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조선 - 16~18세기 조선.일본 비교
문소영 지음 / 나남출판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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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기와 자기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흙을 굽는 온도다. 도기는 섭씨 800-900도 정도의 낮은 온도에서 굽고 자기는 섭씨 13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굽는다. (중략) 도자기 원조 국가인 중국이 고화도 자기를 굽기 시작한 것은 7세기 무렵이었다. (중략) 신라 말에 장인들이 스스로 터득했든지 아니면 중국의 혼란기에 월주요의 장인들이 흩어져 고려로 들어와 자기기술을 전수했든지 간에 늦어도 10세기 후반에는 고려청자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중략) 16세기까지 자기를 만들 수 있었던 민족은 전세계적으로 중국, 한국, 베트남밖에 없었다고 하니, 10세기 안팎의 고려는 최첨단 과학기술을 소유한 나라였다고 자부해도 된다.-39-42쪽

조선에서 백자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중국 명나라의 백자가 소개된 덕분이었다. 명나라의 백자는 순수한 백자가 아니라 서양에서 ‘블루 앤 화이트’로 부르는 청화백자였다. 푸른색 안료(코발트)로 새하얀 도자기 위에 용이나 새, 중국 산수화 등을 그려 넣은 자기였다. (중략)중국에서 청화백자의 수출을 금지하자 조선 왕실은 직접 백자 생산을 지시했다. (중략) 청화백자의 몸통인 백자 만들기에 성공하자 15세기 중반, 세조 때부터 백자 위에 코발트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 제작에 본격적으로 들어간다. 즉, 조선의 백자는 원래 명나라의 청화백자와 닮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지 단지 하얗게 빛나는 백자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순백자가 많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중략) 코발트를 수입해 청화자기를 생산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조선 왕실은 국산 코발트를 발굴하려고 노력하 정도로 청화백자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 (중략) 그러나 전문가들은 청화자기 안료를 국산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노력은 실패했다고 분석한다. 세조와 예종 때를 지난 뒤에는 기록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아래에 계속)-51-58쪽

(위에서 계속)
조선 왕실과 사대부는 계속 푸른색 그림이 그려진 백자를 구하기 위해서 노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인들의 청화백자 사용을 법으로 금지했다. (중략) 조선 후기 즉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세계적인 도자기의 유행은 청화백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여러 가지 색으로 꽃이나 새 등 도안을 채색한 채색도자기로 진화했다. 일본식 채색도자기의 도약이었다. 18세기에는 채색도자기의 원조인 중국조차도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하기 위해 일본식 채색도자기를 모방해야 할 정도로 유럽에서 인기를 모았다. (중략) 백의민족의 이미지를 강조해주는 조선의 백자는 이런 세계적인 도자기 시장의 흐름에서 완전히 비켜난 결과에 불과하다.
(아래에 계속)-51-58쪽

(위에서 계속)
조선의 사치금지법이 아니었으면 조선에서도 채색자기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한 마디 더 추가하겠다. 일본에서도 1787년에 사치생활 금지법이 발효되었다. (중략) 중국도 명나라 등에서 종종 사치금지법을 내리곤 했다. 중국이나 일본 모두 유교의 세례를 받은 나라였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조선처럼 모두 사치를 금지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사치금지법이 조선에서는 비교적 확실하게 지켜졌던 반면 일본과 중국에서 잘 지켜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의 경제적 수준이 일본의 막부나 중국의 황실에서 백성들의 사치를 금지한다고 해도 지켜지지 않을 정도로 풍족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모든 백성들이 다 사치했다는 것은 아니다. 국가가 사치풍조를 막으려고 해도 상업이 발달하고 수공업의 수준이 향상되는 등 경제적 수준이 높아지면, 문화적으로 한 발짝 진보한 것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사치금지법 등이 일시적으로 상업과 수공업을 위축시킬지라도, 봄날 새싹이 돋아나오듯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51-58쪽

조선은 17세기에 회회청(코발트)을 구할 경제적 외교적 능력이 부족해 청화백자 생산을 중단하고 철화백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일본은 나가사키를 들락거리는 네덜란드와 중국인 상인들을 통해 코발트를 구해 청화백자를 만들고, 그뿐만 아니라 유럽에 수출했다. 일본은 유럽에 중국도자기를 모방한 ‘짝퉁’ 청화백자의 시장을 확보했고, 점차 그 수요를 늘려 나갔다. 그리고 18세기부터는 진정한 의미의 일본 도자기의 유럽 시장을 창출해냈다.(중략)
17세기 전세계적으로 청화백자가 유행이던 시기에 경제적 이유로 철화백자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조선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부터 짝퉁 청화백자를 주문받아 유럽에 수출했던 일본은 이후 완전히 다른 국부의 축적과정을 형성해나갔다. 일본 도자기의 유럽 수출이 메이지유신의 성공을 이끌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이다.17세기 조선의 철화백자는 물론 아름답다. 21세기의 현대적인 시선으로도 꽤나 멋지다. 그러나 철화백자의 아름다움 뒤에는 조선의 가난이 숨겨져 있다. -65-66쪽

신라시대 촌락문서에 기록된 442명의 주민 가운데 노비는 25명뿐으로 5.7%이다. 그때부터 700년쯤 흐른 조선 성종 때인 15세기 말에 이르면 노비의 수는 전체인구의 30%를 넘게 된다. (중략) 17세기 초반 경상도 산음현의 호적을 분석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양반은 23%, 양인은 60%, 천민은 18%였다. 즉 담세자가 60% 수준이었다. 왕실의 친인척과 관리들이 살았던 한성의 경우 신분별 인구비율은 양반 16%, 양인 30%, 노비 53%였다. 노비의 비율이 53%나 되는 것은 한성은 관리와 양반들이 거주하는 특수한 지역이고 이들의 시중을 드는 노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략) 노비가 20-30%에 이르는 인구구성 때문에 미국의 한국사학자 제임스 팔레는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도 노예제 사회(Slave Society)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30%를 넘는 조선의 노비 비율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제국의 수준으로 아시아의 다른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라는 분석이다. 사회의 발전 단계가 서구에서 바라보는 원시-고대-중세로 일률적으로 구성되지는 않겠지만, 팔레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은 중세가 없이 고대 노예제 시대에서 근대로 건너뛰기를 한 것이다. -146-147쪽

노비문제를 두고 조선 왕실과 양반은 대립했다. 조선의 왕실은 양인층이 노비로 몰락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또한 노비를 양인으로 확보하고자 애쓰기도 했다. 양인이 담세자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면 양반은 양인을 노비로 만들기 위해 양천교혼(良賤交婚)을 통해 그들의 자식까지도 노비로 만들고자 애썼다. 조선시대에 양인은 양인끼리만 결혼해야 했다. 그러나 양반들은 자신의 재산을 늘릴 요량으로 양천교혼을 일삼았다. 양반에게 노비는 토지와 더불어 중요한 재산이었던 탓이다. 양인을 확보하려던 조선의 왕실은 양반의 이해관계 때문에 번번히 양반들의 범법행위를 눈감아줘야 했다. 조선 왕실은 양천교혼 금지령을 자주 내렸지만, 양반사회였던 조선에서 양천교혼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양천교혼 금지령을 자주 내렸다는 것은 그만큼 양반들이 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17세기 울산호적을 보면 양반의 노비 중 솔거노비의 94%가 양인 여자와 결혼했다.
-148-149쪽

일본 사학자 사카타 히로시가 경상도 대구 지방의 호적을 분석한 결과 1690년 9.2%에 불과하던 양반은 1858년이 되면 70.3%로 160여년 만에 수직 상승한다. 같은 시기 양인의 인구비율은 53.7%에서 절반 수준인 28.2%로 뚝 떨어진다. 담세자들이 20%대로 줄어든 것이다. 노비 등 천민은 37.1%에서 1.5%로 비중이 떨어졌다. 이는 조선후기 해방노비가 급증한 덕분이다. 드라마 ‘추노’처럼 도망 노비가 속출하기도 했는데,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충분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사회적 경제적 토대가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50쪽

공식적으로 조선은 1886년 노비 세습제 폐지령을 내렸고, 1894년에 노비제도는 종말을 맞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에서야 비인간적인 세습 노비가 사라진 상황은 이웃나라와 비교해 보면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900년대에 이미 노비제를 폐지했다. 다른 형태의 천민제도인 게닌(下人)이 나타나 1871년 해방령이 내려질 때까지 지속됐지만, 공식적으로 노비제는 10세기에 폐지됐다.
중국에서는 노비가 세습되지 않았고 옹정제 때 마지막으로 세습적인 천민집단이 거의 없어졌다. 18세기 초 옹정제가 해방시킨 것이다.
(아래에 계속)-151쪽

(위에서 계속)
옹정제는 1723-1731년에 걸쳐 중국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사회적 법외인’으로 천대받고 차별받았던 집단들을 해방하는 칙령을 잇따라 선포했다. 결혼식이나 상가에서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산시 지방의 노래하는 사람들, 저장 지역의 천민들, 안후이 지역의 세습적 하인들, 장쑤 지역의 세습적 걸인들, 동남 해안지역 뱃사공, 굴채취와 진주조개 어부로 살아가는 사람들, 저장성과 푸젠 성 경계지방에서 삼과 대마와 쪽물 재료들을 모아 살아가는 사람들, 가내 노비들이 그 대상이었다. 옹정제는 이들 천민 집단에도 염치있는 마음을 가지고 스스로 고결한 인간이 되려고 하는 뜻있는 인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신분해방의 기회를 주고, 천업을 그만 둔 자손에 대해 과거응시 자격도 부여했다.-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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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3-10-14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난 조선>이라는 제목은 다분히 필자의 비분강개가 반영된 것이고, 냉정하게 말하면 <가난한 조선>이 적당할 것 같다. 우리들이 가진 낭만적 이미지와 달리 역사적 기록들을 통해 연구한 조선은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는 것과, 그 가난의 원인이 지배계층이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급급하여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데에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때때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비분강개와 애국심이 쓴웃음을 자아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서술된, 한번쯤 읽어볼 만한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