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인터넷에서 시작되었다 - 디지털 리터러시를 위한 여섯 가지 이야기
김경화 지음 / 다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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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과연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변화의 시작점인 우리의 일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다. 내 생활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한다면 미래에 관한 어떤 이야기도 공허할 수밖에 없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삶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는 사람은 어떤 변화가 와도 스스로 대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인터넷의 사회적 영향력을 자신의 힘으로 깨닫고 이해하는 인문학적 소양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 P11

하필이면 1990년대 말 IMF 사태 직후였다. 비교적 안정된 직장을 자기 의지로 그만두는 일은 드물던 때였지만, 젊은 패기를 믿고 불안한 미래에 맞서기로 했다. 이후 나는 망설임 끝에 스무 명 내외의 젊은이가 의기투합한 작은 인터넷 회사에 입사했다. ‘네이버컴’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이 회사가 20여 년 만에 한국의 대표적 인터넷 기업이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 P65

UCC라는 개념이 시들해지는 사이에 UDC User Distributed Contents라는 새로운 용어도 등장했다. ‘이용자가 배급하는 콘텐츠’라는 뜻으로, SNS 이용자들의 적극적인 선택이 결과적으로 콘텐츠의 영향력을 넓히고 가치를 높인다는 점에 주목한 개념이다. - P75

정보와 지식이 희소가치라는 지식경제의 원리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에서는 조회수, 클릭, 리트윗 좋아요 횟수 등으로 환산되는 이용자들의 관심이 희소가치이며,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여 최대한의 관심을 얻는 것이 경제적 효용이다. 이 점을 설명한 개념이 바로 ‘관심경제 Attention economy’이다. - P79

소셜네트워크는 사람 사이의 연결망을 뜻하며, 이는 사회가 돌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다. 동네 사람, 학교 동문, 회사 동료 등이 이런 소셜네트워크의 대표 격인데, 이런 사람 사이의 연결망 없이 우리 사회는 기능할 수 없다. 소셜 미디어나 SNS가 없던 시절에도 이런 소셜네트워크는 잘 구축되고 유지되어왔다. 소셜미디어나 SNS는 이 틀을 인터넷에서 구현한 플랫폼이다. - P141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중심으로 활동하면 다른 사람과 네트워킹하기 쉽지 않다. 근황을 알기 위해 일부러 서로의 홈페이지를 방문해야만 했는데, 웬만한 관심과 노력 없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지인과 쉽게 정보를 교환하고 교류할 수 있는 SNS가 훨씬 편리하다. - P142

매스미디어의 후광 없이 순수하게 지인 네트워크에서 사회적 인지도를 획득한 유명인이 많아지고 있다. 인플루언서라고 불리는 SNS의 유명인이 대표적인 예다. 이들은 수많은 팔로워의 지지를 바탕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소셜네트워크는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 P144

한 인류학자가 영장류의 뇌 크기와 사회집단 사이의 상관관계를 조사했다. (중략) 영장류의 뇌 용량이 클수록 함께 생활하는 무리의 크기가 크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중략)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인간은?’이라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이 인류학자는 인간이 안정적으로 사회생활을 유지하는 사회집단은 150명 정도의 규모로 추정된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150명이라는 수치는 이 인류학자의 이름을 따서 ‘던바의 수 Dunbar’s number’라고도 부른다. - P146

SNS 시대에 던바의 수라는 개념의 의미를 곱씹어보는 것은 유의미하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무제한으로 지인을 늘려나갈 수 있지만, 실제로 내 삶에 영향을 주는 사람의 수가 무한정 늘어나지는 않는다. 실제로 SNS에서 수천수만 명의 팔로워나 구독자를 확보한 경우에도 매스미디어의 시청자, 청취자와 같은 불특정 다수일 뿐 의미 있는 지인은 아니다. SNS에서 지인의 수를 늘리는 일에 집착해서 무의미한 네트워크를 관리하는 데 허튼 힘을 쏟기보다는, 내게 의미가 있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진짜 지인과의 신뢰를 쌓아가는 편이 유익하지 않을까. 나에게 적절한 던바의 수는 몇인지 생각해볼 만하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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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죽음을 맞으려면 의사를 멀리하라
나카무라 진이치 지음, 신유희 옮김 / 위즈덤스타일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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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여 년 전부터 어딜 가나 ‘죽기에는 암이 좋다’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이 이야기를 책으로도 써냈다. 그러다 보니 ‘과연 어떻게 죽나 보자’라며 나의 임종 자리에 꼭 참석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생겨날 정도로 뭇시선을 끌기도 했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나의 주장이 곱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죽기에는 암이 최고’라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 P119

첫째,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주변에 보이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마지막 의무라 여기기 때문이다. 서서히 쇠약해져가는 데에는 암이 적격이다. (중략) 둘째, 비교적 마지막까지 의식이 맑은 상태로 의사표시를 하기에는 암이 더할 나위 없이 좋기 때문이다. (중략) 암으로 인한 사망은 머지않은 미래의 집행일을 비교적 확실히 정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신변 정리를 깔끔히 할 수 있고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제대로 전할 수 있다. - P120

아무리 지독한 암이라도 그 가운데 30퍼센트는 통증을 수반하지 않는다. 요컨대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아프지 않다는 것이다. (중략) 사람들이 암을 ‘지독하게 아픈 병’이라고 여기는 까닭은 방사선이나 맹독성 항암제로 암세포를 어설프게 괴롭히기 때문이다. - P120

누구에게나 죽을 때를 대비한 자기만의 훈련 과정이 필요하다. 죽음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다소 아프거나 괴롭고 힘든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한 상황에 미리 대비하기 위한 것이 훈련의 목적이다. 나의 경우는 가족들 앞에서 될 수 있는 한 아프다, 힘들다는 나약한 말은 입에 올리지 않는 것, 한숨을 쉬거나 근심 어린 표정을 짓는 일도 삼가고 평소처럼 행동하는 것, 그리고 앓는 것은 가능한 혼자 있을 때 하자는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다. 상대가 가족인데 너무 냉정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지만 가까운 사이에도 예의는 필요한 법이다. 눈만 마주치면 아프네, 괴롭네 하는 소리를 듣는다면 아무리 가족이라도 못 견딜 노릇이다. - P163

태어나는 것(生)은 나의 의지가 아니지만 늙고 병들고 죽는 것(老病死)는 오로지 나만의 몫이니 스스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젊고 건강할 때부터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해보고, 마음 자세를 가다듬는 훈련이야말로 자연스럽고도 건강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길이다. - P163

오래전 큰아들 녀석이 고등학교 2학년일 때의 일이다. 하루는 다짜고짜 오토바이를 사달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책임질 능력도 없는 녀석에게 그런 건 사줄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자 한창 반항기에 있던 녀석은 ‘부모의 횡포’라며 대들기 시작했다. 나도지지 않고 "내가 우리 집의 법이다!"라며 폭군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다 언쟁으로 번져 한참 옥신각신하다가 녀석을 다리후리기로 넘어뜨려 제압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아들놈은 예전의 꼬맹이가 아니었다. 그 큰 덩치로 죽자 살자 발버둥치는 바람에 5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심장이 터질 듯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그제야 새파래진 아들 녀석이 "구급차!"라고 외치는 순간 나는 "부르지 마!"라고 소리쳤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구급차는 부르지 않는다, 타지 않는다, 입원하지 않는다, 타지 않는다’라는 신조를 신주단지처럼 여기고 있다. - P178

내가 양팔로 가슴을 부여잡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자니 곁에서 아내와 딸은 엉엉 울고, 아들 녀석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등 슬픔과 애통으로 가득한 현장이 연출된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예상한 대로 30분쯤 지나자 그럭저럭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상상이지만, 만약 그때 숨이 끊어졌다면 당사자가 구급차를 완강히 거부했다고 주장한들 증거는 없고, 가족들은 ‘보호책임자 유기치사’로 경찰의 수사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들 녀석은 평생 ‘친부 살해’라는 엄청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 점은 아비 된 자로서 대단히 무책임하고 경솔한 행동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때 나는 별 탈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내 몸이 보내는 신호에 늘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제 딴엔 어지간히 놀랐던지 아들 녀석은 그 일이 있은 뒤로 절대 내게 덤벼드는 일이 없다. - P179

노화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며 특별한 것도 이상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늙어도 무조건 건강해야 한다’고? 늘는다는 것은 곧 건강하지 않게 되는 것인데도 자꾸 이런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 몸이 불편한 것도 서러운데 마음마저 커다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꼴이다.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이 젊음의 판타지에 너무 연연한 나머지 나이 탓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피하려고만 한다. 놀랍도록 발달했다는 근대의료에 과도한 기대감을 안고, 심지어는 노화를 병으로 간주하기까지 한다. 또한 각종 시술이나 약으로 젊음을 되돌릴 수 있는 것마냥 포장하지만 그런다고 노화를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작용과 피로감만 남을 뿐 세월 앞에 장사 없다. - P214

‘나이가 들면 어딘가 안 좋은 것이 정상’이다. 늙는다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이치임을 확실히 깨달아 건강에 너무 구애받지 말고 함께 가는 것이 더 건강하게 사는 법이 아닐까.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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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를 생각하다 - 식탁의 역사
비 윌슨 지음, 김명남 옮김 / 까치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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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와 르네상스 유럽에서 사람들은 어디든 자기 칼을 가지고 다녔고, 식사할 때 그것을 꺼내 썼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용 식사용 칼을 칼집에 담아 허리띠에 매달고 다녔다. 남자의 허리띠에 매달린 칼은 적을 방어하는 데에는 물론이거니와 음식을 자르는 데에도 유용하게 쓰였다. 칼은 요즘의 손목시계처럼 도구인 동시에 의상이었다. (중략) 6세기의 문헌 ‘성 베네딕투스의 계율’은 수도사들에게 잠자리에 들기 전에 허리띠에서 칼을 풀라고 상기시킨다. 자기 칼에 찔리면 안 되니까. (중략) 칼에는 폭력성이 잠재되어 있는지라 남자만 배타적으로 사용했다는 그릇된 통념이 있지만, 실제로는 여자도 차고 다녔다.
- P81

중국 부엌칼의 또다른 중요한 능력은 먹는 사람이 칼질할 필요가 없게 해주는 것이다. 중국에서 식사용 나이프는 불필요할뿐더러 조금 역겨운 것으로 간주된다. 식탁에서 음식을 써는 것은 푸주한의 일과 비슷하다고 여긴다. 부엌에서 칼이 제 역할을 다했다면 먹는 사람은 균일한 음식 조각들을 젓가락으로 집기만 하면 된다. 부엌칼과 젓가락은 완벽한 공생관계이다. 부엌칼로 썰고, 젓가락으로 먹는다.
- P91

자기만의 칼을 가지는 풍습은 기독교, 라틴어 알파벳, 법치(法治)와 마찬가지로 서양 문화의 기틀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렇지 않게 되었다. 부엌 도구에 대한 이런저런 믿음은 문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많은데, 문화적 가치란 영구불변하지 않는다. 칼에 대한 유럽인의 태도는 17세기부터 격변했다. 최초의 변화는 당시 새로 탄생한 포크와 나란히 칼을 식탁에 미리 차려두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자 칼은 이전까지 간직했던 마법을 박탈당했다. 사람들은 칼을 개인적으로 주문 제작하는 대신 똑같은 칼들을 상자째 사고팔았고, 누가 어느 자리에 앉느냐와는 무관하게 미리 식탁에 차려두었다. 두 번째 변화는 식사용 칼이 무뎌진 것이었다. 칼이 자르는 힘조차 박탈당한 것이다. 칼의 존재 의의는 자르는 데에 있다. 자르지 못하는 칼을 일부러 만든다는 것은 고상한 격식, 달리 말해서 수동적 공격성을 갖춘 문명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요즘도 우리는 그 변화의 영향을 겪으면서 살고 있다.
- P94

역사에 남은 최초의 진정한 포크는 11세기 베네치아의 총독과 결혼한 비잔틴 제국의 공주가 썼다는 두 갈래 황금 포크였다. 성 베드로 다미아노는 그녀가 신이 주신 두 손을 놔두고 그렇게 생경한 도구를 선호한 것은 ‘지나친 고상함’이라고 힐난했다. 철없는 공주와 우스운 포크 이야기는 그로부터 200년 뒤에도 종교계에서 회자되었다. 공주가 포크로 먹은 응보로 흑사병에 걸려 죽었다고 이야기가 윤색되기도 했다.
- P239

그런 포크는 17세기까지도 이상한 물건으로 인식되었는데, 이탈리아만은 예외였다. 왜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 지역보다 앞서 포크를 채택했을까?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파스타. 중세 이탈리아에서는 마카로니와 베르미첼리가 벌써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 사람들은 국수처럼 긴 파스타를 푼테루올로(송곳)라는 긴 나무 꼬챙이로 먹었다. 그러나 꼬챙이 하나로 미끄러운 파스타 가닥을 감기에 좋다면 두 개는 더 좋을 것이고, 세 개는 훨신 더 좋을 것이다. (중략) 포크가 국수를 먹기에 유용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탈리아인은 다른 요리에도 포크를 쓰기 시작했다. - P241

1608년 이전 언젠가 이탈리아를 유람했던 엘리자베스 시대의 여행가 토머스 코리에이트는 "다른 어느 나라에도 없는" 풍습을 목격했다. 고기를 써는 동안 "작은 포크"로 붙잡는 풍습이었다. 코리에이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전형적인 이탈리아인은 "사람들의 손이 다 깨끗한 것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손으로 음식을 만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중략) 코리에에이트가 이탈리아를 여행했던 때로부터 100년이 지난 1700년 무렵에는 온 유럽에 포크가 전파되었다.
- P241

냉장고에 신선 식품을 잔뜩 쌓아두는 것은 - 채소 보관실에는 양상추를, 우유는 몇 리터씩, 마요네즈는 몇 병씩, 로스트치킨을 통째, 냉장육이나 크림이 든 디저트를 몇 킬로그램씩 -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일이었다. 아메리칸 드림은 본질적으로 풍요에 대한 꿈이기 때문이다. 냉장고는 부엌의 새 구심점으로서 화덕의 자리를 넘겨받았다. 옛날 사람들은 따뜻한 불가에 모였지마나 요즘 사람들은 싸늘한 냉장고를 중심에 두고 일상을 조직한다. 냉장고에 관한 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미국인이 되기를 갈망한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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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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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고 유머러스하고 긍정적인 태도가 호감을 준다.


신기한 건, 저자가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해서 구설수에 올랐던 것. 무책임하게 아이를 낳는 사람들이야말로 문제가 아닌가. 자신의 삶도  컨트롤하지 못하면서 타인과의 로맨틱한 관계를 갈망하고 아이까지 낳다니,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엄마도 다른 형제들처럼 일찍 집을 떠났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전도유망한 학생이었으나, 열여덟 살에 임신을 하는 바람에 대학 진학을 미뤄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남자 친구와 결혼했고, 새로운 생활에 정착하려 했지만 정착은 엄마에게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다. 어릴 때 너무도 잘 보고 배운 탓이었다.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어릴 때 집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다툼과 사건이 반복되지 엄마는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학위도 남편도 없는 열아홉 살의 엄마 곁에는 어린 딸, 린지 누나뿐이었다. - P90

내 아빠인 돈 보먼은 엄마의 두 번째 남편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1983년에 결혼했다가 내가 걷기 시작할 즈음에 갈라섰다. 2년쯤 지나고서 엄마는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아빠는 내가 여섯 살 때 친권을 포기했다. - P114

3학년을 다니던 도중에 우리 가족은 미들타운과 할모, 할보를 떠나 밥 아저씨가 살던 프레블 카운티로 이사했다. (중략) 5학년을 마칠 때쯤 매킨리가 200번지를 떠나 300번지로 이사했고, 그 무렵 칩 아저씨가 나타났다. 칩 아저씨는 우리와 같이 살지는 않았으나, 우리 집을 제집 드나들 듯했다. 6학년을 마칠 즈음 우리 가족은 여전히 매킨리가 300번지에서 살고 있었지만, 칩 아저씨는 스티브 아저씨로 대체됐다. (중략) 7학년이 끝날 때는 맷 아저씨가 나타났고, 엄마는 맷 아저씨의 집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면서 나도 같이 데이턴으로 이사하길 바랐다. 8학년을 마쳤을 때 엄마는 내게 데이턴으로 들어오라고 했고 나는 친아빠의 집을 잠깐 거친 후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9학년을 마치면서 얼굴 한 번 본 적 없었던 켄 아저씨와 그의 자녀 셋이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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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군도 6 열린책들 세계문학 26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김학수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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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잘사는 사람이 재빨리 집단 농장에 들어와서 그대로 있는 예도 있었다. 반면에 가입 신청을 하지 않은 고집 센 가난뱅이는 강제로 이주되었다. 이것은 중요한 일이다. 아주 중요한 일이다! 문제는 <꿀라끄 박멸>이 아니라 집단 농장으로의 강제 가입이었다. 혁명에 의해 주어진 토지를 농민으로부터 빼앗고, 그 토지에 사람들을 농노로 묶으려면 죽음을 가지고 위협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것은 제2의 내전이며, 이번에는 농민과 싸우는 내전이었다. 이것은 <위대한 전환기>, 또는 글자 그대로 <위대한 단절기>였다. 이 시기에 무엇이 두 동강 나서 끊어졌는지는 아무도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러시아의 등뼈였다.
- P42

자유를 옹호하는 서방의 <좌익> 사상가들이여! 좌파 노동당원들이여! 미국, 독일, 프랑스의 진보적인 대학생들이여! 당신들한테는 이것으로 아직 부족하겠지. 당신즐은 나의 이 책만으로는 아직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손을 뒤로 돌려라!>는 명령이 있을 때, 당신 <자신>이 우리 나라의 수용소군도에 발을 들여놓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을 한 번에 알게 될 것이다.
- P322

1930년대 초에 체르딘스끄 지방에 유배된 사회주의자들은 완전히 저항을 중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다가왔다고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현실적인 희망은 ‘새로운 형기’를 추가할 때 다시 체포되지 않고 바로 ‘서명’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중략) 우리는 부서지고 갈기갈기 찢긴 분자들이었지만 도형 수용소를 거쳐 강력한 단일체가 되었기 때문에, 한때 분명한 단일체였던 사회주의자들이 거꾸로 무방비한 분자로 흩어지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사회생활이 확대와 충만으로 향하고 있는 데 비하여 그들의 시대에는 억압과 축소로 향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하여 우리 세대는 그들 세대를 비판할 수 없는 것이다. - P31

1941년에 벌거숭이 상태로 강제 이주된 이래, 근면하며 피로를 모르는 그들은 조금도 낙담하지 않고, 그곳에서 자연에 순응하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꾸준히 일하기 시작했다. 이 지상에 독일인들이 푸른 땅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사막이 있겠는가? 옛 러시아 속담에 ‘독일인은 버드나무처럼 어떤 땅에 꽂아도 이내 뿌리를 내린다.’고 했는데, 정말 그대로였다. 탄광이건 기계트랙터 공급처건 국영 농장이건 어디서나 책임자들은 독일인들을 칭찬했다. 독일인보다 일을 더 잘하는 사람은 없었다. - P109

그리스인도 열심히 일했다. (중략) 밭이나 소에 대해 말한다면 독일인들을 따라잡을 정도였다. 까자흐스딴 지방의 시장에서 제일 맛있는 연유나 제일 좋은 버터나 채소는 모두 그리스인들이 팔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한국인들도 까자흐스딴에서 크게 성공했다. 그들의 강제 이주는 훨씬 일찍부터 실시되었고, 1950년대 초에는 상당히 자유롭게 되었다. (중략) 그들은 교육열이 높아서 재빨리 까자흐스딴 지방의 교육 시설을 점령하고 (이미 전쟁 때부터는 그들을 막을 장애물이 없었다) 공화국의 지식인층을 지탱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 P109

그런데 전혀 복종의 정신을 받아들이지 못한 민족이 하나 있었다. 몇 명의 반란자가 아니라, 민족 전체가 그러했다. 바로 체첸인들이었다. (중략) 특별 이주자들 중에서 체첸인들만이 정신적으로 진짜 ‘제끄’였다. (중략) 체첸인들은 어디서나 당국을 즐겁게 하거나 당국의 마음에 들 일은 하려고 하지 않고 언제나 가슴을 펴고 살며, 그 적의를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중략) 그들은 가축을 훔치고, 집을 털고, 때로는 강도짓으로 물건을 빼앗았다. 그들은 현지 주민이나 쉽사리 당국이 시키는 대로 하는 유형수들을 자기들과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존경하는 것은 반란자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누구나 그들을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누구도 그들의 이러한 생활을 방해하지 않았다. 이미 30년간에 걸쳐서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도 강제로 그들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 P110

본토의 아이들은 이미 공부에 흥미를 잃었고, 학교에 다니는 것은 일종의 의무며, 일정한 나이가 될 때까지 어디엔가 적을 두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우리 유형지 아이들의 경우에는 지도만 잘 한다면 공부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인생의 모든 것이 되었다. 열심히 공부함으로써 그들은 마치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2류의 입장을 벗어나 1류 아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실한 공부를 통해서만 그들의 갈증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수 있었다. - P151

학교에서는 원하는 대로 수업 시간을 오전이나 오후로 맡았고, 나는 그 수업으로 항상 행복했으며, 괴로운 것도 피곤한 것도 없었다. 또한 매일 글을 쓰기 위해 1시간쯤 시간을 낼 수도 있었다. 그 1시간 동안, 나에게는 정신적인 긴장도 필요하지 않았다. 책상에 앉으면 펜 밑에서 문장이 흘러나왔다. 집단 농장에서 사탕무 수확에 동원되지 않는 일요일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나는 줄곧 쓰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나는 장편 소설을 쓰기도 했으며, 앞으로 오래 써도 다 쓸 수 없을 재료가 있었다. 출간에 관해서라면, 어치파 내가 죽은 다음에 발표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 P167

그는 1944년에 내가 스딸린에 대해 쓴 해학에 웃음까지 지었다. "참, 이것은 바로 지적했군요!" 조서에 딸려 있는 죄를 입증하는 증거물 중에서 전선에서 쓴 나의 단편 소설을 보고 칭찬했다. "이 속에는 반소비에뜨적인 것은 하나도 없더군요! 원하신다면 가져가도 좋아요. 발표하는 게 어떨까요?" 그러나 나는 환자처럼 기어드는 목소리로 거절했다. "아닙니다. 저는 이미 오래 전부터 문학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만일 제가 앞으로 몇 년을 더 산다면 물리학을 공부해 볼까 합니다." (이것이 지금의 유행이다! 앞으로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매를 아끼면 버릇이 나빠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감옥은 나름대로의 지헤를 우리한테 가르쳐 주었다. 체까 GB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 P173

나는 이 힘찬 종족에 소속되어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종족은 아니었으나 종족이 되었다! 서로가 모두 두려워하던 사회의 황혼이나 분산 상태 속에서, 우리 스스로 놀라울 정도로 강하게 단결되어 있었다. 사회에 나오자, 정통파 공산당원이나 밀고자들은 자발적으로 우리에게서 이탈해 갔다. 우리는 서로 의지하기 위해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시험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만나서, 서로 눈을 바라보며 몇 마디 건네면 다음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이제 도울 용의가 있었다. 우리는 어디나 동료가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수백만에 달했다! - P200

역사는 한 번도 과거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의 역사는 더욱 그렇다. (A. 꾸즈민)
역사는 과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충성파들이 생각했던 것과 같다. 그렇다면, 역사는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미래인가?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우리의 역사를 쓰고 있었다!
이런 모든 그들에게, 한 덩어리가 된 그들의 무지에 대하여 대체 어떤 반론을 하면 될까? 이제 그들에게 어떤 설명을 하면 되겠는가?진실이라는 것은 언제나 부끄러움이 많고 얌전해서, 거짓이 뻔뻔스럽게 날뛰는 사이에도 잠자코 있게 마련이다. - P220

죄수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킨다고? 그것은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수용소 주변에 살고 잇는 자유인들이 죄수들보다도 나쁜 생활을 하게 되니까, 그런 것을 절대 허가해서는 안 된다. 소포의 횟수를 늘리고, 그 중량을 더한다고? 그것은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수도에서 식료품을 사지 못하는 교도관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중략) 수용소 군도는 이미 존재했고, 수용소 군도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고, 수용소 군도는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진보적 교리’의 잘못을 대체 누구한테 덮어씌울 수 있겠는가?인간은 반드시 틀에 맞게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에 탓을 돌릴 것인가?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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