 우아한 약식 기모노를 입고 서 있다. (중략) 둘 다 모두 18,9세였던 시절부터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몇 달 연장자라든가, 교양이며 가문 같은 사회적 기반의 차이 등을 이유로 들며 고다의 비호자를 맡아 왔고, 지금은 그것이 습성이 된 영원한 귀인이자 형님인 가노 유스케였다. (중략) 잘 닦인 복도와 창, 문의 윤기, 빛바랜 노송나무의 짙은 갈색, 매년 새로 칠하는 장지문의 흰색, 채광창의 조각에 쌓인 먼지의 깊은 색, 안뜰의 이끼와 물그릇의 물 냄새, 서고에 쌓인 장서들의 냄새. 그 어느 것이나, 자신과는 인연이 없는, 삶이나 전통이라든가 혈통이라든가 움직이기 어려운 현실이 있다는 것을 젊은 고다로 하여금 느끼게 했다. 고다 자신은 그것에 대해 어떤 경의를 표한다는 형태로밖에는 반응하지 못했다. 자신이 동화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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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하지만 목욕을 하고 유카타로 갈아입은 무렵에는, 자신도 이제는 어딘가에 정착해야 할 텐데 하는 쪽으로 생각은 옮겨졌고, 이내 그 생각이 너무나 현실성이 없어 질리던 차에, 툇마루 쪽에서 "어이, 토마토를 차게 해 뒀어!" 하고 부르는 옛 처남의 목소리가 울렸다. 옛 처남은 자신의 방에 접한 툇마루를 활짝 열어젖히고 위스키를 준비하고 있었다. 관리인 부부의 밭에서 딴 토마토와 오이가 얼음이 든 통에 담겨 있고, 풍로 위의 석쇠에는 역시 얻은 것이 틀림없는 가자미와 대합이 얹어져 있다.(중략)
"그런데 건설회사 뇌물수수사건 쪽은 여름휴가인가?"
"여름휴가라고 할까, 중간휴가라고 할까. 나가타초를 의심병으로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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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처남은 너무나도 특수검사다운 말투로 슬쩍 넘겼다. 10년 전에는, 마치 책에 손발이 자란 듯한 모습의 그가 지검 내부에 있는, 소득 없는 권력 다툼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어느새 정체를 알 수 없는 모습은 물론 두꺼운 얼굴까지 어엿하게 몸에 익히고 있다. 적어도 사회적으로는 반석같은 가노 유스케였다.
"그래서, 네 쪽은 아직 하치오지 살인 사건인가?" 하고 물어와, 고다는 "뭐, 그렇지" 하고 대꾸했다.
"막힌 거야? 얘기라면 들어줄게."
"싫어. 위스키가 맛 없어져."
"그보다, 도박장 같은 곳은 나가지 마."
예상했던 말이 나왔다. 지검 내부의 은밀한 권력 다툼 속에서, 한 번은 친척이었던 형사 한 명의 신변까지 이야깃거리가 되어 날아다니고, 옛 처남의 귀에 들어간다. 일상적인 일이기는 했지만, 본 적도 없는 누군가의 악의며 중상보다도 옛 처남에게 알려지는 것이 신경을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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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옛 처남은 "그럼 마시자" 하고 새로운 위스키를 두 개의 잔에 부었다. 기요코와 이혼한 이후, 어느 쪽이나 서로의 신경을 서슬리는 곳까지는 건드리지 않는 습관이 들어, 누군가가 그만두자고 하면 그만둔다. 마시자고 하면 마신다. 이 정도면 두 사람은 꽤나 어른이 되었다고 할 만했다. 그렇게 다시 마시기 시작하자 옛 처남은 이번에는 고다의 왼손을 잡고 손금 보기를 시작했다. 잠깐 동안, 그만둬라, 싫다 하며 아이 같은 실랑이가 이어졌다.
"봐, 요전에 봤을 때보다 꽤나 주름이 늘었어.....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뭔가 계속 생각하고, 고민을 담아두면서 가만히 움츠리고 있는 아이의 손이야."
고다는 "원숭이도 고민은 한다" 하고 말하며, 이번에는 그가 옛 처남의 손을 쥐고 들여다보았다. 역시 가는 주름이 가득 한 섬세한 손바닥이었다. 그것도, 기요코와 매우 비슷한 손바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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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봐라. 남들이 모르는 고민의 깊이라는 의미라면, 이 남자는 자신보다 훨씬 위일 터다. 그리고 그 눈. 기요코와 똑같은 눈. 본가의 깊이 있는 고요함 속에서, 쌍둥이밖에 알 수 없는 은미한 정념을 담고 있던 남매의 눈. 기요코와 고다의 사이에서, 이성의 지휘봉을 휘둘렀지만 실은 남모래 두 사람에 대한 질투의 불꽃을 태우던 남자의 눈. 아무리 이성이라는 덮개를 씌워도, 반드시 애증과 고뇌의 소양이 떠오르는 눈.
고다는 자신과 상대, 서로에 대한 풀어낼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를 인정하며, 비틀어 뭉개고 싶은 마음으로 자신의 손 안에 있던 또 하나의 손을 꽉 쥐고, 그리고 뿌리쳤다. 하지만 그때 처남은 전혀 다른 것을 생각했음에 틀림없는 것이, 조금 사이를 두고 너무나도 그다운 방식으로 마음을 숨겨 보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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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한은 改悛의 의식의 시작이니, 기뻐하면 된다. 갑자기 영혼을 덮치는 의지야말로 淨化의 유일한 증거라고 이야기한 단테의....."
"스타티우스가,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에게 한 말이지. 연옥의 몇 번째인가의 회랑에서."
"하지만 정말 의지의 문제일지 어떨지."
옛 처남은 스스로 말을 꺼내 놓고선 그답지 않게 말을 흐렸다. (중략)
"자네에게도, 의지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있나?"
"눈앞에 있는데."
"그런 진지한 얼굴로 말하지 말아 줘. 흠칫하잖아....."
고다는 그다지 정확하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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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무렵, 옛 처남은 먼저 침대에 드러누웠다. 툇마루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고다는 스물한 살의 가을에 그 침대에서 기요코를 처음 안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가노 유스케가 사법시험의 3차 구두시험을 위해 도쿄에 남고, 2차에서 떨어진 고다는 기요코가 권하는 대로 이 집에서 연휴를 보냈다. 기요코와 둘만 있게 된 첫 기회였다. 고다가 원하고 기요코가 응하는 형태로 서로를 안았을 때, 둘이서 이제부터 시작될 미래의 정신적 修羅場을 예감한 것은 각자의 입장에서 유스케를 따돌린 것에 대한 통한의 마음과 전혀 상관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남매의 인연이나 남자 사이의 어떤 종류의 친밀한 인연을 단숨에 와해시켰던 그 침대에서, 자신이 설 곳이 없어진 점이나 질투 같은 것과 홀로 타협해 오던 남자가 지금은 느긋하게 팔다리를 내던지고 잠들어 있다. 그리고 그를 도다시 배신하며 이제는 기요코가 아닌 여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410-4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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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3-01-28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꿉친구에게 밀려 이번에는 출연이 적었던 가노 검사님의, 양보다 질로 승부하는 심야의 기모노 씬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