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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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 세계사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길 위에서' 사이에 있던 간극을 메워준 책. 1차대전 후 벨 에포크가 종말을 고한 프랑스와 경제 공황으로 신분의 격차가 무너진 미국을 오가며, 자본 계급 출신 미국인들의 다양한 인생 행로를 보여준다. 노년에 이른 작가의 날카로운 인간 관찰과 세련된 유머 감각이 빛을 발한다. 최근에 서머싯 몸을 시리즈로 읽고 있는데, 이 책에 나온 엘리엇 템플턴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젊은 시절 유럽에 처음 왔을 때는 소개장을 들고 명사들을 찾아다니며 발판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후 그러한 발판은 프랑스와 영국의 가난한 귀족 집안들과 사업 관계를 맺으면서 더욱 튼튼해져 갔다. 그가 소개장을 들고 찾아간 상류층 미국계 부인들은 그의 출신을 특히 마음에 들어 했다. 버지니아 주의 오래된 가문 출신인 데다 어머니 쪽 조상이 미국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는 잘생긴 외모에 성격도 쾌활하며, 춤도 잘 추고 사격 솜씨도 훌륭하고 테니스 실력도 뛰어났다. (중략) 싹싹하고 사교적인 면에서 그를 능가할 사람은 없었다. 갑자기 파티에 못 온다는 손님이 생겨서 파티 주최자가 마지막 순간에 그를 초대하더라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따분하기 그지없는 늙은 부인 옆에 앉혀 놓아도 붙임성 있게 굴며 즐거움을 선사했다. - P16

물론 그는 속물이었다. 대단한 속물, 부끄러움을 모르는 속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파티에 초대받기 위해서라면 또는 성질은 고약하나 명성이 자자한 귀부인과 사귀기 위해서라면 공공연한 모욕도 참아냈고, 딱지를 맞아도 개의치 않았으며, 어떤 무례함도 감수했다. (중략) 마치 진귀한 야생란을 찾기 위해서 홍수와 지진과 열병과 적대적인 원주민의 위험도 기꺼이 감수하는 식물학자 같았다. 1914년에 일어난 전쟁은 그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주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야전 의무대에 들어가 처음에는 플랑드르에서, 나중에는 아르곤에서 복무했다. 1년 후에는 옷에 붉은색 훈장을 달고 돌아와 파리의 적십자사에서 한자리를 차지했다. (중략) 그는 파리에 있는 회원제 클럽 가운데 최고급 클럽 두 군데의 회원이었다. 그는 프랑스 상류층 부인들 사이에서 ‘스 셰르 엘리엇(경애하는 엘리엇)’으로 통했다. 마침내 목적을 이룬 것이다. - P17

"미국 사람들은 너무 경솔하게 소개장을 써요. 소개장을 들고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기가 싫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 친구들까지 귀찮게 만들 필요는 없잖습니까."
그는 그들에게 커다란 장미 바구니나 초콜릿 상자를 보내는 것으로 보상을 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그것으로 부족한 경우도 있었다. 바로 그럴 때 나한테 파티에 참석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럴 때 보면 나한테 투덜댔던 사실은 까맣게 잊은 사람 같았다. 그는 내가 우쭐해질 만한 듣기 좋은 말을 초대장에 썼다.
"다들 당신을 무척 뵙고 싶어 한답니다. 모모 부인은 굉장히 교양이 높으신 분으로, 당신 작품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읽으셨다는군요."
모모 부인을 만나 보면 그녀는 내 작품 ‘페린 씨와 트레일 씨’를 매우 감명 깊게 읽었다고 말했고 내 희곡 ‘연체동물’에 찬사를 보냈다. 앞의 것은 휴 월폴의 작품이고 뒤의 것은 허버트 헨리 데이비스의 작품이다. - P20

신부는 지혜로움과 인자함이 담긴 태도로 종교적 신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관대하고 아량이 넓으며 현대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또 가톨릭교회가 마치 교양 있고 점잖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입해야 하는 상류사회 클럽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엘리엇은 가톨릭에 귀의했다.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또 성당의 자선 활동에 아낌없이 기부하면서, 그의 앞에는 이전까지 굳게 닫혀 있던 많은 문들이 열렸다. 그가 집안의 신앙을 버리게 된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일단 개종한 다음에는 독실한 신앙심을 보였다. 그는 상류층 인사들이 다니는 교회 미사에 일요일마다 참석했고, 정기적으로 신부에게 고해했으며, 정기적으로 로마도 방문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는 교황의 수행인에 임명됨으로써 그러한 열성에 대해 보상받았다. - P24

"나는 별로 영향력이 없습니다. 그 애는 어렸을 적부터 늘 자기 마음대로였어요." (중략)
벌써 술을 상당히 마신 넬슨 박사는 약간 언짢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붉은 얼굴이 더 붉어져 있었다. "저는 대단히 바쁘게 지냈습니다. 제게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그 애가 마땅히 갈 곳도 없고, 또 애 아버지가 제 친구였기 때문에 맡은 겁니다. 다루기 힘든 아이였어요."
그러자 브래들리 부인이 톡 쏘듯이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어요? 마음씨는 아주 좋은 아이예요."
"말다툼을 하지는 않지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아이를 부인이라면 어떻게 다루시겠습니까? 무섭게 화를 내면,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해서 제 속을 뒤집어 놓는단 말입니다. 만약 내 자식이었으면 아마 두들겨 패 줬을 겁니다. 하지만 하늘 아래 혈육이라곤 없는 어린애한테 어떻게 손찌검을 하겠습니까. 잘 보살펴 줄 거라고 친구가 믿고 맡긴 아들인데 말입니다." - P49

브래들리 부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성적 방종을 가능하게 해 주는 갖가지 장소가 마련되어 있고 결혼을 위한 길에는 장애물뿐인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게, 오빠는 퍽 마음에 들 거예요."
"그럼 물론이지. 결혼은 가정의 무사함과 나라의 안정이 달린 중요한 문제야. 하지만 결혼이라는 것도, 혼외 관계가 용인될 뿐만 아니라 정당하게 인정되어야만 그 권위가 유지될수 있는 거야. 루이자, 매춘이라는 게 말이다..."
"그만해요. 지저분한 간통의 사회적, 도덕적 가치에 대한 오빠의 견해 같은 거 듣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그 다음에 엘리엇이 이사벨과 래리가 계속 만나는 것을 중단시킬 방법을 하나 제안했다. - P137

브래들리 부인은 나름대로 강한 소신과 상식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모름지기 관습을 따라야 하고 남들이 모두 하는 것을 혼자만 하지 않으면 불안정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또한 그녀의 소신에 따르면, 남자는 마땅히 일을 해야 하고, 열심히 노력하여 아내와 가족들이 그의 신분에 맞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또 자식들이 성년이 되어 웬만큼 안정적인 생활을 꾸릴 수 있을 만큼 좋은 교육을 시키고, 죽을 때는 아내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유산을 남겨 주는 것이 남자의 책무였다. - P145

지중해 연안에는 유럽 각지에서 온 왕족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온화한 기후에 이끌려 온 사람도 있고, 망명해 온 사람도 있고, 어떤 불명예스러운 과거나 부적절한 결혼 때문에 외국에서 사는 것이 더 편해서 와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 지역에는 로마노프가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스페인 부르봉가의 자손들, 시칠리아의 귀족 두 명과 파르마 귀족이 살고 있었다. 또 윈저 왕가 사람들, 브라간사 왕가의 공작들, 스웨덴이나 그리스의 왕족도 있었다. 엘리엇은 그들을 자주 초대했다. (중략) 내가 엘리엇을 보면서 무엇보다도 감탄한 점은, 그가 신분 높은 인사들을 대할 때 우아함과 예의를 한껏 갖추면서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난다고 가르치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독립적이고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P207

"교황께서 저를 위해 우리 가문의 옛 칭호를 부활시켜 주셨답니다. 미처 말씀드릴 기회가 없었군요."
"당신의 뭘요?"
나는 놀란 나머지 미처 정중하게 물어보질 못했다. 엘리엇은 기분이 약간 상했는지 눈썹을 추켜세웠다.
"모르셨습니까? 저는 외가 쪽으로 라우리아 백작의 후손입니다. 라우리아 백작은 스페인 펠리페 2세를 수행하여 영국에 가서 메리 1세의 시녀와 결혼했지요."
"그 피의 메리 여왕 말인가요?"
"그건 이교도들이 부르는 말이지요."
엘리엇은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곧 다시 말을 이었다. - P216

나는 그에게 성 마틴의 훌륭한 행동과 그가 꼭 알맞은 때에 팔아치워서 번 돈을 마치 주식 중개인한테 수수료를 주듯 하느님께 바친 것 사이에 무슨 연관 관계가 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어쨌거나 나처럼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은 상징이란 것을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다. 엘리엇은 계속했다.
"그 성당 사진을 교황께 보여 드렸더니, 자상하게도 교황께서는 한눈에 봐도 제 안목이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다는 것을 알겠다고 하시면서, 지금처럼 타락한 시대에 저처럼 독실한 신앙심과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겸비한 사람을 만나게 되어 참으로 기쁘다고 하시더군요. 저로서는 그야말로 평생 잊지 못할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저한테 귀족 작위를 내려 주시겠다고 하시기에 얼마나 놀랐던지요!" - P218

그리고 경제공황에 대응하는 미국인들의 태도에 실망했다고 말했다. 눈앞에 닥친 불행에 좀 더 침착하게 행동할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본래 남의 불행을 의연하게 보아 넘기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는 법이다. 나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부자가 되어 있는 엘리엇이 냉정하고 호되게 미국인들을 비판할 자격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P219

나는 여자의 직감을 믿는 편이 아니다. 여자의 직감은 그 여자가 믿고 싶어 하는 것과 너무도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이사벨과 나눈 오랜 대화의 결말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문득 수잔 루비에가 떠올랐다. 며칠 동안 만나지 못했다. 지금 무얼 하고 잇을까? 특별히 할 일이 없다면 나와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택시를 잡아서 그녀의 아파트로 가자고 했다. - P282

그레이가 말했다.
"소피, 정말 안됐어요."
이사벨이 차갑게 대꾸했다.
"난 아닌데. 물론 충격적인 일이죠. 저만큼 소피를 가엾게 여겼던 사람도 없을 거예요. 우린 아주 어릴 때부터 친구였잖아요.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일을 겪고도 충분히 회복될 수 있다구요. 소피가 그렇게 망가진 건 그런 기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천성적으로 불안정한 기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요. 밥에 대한 사랑도 좀 지나쳤잖아요. 만약 품성이 올바른 사람이었다면 제대로 된 삶을 꾸려 나갈 수 있었다는 얘기죠." - P327

"상류사회는 죽었습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미국이 유럽을 대신해서 서민들이 동경할 만한 귀족 사회를 만들어 낼 수도 잇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공황 때문에 이제는 그럴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가엾은 내 조국은 손도 못 쓰고 중산층 사회로 전락하고 있지요. 글쎄 지난번에 미국에 갔을 때는 택시 기사가 나한테 형제라도 되는 것처럼 말을 걸더군요. 믿어지십니까?"
리비에라 역시 1929년에 일어난 공황의 여파에서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지만, 엘리엇은 계속해서 파티를 열고 파티에 참석하고 있었다. 게다가 예전에는 로트실트 가가 아닌 이상 유대인의 집에는 절대 드나들지 않았지만, 이제는 가장 성대한 파티들이 선민들, 즉 유대인들에 의해 열리고 있었고, 엘리엇은 파티가 열리면 참석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었다. (중략) 유배당한 왕족들도 그들의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게다가 영화배우를 만나 보는 것을 최대의 꿈으로 품고 있는 모양이었다. - P335

조제프는 40년 동안 엘리엇의 곁에서 그를 모신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계층의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슬픈 척 행동하는 그에게서 주인의 불행에 대해 내심 흡족해하는 기색이 보였다.
"스 포브르 무슈(가엾은 주인 어른)."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좀 유별난 구석은 있지만 사실은 아주 좋은 분입니다. 그런데 이제 가실 날이 머지않으신 것 같습니다."
그는 엘리엇이 금방 죽기라도 할 것처럼 말했다.
"그동안 그분 덕분에 잘 먹고살았을 텐데, 조제프?"
내가 다소 험악하게 말했다.
"그렇게 보이겠지요."
그가 슬픈 목소리로 대꾸했다. - P373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엾은 엘리엇에게 그가 그토록 열망하는 초대장을 안겨주고 싶었다. 식사가 끝나자 에드나는 친구들을 정원으로 데리고 나갔다.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나는 예전에 그 집에 며칠 동안 묵은 적이 있으므로 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분명히 아직 초대장이 몇 장 남아 있을 것이다. 바로 비서실에 말이다. 나는 얼른 비서실로 갔다. 초대장 한 장을 슬쩍 빼내어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엘리엇의 이름을 써서 보낼 생각이었다. 어차피 건강 때문에 참석할 수 없을 테지만 초대장을 받는 것만으로도 무척 기뻐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문을 열어 보고 나는 움찔 놀랐다. 아직 점심 식사 중일 거라고 생각했던 에드나의 비서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스 부인이라 불리는 이 중년의 스코틀랜드 여자는 옅은 갈색 머리의 미혼 여성으로, 주근깨 난 얼굴에는 코안경을 걸치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순결만큼은 지킬 것 같은, 그런 여자였다. - P382

"공작 부인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으셨으면 좀 더 현명하게 행동하셨겠죠. 부인이 운전수하고 자고 다닌다고 떠벌리진 않으셨을 거라고요. 그 운전수한텐 아내도 있고 아이들도 셋이나 되는데."
"그런데 그게 사실입니까?"
키스 부인은 코안경 너머로 나를 보았다.
"선생님, 저는 21년째 비서 일을 하면서, 제가 모시는 분들이 순결하고 정숙하다고 믿는 것을 규칙으로 삼아 왔어요. 사실, 예전에 모시던 분 중에 남편이 사자 사냥을 하려 6개월 동안 아프리카에 가 있는 사이에, 임신 3개월째라는 게 밝혀져서 믿음이 크게 흔들린 적도 있긴 했죠. 하지만 그 부인이 파리로 짧게, 그것도 아주 비싼 돈을 주고 여행을 다녀온 후로 모든 게 해결됐답니다. 그때 그 부인과 제가 얼마나 다행스러워했는지 아세요?" - P383

"그분은 신사예요. 제가 신사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몇 명 안 되거든요. 이 집에 와서 공작 부인의 돈으로 살찐 배를 채워 가는 신사들은 신사로 안 보죠."
원래 지체 높은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귀가 되어 줄 충실한 부하를 두고 있는 법이다. 이런 부하들은 무시나 모욕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스스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그 상대를 정확히 겨냥하여 주인에게 그 사람에 대한 혹평을 끊임없이 늘어놓는다. 그렇게 해서 주인까지 그 사람을 미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과는 되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엘리엇은 언제나 가난한 친척들과 늙은 하녀들, 충실한 비서들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고 진심 어린 미소를 보냈다. 틀림없이 키스 부인과도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고, 크리스마스에는 초콜릿 한 상자나 휴대용 화장품 케이스, 핸드백 등을 선물로 보냈을 것이다.
"키스 부인,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하는 겁니다."
(아래에 계속) - P384

(위에서 계속)
키스 부인은 코안경을 올려 오뚝한 코에 똑바로 걸쳤다.
"저더러 주인을 배신하라는 건 아니겠죠, 몸 선생님? 게다가 제가 배신한 걸 알면 그 노인네는 당장 절 해고할 거예요. 초대장은 책상에 있어요. 봉투에 들어 있죠. 저는 그냥 창밖을 보고 풍경을 즐기고 있을게요. 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다리가 저리니까요. 제가 등을 돌리고 있을 때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든 사람이든 저한테 책임을 묻지 못하겠죠."
키스가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았을 때 초대장은 이미 내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키스 부인."
내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장무도회 때 무슨 옷을 입으실 겁니까?‘
"저는 목사의 딸이에요, 선생님. 그런 바보 같은 일은 상류층에게나 양보해야죠." - P385

중백의와 영대를 걸친 모습을 보니 키도 크고 체격도 우람했다 파티에서는 짓궂으면서도 다정한 웃음으로 주름져 있던 붉은 얼굴도 그날은 엄숙해 보였다. 예전에 기병 장교였지만 이제는 그런 흔적이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자신의 신분 그대로 성당의 고위 성직자처럼 보일 뿐이었다. 조제프가 성호를 긋는 모습을 보고도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 P391

우리는 계단을 내려갔다. 조제프와 하녀들이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녀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모두 세 명의 하녀들이 한 명씩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주교의 반지에 키스를 했다. 그는 두 손가락으로 그들을 축복했다. 조제프도 아내가 옆에서 쿡 찌르자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반지에 키스를 했다. 주교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넨 불가지론자라면서?"
조제프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습니다, 몽세녜르."
"걱정할 것 없네.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훌륭한 하인이었으니, 하느님도 그런 잘못된 생각쯤은 너그럽게 봐주실 거야."
나는 그와 함께 밖으로 나가 차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차에 올라타면서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의 가엾은 친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겉보기에는 결점도 많았지만, 본디 마음이 너그럽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친절하셨지요." - P394

"서재에 가면 메모판이 있을 겁니다. 그걸 갖고 와서 좀 받아 적어 주시죠." (중략)
그는 눈을 감고 잇었지만 입가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나는 그가 뭐라고 할지 몹시 궁금해졌다.
"엘리엇 템플턴 씨는 하느님과의 선약 때문에 노베말리 공작 부인의 친절한 초대에 응할 수 없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는 유령처럼 희미하게 키득거렸다. (중략) 그는 여전히 내가 훔쳐 낸 초대장을 들고 있었다. 들고 있기가 힘든 것 같아서 그의 손에서 빼내려고 했지만 너무 꽉 쥐고 있어서 빼낼 수가 없었다. 뒤이어 들려온 그의 힘찬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더러운 할망구."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러고는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 P397

"현명한 우리 구교에서는 믿는 것처럼 행동하면 믿음을 갖게 되고, 의심이 생겨도 신실하게 기도하면 의심이 사라지며, 성찬의 아름다움에 빠지면 평화가 내려온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중략) 우리 수도원에서 2-3 주 지내보는 게 어떨까요?우리 평수사들과 함께 밭일을 해도 되고, 우리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숟 있습니다. 탄광이나 독일의 농장에서 일하는 것 못지않게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겁니다. (중략) 당신은 신앙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 거리는 얇은 종잇장 두께에 불과합니다." (중략)
알자스 시골에 있는 수도원이었는데 경치가 참 예뻤어요. 엔스하임 신부는 수도원장에게 인사를 시킨 다음 제가 쓸 방을 보여줬죠. - P418

이사벨에게 칵테일을 건네다가 테이블에 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이야! 래리의 책이잖아."
내가 소리쳤다.
"오늘 아침에 왔는데, 너무 바빠서 들춰 보지도 못했어요. 오전 내내 수십 가지 일을 처리해 놓고 점심엔 밖에 나가서 밥을 먹고 오후에는 몰리뉴에 갔었거든요. 언제쯤이나 볼 시간이 날지 모르겠네요."
작가는 열과 성을 다해 몇 달에 걸쳐 책 한 권을 완성하는데, 독자는 이 세상에 할 일이 하나도 없어질 때까지 그 책을 아무 데나 놓아둔다고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 P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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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이 필요한 순간 - 경제학은 어떻게 사람을 살리는가
김현철 지음 / 김영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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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경제학의 트렌드를 알 수 있어서 유익했다. 실험과 데이터를 중시하는, 자연 과학 스타일의 경제학 연구 성과들을 알기 쉽게 소개해 준다.


<덧붙임>

저자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독서,예술, 스포츠를 포함한 다양한 학교 활동을 강조하고, 수능에 대해서는 굉장히 적대적으로 말하더라. 본인처럼 예술, 체육 성적을 포함한 내신 성적 전교1등을 간단하게 하는 게 불가능한, 재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수능이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지 전혀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았다. 본문 내용 중에 육아 비용이 너무 비싸다면서, 50대-60대 저학력 여성인 육아 도우미가 30대 대졸 여성 평균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는 것을 비판하는 부분도 그렇고, 인간의 개인적인 경험들이 만들어내는 무지와 편견은 극복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실감했다.

경제학은 2000년대 들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양질의 데이터와 연구 방법론의 발전은 실증 경제학 연구의 신뢰성을 크게 발전시켰죠. 이를 소위 경제학의 ‘신뢰성 혁명 Credibility Revolution’이라 부릅니다.
신뢰성 혁명은 우선 양질의 데이터가 확보될 수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선진국뿐 아니라 개발도상국에서도 우수한 데이터가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또 ‘자연 실험 Natural Experiment’이나 ‘사회 실험 Field Experiment’과 같은 기법을 이용하여, 정책 혹은 프로그램의 인과성을 입증하는 연구가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이에 하버드대학교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라즈 체티 Raj Chetty는 "경제학은 과학이다"라는 글을 ‘뉴욕타임스’에 기고했습니다. 가용한 데이터가 늘어남에 따라, 경제학은 더욱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분야가 되어가고 있다고 이야기했죠. - P17

우리나라 정부가 시행하는 수많은 프로그램 중 어떤 것이 작동하고, 어떤 것이 작동하지 않는지에 대한 근거는 대부분 부족합니다. 당위와 직관이 아닌 데이터와 근거에 기반한 정책을 만들어야 합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면밀히 조사해 진단한 후, 의학적 근거에 기반해 치료하듯이 말입니다. 암세포만을 떼어내는 외과 의사의 날카로운 칼과 같은, 사람을 살리는 정책을 만드는 일에 이 책이 기여했으면 좋겠습니다. - P21

제 책을 읽으시는 분들은 아마도 크고 작은 성취를 이룬 분들일 것입니다. 어렵게 살고 계신 분들은 한가하게 독서할 시간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죠. 아이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주셔도 좋겠습니다.
"인생 성공의 8할이 운이래. 우리 가족의 성취도 사실 대부분 운이야. 우리의 힘으로만 이룬 게 아니니까 겸손하게 살아야 해. 그리고 실패했다고 생각해도 좌절하지 말자. 운이 좀 나빴던 것뿐이야. 또 운이 나빴던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우며 살자꾸나. 혹시 스스로 성취한 것처럼 자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부러워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렴. 착각 속에 사는 사람이니까." - P30

자녀가 잘못했을 때, 어떤 부모는 "우리 애가 원래는 착한데 친구를 잘못 만나서 이렇게 됐어"라고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 물론 나쁜 친구의 영향도 있겠지만, 서로 친해져서 사고를 치는 아이들은 애초에 유유상종인 경우도 많은 게 사실입니다.
또 교육열 높은 부모는 자식이 공부 잘하는 친구를 만나길 원하기도 합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의 친구는 공부를 잘할 확률이 높으니까요 (연관성). 그런데 공부 잘하는 친구의 영향을 받아 성적이 오른 것인지 (친구 효과), 두 사람이 공유한 특성 때문에 서로 친구가 될 것인지 (유유상종) 쉽게 구분이 되질 않습니다. 만일 유유상종의 힘이 친구 효과를 아보한다면 이러한 부모의 바람은 별 소용없는 일일 것입니다.
인과성, 그러니까 ‘친구 효과’를 밝혀낸 최초의 실마리는 대학 룸메이트 연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 P90

하위권 학생의 경우 같은 반에 상위권 학생이 늘어나도 성적에 큰 변화가 없습니다. 반면 상위권 학생은, 비슷하게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늘어나면 큰 자극을 받아 성적이 오릅니다. 전교 1등은 전교 2등과 짝을 이뤘을 때 성적이 가장 많이 오릅니다. 하위권 학생들은 오히려 중위권 학생이 많아질 때 성적이 오르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 P94

특별히 해고될 염려도 거의 없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임금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연공제의 폐해가 큽니다. 젊은 세대한테 지나치게 불리한, 공정하지 못한 제도입니다. 운 나쁘게 실직한 사람들이 새로운 직장을 찾기에도 불리해 실직의 부정적 영향이 커집니다. 기업의 경쟁력에도 부정적 영향을 줄 수밖에 없지요.
다만, 동시에 실직해도 큰 걱정이 없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안전망을 크게 강화해야 합니다. 서울시에서 시범 사업 중인 ‘안심 소득’은 확실하게 소득을 보장합니다. 가령 소득이 없는 3인 가구에 월 170만 원을 지급합니다.
유연한 노동시장을 통해 기업은 능력 있는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고 경쟁력을 높이며, 국가는 충분한 소득 보장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발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 P107

그렇다면 육아가 조부모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요?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와 그렇지 않은 조부모의 건강을 비교하면 될까요? 답은 ‘아니요’입니다. 왜냐하면 건강한 노인이 손주를 돌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픈 노인은 아무래도 애초에 손주를 돌보기가 어렵겠죠.
즉, 우리는 ‘육아-건강’ 채널을 알고 싶지만, 그 반대로 ‘건강-육아’ 채널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두 집단을 비교하는 (틀린) 방법으로 분석을 해보면,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는 건강해진다고 잘못 이해하게 되죠. 건강하니까 손주를 돌볼 수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이를 학술 용어로 ‘역인과관계 Reverse Causality’라고 합니다. - P112

부모님이 편찮으셔서 전담 간병인을 고용하고자 하면 월 평균 300-400만 원 정도 비용이 든다는 사실에 많은 분들이 깜짝 놀랍니다. 입주 육아 도우미의 비용도 비슷한 수준입니다.
반면 대한민국 30대 여성의 중위소득은 320만 원 정도입니다. 대부분 학력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50-60대 이상 돌봄 노동자의 임금이 평균 대졸 30대 여성의 임금보다 큽니다.
돌봄 노동자 공급 부족에서 나온 기현상입니다. - P131

정책은 설계 단계인 타당성 조사와 시범 사업에서부터 그 효과를 충분히 입증한 뒤 시행해야 합니다. 가령 정부가 성적 장학금 제도를 도입하려 한다면, 제가 했던 것과 같이 먼저 소규모 실험을 해보는 것입니다. 만일 실패한다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이상과 거리가 멉니다. 수많은 정책을 당위와 직관, 빈약한 증거를 토대로 도입합니다.
- P159

지금까지 국민의 부담을 줄여주려는 선한 의도를 가진 보장성 확대 정책의 장단점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는, 경증 질환 치료를 저렴하게 하는 정책은 필요성이 낮지만 선거 기간 표심에 영향을 줍니다. 반면 소수의 사람이 혜택을 보고 목돈이 드는, 중증 질환 치료비를 줄여주는 정책은 꼭 필요하지만 득표에 별 도움이 되지 않죠. 그 탓에 건강보험이 가장 아픈 사람을 충분히 보호하는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정책 입안자와 국민의 분별력 있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 P184

이 연구는 생산성 높은 사람들이 ‘고임금, 주 5일’ 직장으로 몰리고, 생산성 낮은 사람들이 ‘저임금, 주 4일’ 직장으로 분포되는 현상을 예측하게 합니다. 생산성 낮은 사람들이 몰리는 ‘저임금, 주 4일’ 회사는 장기적으로 생산성이 더 낮아져 생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 P221

여성 전용 주차장도 오답입니다. 정답은 어린아이와 노약자 동반 가족을 위한 주차장입니다. 남녀 모두가 혜택을 누릴 수 있기에 불필요한 젠더 갈등이 생길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돌봄을 주로 여성이 담당하는 현실이니 대부분의 혜택은 여성이 누릴 것입니다. - P234

팬데믹 대처 과정에서 정부 및 언론의 국민과의 의사소통도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코로나19 감염 사례와 사망 보도를 거의 매일 접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결과 코로나19의 위험을 실제보다 훨씬 크게 인식했죠. 이를 ‘노출 효과’ 혹은 ‘가용성 편향 availability bias’이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대다수 국민이 일반 폐렴, 자살, 교통사고보다 코로나19의 위험을 크게 인식했을 겁니다. 이런 편향된 인식은 이를 대비하는 정책에도 잘못된 영향을 줍니다. 정부가 국민의 가장 중요한 위험에 대처하기보다는 사람들이 가장 큰 두려움을 해소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 P238

놀랍게도 우리에게는 학생들의 학력과 관련한 체계적인 자료가 부재합니다. 사실 전국 단위 시험 결과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유일한 전국 단위 시험인 학업 성취도 평가는 중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하고, 그나마도 전체가 아닌 3% 샘플입니다. 더구나 초등학생은 전국 단위 시험이 없어 등교 제한이라는 전무후무한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그것이 학생들의 학업 성취에 미친 영향을 알 길이 없습니다.
학생들에게 지나친 시험 부담을 주는 것은 문제지만,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저는 적어도 1-2 년에 한 번씩 학생들의 성취를 체계적으로 수집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학생들의 학력뿐만 아니라 이른바 비인지 기능(가령 사회성, 끈기 등)에 대한 체계적 조사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P255

요약하면, 우리나라에서의 등교 제한은 고등학생의 ‘평균’ 학업 성취도를 낮추지 않았지만 학습 불평등은 증가시켰습니다. 잘하는 친구들은 더 잘하고, 못 하는 친구들은 더 못 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완벽하게 알 수는 없지만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합니다.
상위권 학생들에게 공교육은 애초에 사교육 같은 대체 학습에 비해 효과적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기에 팬데믹으로 등교하지 않는 동안 본인 수준에 맞는 공부를 해서 성적이 올랐을 수 있습니다. 또 상위권 학생의 부모는 이 기간 아이들의 학업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을 것입니다.
반면 하위권 학생들에게 등교는 공부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을 제공합니다. 학교를 가지 않으니 학업에 손을 놓아버렸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교육에 적극적일 가능성도 낮습니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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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베일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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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읽기 편한 책. 어리석고 경박하다고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는 키티의 항변은 어리석고 경박한 사람의 말 치고는 너무 지혜로워 보여서 좀 어색했다. 인간이란 게 원래 이렇게 일관성이 없는 존재인 걸까? 다른 등장인물들에 비해서 키티라는 인물이 유독 일관성이 없이 튀는 느낌이어서, 작가 자신이 여성 인물을 잘 이해 못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찰스 타운센트나 월터 페인을 해부대에 펼쳐놓듯이 보여주는 데 비해서, 키티는 뭔가 알듯말듯하다. 

"내가 어리석고 경박하고 천박하다고 해서 날 비난하는 건 공평하지 않아요. 난 그렇게 자랐어요. 내가 아는 모든 여자들은 다 그래요. ....교향곡 연주회가 지루하다는 사람에게 음악에 대한 기호가 없다고 힐책하는 것과 같아요. 내가 갖지 못한 품성을 내 탓으로 돌리고 나를 비난하는 게 공평한가요? 난 내가 아닌 존재인 척하면서 당신을 속이려고 한 적 없어요. 난 그냥 예쁘고 명랑해요. 장터 노점에서 진주 목걸이나 담비 외투를 찾지 마요. 주석 트럼펫이나 장난감 풍선을 찾으라고요." - P182

키티는 매일 워딩턴을 만났다. 워딩턴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언덕을 어슬렁거리며 올라와 페인 부부의 방갈로를 찾았던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이 흐르자 다른 상황에서라면 1년은 족히 걸려 생겼을 친밀감이 그들 사이에 싹텄다. 한번은 키티가 그가 없으면 어떻게 지내야 할지 막막할 거라고 말하자 그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현실의 땅 위에 조용하고도 평화롭게 걸어다니는 사람은 부인과 내가 유일합니다. 수녀들은 하늘 위를 걷고 당신의 남편은.... 암흑 속을 걷죠." - P145

그(인용자주-워딩턴)는 (중국학을 날뛰는 산토끼처럼 미친 학문이라고 욕하며) 자신이 중국어 학자가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중국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는 글은 거의 읽지 못했지만 일상 대화 속에서 말을 배웠다. 그래서 가끔 키티에게 중국 소설이나 중국 역사 속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다소 우쭐대는 농담조로 말하긴 했어도 그것들은 꽤나 재미있고 애정이 담겨 있었다. 아마도 그는 유럽 인들이 야만적이고 그들의 삶은 어리석다고 여기는 중국인의 시각을 무의식적으로 차용한 듯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 어리석음 속에서 진실을 구분해 낼 수 있다는, 중국에서나 통할 법한 생각이었다. 한번 눈여겨볼 가치가 있는 생각이었다. 키티는 중국인들에 대해서라면 퇴폐적이고 더럽고 입에 담기도 싫은 족속이라는 말 빼고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마치 커튼의 한쪽 끝이 들어 올려진 틈새고 꿈에서도 본 적 없는 다채롭고 장대한 세상을 언뜻 본 것만 같았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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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와 맥주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4
서머싯 몸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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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날카로운 관찰자의 시각으로 한 시대의 모습을 유머러스하면서도  품위 있게 보여준다. 


윌리 어셴든이 젊었을 때도 50이 넘어서도 한결같이 훌륭하게 느껴진다고 평한 소설들 중 한국어 번역이 나오지 않은 필딩의 <아멜리아>를 뺀 다섯 편을 다 읽었다는 게 뿌듯하다. 나, 소설도 잘 골라서 읽고 있었구나ㅎ. 그 다섯 편은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 새커리의 <허영의 시장>,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스탕달의 <파르마의 수도원>,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이다. 



(아래는 스포일러)



신사 계층의 사람들이 모두들 경멸하는 분수 모르는 장사꾼을 "완벽한 신사"라고 칭하는 하층 계급 출신 옛 미녀의 말을 통해, 세상의 가치관에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마무리가 압권이다. 

여섯 살 딸의 죽음을 한 사람은 예술로, 한 사람은 육체의 쾌락으로 극복하며 각자 다른 길을 찾아서 헤어지는 젊은 부모의 모습이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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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발간되었을 때 나는 여러 대상에게서 공격을 받았다. 내가 토머스 하디를 모델로 에드워드 드리필드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는 의혹 때문이었다. 그것은 나의 의도가 아니었다. 나는 토머스 하디를 조지 메러디스나 아나톨 프랑스만큼이나 염두에 둔 적이 없다. (중략) 나는 열여덟 살 때 ‘테스’를 읽고 젖 짜는 아가씨와 결혼하리라 결심할 만큼 그것에 열광했지만, 대부분 의 동시대인들과 달리 하디의 다른 작품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문체도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 P9

나는 토머스 하디를 딱 한 번 만났다. 장소는 레이디 세인트헬리어의 만찬 자리였다. (중략) 당시 나는 인기 있고 잘나가는 극작가였다. 그 자리는 전쟁 전 사람들이 열곤 했던 성대한 만찬 파티들 중 하나였다.(중략) 스물네 명의 참석자들은 모두 신분이나 정치적 입지, 혹은 예술적 성취도가 남다른 사람들이었다. 숙녀들이 응접실로 물러갔을 때 나는 우연히 토머스 하디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중략)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사십오 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 것은 분명하다. 대화가 끝날 무렵 그는 나를 크게 칭찬하고 나서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내 이름을 들은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 P10

듣자 하니 작가 두세 명이 앨로이 키어라는 인물이 본인을 겨냥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것은 그들이 오해다. 이 인물은 여러 가지가 복합된 초상이다. 외모는 한 작가에게서 따왔고, 상류 사회에 대한 집착은 다른 작가에게서, 활력은 세 번째 작가에게서, 운동 능력의 자긍심은 네 번째 작가에게서, 그 외에 많은 부분은 나 자신에게서 빌려 왔다. (중략) 자신의 작품을 홍보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하는 작가를 표현할 때 나는 다른 사람에게 초점을 맞출 필요가 없었다. 그러기에 이것은 너무나 흔한 관행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 P10

로이는 처음부터 유리한 고지에서 출발했다. 그는 오랫동안 홍콩에서 식민 장관을 지낸 뒤 자메이카 총독으로 퇴임한 공무원의 외아들이었다. (중략) 로이는 아무런 빚도 지지 않고 대학을 졸업했다. 이미 그때부터 검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쓸데없는 지출을 자제했다. 그는 좋은 아들이었다. 자기가 받은 값비싼 교육이 부모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P16

그 집안의 섬세하고 허약한 외아들을 가르친 것이 로이에게는 젊은 나이에 큰 세상으로 진입하는 발판이 되었다. 그는 이 경험을 십분 활용했다. 주간지로 상류 사회를 엿본 작가의 작품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그런 결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공작들이 서로 어떻게 대화하는지, 국회의원과 대리인, 마권업자, 대리 주차원에게 각각 어떤 호칭으로 대우를 받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의 초기 소설에 등작하는 총독, 대사, 수상, 왕족, 귀부인의 경쾌한 면모에는 어떤 매력이 살아있다. (중략) 귀족들의 행위가 더 이상 진지한 소설의 적당한 소재가 될 수 없는 시류 탓에 언제나 시대의 흐름에 극도로 민감한 로이가 후반기 소설들을 사무 변호사, 공인 회계사, 농산물 브로커의 내적 갈등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나는 늘 애석하게 생각한다. - P17

많은 작가들이 단어에 심취해 있다 보니 대화 중에 단어를 지나치게 고르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너무 정성껏 문장을 만들어 의도하는 바를 가감 없이 정확하게 말한다. 그래서 어휘 구사력이 단순하고 민감한 욕구에 국한된 상류 사회 사람들은 이들과 의사소통에 다소 어려움을 겪게 되고, 그 결과 이들하고 어울리는 것을 망설이게 된다. 로이는 이러한 종류의 제약을 받은 적이 없었다.
- P36

현자는 모름지기 상용구를 많이 쓰고 유행하는 형용사를 쓰며 그 상황에 딱 들어맞는 표현을 써서 환담에 소탈한 광채를 더하고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게끔 한다. 지구상에서 효율성을 가장 따지는 미국인들은 이러한 요령을 완벽의 경지로 끌어올려 방대한 범위에서 간결하고 진부한 문구들을 무수히 만들어 냈고, 그 덕분에 서로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한시도 생각하지 않고 즐겁고 활기찬 대화를 이어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로써 이성은 큰 사업과 간통 같은 더 중요한 문제의 몫으로 자유롭게 남겨둔다 - P37

"그럼 그때나 지금이나 대단하다고 생각한 건 무엇인가?"
"글세, ‘트리스트럼 샌디’, ‘아멜리아’, ‘허영의 시장’, ‘마담 보바리’, ‘파르마의 수도원’,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워즈워스와 키츠, 베를렌."
"내가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다지 독창적인 생각은 아닌 것 같군."
"그렇게 말해도 무리는 아니지. 내가 봐도 독창적이지 않으니까." - P44

내 숙부는 교구 목사였다. 숙모는 독일인이었는데, 신분이 대단히 높았지만 가난한 집안 출신이어서 결혼할 때 가져온 것이 17세기 조상 중 한 분이 제작한 쪽매붙임 책상 하나와 컵 세트뿐이었다. 내가 그 집에 살 때는 컵들이 몇 개 남지 않아 응접실에서 장식품으로 쓰이고 있었다. 나는 전체적으로 웅장한 문장이 새겨진 그 컵들을 좋아했다. 컵에는 숙모가 점잖게 설명해 준 결합 문장이 무수히 많았는데 문장을 받치는 동물들이 정교하고 왕관에서 솟아난 투구는 굉장히 낭만적이었다. 숙모는 소박한 노부인으로 온화한 기독교인의 성향을 지녔지만, 봉급 외에 부수입이 거의 없는 평범한 목사와 결혼한 지 삼십 년이 넘은 처지에도 자신의 ‘고귀한 태생’을 결코 잊지 않았다. - P52

한번은 오늘날 금융계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런던의 부유한 은행가가 이웃집을 빌려 여름휴가를 보낸 적이 있었다. 숙부는 그를 찾아갔지만 (복자 협회의 기부금을 얻어 보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숙모는 그가 장사꾼이라는 이유로 방문하지 않았다. 아무도 숙모를 거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극히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그 은행가에게는 내 또래의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자세한 경위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 아이와 친해지게 되었다. 내가 그 아이를 목사관에 데려와도 되느냐고 물었을 때 이어졌던 대화가 아직도 기억난다. 망설임 끝에 허락이 떨어졌지만 그 아이의 집에는 가지 말라는 금지령이 내려졌다. 숙모는 나더러 다음에는 석탄 상인의 집에 가겠다고 하겠구나 했고, 숙부는 이렇게 말했다. "나쁜 언사를 행실을 망친단다." - P53

호드마시 부인은 초대한 작가들의 책을 읽은 적이 없었고 화가들의 그림 또한 본 적 없었지만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겼고 그 과정에서 예술계의 사정에 밝아지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던 중 그 자리에서 부인의 가장 유명한 이웃 에드워드 드리필드가 잠시 화제에 올랐고, 내가 한때 그와 잘 아는 사이였다고 말하자 부인은 많은 손님들이 런던으로 돌아가는 월요일에 그분 댁을 방문해 점심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난색을 표했다. 드리필드를 만난 것이 삽십오 년도 더 지난 일이라 그가 나를 기억할 리 만무했고, 기억한다 해도 (이 말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지만) 즐거운 기억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P64

하지만 그 자리에 문학열을 뜨겁게 불태우는 스캘리언 경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법률가의 소임에 충실하기보다 탐정 소설 창작에 기운을 빼는 자였다. 그는 드리필드를 만나고 싶은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호드마시 부인이 말을 꺼내자마자 아주 훌륭한 제안이라고 나섰다. 파티의 주빈은 젊고 뚱뚱한 공작 부인이었는데, 그녀마저 그날 런던의 약속을 취소하고 오후에 출발하는 것을 감수할 만큼 그 유명한 작가를 열렬히 숭배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우리 넷이 되겠네요." 호드마시 부인이 말했다. "더 많으면 그들도 난처할 거예요. 드리필드 부인에게 즉시 전보를 보내죠." - P65

"대체 드리필드 부부가 뭘 잘못한 거야?" 나는 메리앤에게 물었다.
메리앤은 열여덟 살 때 목사관에 왔다. 어린 나를 목욕시켰고, 필요하면 자두잼에 가루 설탕을 뿌려 주었고, 학교에 갈 때 책가방을 싸 주었고, 아플 때는 병간호를 해 주었고, 심심할 때는 책을 읽어 주었고, 말썽을 부리면 꾸짖기도 했다. 하녀인 에밀리는 철부지 덜렁이라 메리앤은 에밀 리가 나를 돌보았ㅇ면 내가 어찌 되었을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중략)
"도련님이 내 조카는 아니지만 나라도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게 가만두지 않았을 거예요! 도련님한테 자전거를 같이 타자고 했다니 원. 하여간 사람들이 별짓을 다하지."
- P86

나는 조지 경을 알고 있었다. 이름은 조지 켐프였고, ‘경’이라는 말은 배포가 워낙 커서 붙은 별명이었다. 그는 이 고장 석탄 상인이었다. 부동산업에도 손을 댔고, 석탄선 한두 척에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땅에 지은 새 벽돌집에 살면서 자기 마차를 몰았다. 그는 뾰족한 턱수염을 기른 투실투실한 남자였다. 발그레한 혈색에 파란 눈은 부리부리했다. 돌이켜 보면 옛날 네덜란드 그림에 흔히 보이는 붉은 얼굴의 유쾌한 상인과 흡사했다. 복장은 언제나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 P90

마을 의사의 아내가 숙모를 만나러 왔을 때의 일이 기억난다. 에밀 리가 들어와서는 숙부에게 조지 켐프 씨가 와서 숙부를 뵙기를 청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관문 벨 소리가 났는데, 에밀리." 숙모가 말했다.
"네, 그 사람이 현관문으로 왔어요."
순간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모두들 뜻밖의 사건에 어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난색이었다. 누구는 현관문으로 오고 누구는 옆문으로 오고 누구는 뒷문으로 와야 하는지 아는 에밀리마저도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심성이 착한 숙모는 누군가 잘못된 위치에 서는 일이 벌어져 진심으로 난감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의사의 아내는 기가 차다는 듯 살짝 콧방귀를 꼈다. 마침내 숙부가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내 서재로 안내해, 에밀리." 숙부가 말했다. "아를 마시는 대로 가볼 테니까." - P91

모두들 그랬듯 나도 조지 경을 조롱하고 깔보았다는 것을 덧붙여 둔다. 그가 거리에서 나를 붙잡아 세우고 내 이름을 불러 대면서 우리 사이에 신분의 차이가 없는 양 이야기할 때면 화가 났다. 그는 내게 아들들이 나랑 같은 또래라면서 같이 크리켓을 해 보라는 말도 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들은 하버샴의 중등학교에 다녔고 당연히 나는 그 아이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 P92

메리앤의 이야기는 충격적이면서도 흥미진진했지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소설을 너무 읽은 데다 사랑을 알기에는 학교 공부가 너무 많아서 사랑이란 그저 젊은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막연히 알고 있었는데, 턱수염이 난 데다 내 또래의 아들들을 둔 남자가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니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그런 것은 결혼하면 끝나는 게 아니던가. 서른이 넘은 사람들이 사랑을 한다니 속이 좀 울렁거렸다.
"그래도 두 사람이 실제로 무얼 한 건 아니지?" 나는 메리앤에게 물었다.
"듣자 하니 그 로지 갠이라는 여자는 하지 않은 게 거의 없는 모양이던데요. 그리고 상대는 조지 경만이 아니었어요." - P92

"그런데 왜 그 여자는 아기가 안 생겼지?"
내가 읽은 소설에서는 예쁜 여자가 어리석은 짓에 휩쓸리면 반드시 아기를 낳았다. 원인이 되는 장면은 애매모호하게 설명되었고 가끔은 숨김표로 암시되었지만 그 결과는 불가피했다.
"처신을 잘했다기보다 운이 좋았다고 봐야죠." 메리앤은 그렇게 말하고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바쁘게 접시를 닦던 손길을 멈추었다. "우리 도련님이 필요 이상으로 많은 걸 아네."
"당연히 알지." 나는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참 나, 나도 이제 다 컸어. 왜 이래?" - P93

마흔 살에 정치인이었던 사람이 일흔 살이 되면 정치 거물이 된다. 너무 늙어 점원도 정원사도 즉결 심판 치안 판사도 못 하는 나이가 되어서야 한 나라를 다스릴 만큼 성숙해진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예로부터 노인들은 그들이 젊은이들보다 더 현명하다고 젊은이들을 끊임없이 세뇌했고, 젊은이들은 그것이 허튼소리임을 깨달을 즈음엔 이미 늙은이가 되어 그 기만적 행태에 편승해 이익을 봐 왔다. 또한 정치인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치고 국가를 다스리는 데 별다른 지능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결과만 봐도 판단이 가능하다.) 하지만 작가들은 왜 나이가 들어 갈수록 존경을 받아야 하는지 나는 오랫동안 의구심을 품어 왔다. - P143

만약 이십 년째 주목할 만한 작품을 쓰지 못하는 노작가라면 경쟁자로서 젊은 작가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므로 그의 가치를 극찬해도 괜찮다는 점에서 합리적 찬사라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알다시피 두렵지 않은 경쟁자를 칭찬하는 것은 만만찮은 경쟁자를 견제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성을 너무 폄하하는 시각일 수 있고, 싸구려 냉소주의라는 비판을 자초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곰곰이 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 P144

평균 나이를 넘긴 노작가가 노년에 보편적으로 칭송받는 진짜 이유는 지식인들이 서른 살이 넘으면 글을 전혀 읽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젊었을 때 읽은 책들은 화려한 빛을 발하기 마련이니 그 책을 쓴 저자의 가치는 해마다 높아진다. 물론 계속 글을 쓰고 대중의 시선 안에 머무는 노작가여야 한다. 걸작을 한두 편 쓴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걸작들을 떠받칠 받침대로 변변찮은 작품을 사오십 편쯤 펴내야 한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매력으로 독자를 사로잡을 수 없다면 무게로 독자를 압도하겠다는 각오로 대량 생산을 해야 한다. 내 생각대로 긴 수명이 천재성이라면 당대에 에드워드 드리필드만큼 긴 수명을 오래도록 뚜렷하게 누린 작가는 드물다. - P144

"그 사람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로지의 시선이 벽에 걸린 사진으로 흘러갔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동안 내가 못 보고 지나친 사진이었다. 크게 확대된 조지 경의 사진이 조각된 도금 액자에 들어 있었다. (중략) 풍성한 콧수염은 끝에 왁스를 발랐고, 능청스러운 눈빛으로 으스대며 활보하는 걸음새였다. 한껏 차려입고 더비 경마장에 가는 펍 주인 같았다.
"그건 말이지." 로지가 말했다. "그이는 언제나 완벽한 신사였거든."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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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풀니스 (50만 부 뉴에디션) -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이유와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
한스 로슬링.올라 로슬링.안나 로슬링 뢴룬드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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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세계가 점점 나빠진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보기에는 생각을 아예 ‘안 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생각이 아닌 느낌을 말할 뿐이다. 내가 이렇게 명확하고 멋진 자료를 여럿 제시해도 세계가 점점 좋아진다는 데 동의하기가 여전히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아마도 거대한 문제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가 점점 좋아진다는 말이 마치 만사 오케이라거나 심각한 문제가 없는 척 외면하라는 말처럼 ‘느껴지고’, 그러다 보니 그런 말이 터무니없어 보이고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중략) 그러나 이미 이룩한 발전을 외면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터무니없고 스트레스다. - P99

유엔의 릴리프웹ReliefWeb은 재해 지역 지원 사업에서 세계의 조정자 역할을 한다. 앞선 세대의 재해 피해자들은 그저 상상만 하던 일이다. 비용은 4단계 납세자들이 충당한다. 우리가 자부심을 느길 만한 일이다. 우리 인간은 마침내 자연재해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자연재해 사망자가 급격히 감소하는 추세 역시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중략) 릴리프웹에 비용을 대는 4단계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우리가 자연재해 추셀ㄹ 질문한 바로 그들이다. 이들 중 91%가 자신이 비용을 대는 사업이 성공한 줄 모르고 있었다.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언론은 끊임없이 최악의 사태인 양 보도하기 때문이다. - P156

카메라가 잿더미에서 끄집어낸 아이의 시체를 훑을 때 나는 두려움과 비통함에 지적 능력이 마비된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어떤 도표도 내 감정에 영향을 미칠 수 없고, 어떤 진실도 내게 위안을 주지 못한다. 그 순간에 세상이 더 좋아진다고 주장한다면, 피해자와 그 가족의 참담함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 되기 쉬워 대단히 비윤리적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큰 그림을 잊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들을 도와야 한다. 거창한 진실과 큰 그림은 그 위험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그 후에는 다시 과감하게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바라봐야 한다. 뇌를 식히고 수치를 비교하면서 우리 자원이 미래의 고통을 멈추는 데 효과적으로 쓰이는지 점검해야 한다. 자원 배분의 우선순위를 정할 때 공포를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위험이 지금은 국제적 공조 덕에 우리에게 가장 적은 해를 끼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 P157

세계는 실제보다 더 무서워 보인다. 우리는 주목 필터나 언론에 걸러진 무서운 것을 보고 듣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의 위험성은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이 아니라, 실제 위험과 그것에 노출되는 정도를 합쳐 결정한다. 두려움을 느끼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공포가 진정될 때까지 가급적 결정을 유보하라. - P174

1, 2단계 나라에서 아이들의 목숨을 살리는 것은 의사나 병실 침대가 아니다. 병실 침대와 의사는 수를 세기 쉽고 정치인은 병원 개원식을 무척 좋아하지만, 아이들의 생존율을 높이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병원 밖에서 해당 지역 간호사, 산파, 교육받은 부모 등이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특히 엄마의 역할이 중요하다. 데이터를 보면 세계적으로 아동 생존율 증가의 절반은 엄마들의 탈문맹에서 나왔다. 지금은 아동 생존율이 더 높아졌다. 처음부터 아예 병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훈련받은 산파가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돕고, 간호사는 아기에게 면역력을 심어준다. 아기는 잘 먹고, 부모는 아기를 늘 따뜻하고 청결하게 관리한다. 그리고 아기 주변 사람들은 손을 씻고, 엄마는 약통에 붙은 지시 사항을 읽을 줄 알게 되었다. - P184

니엠은 나를 태우고 도시 중앙에 있는 공원으로 갔다. 거기엔 황동 판이 붙은 1m 정도 높이의 돌이 있었다. 나는 농담이겠지 싶었다. 서양에서는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가 활동가 세대를 하나로 통합하는 역할을 할 정도였다. 내가 담요와 의료 기구를 보낸 것도 거기에 자극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쟁에서 150만 명 넘는 베트남인과 5만8000명 넘는 미국인이 목숨을 잃었다. 도시가 그런 대재앙을 기억하는 방식이 고작 이런 식이라니! 내가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자 니엠은 나를 태우고 더 큰 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3.5m가 넘는 대리석 비로, 프랑스 식민 통치에서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시큰둥했다.(아래에 계속) - P187

(위에서 계속)니엠은 내게 비다운 비를 볼 준비가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나를 태우고 조금 더 가더니 창밖을 가리켰다. 나무 꼭대기 너머로 금색으로 덮인 거대한 돌탑이 보였다. 100m 가까이 되어 보였다. "여기가 전쟁 영웅을 추모하는 곳이에요. 멋지죠?" 베트남이 중국을 상대로 싸운 전쟁을 기리는 비였다. 중국과의 전쟁은 싸움과 휴전을 반복하며 2000년 동안 지속되었다. 프랑스가 점령한 기간은 200년이었다. 대미항전은 고작 20년 지속되었다. 비의 크기는 그런 기간을 완벽하게 반영했다. 나는 여러 개의 비를 비교한 뒤에야 비로소 지금 베트남 사람들에게 베트남전쟁은 상대적으로 의미가 작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 P187

"아이한테 망치를 주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는 말이 있다. 가치 있는 전문성을 지닌 사람은 그 전문성을 활용할 곳을 찾고 싶어한다. 그래서 전문가는 더러 어렵게 얻은 지식과 기술을 본래의 활용 영역을 넘어선 곳에도 적용할 방법을 고민한다. - P273

경제와 사회가 크게 발전한 나라라고 해서 다 민주국가는 아니다. (산유국도 아닌)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빨리 1단계에서 3단계로 넘어갔고, 그 시기는 줄곧 군부 독재가 이어졌다. 2012-2016년에 빠른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 열 곳 중 아홉 곳은 민주주의 수준이 낮았다. 경제성장과 보건 의료 발전에 민주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그와 모순되는 현실에 부딪히기 쉽다. 따라서 우리가 좋아하는 다른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민주주의가 우월한 수단이라고 주장하기보다 민주주의 자체를 목적으로 지지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 P286

단순한 생각과 단순한 해결책을 조심하라. 역사는 단순한 유토피아적 시각으로 끔찍한 행동을 정당화한 사람으로 가득하다. 복잡함을 끌어안아라. 여러 생각을 섞고 절충하라. 문제는 하나씩 사안별로 해결하라. - P288

세계의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려면 개인에게 죄를 추궁하기보다 시스템에 주목해야 할 때가 많다. 비난 본능은 일이 잘 풀릴 때도 발동되어 칭찬 역시 비난만큼 쉽게 나온다. 일이 잘 풀릴 때 우리는 아주 쉽게 그 공을 개인이나 단순한 원인으로 돌리는데, 이때도 대개는 문제가 훨씬 복잡하다. 세계를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세계를 이해해야지 비난 본능에 좌우돼서는 안 된다. - P295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에게 겸손과 호기심을 가르쳐야 한다. 여기서 겸손이란 본능으로 사실을 올바르게 파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것이고, 지식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아울러 "모른다"고 말하는 걸 꺼리지 않는 것이자,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을 때 기존 의견을 기꺼이 바꾸는 것이다. 겸손하면 모든 것에 대해 내 견해가 있어야 한다는 압박감도 없고, 항상 내 견해를 옹호할 준비를 해야 할 필요도 없어 마음이 편하다. - P357

호기심이란 새로운 정보를 마다하지 않고 적극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한다. 아울러 내 세계관에 맞지 않는 사실을 끌어안고 그 것이 내포한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실수를 부끄러워하기보다 실수에서 호기심을 이끌어내자. ‘내가 그 사실을 어쩌면 이렇게 잘못 알 수 있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사람들이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왜 그런 해결책을 썼을까?‘ 호기심을 품으면 늘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 꽤 흥미진진하다. - P357

사실에 근거한 경험 법칙
1. 간극. 다수를 보라.
2. 부정. 나쁜 소식을 예상하라.
3. 직선. 선은 굽을 수도 있다.
4. 공포. 위험성을 계산하라.
5. 크기. 비율을 고려하라.
6. 일반화. 범주에 의문을 품어라.
7. 운명. 느린 변화도 변화다.
8. 단일 관점. 도구 상자를 챙겨라.
9. 비난. 손가락질을 자제하라.
10. 다급함. 하나씩 차근차근 행동하라.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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