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가지 인생의 법칙 - 혼돈의 해독제
조던 B. 피터슨 지음, 강주헌 옮김 / 메이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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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설교 같은 느낌도 좀 들지만, 절대 뻔한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도발적이다. 그리고 설득력이 있고 희망적이다. 지금 여기에 꼭 필요한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공감하는 점이 많았다.


(번역에 문제가 많다고 느껴서 별을 하나 뺐다. 가독성이 떨어진다고 느꼈고, 알라딘의 다른 리뷰를 보니, 재창작 수준의 오역도 않은 모양이다. 원서로 보고 싶은 책이다. )

미래를 상상하며 이렇게 생각해 보자.
‘나 자신을 제대로 보살핀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까? 어떤 일을 해야 과감하게 도전하고, 신나게 일하며, 세상에 도움을 주고, 기꺼이 책임을 지며, 보람을 느낄 수 있을까? 시간을 어떻게 써야 더 건강해지고 많이 배울 수 있을까?’
지금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중략) 또 당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삶에서 혼돈을 줄이고, 질서를 재정립하며,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다. 또 당신이 나아갈 방향을 정해야 한다. 그래야 당신 자신을 다스릴 수 있고 결국에는 원망과 앙심과 잔혹성을 떨쳐 낼 수 있다. 당신만의 원칙을 명확히 세워야 한다. 그래야 당신을 부당하게 이용하려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당신을 지킬 수 있고, 안전하게 일하며 삶을 즐길 수 있다. (중략) 세상이 더 살기 좋은 곳이 되면 좋겠지만, 천국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중략) 우리는 더 강해져야 한다. 당신 자신부터 시작하라. 당신을 보살펴라. (중략) 19세기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P103

현재는 언제나 결함이 있다. 그러나 현재 상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나아가려는 방향이다. 행복은 산 정상에서 느끼는 잠깐의 만족이 아니라, 산을 오르는 길에서 느끼는 희망이다. 행복은 희망에서 나온다. 지금 걷는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희망이 있다면 불행하지 않다. - P146

훈련과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은 어떤 목표도 세울 수 없다! 순종하며 배우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할지도 모르고, 어찌어찌 훌륭한 목표를 세웠더라도 목표를 이루는 법을 모른다. 그리고 목표로 정할 것이 없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다. 목표가 없으니 방향을 잃고 방황한다.- P159

아이들의 무한한 창의력이 어른들의 교육과 참견 때문에 제약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여러 연구 결과를 보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극소수의 사례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아이들의 창의력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 그리고 엄격한 제약이 창의적인 성취를 방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촉진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법칙과 체계가 아이들을 파괴한다는 믿음에는, 충분히 기회를 주면 아이들 스스로 언제 밥을 먹고 무엇을 먹을지 훌륭히 선택할 수 있다는 의견이 짝으로 붙어 다닌다. 이런 생각은 근거 없는 추정이다. 아이에게 충분히 기회를 주면 햄버거와 프라이드치킨, 과자만 먹을 것이다. 피곤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밤새 부모와 실랑이를 벌일 것이다. 어린 침팬지가 성인 침팬지를 괴롭히는 것처럼 아이들도 집 안을 어슬렁대며 의도적으로 어른을 자극하여 짜증나게 할 수 있다. 침팬지와 아이는 어른들 반응을 보고 자유의 한계와 범위를 인식한다. 그 한계를 확인하는 시점에는 일시적으로 짜증을 내거나 불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 한계가 바로 아이들의 안전망이다. - P187

습관적으로 엄마 얼굴을 때리는 아기가 있다고 해 보자. 왜 그런 짓을 할까? 답은 분명하다. 엄마를 지배하기 위해서다. 나쁜 짓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아이가 폭력적인 게 걱정되는가? 폭력은 당연한 것이다. 폭력은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평화다. 평화는 배우고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188

자기방어가 아닌 경우에는 물어뜯거나 때리거나 발로 차지 마라.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지 말고 위협하지 마라. 그래야 감옥에 가지 않는다. 음식을 먹을 때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절 바르게 먹어라. 그래야 즐거운 마음으로 너를 식사에 초대할 것이다. 친구들과 나누고 공유하는 법을 배워라. 그래야 다른 아이들이 너와 함께 놀려고 할 것이다. 어른이 말할 때는 귀담아들어라. 그래야 어른이 너를 싫어하지 않고, 너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려 할 것이다. 잘 시간이 되면 조용히 잠자리에 들어라. 그래야 부모가 너를 귀찮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가족과 친척을 함부로 대하지 마라. 그들과 함께함으로써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따.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함께 즐거워해라. 그래야 지미있는 일에 초대받을 수 있다. 너와 함께하면 누구나 즐거워하도록 행동해라. 그래야 모두 너와 함께하고 싶어 한다. 이런 규칙들을 알고 실천하는 아이는 어디에서나 환영받을 것이다.- P205

높은 수준의 사회성이 갖춰진 후에야 개인의 정체성도 의미를 갖는다.- P213

당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100퍼센트 활용해 왔는가? 직장에서 전력을 다해 일하고 있는가? 혹시 분노와 원망에 사로잡혀 맥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는 않은가? 형제와는 잘 지내고 있는가? 배우자를 존중하는가? 자식들을 애정으로 대하고 있는가? 건강과 행복을 파괴하는 나쁜 습관은 없는가? 당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친구와 가족에게 꼭 해야 할 말을 하는가? 주변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하는 일이 있는가?
당신 삶을 깨끗이 정리했는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부터라도 이렇게 해 보자. 당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것들을 중단하라! 오늘 당장 중단하라! - P232

다른 사람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당신의 판단이 행동의 기준이다. 세상이 정한 행동 기준을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당신이 속한 문화의 전통을 무시하지는 말라. 인생은 짧다. 전통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발견한 것들을 혼자서 알아낼 만한 시간은 없다.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지혜는 어렵게 얻은 것이다. 전통과 문화 속에는 분명히 삶에 유익한 지혜가 있다.- P233

거짓 행동으로 삶을 왜곡하는 것을 중단하면 훨씬 더 나은 삶을 경험할 것이다. 그때쯤에는 조금 더 미묘하고 새로운 당신의 잘못이 드러난다. 그런 것이 있다면 역시 중단하라. 몇 개월 혹은 몇 년 동안 꾸준하게 하면 당신의 삶은 점점 단순해질 것이다. 판단력이 향상되면서 꼬이고 뒤틀린 과거 문제들도 정리된다. (중략) 그래도 인생의 비극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냉소와 기만으로 그 비극이 더 악화하는 것은 막을 수 있다. 그렇게 타락의 길에서 빠져나온 당신은 전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을 것이다. 인생의 피할 수 없는 비극에 좀 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비극을 그저 비극으로만 머물도록, 그 비극이 불지옥으로 변하지 않도록 자신을 조절하는 법도 알게 될 것이다. (중략) 당신은 여전히 나약한 존재지만, 맑아진 정신은 삶의 좋은 면을 발견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당신은 누구보다 평화와 세상의 모든 선함을 지키는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 - P234

신분이 상승할수록 내면의 어둠이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도 커진다. 피와 약탈, 파괴에 대한 욕망은 권력욕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 인간이 단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권력을 탐하는 것은 아니다. 궁핍과 죽음, 질병을 극복하려고 권력을 탐하는 것도 아니다. 권력은 복수를 가능하게 하고, 복종을 강요하고, 적을 부숴 버릴 수 있는 힘을 뜻한다. 카인에게 권력이 있었다면 아벨을 그렇게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죽이기 전에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방법으로 아벨을 천천히 괴롭혔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는 다른 대상을 찾아냈을 것이다.- P268

진화론의 핵심을 이해하게 되면서 어린 시절에 배운 기독교 교리에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그 후로 나는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교리와 소망적 사고를 구분할 수 없었다. 기독교 신앙의 대안으로 사회주의에 잠깐 관심을 두었지만, 사회주의도 실체가 없는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위대한 작가 조지 오웰을 통해, 사회주의적 사고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진정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부유한 사람에 대한 증오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덕분이었다.- P283

내가 무엇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현실 세계는 고통에 짓눌려 있다. 이 명제는 반박할 여지가 없다. (중략) 고통은 실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하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다. 이런 생각의 흐름이 내 믿음의 밑바탕이 되었다. 내 의식의 밑바닥과 내 모든 생각과 행위를 낱낱이 뜯어봤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나치의 수용소 교도관이나 수용소 군도의 인민 위원 혹은 지하 교도소에서 어린아이들을 괴롭히는 악당처럼 행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비로소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진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중략) 최악의 죄가 순전히 고통을 주려는 목적에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라면, 선은 그 와 완전히 반대편에 있는 모든 것이다. 그런 잘못된 행위를 멈추게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선이다.- P286

이런 추론 끝에 나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도덕률을 정리할 수 있었다. 높은 목표를 지향하라. 주의하고 집중하라. 고칠 수 있는 것이면 고쳐라. 현재의 지식에 교만하지 말라. 겸손한 마음을 가져라. 전체주의적 자만심은 무자비와 억압, 고문과 살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나의 부족함을 정확하게 인지하라. 나의 내면에 감추어진 비겁함과 악의, 원한과 증오를 인정하라. 남을 비판하기 전에, 세상의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나서기 전에 나의 잔혹한 심성을 살펴라. 어쩌면 세상이 잘못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중략) 무엇보다, 거짓말하지 말라.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하지 말라. 거짓말은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은 나치와 공산주의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P286

불평등하고 고통스러운 삶은 아무리 원망해 봤자 바뀌지 않는다. 불필요한 고통과 아픔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는 길을 찾는 게 훨씬 의미 있는 삶이다.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인생의 수고로움을 덜고 세상을 좋게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많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 오늘은 무엇을 할지 생각해 보라. 귀찮아서 오랫동안 미뤄 둔 서류 작업도 좋다. 어질러진 방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가족들에게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는 것도 훌륭한 일이다. 이 모두가 세상을 조금 더 좋게 만드는 일이다.- P288

쉬운 길을 선택해서 원하는 것을 갖는 것보다, 어려운 길을 선택해서 의미 있는 것을 갖는 편이 훨씬 낫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게 뭔지 우리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의미는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이다. 높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에 맞게 행동하면 의미는 저절로 모습을 드러낸다.- P290

전체주의자는 개개인이 삶에 대해 궁극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전체주의는 ‘발견되어야 할 것은 이미 발견되었다’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계획대로 정확하게 전개될 것이다. 완전한 시스템이 체택되면 모든 문제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중략) 특히 공산주의는 억압받는 노동자에게보다는 지적인 오만함으로 항상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지식인들에게 더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약속한 유토피아는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스탈린의 러시아, 마오쩌둥의 중국, 폴 포트의 캄보디아가 지옥으로 바뀌는 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그곳 국민은 동포를 배신하고, 직접 보고 겪은 일을 외면했다. 그 결과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 P315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만들어내는 로고스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재물로 바친다.’ 이 하나의 문장이 기독교 교리를 압축해 보여 준다.- P321

진실을 보고, 진실을 말하라.
진실은 구호도 아니고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의견이라고 해서 진실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진실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당신의 진실은 당신이 처한 독특한 환경에 근거하고 있다. 오로지 당신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의 개인적인 진실을 파악한 뒤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신중히 그리고 명확하게 전달해 보라. 그러면 현재의 믿음 체계를 유지하면서도 확실한 안전과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또한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서 벗어나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 P330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혼돈이 얼굴을 드러낼 때 우리는 말을 통해 혼돈을 바로잡고 질서를 찾을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것이든 분류하고 정돈해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P389

서구 사회에서 성공 가능성을 가장 정확하게 예측하는 지표는 지능과 성실성이다. 지능은 인지 능력이나 지능 검사로 측정되는 것이고, 성실성은 근면함과 유순함으로 대표되는 성격 특성이다.
- P435

개는 사람의 친구이자 충실한 동반자다. 길들어지고 사회적이며 위계질서를 따른다. 개는 가족 서열 밑바닥에서도 즐거워한다. 관심을 받는 만큼 충성과 존경과 사랑으로 보답한다. 한 마디로 개는 위대하다.
하지만 고양이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동물이다. 사회적이지도 않고, 일시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위계질서를 따르지도 않는다. 완전히 길들어지지도 않는다. 재롱을 부리지도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친근감을 표시한다. 개는 주인 말을 잘 따르지만, 고양이는 스스로 결정한다. 고양이는 자기만의 이유로 인간과 자발적으로 교감하는 듯하다. 내가 보기에 고양이는 자연 그 자체이자, 가장 순수한 형태의 존재다. 인간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느낌마저 든다.- P486

길을 걷다가 고양이와 마주치면, 존재의 경이로움이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보상해 준다는 것을 잠시나마 떠올려 볼 수 있지 않을까?
길에서 고양이와 마주치면 쓰다듬어 주어라. - P488

세상과는 어떻게 지내야 할까? 자신이 존재하는 게 존재하지 않은 것보다 더 나을 수 있도록 행동하라. (중략)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자신이 진정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그들과 공유하라. - P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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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부터의 수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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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가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출발점을 잘 보여주는, 짤막하지만 의미심장한 소설. 유머러스한 점이 특히 좋다. 자기 자신이 젊은 시절부터 저질러 온 어리석은 짓에 대한 40대 작가의 이불킥이 들어있는 듯해서 호감이 간다. 

인간은 언제나 어디서나 그가 누구든 간에 절대 이성과 이익의 명령이 아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길 좋아했던 것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의 이익에 반해서라도 그렇게 하고 싶어할 수 있고 이따금씩은 꼭 그래야만 한다.
- P43

나는 녹초가 될 정도로 흥분에 시달렸다. 내 손으로 구두도 한 번 더 닦았다. 아폴론은 세상에 어떤 일이 있어도 구두를 하루에 두 번씩 닦지는 않을 위인, 그런 건 원칙에 위배된다고 생각할 위인이었다. 해서, 내가 직접 구두를 닦은 것이었는데, 어쩌다 저놈한테 들켜서 나중에 멸시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구두솔은 현관에서 몰래 가져왔다.
- P109

"안 돼!" 나는 다시 썰매에 올라타며 소리쳤다. "이렇게 예정된 일이다, 이건 숙명이다! 달려, 더 빨리 달려라, 거기로!" 이렇게 조바심을 내며 나는 주먹으로 마부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아니, 나리, 왜 사람을 치고 그러쇼?" 이렇게 소리를 치면서도 무지렁이 마부는 여윈 말을 채찍질했고, 때문에 말은 뒷발을 힘껏 구르기 시작했다.
- P134

가령 이놈의 월급만 하더라도 이삼 일도 미룰 수 없었다. 그랬다간 엄청난 소동을 일으켰을 것이고 나는 쥐구멍이라도 찾으려고 절절 맸을 것이다. (중략) 그러니까 이놈은 일단 굉장히 엄한 눈초리를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몇 분 동안 계속 나한테서 눈을 떼지 않는데, 나를 맞이하거나 외출하는 나를 배웅할 때는 특히 더 그랬다. 내가 가령 이 시선을 알아채지 못하는 척하며 견뎌 내면 이놈은 예전처럼 말없이 다음 단계의 고문에 착수했다. 즉, 내가 방을 거닐거나 책을 읽고 있을 때 갑자기 밑도 끝도 엇ㅂ이 어슬렁거리며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와 문 옆에 멈춰 서선 한쪽 손은 등 뒤로 돌리고 한쪽 발은 뒤로 뺀 채 이미 엄격하다기보다는 완전히 경멸에 찬 시선으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래에 계속)- P175

(위에서 계속)
내가 갑자기 이놈한테 무슨 용건이냐고 물으면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몇 초간 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 다음에, 왠지 유별나게 입술을 앙다물고 사뭇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 자리에서 느릿느릿 몸을 돌려 또 그렇게 느릿느릿 자기 방으로 물러난다. 그러다 두 시간쯤 지나면 갑자기 또 자기 방을 나와 또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중략) 이러고도 내가 정신을 못 차려 계속 반항하면 이놈은 갑자기 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이런 한숨만으로 나의 정신적 타락의 심연을 몽땅 재려는 듯 길고 깊은 한숨이었다. 물론 결국에는 이놈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나는 미친 듯 날뛰며 고함을 질러 대지만 어쨌든 문제가 됐던 그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됐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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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 - 개정판
데이비드 콰먼 지음, 강병철 옮김 / 꿈꿀자유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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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사실들에 대한 친절하고 이해하기 쉬운 설명, 몸을 아끼지 않고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 체험한 모험들의 생생한 기록 , 여러 인물들에 대한 매력적인 묘사, 세련되고 지적인 유머가 있는 책이다. 

양도 아주 넉넉해서 오랫동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포식자란 외부로부터 먹잇감을 찾아 잡아먹는 비교적 큰 맹수들이다. 반면 병원체(바이러스 등 질병을 일으키는 매개체)는 내부로부터 먹잇감을 찾아 잡아먹는 비교적 작은 맹수들이다.
- P26

실험실에서 일하는 바이러스학자들은 왁자지껄 떠들고 다니는 타입이 아니다. 술집에서 과장된 손짓을 해가며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하는지 자랑삼아 떠벌이는 바이러스학자는 없다. 이들은 대개 핵엔지니어처럼 집중력이 뛰어나고 말쑥하며 조용하다. 하지만 야생에서 바이러스가 어디 사는지 찾아내는 일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예를 들어 그리즐리 곰을 잡아 서식지를 옮겨놓는 일처럼 위험수준을 통제하기 어려운 현장업무다. 물론 야생에서 바이러스를 추적하는 사람들 또한 실험실의 전문가들처럼 소란스럽고 부주의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럴 여유도 없다. 그러나 그들의 일은 훨씬 시끄럽고 어수선하며 예측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다.
- P33

내게 수학이란 직접 구사하지는 못하지만 번역된 문학작품을 통해 존경심을 갖고 있는 언어와 비슷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러시아 문학이나 카프카, 무질, 토마스 만 등의 독일 문학과 같달까. 학창시절에는 라틴어만큼이나 대수학도 열심히 공부했지만 타고난 재주가 신통치 않았던지 아이네이스의 비밀스런 음율만큼이나 미분방정식의 오묘한 음악도 도통 내 귀엔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20세기 초에 말라리아와 다른 감염병의 유행을 둘러싼 연구에서 비롯된 다른 두 가지 수학적 질병이론이 중요할 뿐 아니라 흥미롭다고 말한다면 독자들은 믿어도 좋을 것이다. 나같은 사람조차 무슨 말인지 이해한다면 틀림없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P178

"현장에서 일하시나요?"
"아니요. 저는 분자생물학자입니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에게 주택 페인트 작업도 하느냐고 질문한 격이었을지 모르지만 레오 푼Leo Poon은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칭찬할 사람을 칭찬하는 데도 인색하지 않았다. 제 동료 중에 고양이과 야생동물을 연구하는 구안 이Guan Yi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역학자의 감각을 지니고 있는 데다 황동으로 만든 마카크원숭이만큼이나 배짱이 좋지요. 이 친구가 중국에 가서 지방 관리들을 구워삶았답니다. 선전에서 살아 있는 동물을 취급하는 시장 중에 제일 큰 곳을 찾아가 동물들의 인후와 항문, 그리고 배설강에서 면봉으로 검체들을 채취해왔다지 뭡니까.
- P230

그러나 어쩌면 가장 중요한 또 한 가지 요인은 SARS-CoV가 인체를 침범하는 방식 자체일 것이다. 우선 증상이 감염력이 매우 높아지기 전에 나타난다. 두통, 발열, 오한, 아마 기침까지도 본격적으로 바이러스를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리기 전에 시작된다. (중략) 독감을 비롯한 많은 질병에서는 이 순서가 반대다. 증상이 나타나기 며칠 전부터 이미 감염을 퍼뜨리고 다닌다. 위험이 닥친 후에야 경고가 따라오는 셈이다. 사스라는 질병이 이랬다먼 2003년 유행은 그리 쉽게 끝나지 않고 훨씬 암울하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 P258

11월의 코네티컷 숲 속에 사는 흰꼬리사슴은 금요일 밤 맨해튼 남부의 독신자 전용 술집만큼이나 짝을 찾는 음란한 동물들로 바글거린다. 불쌍하게도 암사슴 한 마리의 몸 위에 검은다리진드기 성체가 1천 마리 정도 붙어 있을 수도 있다. 사슴의 피부를 기어다니던 진드기 수컷이 이미 자리를 잡고 사슴의 피를 빠느라 꼼짝할 수 없는 암컷과 마주치는 순간 짝짓기가 이루어지는데 이때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절지동물의 섹스에 로맨스 따위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배를 채운 암컷과 욕정을 채운 수컷은 사슴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파트너를 찾는다. 이런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므로 4주에 걸친 진드기 생식 기간 동안 한 마리의 흰꼬리사슴이 200만 개의 진드기 수정란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혈액을 공급한다. 반만 부화해도 사슴 한 마리당 백만 마리의 유충이 기생하게 된다.
- P314

오스트펠트Richard Ostfeld는 ‘모든 생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생태학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지 않다. 그건 모호하고 뻔한 소리일 뿐이다. 과학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떤 동물종이 다른 동물종과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어떻게 변화나 교란이 일어나고, 그 결과는 어떤 것인지 이해하는 일이다.
- P324

광견병의 숙주는 대개 개나 여우, 스컹크, 또는 날카로운 이빨로 다른 동물을 무는 육식동물이다. 광견병 바이러스는 이들의 뇌로 들어가 공격적인 행동을 유발한다. 숙주는 미쳐 날뛰며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다. 그 사이에 바이러스는 뇌뿐만 아니라 침샘으로도 이동한다. 침을 통해 새로운 희생자의 몸속으로 들어가려는 것이다. 결국 숙주가 광견병으로 죽거나, 애티커스 핀치Atticus Finch의 총에 맞아 죽더라도 바이러스는 새로운 숙주를 전염시키는 데 성공한다.
- P372

마지막 박쥐를 놓아주기 전에 앱스타인Jon Epstein은 아리프의 통역으로 주민들에게 짧게 연설을 했다. 우선 과일나무와 다른 식물들에게 도움이 되는 멋진 박쥐들이 그토록 많다는 데 대해 마을 사람들의 큰 행운을 축하하며, 자신과 팀원들은 박쥐의 건강을 연구하면서 동물들이 다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고 주지시켰다. (중략) 나중에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 여섯 마리 중 얼마나 많은 녀석들이 (니파 바이러스에:인용자)감염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게 어려운 점이에요. 완벽하게 건강해 보이죠? 겉으로는 구별해낼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조심을 하는 거지요."
- P427

사람들은 걱정한다. 심각하다는 정도는 어렴풋이 안다. 하지만 과학적인 사실들을 자세히 알아볼 시간이 없고, 관심도 없다. 경험상 그런 주제, 즉 무시무시한 신종 질병이나 치명적인 바이러스, 전 세계적인 유행병에 관해 책을 슨다고 하면 자세한 내용을 궁금해하기보다 결론만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질문한다. "우린 다 죽는 건가요?" 언제부턴가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기로 했다. 물론, 우리는 모두 죽는다.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모두 세금을 내야 하고,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 하지만 우리들은 대부분 오리나 침팬지나 박쥐로부터 인간에게 전파된 신종 바이러스보다는 훨씬 평범한 원인들로 죽을 것이다.
- P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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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준비해온 대답 - 김영하의 시칠리아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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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가 인기 있는 것을 보고 조금 궁금했던 김영하의 여행기. 달리기를 하지 않고 출신 대학을 사랑하는, 한국 남자 버전의 무라카미 하루키? 읽기 편하게 글을 잘 쓴다는 건 인정. 그러나 특별한 매력이 있는지는 모르겠고, 다시 찾아 읽을 것 같지도 않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나오는 동네들의 근황을 알 수 있었다는 점이 제일 좋았다.

무엇보다도 선생에게는 자신이 가르치는 것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며 따라서 너희들은 이것을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이 없다면 수업은 맥이 빠진다. 내겐 그게 없었다. 과연 소설 쓰기라는 게 배워서 되는 것일까? 내가 가르치면 뭐가 좀 나아지는 것일까? 오히려 재능 있는 학생들을 망치는 것이 아닐까? 늘 이런 의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 P22

1960년대 갓 취업한 이십대의 젊은이는 첫 월급의 반 이상을 양복을 구입하는 데 썼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방직기술의 발전과 값싼 재료의 등장으로 옷값이 기록적인 수준으로 낮아졌다. 덕분에 옷장은 입지도 않는 옷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 P33

그때까지 나는 방송 프로듀서나 카메라맨도 나와 같은 일종의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겪어보니 그들은 예술가라기보다 군인에 가까웠다. 밤늦도록 일하고도 새벽이면 벌떡 일어나 카메라와 삼각대를 지고 밖으로 나갔다. 아그리젠토의 신전 위로 떠오르는 해를 찍고 그 위로 흘러가는 구름떼를 찍었다. 아무리 시칠리아라도 12월의 새벽은 추웠다. 카메라맨은 홑겹의 윈드브레이커 하나로 묵묵히 새벽 추위를 견디며 뷰파인더를 노려보았다. ‘느린 다큐’를 표방하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오랜 촬영이 필요했다. 몇 시간 동안 타임랩스로 찍은 화면을 삼 초에 보여주는 것. 이것이 바로 ‘느린 다큐’의 정체였고 우리가 이런 영상을 TV에서 자주 보지 못하는 이유였다. (중략) 카메라맨과 프로듀서는 아무 불평 없이 이런 화면들을 찍었다. 이십 년 가까이 함께 일해온 사이라더니, 눈빛만 봐도 손발이 척척이었다. 나약한 소설가가 이불 속에서 끙끙대는 동안 그들은 자외선 차단 크림을 바르고 벌판으로 나가 찬바람을 맞으며 촬영을 했다.
- P48

시칠리아에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혼자 상상해오던 이탈리아가 있었다. 따사로운 햇볕과 사이프로서 그리고 유쾌하고 친절한 사내들, 거대한 유적들과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주인 없는 개들, 파랗고 잔잔한 지중해와 그것을 굽어보는 언덕 위의 올리브나무, 싸고 신선한 와인과 맛있는 파스타, 검은 머리의 여성들과 느긋하고 여유로운 삶...... 예전에 나는 로마와 피렌체, 베네치아를 여행한 적이 있지만 어디에서도 이런 것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몰려드는 관광객들, 장사치들, 약삭빠른 도시인들과 척박한 사람, 테마파크를 닮은 번드르르한 대리석 건물들만 보았던 것이다. 내가 꿈꾸던 이탈리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저 영화나 관광엽서, 여행사의 팸플릿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단 말인가? 아니, 그것들은 모두 시칠리아에 있었다. 나는 다큐멘터리 제작팀과 함께 팔레르모 공항을 떠난 지 불과 다섯 달 만에 아내와 함께 다시 그 섬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 P50

배에서 내려 사방을 둘러보며 정세를 살피는 우리에게 바르톨로 빌리니 씨와 한 명의 노파가 다가왔는데 모두 자기 아파트를 설명하는 명함 크기의 광고지를 들고 있었다. 그 광고지는 하나같이 ‘발코니, 냉장고, 샤워, 부엌’을 강조하고 있었다. 시원하게 샤워를 한 후,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발코니에서 맥주를 마시고 동네에서 사온 신선한 토마토로 스파게티를 먹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또한 그것은 다소 억지스럽지만, 세계가 물, 불, 흙, 그리고 공기라는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그리스 철학자 (그러나 그는 지금의 그리스가 아닌 시칠리아의 아그리젠토에서 태어났다) 엠페도클레스의 학설을 연상시켰다. 샤워는 물, 부엌은 불, 발코니는 흙, 마지막으로 냉장고는 (차가운) 공기와 관련돼 있다. 이 네 가지는 현대의 인간이 조금이라도 오래 어딘가에 머물고자 할 때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 P83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연기과 대학생들이 이런 무거운 인물들을 연기하는 것은 사실 역부족이다. 아무리 훌륭한 연출가가 붙어도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연기하는 그리스극을 보는 맛은 따로 있다. 장황한 그리스 운문을 번역한 부자연스런 한국어 대사, 인물의 내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연기, 코러스와 대사의 부조화 때문에 관객들은 극 속으로 결코 깊이 빠져들지 못한다. 브레히트가 말한 ‘소외효과’가 여기에서 이상한 방식으로 달성된다. "오레스테아"를 보는 내내 나는 연극이 촉발한 딴생각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 P161

돌아보면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여행하기에 가장 안전한 시대였다. 민간 항공기가 출현했고 해적이나 산적, 마적은 거의 사라졌다. 나라와 나라 간의 이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간단했다. 기축통화인 달러의 가치가 안정돼 있어 달러만 가지면 어느 나라에서든 밥을 사 먹고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2011년 9.11 테러 이후로 그런 시대는 이제 서서히 저물고 있다. 위험지역은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우티스들도 부유한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을 적극적으로 노리고 있다. (중략) 지금 와 돌이켜보면 인류의 역사에서 20세기만이 오히려 예외처럼 보인다. 중세에는 유럽과 지중해 일대에서도 해적질과 인신납치가 성행했으며 귀족들조차 친지들이 몸값을 내주지 않으면 엉뚱한 곳으로 팔려가곤 했다.
- P200

시라쿠사는 그리스문명의 토대 위에 로마문화를 더하고 그 위에 기독교적 색채를 가미한, 일종의 크레이프 케이크 같은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눈에 그리스문명과 로마문명을 일별할 수 있는 도시는 흔치 않다. 시라쿠사에서는 그리스인들과 로마인이 어떻게 다른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이야기를 사랑한 그리스인들과 아드레날린에 중독된 로마인들의 차이는 그들이 지어놓고 떠난 극장과 경기장으로 드러난다. (중략) 그리스극장과 로마경기장 사이에는 거대한 채석장이 있다. 기원전 413년에 사로잡힌 아테네 포로들이 노역을 하다가 노예로 팔려간 곳이 바로 이곳이다. 본래는 꽤 높은 언덕이었던 이곳은 유명한 1693년의 지진과 오랜 세월의 채석으로 인해 지금은 한 입 크게 베어 문 사과처럼 아래로 푹 꺼져 있고 군데군데 올리브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그리스 후예들이 비극 "아가멤논"을 보고 있는 동안 로ㄴ마의 후예들은 유로2008에 출전한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을 응원하러 카페에 모여 있었다.
- P220

우리가 묵은 호텔의 주인은 아그리젠토 남자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식사를 하러 식당에 들어가자 그는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나비넥타이를 매고 흰 양복 윗도리를 걸치고서야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는 무뚝뚝했지만 정중했다. 자신의 힘과 위세를 충분히 과시하면서도 필요한 친절은 잊지 않았다. 허겁지겁 메뉴를 결정하려는 우리를 만류하며 그는 우아한 태도로 차가운 물 한잔을 권했다.
"부인, 천천히 하시지요. 날이 덥습니다." (중략)
그후로 오랫동안 아내와 나는 힘든 일을 당하며 낙심할 때마다, 혹은 당황하여 우리 중 누군가가 허둥댈 때마다 그 멋쟁이 사장의 느긋한 대사를 서로에게 들려주었다. 이탈리아 원어로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은 간결하고 산뜻한 표현이 된다. "Signora, prego. E caldo." 우리는 마법의 주문처럼 이 말을 외우고 그럴 때마다 거짓말처럼 다시 인생에 대한 느긋한 태도를 되찾을 수 있었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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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의 건축 -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
정기용 지음 / 현실문화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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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가 재미있었던 것과 별도로, 정치적인 맥락도 재미있게 읽힌다. 노무현 시대를 살던 좌파들의 순수하고 지적인  태도가 흥미로웠다. 위험한 선동가들이 좌파의 목소리를 독점하고 있는 지금, 이런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지......

건축가들은, 쉽게 말하면, 땅을 바라보고 교감하는 능력을 키워온 사람들이다. 필자에게도 마찬가지로 땅을 예사롭게 보지 않는 독특한 판단력이 축적되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건축가들에게는 우연한 만남이지만, 안성면에서 펼쳐진 흔치 않은 땅과 필자 사이의 교감은 어떤 면에서는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한 남자가 평생 그리워하던 여인과 우연히 처음 만났을 때처럼 버갯불이 튀는 듯한 사건이라고 할까? 그런 정도의 열정적인 교감이 안성면과 필자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기억한다. 바로 이것이 한 건축가를 10여 년 동안 무주에서 일하게 한 계기다. - P28

무주에서 10년을 작업하면서 느낀 것은 군청의 모든 직원은 감사원을 두려워한다는 이것은 대한민국의 모든 공무원들이 다 같은 처지다. 직원들이 정말로 무서워하는 것은 일이 잘되느냐 못되느냐가 아니라 감사에 걸리느냐 안 걸리느냐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무서워하는 대상은 국민이 아니라 감사원이거나 여러 법의 저촉 여부인 것이다. 이 일이 국민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는 그다음 문제다. 그러나 진정한 군수라면 감사원이나 검찰이 아니라 군민을 두려워해야 한다. 군민, 주민의 삶을 향상시키려면 자기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좋은지를 물어야 한다. 김세웅 무주군수가 그런 결심을 하게 된 배경에는 지금의 시스템, 지금의 건축 발주방식으로는 좋은 건축을 할 수 없다는 아주 확고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P39

필자는 수의계약을 통해 무주 프로젝트를 10년간 진행할 수 있었다. 군수는 여러 가지 일로 검찰에 두 차례나 소환당했다. 심지어는 필자도 검찰에 불려갈 준비를 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차라리 필자는 검찰이 정말로 필자를 불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의계약이라는 것은 규모가 큰 설계 일도 최소한의 한도 내에서 진행해야 하는 터라 일을 할수록 적자를 면치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검찰이 부르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게 근거자료를 만들어두고 싶었던 것이다. - P40

건축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과 식물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지, 건축가가 처음부터 다 건축을 완성하는 것으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식물은 무엇으로 건축을 완성시키는 것인가? 바로, 흐르는 시간이다. (중략) 특히 불특정 다수의 삶과 관계있는 공공건축은 다중의 삶을 미리 확정하는 일이기도 해서 보편적이면서도 시간에 따르는 변화 또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가장 큰 어려움은 지금까지 축적된 지혜와 지식을 동원해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오늘 결정해야 하는 데 있다. 그래서 건축가가 이런 어려움에 대응하는 방법은 건축이 지닌 근원적 모순을 직시하고 그 한계를 미리 예측하며, 불확정적인 것까지 오늘 확정할 수 있는 지혜와 상상력을 겸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 P43

도시는 자연을 먹고사는 짐승이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도시라 하더라도 안성면처럼 자연에 세우는 도시는 자연이 파괴되는 것보다 1000배, 1만 배 이상의 이익을, 그것을 가능하게 한 자연에 또 그 땅을 지킨 주민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 그런 한도 내에서만 기업도시가 지역균형발전이라는 가치로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 P87

건물에서의 창은 풍경을 오려내고 안으로 불러들인다. 불려온 풍경은 거리를 소멸시키고 안에 있는 사람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P95

부남면을 논하면서 어떻게 하늘의 별들을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필자는 부남면이 별을 볼 수 있는 장소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부남면에 별 보는 집을 지은 이유다. 그리고 그것은 이곳 주민들에게 필자가 선사하고 싶었던 부남면에 사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도 연결되었다. 건축가는 건물만 지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의미 있게 조직해 주는 사람인데, 부남면 같은 오지의 면사무소를 리노베이션 한다는 것이 바로 마을의 정체성을 찾아주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 P100

공공건축이란 ‘공공이 발주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사람, 주민, 시민)가 원하는 동시에 땅이 원하는 건축이며, 시대가 원하는 건축이고 그리고 끝으로 지구가 원하는 건축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대단한 요구처럼 보이지만 이런 것이 진정한 공공건축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사실 아무리 작은 공공건축이라 해도 건축을 제안한다는 것은 한 사회를 상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P113

관공서 건물은 두 가지 점에서 선도적이어야 한다. 하나는 도시 환경 속에서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그 도시에 사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줄 만큼 평화롭고 아름다운 건축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어서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시민들과 호흡하는 편안한 장소, 그런 공적 영역의 특질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본이 갖추어지지 않은 관공서 건물은 지금이라도 개선의 여지를 두고 노력해야 한다. - P139

어떻게 보면, 어른들은 ‘형식’을 아이들은 실재하는 ‘현실’을 더 잘 포착해 낸다. 건축의 내외부 공간을 미끄러지듯 즐겁고 유쾌하게 넘나드는 아이들의 몸짓 속에 진정한 건축이 있다. 아이들이 자기 삶을 공간 속에서 조직해 내는 능력은 신비할 정도다. (중략) 어른 건축가들은 유쾌하게 놀 줄 모른다. 유쾌한 어린이집. 그것은 아이들만이 설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어른 건축가들은 그것을 찾는 방식을 개발해야 할 것 같다.- P186

적상산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전쟁 무렵 북한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중에도 "조선왕조실록"이 소실되지 않았을 만큼 깊고 특별한 산인 적상산은 가을에 단풍이 들면 여인이 붉은색 치마를 두른 것 같다 하여 적상이라 하는데, 지금도 그 정상에 올라가 보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P202

섬세하고 작은 것들의 축적을 고마워하고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할 때, 사회는 진정으로 한 발자국씩 진보할 것이다. 진보란 소위 좌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마음과 손길 속에 있는 것이다. 필자 생각에 무주군 보건의료원은 큰 건물이 아니라 보건의료원을 작동시키는 작은 마음들의 결집 속에 큰 위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P262

지난 10여 년간 필자가 무주에서 한 작업들은 그래서 필자에게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건축을 완성하는 것은 시간이며, 그것은 사람과 식물들에 의해 헤어려지면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이것이 바로 건축을 오브제처럼 단독적이고도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으로 확장된 전일적 접근holistic approach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P297

건축이 탈산업사회에서 농촌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기능과 공간으로 포섭하고 자유로운 형태로 사람들을 유혹할 일이 아니라 근접성의 법칙과 체험에 각인되는 삶의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체험은 정신적으로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히며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갈등까지를 포함하는 ‘가까운 것들’. 사랑, 평화, 애정이 깃든 모든 것은 근접한 데서 시작된다.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것들 사이에서 어떤 관계가 생길 수 있겠는가!- P298

필자가 공설운동장만이 아니라 무주에서 한 수많은 일은 건축가의 새로운 정의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조절자social coordinator’로서의 역할을 한 것과 같다. 그래서 현대 건축가는 형태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판단력 있게 조절하고 건축의 행위로 이행시키는 사람이다. - P306

감응. 감응이라고 하는 키워드. 무주의 모든 일은 감응인 것 같다. 이를 영어로 말하면 correspondence. 쌍방적인 것. 무엇을 느끼고 응하고...... (중략) 무주 공설운동장도 그렇고 안성면 주민자치센터도 그렇고 또 부남면 주민자치센터 등도 그렇고, 내가 보통 때 건축하던 방식과 전혀 다르게, 감응은 쌍방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거기에는 사실 자연과 풍경과 말씨와 음식 등의 친근함에서 오는 프록시proxy의 미, 내가 무주에 살지 않지만 무주에 사는 사람의 풍경에 감응되어서 거기에 사는 사람이 되어버린 게 제일 중요한 것 같다. - P330

무주 프로젝트를 돌아보면서, 이런 공공건물이 들어서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주민들에게 필요한 시설이라고 판단한 지방자치단체장과, 쓰임새와 구조, 생김새 등을 협의해 결정지은 건축가가 있었기 때문이고, 양쪽의 관계가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기용 선생은 이를 ‘권력’의 문제라고 말했다.
"우선은 김세웅 전 무주군수가 일방적으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종의 ‘전횡’이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건축가 또한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가지고 있는 ‘폭력’이란 게 있다. 건축가들은 이처럼 자기가 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는 상황을 미화하거나 합리화한다. 사실 건축가들이야말로 그런 상황을 빠져나가는 데 무시무시하게 빠른 사람들이다. 무주를 냉정하게 바라보면, 지방자치단체장이 결정할 수 있는 권력과 건축가들의 숙명적인 직업적인 권력, 그 두 권력이 우연히도 충돌하지 않고 결합된 것이다. 그 두 권력이 결합돼서 마치 새로운 사건처럼 탄생한 것이다. (계속)- P365

(위에서 계속) 하지만 권력이 모였을 때 공공건축물을 가능하게 한 걸 보면서, 과연 공공건축이란 게 꼭 그렇게 나와야 하느냐,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P365

당시 무주군 조례는, 용역비 3,000만 원 이상이면 공개입찰, 그리고 3,000만 원 미만이면 수의계약을 할 수 있도록 정해 놓고 있었다. 제대로 된 공공건축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정기용 선생은, 무주군과 수의계약을 맺기 위해 설계비, 감리비 한도를 모두 3,000만원 이하로 낮춰야 했다. 때로는 실비도 안 나올 때도 있었다. 이는 고스란히 사무실의 부담으로 돌아왔다. 당시 기용 건축이 입은 경제적 손실이 얼마나 컸느냐고 물어보니, 한 실장은 "무주 프로젝트 때문에 밀린 월급 700만원을 아직도 받지 못하고 있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다른 퇴사한 직원들도 아직 ‘무주 월급’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회사가 얼마나 골병이 들었을까 짐작이 간다. - P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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