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얼 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 - 서양과 나머지 세계
니얼 퍼거슨 지음, 구세희.김정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역사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냥저냥 재미나게 술술 읽히는 책. 시시콜콜한 에피소드들이 많아서 읽기에 즐거웠다. 저자의 국가적, 사회적, 종교적 배경과 그에 따른 입장들이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에 좀 웃었다. 서양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책에 대해서 "나는 킹 제임스 성경, 뉴턴의 '프린키피아', 로크의 '정부론', 스미스의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고찰', 다윈의 '종의 기원'을 꼽고 싶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라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링컨과 처칠의 연설문 등이 있다. 나의 코란으로 단 한 권을 고르라면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전체가 될 것이다." 란다. 이 못 말릴 영국인(사실은 스코틀랜드 출신). -_-

74
Conceptio culpa. Nasci pena. Labor vita. Necesse mori.

143-145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 경은 친구에게 이렇게 써보낸 적이 있다. "영국에서 유행하는 악습은 매춘과 음주고, 투르크에서는 남색과 흡연이라네. 우리는 여자와 술을 더 좋아하고 그들은 담배와 남색 상대를 더 좋아하는 셈이지." 아이러니하게도 개화된 전제주의의 선구자 프리드리히 대왕이 젊어서 오스만 궁전에서 살았더라면 더 행복했을지 모른다. 상당히 예민하고 지적이면서 동성애 성향이 있던 그는 성마르고 과시하기 좋아하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밑에서 금욕적이고, 때로는 가학적이기까지 한 교육을 받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담배 내각’의 상스러운 술친구들과 긴장을 푼 반면 그의 아들(프리드리히 2세)은 역사, 음악, 철학에서 위안을 찾았다. 엄격한 아버지의 눈에 그는 ‘남자다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말도 못 타고 총도 쏠 줄 모르며, 지저분한 데다 머리도 자르지 않고 사내가 바보같이 머리나 마는 여성스러운 소년’이었다. 프리드리히가 프로이센에서 도망치려다 붙잡혔을 때, 아버지 빌헬름 1세는 아들을 퀴스트린 성에 가두고 아들의 탈출 계획을 도운 친구 한스 헤르만 폰 카테(Hans Hermann von Katte)가 참수되는 모습을 지켜보게 했다. 친구의 시신과 잘려나간 머리는 왕세자 방에서 내다보이는 곳 바닥에 놓아두었다. 그는 퀴스트린에서 2년이나 갇혀 지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 군대를 향한 아버지의 열정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골츠 연대의 대장으로서 군사적 기술들을 연마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기술들은 적의 공격을 받기 쉬운 프로이센의 지리적 약점을 보완하고 주앙유럽을 가로질러 세력을 확장해나갈 때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었다. 프리드리히는 통치 기간에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8만 병력을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인 19만 5000명으로 키웠다. 프리드리히의 통치 기간이 끝날 무렵인 1786년에 프로이센은 백성 29명당 1명의 군사 규모로, 상대적으로 따져 보았을 때 세계에서 가장 군국화되어 있었다. 또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와 달리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군대를 전쟁터에 전략적으로 배치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1740년 왕으로 즉위한 몇 달 만에 그는 오스트리아부터 슐레지엔에 이르는 부유한 지방을 손에 넣어 유럽 대륙을 충격에 빠뜨렸다.


155-156
오늘날 포츠담은 여름에는 먼지 자욱하고 겨울에는 황량한 베를린의 또다른 초라한 교외에 불과하다. 구동독의 전형적인 특징인 흉측한 건물들로 지저분해진 풍경은 마치 거기에 ‘사회주의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대왕 시대 포츠담 주민들은 대부분 군이었다. 또 포츠담에 있는 건물들은 거의 모두 군사적 목적이나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영화 박물관은 원래 오랑주리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졌으나 이후 기병대의 마구간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시의 중심부를 걷다 보면 군 고아원, 연병장, 옛 승마 학교를 지나게 된다. 린덴 거리와 샤를로텐 거리가 만나는 곳에 군대 장식품으로 가득한 곳은 예전에 감시소였다. 당시에는 일반 주택도 꼭대기를 군인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한 층 더 지었다.
포츠담은 프로이센의 축소판 또는 캐리커처라 할 만한 곳이었다. 프리드리히의 부관 게로르크 하인리히 폰 베렌호르스트(Gerg Heinrich von Berenhorst)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프로이센은 군대를 거느린 국가가 아니라 국가를 거느린 군대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센의 군대는 단순히 왕권의 수단이 아니라 프로이센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였다. 지주들은 군대 지휘관으로 활동하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신체 건강한 소작농들은 사병으로서 외국 용병들을 대신했다. 프로이센이 곧 거대한 군대였고, 군대가 곧 프로이센이었다. 프리드리히 정권 말기에는 프로이센 인구 3퍼센트 이상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2배가 넘는 비율이었다.

296-300
1904년 8월 11일, 바터베르크 고원 근처에서 벌어진 하마카리 전투는 전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학살이었다. 헤레로족은 커다란 야영지에 모여 있었고 얼마 전 한 차례 독일군을 쫓아낸 터라 일종의 평화 협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트로타는 그들을 포위하고 맥심 총으로 대량 사격을 퍼부었다. 남자, 여자, 아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쓸어버렸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토로타의 의도대로 오마헤케 사막으로 도망쳤다. 장군의 말을 빌리면 ‘최후를 맞으러’ 간 것이었다. 사막 가장자리의 샘들은 독일군의 살벌한 감시를 받았다. 남서아프리카 참모의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물이 없는 오마헤케 사막은 독일군의 총이 시작한 일을 마무리지어 주었다. 바로 헤레로족의 박멸이었다." (중략) 폭동에 참여하지 않은 헤레로족은 정착민으로 구성된 "정화 정찰대(schuztruppen)’의 손에 붙잡혔다. 그들의 모토는 ‘모두 없어질 때까지 몰아내고, 매달고, 쏘아 죽이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하지 않은 사람, 주로 여자와 아이들은 다섯 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나중에 나마족도 이 수용소에 들어왔다. 반독일 폭동에 가담하는 실수도 모자라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독일군의 말만 믿고 무기를 내려놓는 더 큰 실수를 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수용소는 영국군이 보어 전쟁 당시 남아프리카에 세운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곳에서는 게릴라전이 한창이었고 그런 수용소의 목적은 보어군 보급 전선을 교란하는 것이었다. 사망률이 그리도 높았던 것은 위생 상태가 심각해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온 것뿐이었다. 하지만 독일이 다스리던 남서아프리카에서는 전쟁은 이미 끝났고, 그런 수용소는 죽음의 수용소로 만들기 위해 세워진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것은 뤼데리츠 근처의 상어 섬이었다. (중략) 반란 전 헤레로족은 8만 명에 이르렀으나 그 후에는 겨우 1만 5000명만 남았다. 나마족은 2만 명이 있었으나 1911년 인구조사를 했을 때에는 1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 나마족 죄수는 겨우 열 명당 한 명꼴로 살아서 수용소를 나갔다. (중략)
하지만 섬뜩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혹시 남서아프리카가 미래의 훨씬 더 큰 규모의 대량 학살을 위한 시험장은 아니었을까? 콘래드가 소설 ‘암흑의 핵심’에서 이야기했듯 유럽인이 아프리카를 개화하는 대신 아프리카가 유럽인들을 야만인으로 바꾸어놓은 것은 아닐까? 진정한 핵심은 어디인가? 아프리카인가? 아니면 아프리카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함께 유럽 문명이 수출한 것 중 가장 치명적인 사이비 인종 과학 실험실로 취급한 유럽인들인가? 아프리카인들을 향한 잔인한 행위는 나중에 끔찍한 방식으로 되돌아올 것이었다. 인종 이론은 식민지라는 변방에만 국한되기에는 너무나도 사악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기가 밝아오면서 그것은 유럽으로 돌아왔다. 서양 문명은 곧 가장 위험한 적을 만나게 돌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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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1 니노미야 시리즈
구로카와 히로유키 지음, 민경욱 옮김 / 엔트리(메가스터디북스)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외국인의 시선으로 북한을 보는 글은 신선하다. 국민 교육으로 세뇌된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일 때가 있다. 


참 재미있는 소설인데, 구와바라의 칸사이 사투리를 번역자가 엉터리 전라도 사투리로 번역해 놓는 바람에 두 번은 읽기 싫다. 서울놈들 중에는 이런 식으로 타인이 쓰는 말을 웃음거리로 삼는 자들이 있다. 언어에 대한 예의는 인간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들은 전혀 모른다. 원작의 칸사이벤이 매력적이니 번역자로서 욕심이 날 법도 했겠지만 능력도 없으면서 과욕을 부렸다. 그냥 거친 말투로 표현하면 충분했을 것이다. 




441-442

"국경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요?"
니노미야가 구와바라에게 말했다.
"나라와 나라라는 조직이 관리하는 경계제. 지도에 선으로 그어 놓잖여."
"달랑 강 하나를 끼고 이쪽은 돼지 사료를 먹고, 다른 쪽은 돼지고기를 먹어요. 뭐라고 할 순 없지만 어쩐지 저는 이해가 되질 않아요."
"고기어 세력권이라는 거여. 조장이 자기 세력권을 제대로 관리하믄 괜찮은 일이 생기고야, 세력권을 제대로 못 지키믄 다른 조직에 멕히는 법이여."
"하지만 이 나라는 중국이나 러시아에 먹히지 않았잖아요."
"잘못 묵었다간 복통을 일으키니께. 묵어서 좋은 것이 있고 안 되는 것이 있제."
"간단하네요."
"조선 반도의 지도를 보랑께. 국경은 38도선을 끼고 적당히 선을 그은 것이 다여. 그래서 북조선과 한국은 같은 민족임시롱 하늘과 땅이 되었제. 국경이란 거이 지형이나 민족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여. 그때그때 싸움에서 누가 더 세냐로 결정하는 것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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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제4판 개역본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강정인.김경희 옮김 / 까치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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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인간들이란 다정하게 안아주거나 아니면 아주 짓밟아 뭉개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하려고 들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감히 복수할 엄두도 못 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려면 복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예 크게 입혀야 한다.

117-118
인간이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자인 데다 기만에 능하며, 위험을 피하고 이득에 눈이 어둡다는 것이다. 당신이 은혜를 베푸는 동안 사람들은 모두 당신에게 온갖 충성을 바친다. 이미 말한 것처럼, 막상 그럴 필요가 별로 없을 때, 사람들은 당신을 위해서 피를 흘리고, 자신의 소유물, 생명 그리고 자식마저도 바칠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당신이 정작 궁지에 몰리게 되면 그들은 등을 돌린다. 따라서 전적으로 그들의 약속을 믿고 다른 방비책을 소홀히 한 군주는 몰락을 자초할 뿐이다. 위대하고 고상한 성격을 통하지 않고 돈으로 얻게 된 우정은 대가는 지불했지만 아직 확보된 것은 아니며, 정작 필요할 때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 판명된다.
인간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보다 사랑을 받는 자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덜 주저한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일종의 의무감에 의해서 유지되는데 인간은 지나치게 이해타산적이어서 자신들의 이익을 취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자신을 사랑한 자를 팽개쳐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로써 유지되며 항상 효과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명한 군주는 자신을 두려운

123-124
군주는 짐승처럼 행동하는 법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여우와 사자의 기질을 모방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자는 함정에 빠지기 쉽고 여우는 늑대를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함정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여우가 되어야 하고 늑대를 혼내주려면 사자가 되어야 한다. 단순히 사자의 힘에만 의지하는 자는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는 신의를 지키는 것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때 그리고 약속을 맺은 이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약속을 지킬 수 없으며 지켜서도 안 된다. 이 조언은 모든 인간이 정직하다면 온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신의가 없고 당신과 맺은 약속을 지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그들과 맺은 약속에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는 항상 둘러댈 수 있기 마련이다. 이 점에 관해서 근래의 무수한 예를 들 수 있으며 얼마나 많은 평화조약과 협정이 신의 없는 군주들에 의해서 파기되고 무효화되었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 여우의 기질을 가장 잘 모방한 자들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여우다운 기질은 잘 위장하여 숨겨야 한다. 인간은 능숙한 기만자이며 위장자이어야 한다. 또한 인간은 매우 단순하고 목전의 필요에 따라 쉽게 움직이기 때문에, 능란한 기만자는 속고자 하는 사람들을 항상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32
군주는 미움을 받는 일은 타인에게 떠넘기고 인기를 얻는 일은 자신이 친히 해야 한다. 다시 한번, 군주는 귀족을 존중해야 하지만 인민들로부터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133-134
첫째로 지적할 점은 다른 군주국에서는 귀족의 야심과 인민의 무례함만을 염두에 두면 되었지만, 로마 황제들은 세 번째 문제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곧 그들은 군인의 잔악함과 탐욕스러움에 대처해야 했다. 그것은 매우 커다란 문제로서 많은 황제의 몰락을 초래했다. 군인과 인민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일이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인민은 평화로운 삶을 좋아하고 그 결과 온건한 군주를 원하는 데 반해, 군인은 호전적인, 곧 오만하고 잔인하며 탐욕스러운 군주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군인들은 군주가 인민을 거칠게 다루어서, 그 결과 그들의 급료가 올라가고 그들의 탐욕성과 잔인성을 만족시킬 배출구를 원했다.
그 결과 (천부적인 재질이나 경험이 부족하여) 군인과 인민을 동시에 누를 수 있는 명성을 얻지 못한 황제들은 항상 몰락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황제들은 (특히 새로 제위에 오른 황제들은) 상반되는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 군인들을 만족시키고자 애를 썼지, 인민이 박해를 당하는 일에 대해서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이러한 정책을 따르도록 강요당했다. 군주는 어느 한편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가 해야 할 일은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미움을 받는 일만큼은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것을 성취할 수 없으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가장 강력한 집단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일은 피하는 것이다.

149-150
옛 통치에 불만을 품은 자들은 새로운 통치에 대해서도 불만을 품는다.
게다가 신생 군주라면 누구에게나 상기시킬 필요가 있는 중대한 문제가 있다. 즉 주민들의 지원으로 권력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군주라면, 누구나 자신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또록 도와준 사람들이 그를 지원한 이유를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군주에 대한 자연스러운 호감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전 정부에 품었던 불만 때문이라면, 그들을 자기 편으로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고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역시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와 근래 역사로부터 끌어낸 사례들에 비추어) 이에 대한 이유를 고려해보면, 이전의 정권에서 만족했기 때문에 새 군주에게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이전 정권에 불만을 품고서 그에게 호의를 느끼고 그를 도운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계속 유지하는 일보다 훨씬 더 쉽다는 점은 명백하다.

151
만약 군주가 외세보다도 신민을 더 두려워한다면 그는 요새를 구축해야 한다. 그러나 신민보다 외세를 더 두려워한다면 요새를 구축해서는 안 된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세운 밀라노의 성벽은 그 나라의 어떤 분란보다도 스포르차 가문에게 분쟁의 근원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따라서 군주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요새는 인민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요새를 가지고 있더라도 인민이 당신을 미워하면, 요새가 당신을 구출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민이 봉기하면 그들을 지원할 태세가 되어 있는 외세가 반드시 출현하기 때문이다.

158
차악을 선으로 받아들여라.
어떤 정부도 안전한 정책을 따르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모든 행위는 위험을 수반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사물의 도리상 하나의 위험을 피하고자 하면 으레 다른 위험이 직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려 깊은 사람은 위험을 평가하는 방법을 알고, 가장 해악이 적은 대안을, 따라야 할 올바른 대안으로 선택한다.

161
군주가 대신의 사람됨을 살피는 데에는 아주 확실한 방법이 있다. 만약 그가 당신의 일보다 자신의 일에 마음을 더 쓰고 있고 그의 모든 행동이 자신의 이익을 추진하기 위해서 의도된 것이라는 점이 밝혀지면, 그는 결코 좋은 대신이 될 수 없고, 당신은 결코 그를 신뢰할 수 없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절대로 자신과 자신의 일이 아니라 군주에 관해서 생각을 쏟아야 하고 군주의 일에 몰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대신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서 군주는 그를 우대하고, 부유하게 만들며, 그를 가까이 두고 명예와 관직을 수여하는 등 그를 잘 보살펴주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군주는 대신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오직 군주에게만 의존한다는 점을 깨닫게 하고, 이미 얻은 많은 명예와 재부로 인해서 더 많은 명예와 재부를 원하지 않도록 하며, 자신이 맡은 많은 관직들을 잃을까 염려하여 변화를 두려워하도록 대우해야만 한다.

163-164
인간이란 너무 자기 자신과 자신의 활동에 만족하고 자기 기만에 쉽게 빠지기 때문에, 아첨이라는 질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란 지극히 어렵기 마련이다. 더욱이 아첨꾼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모종의 방법들은 경멸을 받게 되는 위험을 수반한다.
당신 자신을 아첨으로부터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은 진실을 듣더라도 당신이 결코 화를 내지 않는 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당신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면, 당신에 대한 존경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는 다른 방도를 따르는데, 사려 깊은 사람을 선발하여 그들에게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도록 허용하되, 그것도 당신이 요청할 때만 하는 것이지 아무 때나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모든 일에 관해서 묻고, 주의 깊게 그들의 견해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고 나서 자신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나아가서 군주는 그의 조언자들로 하여금 말하는 바가 솔직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들의 말이 받아들여진다고 믿도록 처신해야 한다. 군주는 그가 선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른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되고, 그의 목표를 확고하게 추구하며, 그가 내린 결정에 관해서 동요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식으로 처신하지 않는 군주는 아첨꾼들 사이에서 몰락하거나 아니면 그가 받는 상반된 조언 때문에 결정을 자주 바꾸게 된다. 그 결과 그는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된다.

175
나는 신중한 것보다는 과감한 것이 더 좋다고 분명히 생각한다. 왜냐하면 운명의 신은 여신이고 만약 당신이 그 여자를 손아귀에 넣고자 한다면, 그녀를 거칠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계산적인 사람보다는 과단성 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매력을 느낀다는 점은 명백하다. 운명은 여신이므로 그녀는 항상 젊은 사람들에게 이끌린다. 왜나하면 젊은 사람들은 덜 신중하고, 보다 공격적이며, 그녀를 더욱 대담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117-118
인간이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자인 데다 기만에 능하며, 위험을 피하고 이득에 눈이 어둡다는 것이다. 당신이 은혜를 베푸는 동안 사람들은 모두 당신에게 온갖 충성을 바친다. 이미 말한 것처럼, 막상 그럴 필요가 별로 없을 때, 사람들은 당신을 위해서 피를 흘리고, 자신의 소유물, 생명 그리고 자식마저도 바칠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당신이 정작 궁지에 몰리게 되면 그들은 등을 돌린다. 따라서 전적으로 그들의 약속을 믿고 다른 방비책을 소홀히 한 군주는 몰락을 자초할 뿐이다. 위대하고 고상한 성격을 통하지 않고 돈으로 얻게 된 우정은 대가는 지불했지만 아직 확보된 것은 아니며, 정작 필요할 때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 판명된다.
인간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보다 사랑을 받는 자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덜 주저한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일종의 의무감에 의해서 유지되는데 인간은 지나치게 이해타산적이어서 자신들의 이익을 취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자신을 사랑한 자를 팽개쳐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로써 유지되며 항상 효과적이다. (뒤에 계속)


(앞에서 계속)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명한 군주는 자신을 두려운 존재로 만들되, 비록 사랑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미움을 받는 일은 피하도록 해야 한다. 미움을 받지 않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그가 인민들의 재산과 부녀자에게 손을 대는 일을 삼가면 항상 성취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를 처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해도 적절한 명분과 명백한 이유가 있을 때로 국한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타인의 재산에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어버이의 죽음은 쉽게 잊어도 재산의 상실은 좀처럼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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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5-09-25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업상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 느낌이다. 저자는 아주 똑똑하고, 그러면서도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조언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놓치면 안 된다.

그렇지만, 운명의 신은 여신이어서 자신을 거칠게 다루는 남자를 좋아한다. 운명은 항상 젊은이들을 좋아한다는 말은 중년의 나이에 정치적으로 몰락하여 실의에 빠진 마키아벨리의 탄식으로 들려서 좀 웃었다. 자신이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중년 남자가 젊고 힘이 있는 야심가 군주에게 매력을 느끼는 상황은 좀 모에하지 않나? ㅋ
 
새로운 빈곤 - 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뉴퓨어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수영 옮김 / 천지인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8-10
1장 ‘노동의 의미: 노동 윤리의 생산’은 노동윤리의 기원을 살펴본다. 노동윤리는 근대 시대 초기부터 빈곤층을 정규 공장 노동으로 유인하고, 빈곤을 뿌리 뽑고, 사회안정을 확립하는, 이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해결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실제로 노동윤리는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새로운 공장제도가 자리 잡는 데에 필요한 복종을 가르쳤다.
2장 ‘노동윤리에서 소비미학으로’에서는 근대 사회가 초기에서 후기 단계로 꾸준히 이행해 가는 과정을 다룬다. ‘생산자의 사회’에서 ‘소비자의 사회’로, 노동윤리가 이끌어가는 사회에서 소비의 미학이 지배하는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소비자 사회에서 대량 생산은 더 이상 대규모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난날 ‘산업예비군’이었던 빈곤층은 ‘결함 있는 소비자’로 다시 정의된다. 이로써 이들에게는 쓸모 있는 사회적 역할-실제적이든 잠재적이든-이 주어지지 않으며, 그것은 빈곤층의 사회적 지위와 그 개선 가능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아래에 계속)

(위에서 계속)
3장 ‘복지국가의 성장과 몰락’은 복지국가의 성장과 몰락을 추적한다. 그것이 2장에서 설명한 이행 과정과 얼마나 연관이 있는지, 그리고 개인의 불행에 관하여 집합적 책임을 지지하는 대중적 합의가 갑작스레 등장하는 배경, 또한 오늘날에 와서는 그 원칙에 반대하는 합의가 지난날처럼 갑작스레 등장하는 배경을 살펴본다.
4장 ‘노동윤리와 새로운 빈곤층’은 그 모든 것의 결과로서, 빈곤층이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문화적으로 정의되는 방식을 다룬다. 최근에 유행하는 개념인 ‘최하층계급’을 탐구하며, 그것이 궁핍의 광범위한 형태와 원인을 권력의 지원 속에 하나의 범주로 응축시키는 도구로 주로 이용되고 있음을 밝힌다. 그 하나의 범주에 속하게 된 이들은 그들 모두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결점으로 뒤덮인 이미지를 지니게 되고, 따라서 하나의 ‘사회 문제’로 드러난다.
(아래에 계속)

(위에서 계속)
5장 ‘세계화 속의 노동과 잉여’에서는 빈곤층과 빈곤의 미래를 고찰한다. 또한 노동윤리가 오늘날 발전된 사회의 상황에 더 적절한, 새로운 의미를 줄 수 있을지 살펴본다. 실재하지 않는 사회를 측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통적인 도구의 힘을 빌어 빈곤을 퇴치하고 정복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생계의 권리를 노동력 판매로부터 ‘분리’하고, 사회적으로 인식된 노동의 개념을 노동시장이 인정하는 개념을 넘어서 확장시키는 것 같은, 새로운 해법을 찾아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런 질문들을 마주하여 실제적인 해법을 찾아내는 일은 얼마나 절박한 것인가?

73-74
빈곤이라는 현상은 물질적 결핍과 신체적 고통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가난은 사회적이면서 심리학적인 조건이기도 하다. 인간 실존의 적절성이 그 사회가 정의하는 남부럽잖은 생활수준에 따라 측정될 때, 그 수준을 지키지 못하는 무능력은 그 자체로 괴로움과 고통, 굴욕의 원인이다. 그것은 ‘정상의 삶’이라고 인정되는 모든 것에서 배제되었음을 뜻한다. 그것은 ‘기준에 미치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 결과 자존감이 낮아지고 수치스러움이나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가난은 또한 그 사회에서 ‘행복한 삶’이라고 여겨지는 기회들과 단절되고 ‘삶이 제공해야 하는 것’을 받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 결과 분노와 적의가 생기고, 그것은 폭력 행위나 자기 경멸의 형태로, 또는 둘 다로 배출된다.
(아래에 계속)

(위에서 계속)
소비자 사회에서 ‘정상의 삶’이란 소비자의 삶이고, 소비자들은 공개적으로 전시되는, 만족과 생생한 경험의 기회들 가운데에서 선택하느라 바쁘다. ‘행복한 삶’은 많은 기회를 거의 또는 전혀 놓치지 않고 붙잡는 것으로 정의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망하는 기회를 잡아야 하고, 그 기회를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잡아서는 안 되며 되도록 먼저 잡아야 한다. 다른 모든 형태의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비자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은 행복한 삶은 말할 것도 없고 정상의 삶에 다가갈 수 없는 이들이다. 그러나 소비자 사회에서 또는 단순히 정상의 삶에 다가갈 수 없다는 건 부족한 소비자, 또는 결함 있는 소비자가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소비자 사회에서 빈곤층은 무엇보다도 흠과 결점이 있고 그릇되며 모자란 –다시 말해 부적합한- 소비자라고 사회적으로 정의되고 스스로 정의된다.

78-79
제러미 시브룩 Jeremy Seabrook이 독자들에게 상기시키듯이, 오늘날 사회의 비밀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주관적 결핍감의 개발’에 있다. ‘사람들이 현재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사회의 기초 원리에 ‘가장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유한 이들이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그 모든 것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지금 갖고 있는 것은 무시되고 위축되고 왜소해져야 한다. ‘부자는 보편적인 숭배의 대상이 된다.’

208-211
오늘날 빈민들의 고통은 공동의 대의로 수렴되지 않는다. 결함이 있는 소비자들은 혼자서 쓸쓸하게 자신의 상처를 쓰다듬는다. 기껏해야 아직 해체되지 않은 가족들, 비슷하게 가난한 친구들과 함께 상심을 달래는 게 고작이다. 결함 있는 소비자들은 외롭고 버려졌다고 느낀다. 오랜 기간 혼자 버려지면 그들은 외톨이가 된다. 그들은 사회가 어떻게 돕는지 알지 못하고, 도움을 받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으며, 축구 도박이나 복권 당첨 말고 어떤 것이 자신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는다.
(아래에 계속)

(위에서 계속)
불필요하고 쓸모가 없고 버려진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가장 간단한 대답은 이것이다. 눈밖에 있다. 먼저 그들은 새로운 소비자 사회의 내부인인 우리가 다니는 거리와 공공장소에서 사라져야 한다. (중략) 신체적 격리를 완벽하게 하기 위해 정신적 분리로 보완할 수 있다. 그러면 빈민들이 도덕적 공감의 세계로부터 분리된다. 빈민들을 거리에서 없애는 한편으로 그들을 인간 사회에서, 윤리적 의무의 세계에서 쫓아낸다. 그 방법은 궁핍의 언어로 씌어졌던 이야기를 타락의 언어로 다시 쓰는 것이다. 평상시의 질서에 문제가 감지되어 대중적 항의가 일어날 때마다 그에 맞춰 검거되는 ‘유력한 용의자들’은 빈곤층에서 제공된다. 빈곤층은 죄를 짓고 도덕 기준이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미디어는 기꺼이 경찰과 협력하여, 선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대중들에게 범죄, 마약, 난교에 빠진 ‘범죄 분자’들이 등장하는 선정적인 장면을 보여 준다. 범죄 분자들은 비열한 거리의 어둠 속에 은신한다.
(아래에 계속)

(위에서 계속)
이에 따라 빈곤의 문제가 무엇보다도, 그리고 아마도 법과 질서의 문제일 뿐이라는 요지가 전달된다. 빈곤의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은 범법 행위에 대처하는 방식과 같아야 한다.
인간 사회에서 대중의 의식에서도 사라진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안다. 순전히 민폐로 전락한 하나의 현상 전체를 제거하려는 유혹은 강렬하다. 그 현상은 고통 받는 타인을 보고 생겨나는 윤리적인 마음으로도 완화시키거나 누그러뜨릴 수 없다. 옥에 티를 없애려는, 질서 잡힌 세상과 정상적 사회라는 깨끗한 캔버스에 떨어진 얼룩을 지우려는 유혹은 강하다. 알랭 핑켈크로트 Alain Finkielkraut는 최근의 저서에서, 윤리적인 마음이 사실상 침묵하고, 공감이 사라지고, 도덕적 장벽이 걷힐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우리를 일깨워 준다.
(아래에 계속)

(위에서 계속)
"나치 폭력이 저질러진 건 폭력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이었다. 가학증 때문이 아니라 장점 때문에, 즐거워서가 아니라 수단이기 때문에, 야만스러운 충동을 발산하고 양심의 가책을 외면해서가 아니라 상위 가치라는 이름으로, 전문적 능력과 앞으로 꾸준히 수행될 과제를 갖고 저질러졌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그 폭력은 사람들의 침묵 속에서 저질러진 것이었다. 스스로 품위 있고 윤리적이라고 생각했으나, 폭력의 희생자들, 오래 전에 이미 인류 가족의 구성원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이들이 왜 자신들의 도덕적 공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이 침묵을 지킬 때 저질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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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7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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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355

하루는 이곳 정자의 누런 갈대로 만든 흔들 의자에 앉아 꼬박 네 시간이나 어떤 책을 읽으면서 점점 더 고조되는 감동에 사로잡혔다. 그가 그 책을 구하려고 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그의 수중에 들어온 경위에는 다분히 우연도 개재되어 있었다. 아침 간식을 든 후 흡연실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있다가 그 책을 발견했다. 그것은 책장 외진 구석의 으리으리한 장정 뒤에 감춰져 있었다. 그가 몇 년 전 에 책방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아무 생각 없이 구입한 사실이 생각났다. 누르스름한 얇은 종이로 만들어진 꽤 두툼한 그 저서는 인쇄나 제본이 조잡했다. 그것은 어느 유명한 형이상학 체계의 제2부였다. 그 책을 가지고 정원에 온 그는 이제 완전히 거기에 몰두해서 책갈피를 한 장 한 장 넘겨갔다.

그는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만족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훨씬 우월한 위치에 있는 정신이 생, 그토록 강력하고 잔혹하며 조소적인 그 생을 제압하고 지배해서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을 보고 비할 데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그것은 생의 한기와 가혹함에 직면하고 늘 치욕에 휩싸여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자기의 고민을 은폐해 오다가, 경사스럽게도 갑자기 위대한 현자의 도움으로 고뇌하는 것에 대한 원칙적인 정당성을 획득한 자의 만족감이었다.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세계들 중에서 최상의 세계라는 이 세계를 가리켜, 주인 되는 유희 정신은 조소적으로 그것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세계임을 입증했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원칙과 전제가 불분명했다. 그러한 독서에 익숙지 않은 그의 정신은 어떤 사고의 경로는 따라갈 수 없었다. 하지만 바로 광명과 암흑이 교대로 나타나고 둔감한 몰이해, 막연한 예감 및 돌연한 형안이 교대로 나타남으로써 그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는 책에서 눈을 떼거나 의자에 앉은 위치를 바꾸지도 않고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에 빠져들었다.

그는 처음에는 어떤 페이지는 읽지도 않고 성급히 앞으로 나아가면서 무의식적으로 요점, 본질적으로 중요한 지점만을 찾아서 읽었다. 즉, 중요한 절(節)이나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절만을 우선적으로 펼쳐들었다. 그러고 나서야 분량이 많은 장(章)에 들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철자 하나 빼놓지 않고 통독했다. 입술을 꼭 다물고 눈썹을 치켜올린 채 생의 어떠한 자극에도 꿈쩍하지 않을 정도로 죽은 사람처럼 완벽하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 장의 제목은 ‘죽음과 우리 존재 자체의 불멸성과 그것의 관계에 대하여’였다.

네시 정각에 하녀가 정원으로 와서 식사하라고 알렸을 때는 몇 줄 남기지 않고 거의 다 읽은 상태였다. 그는 머리를 끄덕이고 남은 문장을 다 읽고는 책을 덮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자신의 존재 전체가 엄청나게 확대된 느낌과 심원하고 묵직하게 취한 상태에 충만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감각은 몽롱해져, 무언가 말할 수 없이 신기하고 매혹적인 것과 축복을 가져다주는 것에 완전히 도취되어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희망에 들뜬 첫사랑에의 동경을 상기시켜 주는 것과 같은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떨리는 차가운 손으로 그 책을 정원에 있는 책상 서랍에 보관했을 때 이상한 압박감과 불안한 긴장감에 사로잡힌 그의 뜨끈뜨끈한 머리는 마치 그 속에서 무언가가 터져버리기라도 할 듯이 논리적인 사고를 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이것은 무엇이었던가? 그는 집으로 들어가 주계단을 오르고 식당의 가족 옆에 앉으며 자문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내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가? 도시의 시의원이자 요한 부덴브로크 곡물 회사 대표인 나, 토마스 부덴브로크한테 무슨 말이 들려왔던가? 그것이 나에게 온 메시지였던가? 내가 그걸 감내할 수 있을까? 난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어. 내가 아는 사실이란 다만 나같이 빈약한 두뇌의 소유자한테는 그것이 너무 과하다는 점뿐이야.

하루 종일 그는 이렇게 취한 듯 묵직하고 멍하게 압도된 상태로 보냈다. 그리고 밤이 왔다. 묵직한 머리를 더 오래 어깨 위에 지탱하고 잇을 수 없어서 그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세 시간 동안 깊은 잠을 잤다. 지금까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이 잠을 잤다. 그런 다음 그는 가슴에 사랑이 움트는 사람이 혼자 깰 때 그러듯이 화들짝 놀라면서 돌연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자신이 커다란 침실에 혼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게르다는 이제 이다 융만의 방에서 잠을 자기 때문이었다. 이다는 최근에 어린 요한과 좀더 가까이 있고 싶어서 세 개의 발코니 방들 중 하나로 옮겨갔다. 두 개의 높은 창의 커튼이 꼭 닫혀 있었기 때문에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다. 깊은 정적과 부드럽게 내리누르는 무더위 속에서 그는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 어둠 속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암흑이 그의 면전에서 찢기고 한밤의 부드러운 바람이 딱 갈라지며 자신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천리안을 지닌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느 살 것이다!" 토마스 부덴브로크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럴 때 자신의 가슴이 내적인 흐느낌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내가 살 것이라는 징표다! 그것이 살아 있을 거니까. 그리고 그것이 내가 아니라는 것은 다만 기만일 뿐이다. 죽음이 정정해 주게 될 오류일 따름이다. 그것이야, 그것이야! 무엇 때문에?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하는 가운데 밤은 그의 눈앞에서 문을 탕 닫아버렸다. 그는 다시는 그 이상의 것을 조금도 보거나 알거나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더 깊숙이 베개 속에 파묻었다. 그에게 방금 모습을 드러낸 그 한줌의 진리로 인해 그는 완전히 정신이 어질어질해지고 몸이 녹초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누워 또 한번 마음의 눈이 떠지는 순간이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면서 열렬히 기다렸다. 다시 그런 순간이 왔다. 두 손을 맞잡고 감히 꼼짝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가만히 누워 들여다보았다. (중략)

"난 살 것이다!" 그는 머리를 베개에 파묻고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울었다. 다음 순간에는 무엇 때문에 우는지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그의 머리는 활동을 중지하고 있었고 그의 비전은 사그라들었다. 갑자기 그의 내부에는 다시 침묵 속의 암흑만 존재할 뿐이었다. 하지만 다시 그 순간이 되돌아올 것이다! 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확약했다. 내가 그것을 소유하지 못했던가? 마치 마취된 듯 잠에 곯아떨어지고 있다고 느끼면서 그는 이 모든 것을 낳은 그 세계관 전부를 철두철미하게 영구히 자신의 것으로 할 때까지 이 엄청난 행복을 결코 놓치지 않고 온 힘을 모아 배우고 읽고 공부해야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그겋게 될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는 순간, 이미 그는 어제의 극단적인 정신 상태에 대해 다소 부끄러운 감정을 느꼈고 이런 아름다운 계획이 실행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을 느꼈다.

그는 늦게 일어났다. 그는 즉시 시의회의 토론에 참석해야 했다. 중소 무역 도시의 박공 집에 늘어선 좁은 거리에서 사업 활동을 하고 공적 시민적 생활을 하느라 그의 정신과 힘은 또 한번 소모되었다. 늘 그런 불가사의한 독서를 다시 하리라 마음먹고서 그날 밤의 체험이 정말 지속적으로 유효할지의 여부를 자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죽음의 길에 들어선다 하더라도 그 체험이 실제적으로 뜻을 궆히지 않을지에 대해 자문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민적 본능은 그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그의 허영심도 들고 일어섰다. 그것은 불가사의하고 우스꽝스러운 역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는 진실로 이러한 것들을 보았던가? 그것들이 요한 부덴브로크 상사의 대표인 토마스 부덴브로크 시의원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이었는가?

그는 수많은 보물을 숨기고 있었던 그 이상한 책에 다시 시선을 던지지 못했다. 하물며 그 위대한 저서의 이 권이나 삼 권을 구입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갈수록 더 꼼꼼하고 신경질적으로 외모를 관리하는 데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허비했다. 오만 가지의 하찮고 일상적인 자질구레한 일에 시달리느라 의지가 너무 쇠약해져 시간을 합리적이고도 효과 있게 배분하지 못했다. 그는 그런 잡사를 정리하고 처리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던 것이다 그리고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그날 오후의 사건이 있고 나서 대략 이주일 이 지난 후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녀더러 정원 책상의 서랍에 무질서하게 나뒹굴고 있는 어떤 책을 당장 위로 갖고 올라가서 책장에 갖다놓으라고 지시하게 되었다. 높고 궁극적인 진리를 갈망하여 손을 뻗었던 토마스 부덴브로크는 결국 자신이 어린 시절에 믿고 사용한 개념들이나 비유들로 힘없이 되돌아왔다.

485-486



"하노, 어린 하노."

페르마네더 부인은 계속 말을 이었다. 솜털이 나고 생기를 잃은 그녀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톰,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 그들은 어디 있단 말인가? 다시는 그들을 만날 수 없어. 아, 이다지도 가슴 아프고 슬프다니!"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프리데리케 부덴브로크가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두 손을 무릎에 포개고 눈을 내리깔며 코는 허공을 향했다.

"그래, 그렇게들 말하지. 아, 어떻게 해도 위로가 안 되는 순간이 있어, 프리데리케. 하느님이 나를 벌하실지도 몰라! 그런데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정의며 자비며 모든 것을 의심하게 돼. 인생은 우리 속에 있는 많은 것을 깨뜨리고 많은 믿음들을 파괴했어. 재회......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그때 세세미 바이히브로트가 탁자 옆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키를 높였다. 그녀는 발끝을 들고 목을 쭉 뻗으며 탁자를 두드렸다. 그러자 그녀 머리 위의 두건이 마구떨렸다.

"그렇게 된다니까!"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큰소리로 말하며 모두를 도전적으로 훑어보았다.

그녀는 거기에 서 있었다. 그녀는 평생 동안 이성의 공격에 맞서 싸운 투쟁에서 멋진 승리를 거두었다. 등이 굽고 작은 그녀는 확신에 차서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영감을 받고 벌하는 조그만 예언자였다. (끝)

497



부덴브로크 일가가 당면한 경제적 실패는 몰락의 이유가 아니라 몰락의 결과이다. 몰락의 원인은 여러 세대가 지나는 가운데 성찰적 경향, 즉 비시민적 경향이 점증한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그들은 그만큼 더 병약해진다. 즉, 네 세대가 흘러가는 가운데 헤겔의 역사 철학 체계인 예술, 종교, 철학 순서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순진성, 종교, 철학, 예술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체계가 실현되고 있다. 이와 같은 구조적 특징은 각 인물을 통해서도 관찰될 수 있다. (홍성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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