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의 협력일기 - 어느 친일 지식인의 독백
박지향 지음 / 이숲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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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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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이제 서양에서 저항과 협력을 윤리적으로 판단하는 일은 중심과제가 되지 못한다. 강제력에 대한 협조는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인정받게 된 것이다. 협력은 복잡한 이슈이며 다양한 형태를 취했다는 사실도 당연시된다. 우리 사회에서 발견되는 "저항하지 않으면 다 협력자"라는 식의 이분법적 판단은 서양 학계에서 이미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다. 태평양전쟁 중 일본에 중국 지역을 연구한 브룩(Timothy Brook)은 언뜻 보기에 협력은 민족주의의 반대 같지만, 20세기에 나타난 협력은 전적으로 민족주의적 용어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협력주의자나 민족주의자는 그 신념에서 다를 바 없으며 그들은 모두 민족의 언어로, 민족을 대신해서, 민족의 이익을 위해 발언했다는 것이다.

80
한편, 저항과 협력은 권력의 분배와 연관되어 있었다. 호프만(Stanley Hoffmann)은 프랑스의 군사적 패배가 권력 구조 밖에 있던 많은 사람에게 기득권층과의 사적인 관계를 청산할 기회를 제공했다고 지적한다. 아프리카 토착사회에서도 억압받은 집단들의 권위주의자적 지배자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제국주의 세력에 협력하였다. 일본에 점령된 중국에 대한 연구도 협력자들은 국민당 정부하에서 닫혀 있던 정치적 기회의 개방을 바랐고 그 기회를 이용했으며 중국인 협력자 가운데서는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도 많이 포함되었다고 지적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대중은 굳이 협력에 동좋지 않았다고 해서 저항을 지지한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놀랄 정도의 수동적 태도를 보였는데,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하루하루 삶의 어려움, 그리고 당국의 정책이 그러한 태도를 더욱 조장하였다. 최근 연구는 평범한 사람들은 일상생활에 대한 관심에 지배되기에 저항에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적대적이 될 수 있으며, 지배체제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도 대결을 피하며, 레지스탕스에 적대감을 보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어찌 되었든 일상생활을 영위한 대중의 협력 행위와 그들의 상충하는 목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98-99
더욱 중요한 사실은 윤치호에게 자유란 우선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의미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는 영국을 세계 최고 수준의 문명국으로 인정하였는데, 그는 영국인들이 이 세상의 "실질적 지배자"가 된 이유를 "개인의 독립을 공동체적 의존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 데서 찾았다. 윤치호는 민족을 위하여 개인의 복리를 희생하라고 강요하는 폭력을 거부하였다. 당시 위세를 떨치던 민족주의의 조류 속에서도 ‘민족’이라는 집단적 관념에서 역사를 바라보지 않고 개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점은 놀랄 만하다.

101-102
19세기 말 조선왕조가 극도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윤치호는 조선이 청나라의 지배에 떨어지는 것보다는 영국이나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되면 나라가 망한다 해도 조선 사람들은 많은 부분 "고통이 제거"된 상황을 맞을 것이고 "여러 이득"을 향유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국가가 사라지도 지배층이 변하여도 국민 개개인이 예전보다 더 많은 안정과 행복을 얻게 되면 그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국가의 목적은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유지해 주는 것이고 만약 정부가 포악하여 국민을 압제하고 수탈한다면, 그런 정부하의 독립이란 무의미한 것이 되며, 동족에 의한 가혹한 통치보다는 오히려 이민족에 의한 관대한 지배가 낫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106
"물지 못하면 짓지도 마라"가 이를테면 윤치호의 좌우명이었고, "물지도 못하면서 방바닥을 두드리며 울부짖는" 조선 사람들을 가엾게 여겼다. 3.1운동 당시 윤치호는 만세만 가지고는 절대로 일본을 굴복시킬 수 없으며 일본인들은 무장하지 않은 저항에는 꼼짝도 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였다. 외치는 것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아무리 정당해도 일본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만들 힘이 없는 한, 그러한 선동은 조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 세상은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를 쫓아내는 곳이다. 울고 짜고 해봐야 소용없다." "조선 민족은 이 철과 혈의 세상이 어린아이 같은 울음으로 제거되기라고 믿는 어리석음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따라서 윤치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고나 그리스같은 작은 나라들이 히틀러의 잔인한 세력에 저항했을 때 감탄하기보다는 이상하게 여긴다.

120
윤치호는 무엇보다도 3.1운동에 동조하지 않았기에 친일파라는 악명을 얻었는데, 그가 반대한 이유는 국민이 독립이 무엇인지를 모르면서 단지 선동에 따라 독립을 외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즉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듯이 독립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선동가들에게 설득당하거나 협박당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일본의 과도한 반응을 비난하고, 애국심이 발동한 젊은이들이 위험을 향해 뛰어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지만, 동시에 그들을 그런 死地로 몰아넣는 "무책임한 선동가"들에게 분노를 느꼈다.

111-113
조선 정부의 행태에 대한 윤치호의 비판은 러일전쟁 시기에 최고조에 달하였다. 2주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이 러시아를 묵덴에서 몰아내고, 일본 정부는 조선을 노예로 만들려는 정책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데,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조선의 황제는 "관직을 팔아넘기고, 장난감 궁궐을 짓고, 굿을 해서 산천의 신들에게 러시아가 이길 것을 빌고 있다"는 것이었다. 윤치호가 판단하기에 다른 사람들도 황제를 혐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중략) 또한 왕비 민씨에 대해서 윤치호는 한 마디로 "그 영리하고 이기적인 여인이 미신 섬기는 것의 반만큼이라도 백성을 열심히 섬겼더라면 그녀의 왕실은 오늘 안전했을 것"이라고 평했다. 권좌에 있는 내내 왕비의 신념은 "우리 세 사람만 안전하다면 무슨 일이든 일어나도 상관없다"였다. 그 세 사람은 왕, 왕비, 왕자인데, 그러한 극단적인 이기심이 파멸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129
윤치호는 경제적 도움을 줄 때에도 실용성 여부를 가장 먼저 고려하였다. 많은 사람이 윤치호에게 경제적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예를 들어 하루 한나절 사이에 아홉 명이 찾아와 돈을 요구한 적도 있었다. 그는 실용적인 공부를 하겠다는 학생들에게 기꺼이 도움을 주었고 실용적 결과과 예상되는 제안을 하는 사람에게 돈을 대주었다. 그러나 그는 철학을 공부한다는 조선 학생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영국에 유하한 5촌 윤보선이 "단지 문학공부를 위해!" 학비로 800파운드를 보내 달라고 했다는 사실에 고소를 금치 못한다. 윤치호는 또한 동경에 있는 조선 유학생들의 99%가 사회학, 철학, 정치학 등에 "코를 묻고" 있는데 그들의 "게으른 혀를 굴리는 데 사회주의는 이상적인 분야"라고 조롱조로 적고 있다.

143
윤치호가 공산주의를 싫어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연구자들은 그가 공산주의를 싫어한 이유를 그의 보수적 성향에서 찾지만, 사실상 그 혐오감의 핵심은 공산주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결국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남의 노고에 얹혀살기를 조장한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점에서 유교 사회의 윤리와 공산주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보았다. "조금 먹고 살 만한 사람들에게 달라붙어 있는" 친척, 친구들을 볼 때 조선은 옛날 옛적부터 공산주의를 해왔다는 것이 윤치호의 주장이다. 조선 사람들이 볼셰비즘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이유도 유교와 공산주의의 기생주의가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데 공산주의는 유교보다 더 나쁘다. 유교는 구걸하는 것을 용서할 만한 ‘약점’으로 만들지만, 조선 버전의 볼셰비즘은 강도짓을 ‘무산자의 영광’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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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 미친 듯이 웃긴 북유럽 탐방기
마이클 부스 지음, 김경영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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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경제적 평등이 사회적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이론이 사실이라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는 경제적으로 가장 평등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전 세계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세계 지니계수 순위는 해마다 달라지며, 1위는 보통 스웨덴(현재 1위이며, 몇 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니면 명예 북유럽 국가인 일본이 차지한다. 덴마크는 다양한 연구자와 연구 기관, 또 오프라 윈프리가 꼽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이지만, 지니계수 순위에서는 북유럽 국가들 중 제일 낮은 5, 6위쯤을 차지한다.

123-124
다음이 얀테의 법칙(Law of Jante)이며, 북유럽 여행을 준비 중이라면 반드시 숙지해야 할 사회 규범이다.
1.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2. 당신이 남들만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3. 당신이 남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4. 당신이 남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지 마라.
5. 당신이 남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6. 당신이 남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7. 당신이 모든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8. 남들을 비웃지 마라.
9. 누구도 당신에게 관심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10. 당신이 남들에게 무엇이든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133
얀테의 법칙과 함께 덴마크의 순응주의를 만드는 주된 요인이 두 가지 더 있다. 휘게hygge와 폴켈리folkelig다. 둘 다 번역하기 까다로운 단어들이다. 휘게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느긋하고 편안한 덴마크 고유의 아늑함과 유쾌함을 뜻하며, 전제 군주에 버금가는 끊임없는 압력을 행사하며 순응을 요구하는 엄격한 사회적 의식들과 함께 실제로 고도로 성문화되어 있다. 폴켈리는 일종의 광범위한 문화 대중주의로, 덴마크 주류 문화 전반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폴켈리는 미다스의 손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손에 닿는 것을 모두 쓸모없게 만들어버린다.

187
"이 사람들은 너무 오랫동안 고립되어 지냈고 이제야 세계로 진출하기 시작해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척 궁금해합니다. 이와 관련된 농담도 있어요." 샤츠가 쿡쿡 웃었다. "핀란드인은 이걸 코끼리 농담이라고 부릅니다. 독일인, 프랑스인, 핀란드인 남자 셋이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코끼리 한 마리를 봤습니다. 독일인이 말합니다. ‘내가 저 코끼리를 죽여서 상아를 팔면 얼마를 벌 수 있을까?’ 프랑스인이 말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동물, 놀라운 생명체야.’ 그리고 핀란드인이 말합니다. ‘오 세상에, 저 코끼리는 핀란드를 어떻게 생각할까?’"

199-200
핀란드인 친구가 관련된 일화를 하나 들었는데, 인간의 상호작용이라는 일반적 관습을 향한 핀란드인의 태도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했다. 친구가 친구의 처남과 함께 눈보라 속에 시골길을 운전해 가는데 두 사람이 탄 차가 고장이 났다. 30분을 기다렸더니 마침내 다른 차가 지나갔다. 차가 멈추고 운전자가 밖으로 나와 두 사람을 도왔다. 남자는 보닛 안을 들여다보며 열심히 차를 고쳤다. 내내 말 한 마디 없이. 알겠다는 듯 한두 번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 친구가 맹세컨대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고는 남자는 차를 몰고 사라졌다. 친구가 말했다. "오, 우리 운이 좋았네. 저 사람 대체 누구지?" 그말에 친구의 처남이 대답했다. "아, 유하라고, 학교 동창이에요."

201
핀란드인은 대화 쪽으로는 제일 답답한 파트너이며, 핀란드인 못지않게 과묵한 스웨덴인이 그 다음이다. 이어서 노르웨이인, 아이슬란드인 순이다. 덴마크인은 그 부분에서는 거의 인간적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 무역상으로 일한 전통이 있고, 유럽 본토에서 가깝기 때문에 잡담을 더 편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휘게는 직장에서 필수다. 그 결과 다른 스칸디나비아 사람은 덴마크인을 약간 의아하게 바라본다.

216-218
시수sisu는 끈기와 강인함, 남성다움의 정신을 뜻하며, 조용하고 결연하며 신뢰할 수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극복하기 힘든 역경 앞에서 흔들림 없는 결의를 보이는 능력, 일종의 준비된 극기심이라고 할 수 있다. 버스가 고장 날 때 시수의 정신은 승객들에게 버스에서 내려 불평 없이 버스를 밀게 한다. 시수는 핀란드 남성들이 열망하는 모든 것이며 핀란드의 흙 아래 숨은 화강암 기반이다. (중략) 무뚝뚝하고 강인하고 ‘한결같이 결연한’ 술꾼이라는 핀란드인의 자아상은 전부 남성 중심적이다. 심하게 남성 우월적인 이탈리아인조차 자아상에 여성적 요소를 허용하지만, 핀란드인은 그렇지 않다. 이런 현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여성들이 대통령과 총리, 그리고 직업인으로 핀란드 사회에서 보여준 두드러지는 역할과 유럽 최초로 여성 참정권이 생긴 나라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상하다. (중략) 하지만 현대 핀란드 남자들은 음주의 건강상 위험과 반사회적 결과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감무쌍하게도 계속 술을 마신다. 마치 나자다움을 보여주는 일종이 의식이거나 남자로 사는 슬픔을 술로 달래기라도 하듯이.

422
스웨덴인이 서로 ‘유능하게’ 보이려고 애쓰지 않을 때는 ‘라곰lagom‘한 인상을 주려고 애쓸 것이다. ’라곰‘은 스웨덴의 또 다른 중요한 좌우명이다. ’적당한‘, ’합당한‘, ’타당한‘, ’상식적으로 해동하는‘, ’합리적인‘이라는 의미다. 확실히 루터교 교리를 떠올리게 하며, ’라곰‘의 어원은 훨씬 더 오래전인 바이킹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해지는 말로는 모닥불 주변에서 뾰족한 잔에 벌꿀술을 나눠 마실 때 이 조심성 많고 배려심 깊은 바이킹들은 너무 많이 마시지 않으려고 주의하면서 잔을 옆 사람에게 건넸다고 한다. (그런 뒤 나가서 수도승의 목을 잡아 찢었다.) 라게트 옴laget om은 대강 번역하자면 ’돌리다pass around‘의 뜻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라곰’으로 변했다고 한다. 오늘날에 와서는 집단의 자발적인 절제를 의미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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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역사를 경계하여 미래를 대비하라, 오늘에 되새기는 임진왜란 통한의 기록 한국고전 기록문학 시리즈 1
류성룡 지음, 오세진 외 역해 / 홍익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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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87
저녁이 되자 임금께서는 개성부에 묵었다. 임금께서 남문 밖 관청에 행사하셨는데, 대간들이 교대로 글을 올려 영의정 이산해가 사람들과 결탁하여 나라를 그르쳤다며 탄핵을 주장했다. 그러나 임금은 이를 윤허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다음 날에도 대간들이 계속 파직을 요청해 결국 영의정이 파면되었다. 내가 영의정으로 승진하고 최흥원은 좌의정에 윤두수는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신할을 해임하고 개성부로 오게 하였다. 이날 정오에 임금께서 친히 개성의 남성 문루에 가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각자 생각하는 것을 말하게 하였다. 그러자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서 엎드리나 임금께서 물으셨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가?" 그 사람이 대답했다. "바라옵건대 정 정승을 불러들이시옵소서." 이때 정철은 평안북도 강계에 귀양 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임금께서 "잘 알았다."라고 대답하시고는 즉시 정철을 불러 행재소에 오도록 명하시고 저녁에 행궁으로 돌아오셨다. 나는 죄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유홍을 우의정으로 삼고 최홍원과 윤두수가 차례로 승진해 영의정과 좌의정이 되었다. 왜군이 아직 한양에 이르지 않았다는 소식이 들리자 사람들은 모두 임금이 한양을 버리고 떠난 것은 실수였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승지 신잡을 한양으로 보내 형세를 살피고 오도록 하였다. 5월 3일에 왜군이 한양에 들어오니 유도대장 이양원과 도원수 김명원은 모두 도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201
하루는 명나라의 여러 장수들이 식량이 떨어졌다는 핑계를 대며 제독에게 군사를 데리고 돌아가자고 청하였다. 이에 제독이 화를 내며 나와 호조판서 이성중, 경기 좌도 관찰사 이정형을 불러서 뜰 아래 무릎을 꿇게 하고는 큰소리로 꾸짖으며 군법을 시행하려고 하였다. 나는 계속해서 사죄하다가 나랏일이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제독이 나를 불쌍하게 여겼는지 다시 명나라 장수들에게 화를 내며 말하였다.
"너희들이 예전에 나를 따라 西夏를 정벌할 때, 군사들이 여러 날 동안 먹지 못하여도 감히 돌아가자는 말을 하지 못하였고 결국에는 대업을 이루었다. 그런데 지금 조선에서 우연히 며칠 동안 식량을 공급받지 못하였다고 감히 회군하자는 말을 하는가? 너희들은 가고 싶으면 떠나라. 나는 적을 섬멸하지 않고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나 응당 말가죽으로 내 시신을 싸소 돌아갈 뿐이다."
제독의 말에 여러 장수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였다. 문 밖으로 나와서 나는 제때 식량을 공급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개성 경력 심예겸의 곤장을 쳤다. 그 뒤 강화에서 식량을 실은 배 수십 척이 있다라 서강 뒤편에 도착하여 겨우 무사할 수 있었다. 이날 저녁에 제독은 총병 장세작을 보내 나를 위로하고 또 군사에 관해 논의하였다.

293
우리나라 사신이 북경에서 돌아오면서 금석산의 하씨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 묵은 적이 있는데, 그 집의 주인이 이런 말을 하였다.
"조선의 역관들이 ‘당신에게 3년 묵은 술, 5년 묵은 술이 있으면 아끼지 말고 즐겁게 드시오. 오래지 않아 병란이 일어나면 당신에게 술이 있다 한들 누가 그 술을 마시겠소?’라고 하였다네. 이 말 때문에 요동 사람들은 조선이 중국에 대해 다른 뜻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고 많은 사람이 놀라고 당혹스러워한다네."
사신이 돌아와서 그 일을 아뢰자 조정에서는 역관 중 반드시 말을 만들어내고 사건을 일으켜 나라를 모함하려는 자가 있다고 판단했다. 여러 역관들을 잡아다가 인정전 뜰에서 국문하여 압슬과 단근질까지 하였으나 모두 인정하지 않고 죽어버렸다. 이는 신묘년에 일어난 일로, 이듬해인 임진년에 과연 왜변이 일어났다.

322-334
심유경은 평양에서 적진을 오가며 적지 않게 애를 썼다. 그러나 그는 강화를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최후에 왜군은 오랫동안 부산에 머무르며 바다를 건너가지 않았다. 그때 명나라 책봉 사절 이종성이 적진에서 도망쳐서 돌아갔다. 그러자 명나라 조정에서는 심유경을 부사로 삼아 정사 양방형과 함께 왜국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나 끝내 성과를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고니시 유카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등도 돌아와 해안 지방에 주둔하였다. 이에 명나라와 우리나라에서는 논의가 자자하게 일어나고 그 책임이 모두 심유경에게 돌아갔다. 심지어는 심유경이 왜군과 공모해서 배반할 것 같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우리나라의 승려 송운(사명대사-역주)이 서생포의 적진에 들어가 가토 기요마사를 만나고 돌아오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왜군은 명나라를 침범하려 하고 있으며 도리에 맞지 않는 흉악한 말을 하였다." 이에 즉시 그 내용을 명나라 조정에 자세히 아뢰었다. 이 소식을 들은 명나라 사람들은 더욱 분노하였다. 심유경은 자신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곧 김명원에게 편지를 써서 자초지종을 설명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하고자 하였다.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세월이 빨리 흘러 지나간 일들이 마치 어제 일과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 왜군이 귀국의 국경을 침범하여 바로 평양까지 쳐들어왔으니 그들의 안중에는 원래 조선 팔도는 없었던 것입니다. (중략) 저는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격문을 보내 그를 불러내어 건복산에서 만나 서쪽으로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약속대로 몇 달 동안 감히 서쪽을 넘어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명나라 대군이 도착하여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를 이뤄냈습니다. 만약 그때 제가 오지 않았더라면 왜군은 그 전에 조승훈의 부대를 무찔렀던 기세를 몰아 의주까지 쳐들어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중략) 마침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의 국왕으로 책봉한다는 조건을 걸고 여러 왜장들을 구슬려 부산이라는 궁벽한 바닷가에 그들을 손을 묶어두고 3년간 책봉의 명을 기다리며 감히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이어서 책봉에 대한 논의가 결정되자 저는 명을 받들고 한양에서 양국 간의 화의를 돕고, 귀하와 이덕형 등을 다시 만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지금 왜국에 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책봉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이 물러날지 모르겠습니다. 귀하의 나라에서는 뒷수습을 잘 할 계획이 있습니까?" (중략) 뒷수습을 잘 하는 일은 귀국의 책임이라고 하시고서, 어찌 원대한 계획은 들려오지 않고 황제의 궁궐 아래에서 우는 계획만 있을 분입니까? 병서에서 말하길, 약자는 강자에 맞설 수 없고, 적은 수로 맣은 수를 당해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중략) 저는 귀국의 謀臣과 책사들이 다방면으로 이간질하고 소문을 내어, 안으로는 위태로운 말로 우리 조정의 분노를 사고, 밖으로는 약한 군졸을 도발하게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중략) ‘명나라를 우러러보고 명나라에 의지하는 것을 萬全之計로 여기고, 마땅히 명나라의 명을 따르고 처분을 기다림으로써 무한한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였으니, 부디 잘못된 계책을 써서 날마다 고생만 하고 졸렬한 결과를 맞이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지극히 부탁드리며, 할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이미 줄입니다.

(중략) 평양성 전투 이후에 다시 적진에 들어가는 일을 사람들은 모두 어렵게 여겼다. 심유경이 마침내 무기나 군사가 아닌 언변으로써 많은 왜군들을 몰아내고 수천 리의 땅을 되찾았다. 그런데 마지막 하나의 일이 잘못되어 큰 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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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8-12-10 0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사 교육이 임진왜란의 실상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를 잘 가르쳐 준 책. 국가를 방위할 능력이 없었던 조선을 둘러싸고 명과 일본의 외교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알지 못하면 이 전쟁에 대한 인식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의병 전설은 그야말로 지엽적인 문제.
 
전쟁의 문헌학
김시덕 지음 / 열린책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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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서인 <고문서 반납 여행>과 대중을 대상으로 한 역사서인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에 이어 읽는 세 번째 김시덕 책. 이번에는 학술서라 이전 책보다 딱딱했다. 어려운 부분은 대충대충 넘기면서 읽음.
이 사람, 자기 생각을 얘기할 때는 그저 그런 심심한 느낌인데, 남의 글을 인용할 때는 아주 매력이 넘친다. 옛 책을 읽는 게 직업인 사람인 만큼 재미있는 얘기를 정말 많이 알고 있고, 그걸 아주 성실하고도 재미있게 풀어놓을 줄 안다. 앞으로도 이 사람 책이 보이면 열심히 빌려 읽을 계획.
인상적이었던 인용문을 두 개 베껴 놓는다. "성호사설"에 나오는 오성과 한음 이야기는 소름이 돋음. 어렸을 때, 만화책으로 본 그 장난꾸러기 소년 오성과 한음 맞지? 친구가 목이 달아날 뻔한 걸 이렇게 살려 줬구나.;;;


222
李瀷의 "星湖僿說" 9 ‘人事門 善戱謔’에 수록된 유명한 대목이다.
林白湖 悌는 기개가 호방하여 예법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 그가 병이 들어 장차 죽게 되자 여러 아들들이 슬피 부르짖으니 그가 말하기를 四海 안의 모든 나라가 帝를 일컫지 않는 자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만이 예부터 그렇지 못했으니 이와 같은 陋邦에 사는 신세로서 그 죽음을 애석히 여길 것이 있겠느냐?" 하며, 명하여 哭하지 말하고 하였다. 그는 또 항상 희롱조로 하는 말이 "내가 만약 五代나 六朝 같은 시대를 만났다면 돌려가면서 하는 天子 쯤은 의당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한 세상의 웃음거리로 전했었다. 임진의 변란에 이르러, 漢陰 李 政丞이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伴接하자, 그는 한음의 인물을 대단히 추앙하여 심지어는 감히 말하지 못할 말까지 하는 것이어서, 일은 비록 진정이 아닐지라도 역시 스스로 편안하지 못했다. 李白沙는 詼諧를 잘하는데 어느 날 夜對가 있어 시골 구석의 누한 습속까지도 기탄없이 다 아뢰는 것을 즐겁게 여겼으며 마침내 林의 일까지 미치자 주상은 듣고서 웃음을 터뜨렸다. 백사는 또 아뢰기를 "근세에 또 웃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니 주상이 "누구인가?" 하고 묻자, 대하기를 "李德馨이 왕의 물망에 올랐답니다."하여, 상은 크게 웃었다. 백사는 이어 아뢰기를 "성상의 큰 덕량이 아니시라면 제놈이 어찌 감히 천지의 사이에 용납되오리까?"하자, 상은 "내 어찌 가슴속에 두겠느냐?"하고 드디어 빨리 불러오게 하여 술을 내려 주며 실컷 즐기고 파했다. "시경"에 이르기를 "戱謔을 잘하도다" 하였는데, 백사가 그 재주를 지녔다 하겠다.

126-127
아래에 古賀精里(1750-1817)의 글을 인용한다.
조선은 작은 땅으로, 진, 한, 당에게 공격받고 합병된 바이다. 중국에 일이 많을 때 스스로 왕을 세워 다시는 그 판도에 들어가지 않았다. 만약 금, 원 등의 제국의 수도가 팔도에 가까웠다면 병탄되고 멸망되어 속국이 되었을 터이다. 어찌 유약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흥망의 때에 태도를 잘 바꾸어, 앞에서는 복종하다가 뒤에 가서는 반역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국이 이를 취하여 하였으나 명분이 없었으므로, 그 사악함으로 인하여 도요토미 씨의 징벌을 받았으나 실처럼 멸망하지 않고 이어졌다. 그가 명나라와 화의를 논한 일은 피차에 의견이 엇갈렸으니 오랫동안 비웃음거리가 되었으나, 한국으로서는 하늘의 도움이었다. (중략) 도요토미 씨가 한국을 통해 명나라를 취하여 한 것은 매우 나쁜 전략이었다. 만약 우리가 군대를 온축하면서, 명나라가 반란군에 의한 내홍과 만주 오랑캐에 의한 외침을 겪는 때에 조금 늦게 군대를 보냈다면, 그리고 멀리 요서 지방이 아니라 吳會, 金陵, 兩淮를 먼저 취하고 나서 명나라의 내외가 서로 피폐해진 뒤에 서서히 전쟁을 펼쳤다면 어부지리를 거두어 중원을 석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그의 문집인 "精里全書" 권18 ‘懲毖錄後’의 첫 구절이다. (중략) 고가 세이리의 이런 주장은 후대의 결과를 통해 선대를 예측하려는 오류라고 하겠다. 명청 교체기에 조선이 중립을 지켰어야 한다는 현대 한국 일각의 조선 왕조 비판 역시 마찬가지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임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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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폐허에서 - 저항과 재건의 아시아 근대사
판카지 미슈라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

12-13
현대 세계는 1905년 5월의 이틀 동안 쓰시마 해협의 좁은 물길에서 결정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오늘날 가장 붐비는 축에 드는 대양 항로에서, 도고 헤이하치로 장군이 지휘하는 소규모 일본 함대가 세계를 반 바퀴 돌아 극동에 도착한 러시아 해군의 주력 함대를 격파했다. 독일 황제가 트라팔가 해전 이래 가장 중요한 해전이라 말하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제껏 세계가 목격한 가장 엄청난 현상"이라고 말한 이 쓰시마 해전의 결과, 한국과 만주를 누가 통치할 것인지를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1904년 2월부터 해 온 전쟁이 사실상 끝났다. 중세 이래 처음으로 비유럽 국가가 주요 전쟁에서 유럽의 열강을 격파한 것이다. (중략) 다마스쿠스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젊은 병사이자 훗날 케말 아타튀르크로 알려지는 무스타파 케말이 승전 소식을 듣고 전율했다. 서구의 위협에 맞서 오스만 제국을 개혁하고 강화하는 일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던 케말은 다른 많은 튀르크인과 마찬가지로 일본을 본보기로 삼아온 터였고, 이제 자기가 옳았음이 입증되었다고 생각했다. 훗날 인도의 초대 총리가 되는 자와할랄 네루는 열여섯 살에 고향 마을에서 신문을 읽으면서 들뜬 마음으로 러일전쟁의 초기양상을 주시했고, "유럽의 속박에서 벗어날 인도의 자유와 아시아의 자유"를 위해 자신이 맡을 역할을 꿈꾸었다. 네루는 도버에서 그가 다닐 영국 사립학교인 해로 학교로 향하는 기차에서 쓰시마 해전 소식을 들었다. 그때 네루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네루처럼 런던에서 그 소식을 들은 중국의 민족주의자 쑨원도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1905년 말 쑨원은 배를 타고 중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수에즈 운하에서 그를 일본인이라 생각한 아랍인 항만 노동자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일본의 성공이 뭣을 함의하는지에 대한 들뜬 추론이 오스만 제국, 이집트, 베트남, 페르시아, 중국의 신문을 가득 채웠다. 인도의 마을들에서는 일본 장국의 이름을 따서 신생아의 이름을 지었다. 미국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도자 듀보이스가 세계 각지에서 분출하는 ‘유색인 자긍심’에 관해 말했다. 이와 엇비슷한 감흥이 평화주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를 사로잡았던 것이 분명하다. 타고르는 쓰시마 해전 소식을 접하자마자 즉흥적으로 학생들을 데리고서 벵골 지역의 작은 학교 주위를 빙빙 돌면서 승전 행진을 벌였다.

20-21
대부분의 유럽인과 미국인은 여전히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소비에트 공산주의와의 오랜 핵 교착 상태가 대체로 20세기의 역사를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계 인구 과반수에게 지난 세기의 중심 사건은, 아시아가 지적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아시아와 유럽 제국들의 폐허에서 부상한 일이라는 것이 이제는 한층 분명해 보인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세계를 오늘날 존재하는 대로 이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서구의 이미지보다는 한때 종속되었던 사람들의 염원과 열망에 맞추어 세계가 어떻게 계속 재형성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180
떠돌면서 무슬림의 병약함을 목격한 또 한 사람인 빈 라덴과 달리, 알 아프가니는 결코 테러 공격의 전도자가 아니었다. 이집트의 유럽 채권자들과 이란의 담배 상인들이 은밀히 악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격한 알 아프가니는, 서구의 힘이 군사력에만 의존하지 않으며 군사적 수단만으로는 그 힘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는 무슬림 지배계급이 서구의 지정학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협조하거나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온갖 행태를 시대에 앞서 경고했다. 그는 당대의 무슬림 군주들에게 경고했으나 그들의 주의를 끄는 데 실패했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묵살당한 예언자의 통한을 느꼈다. 이스탄불로 찾아온 독일 저널리스트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동방 세계 전체가 너무나 철저하게 썩은 데다가 진실을 듣고 따를 능력도 전혀 없으므로, 나는 홍수나 지진이 이 세계를 집어삼키고 묻어버리기를 바랍니다."

191-193
서구를 스승으로 삼은 도제 기간에 메이지 정치가들은 운 좋게도 마찬가지로 근대화를 추진한 오스만 제국이나 이집트의 정치가들보다 장애물에 덜 부딪혔다. (중국은 근대화의 난관을 경험하기 전이었다.) 작은 나라인 일본의 인구가 단일 인종이라는 사실이 그들의 조직화 역량을 강화했다. 무사계급과 부유한 상인측 같은 집단들은 무슬림 세계의 전통적 엘리트층과 달리 근대화에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밀려난 엘리트층인 무사계급의 역량이 국민 통합이라는 과제에 쓰일 수 있었다. 일본 경제는 줄곧 튼튼했다. (중략) 더욱이 메이지 국가는 자국의 주된 목표를 결코 시야에서 놓치지 않았다. 그 목표란 일본이 서구와 맺는 관계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개정하는 것이었다. (중략) 마침내 일본은 1894년에 영국이 5년 안에 치외법권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해에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중략) 일본은 순식간에 중국의 해군과 육군에 대승을 거두어 자국의 군사력과 산업과 기반시설의 토대가 견고하다는 것을 널리 입증했을 뿐 아니라, 도쿠토미의 표현대로 "문명이란 백인의 전유물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혹사당한 일본 농민들은 서구의 노선을 따르는 자국의 근대화 -본래 어디에서나 가장 약자들에게 무자비한 과정-를 위해 이미 막대한 희생을 치른 터였다. 이제 중국인의 차례였다. 당시 일본에서 살고 있던 작가 라프카디오 헌은 "새로운 일본의 진짜 생일은 중국 정복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라고 썼다.

223-224
캉유웨이나 량치차오와 달리, 쑨원은 광저우의 빈농 집안 출신이었다. 쑨원의 형은 가난 때문에 하와이로 이민을 가야 했고, 쑨원도 10대 초반에 그곳으로 갔다. 하와이에서 미션스쿨을 다닌 쑨원은 영어를 유창하게 말했지만 한문 쓰기에는 서툴렀다. 서구식 옷을 입고 화교들에게 신세를 지던 쑨원은 캉유웨이와 량치차오가 속한 전통적인 유학자 세계와는 되도록 거리를 두었다. 서구를 두루 돌아다닌 쑨원은 중국의 약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1894년에 조정에 올린 대담한 상서가 거부되었을 때, 쑨원은 만주족의 군주제를 전복하고 중국을 공화국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확신했다. 이 신념은 훗날 왕정주의자인 캉유웨이와 반목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임기응변에 능한 쑨원은 캉유웨이와 량치차오 편에 가담하기를 열망했다. 나중에 드러났듯이, 캉유웨이는 쑨원을 쓸모없고 상스러운 모험가로 여기며 못 견뎌했ㄷ. 퇴짜를 맞은 기독교 개종자 쑨원은 근대의 분위기를 고려해 유교를 재해석하려는 캉유웨이의 시도를 무의미한 학문적 탁상공론으로 여기게 되었다.

237-238
20세기 초에 도쿄는 아시아 전역의 민족주의자들이 몰려드는 메카, 확장된 아시아 공공 영역의 중심이 되었다. 1905년에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를 거두자 이 과정은 한층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도쿄 외에 시카고와 베를ㄹ린, 요하네스버그, 요코하마처럼 서루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거의 모든 식민 사회 출신 지식인들 -신할리족 불교도, 이슬람 근대주의자, 힌두교 부흥론자-이 지적 문화의 도가니를 이루었다. 이런 곳에서는 탐구와 성찰, 논쟁의 지평이 넓어졌으며, 많은 남녀가 귾임없이 방랑하고 자아와 세계를 부단히 탐험하고 분석하는 일에 몰두했다. 대개 해안가에 자리잡은 도심지(캘커타와 광둥성처럼)의 서구식 학교와 대학, 저널리즘, 인쇄매체는 세속적 공간을 만들어냈고, 최근에 교육받은 엘리트들은 그 공간에서 자기인식과 분석에 필요한 새로운 어휘를 배웠다. 그들 다수는, 선조들이 꿈도 꾸지 못했으며 당시까지 연한계약노동자, 인도인 선원과 유모-제국의 서비스 계급-만 할 수 있던 신체적 지적 여전ㅇ에 올라 서구로 가거나 아시아 안을 돌아다녔다. 직업훈련을 받기 위해 간디는 런던으로, 루쉰은 일본으로, 쑨원은 호놀룰루로 갔다. 이런 제국 중심지들에서 그들은 식민지 경찰의 악의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발행 부수가 적은 잡지에 인쇄되거나 여행자 개개인이 고국에 전달한 그들의 강렬한 언어는 들불처럼 번져나갈 수 있었다.

248-249
량치차오는 이 오욕을 예민하게 느꼈다. 그러나 미국의 화교 공동체가 인종 차별과 학대를 겪으면서도 고국에 있는 중국 국민의 역량을 키우자는 자신의 원대한 구상을 지지하지 않자 낙담했다. 언론의 자유가 있는 민주적인 나라의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중국계 미국인들은 배타적인 길을 선호했다. 그들은 전통에 매달렸고, 그들을 대표하는 당과 지도자가 아닌 갱단과 마피아의 두목들을 배출했다. 량치차오는 이렇게 썼다. "중국인은 국가 사고방식이 아닌 마을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지나치게 발달한 그 의식은 국가 건설에 중대한 장애물이다." 량치차오는 더 이상 중국인이 자각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개개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오직 전제정 때문이라고 결론지을 수 없었다. "누가 미국이 국민 개개인에 의해 자유롭게 형성된 국가라고 말하는가? 나에게는 국민들에게 국가를 강요한 몇몇 위인들이 보일 뿐이다. 자치에 아주 익숙한 미국인들조차 이럴지니, 다른 국민들은 그런 사태를 확실하게 경계해야 한다." 중국에서 혁명이 약속한 민주주의와 자유는 서구 열강에 대적할 수 있는 국민국가를 건설하기는커녕 혼란만을 초래했다. "이런 동포들을 데리고서 선거제도를 시행할 수 있을까? .....자유, 입헌주의, 공화주의는 모두 다수의 통치를 뜻하는 어휘다. 그러나 중국 국민의 절대다수는 샌프란시스코의 주민과 비슷하다." (중략) 량치차오가 갑작스레 변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머문 메이지 시대 일본의 성공은, 권위주의 국가가 근대 국가를 건설하는 일에서 자유민주주의제보다 효과적일 수 있음을 입증했다. 유럽 국가들이 보호주의적 경제정책을 포용하고 더 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쪽으로 움직이자,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255
제국주의 신참도 이미 중국에서 활동 중이었다. 근래에 중국에서 상업적 이해관계가 대폭 깊어지고 영국, 프랑스와 고아범위한 협정을 체결한 일본이었다. (일본은 장차 연합국 편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터였다.) 이제 막 제국주의로 발돋움하는 국가의 역할에 걸맞게, 일본 당국은 외국인 범아시아주의자들의 삶을 고달프게 했다. 일본은 반프랑스 활동가를 자국 영토에 들이지 않겠다는 조약을 프랑스와 체결한 이후 판보이쩌우를 추방했다. 영국이 일본에 압력을 가한 결과 이브라힘의 신문 ‘이슬람 형제애’도 폐간되었다.

256-257
량치차오도 위안스카이의 실패로 인해 때를 묻혀야 했다. 일본에서 망명하던 시절에 그는 스승으로서 큰 존경을 받았다. 그의 제자 몇 명은 중화민국에서 힘 있는 자리에 올랐고, 나라를 황폐화한 분파 투쟁에 가담했다. 이미 학생들보다는 유력한 관료들을 상대로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한 량치차오는 옛 제자들 편에 가세했고, 베이징의 새로운 정부에서 각료직에 올랐다. 량치차오는, 자신을 환대했던 일본인들과 그들의 불합리한 요구에 대해 강경한 자세로 협상했다. 또한 1917년에 중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야 한다고 주장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중국이 승리하는 편에 서는 것이 국제체제에 진입하고, 여전히 중국을 옭아매는 불평등조약을 무효화하고 일본에게서 산둥 반도를 되찾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그가 연합국과 체결한 협정의 일환으로,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같은 제1세대 공산주의 지돚들을 포함한 중국 노동자와 학생들이 프랑스로 갔다. 그럼에도 량치차오의 정치 이력은 비참한 실패로 판명났다. 15년이 지나 중국의 돌아온 그는 청조 이후의ㅡ 격란에 몸을 던졌지만, 현실과 철저히 타협한 채 임시변통으로 부패하고 난폭한 군벌들과 정치적으로 연대한 것이 고작이었다. 위안스카이 사후 중국을 뒤흔든 정치적 격동 속에서 결국 량치차오는 밀려났고, 정계에 적극 개입하는 삶에서 은퇴해야 했다. 이제 더 젊은 세대가 전면으로 부상해 그의 사상이 닦아 놓은 토대 위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것이었다.

276-277
중국과 인도의 사태를 면밀히 주시하던 레닌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손에서 벗어난 아시아가 러시아에 중요하다는 것을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다. 레닌이 썼듯이 "투쟁의 결과는 결국 러시아와 인도, 중국 등이 인류의 절대다수를 이룬다는 사실에 달려 있다." 스탈린은 "사회주의의 승리를 원한다면 절대 동양을 잊지 말아야 한다."라고 단언했다. 1917년 혁명 직후 레닌과 스탈린은 동양인이 제국주의적인 "강도와 노예주"를 타도할 것을 요청했다. 1920년, 볼셰비키는 바쿠에서 동양인미회의를 조직했다. 그 직후에 코민테른은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공산당 창당을 도왔으며, 소비에트 고문들은 중국인 공산주의자는 물론이고 민족주의자의 훈련도 도왔다. 조선, 페르시아, 인도, 이집트, 중국의 많은 활동가들은 소련의 단호한 반제국주의 입장에 이끌렸다.

290-291
중국 대표단은 산둥 반도가 온전히 중국 땅이며 독일이 무력으로 빼앗았다고 웅변했다. 산둥 반도는 공자의 출생지이자 중국 문명의 ‘요람’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일본이 점령한 산둥 반도에 대한 중국의 주장에 동조했지만, 전시에 일본 측에 그 식민지를 계속 보유해도 좋다고 약속한 로이드 조지와 클레망소에게 그 약속을 철회하라고 설득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영국과 프랑스 모두 중국에서 무력을 행사해 획득한, 지켜야 할 이해관계가 있었다. 일본은 전시에 연합군에 군수품을 팔고 아시아에서 시장을 넓힘으로써, 대서양에서 미국이 강대국인 것만큼이나 태평야에서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일본을 국제연맹에 끌어들이려던 윌슨으로서는 이미 일본의 인종 평등 요구가 묵살당한 마당에 이 나라의 화를 더 돋우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295-296
네루는 윌슨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아시아에서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불러냈다고 섰다. 호찌민과 마찬가지로, 마오쩌둥은 공산주의만이 중국에 진정한 주권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략) 소비에트가 창설한 코민테른의 요원들의 중국, 인도, 이란, 터키의 공산주의자들뿐 아니라 중국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까지 지원하기 시작했다. 코민테른 지부가 있던 베를린은 세계 곳곳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반식민 활동가들을 끌어들였으며, 그중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탄 말라카와 인도의 마나벤드라 나트 로이를 비롯해 아시아 공산주의의 첫 지도자들도 있었다. (중략) 1925년 이후 상하이와 광둥성은 아시아에서 이러한 초국적 네트워크의 허브가 되었다. 호찌민은 라시드 리다의 글을 잡지 ‘파리아Le Paria’에 게제했고, 모스크바로 가서 러시아와 중국, 인도의 혁명가들을 만났다.

296-297
버킹엄 궁전에서 열린 가든파티에 참석한 량치차오에게 춥고 안개 자욱한 런던으로 태양은 "핏빛으로" 보였다. "가을의 납빛 하늘 아래" 유럽 대륙 전체가 웅크리고 있었다. 랭스에서는 독일군 포병대의 포격을 세 차례 받고 반쯤 부서진 고딕 대성당의 잔해를 보았다. 벨기에 도시 루뱅에서는 독일군이 민간인 수백 명을 살육하고 유명한 대학 도서관을 파괴했다는 말을 들었다. 량치차오는 중국과 아시아의 다른 지역들에서 서구가 별다른 이유 없이 문화유적을 파괴한 역사를 익히 알고 있었다. 보어 전쟁 기간에 영국 때문에 ‘강제수용소’라는 말이 두루 쓰이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과거에는 그런 참극이 장차 유럽 본토에서 자행될 만행의 전조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량치차오를 비롯한 아시아의 지식인들은 타고르의 말처럼 "문명화된 유럽이 중국처럼 거대한 나라의 목구멍으로 밀어넣은 독약 때문에 유럽 자체가 영원히 심각하게 상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유럽이 문명의 횃불로 빛을 비추지 않고 불을 지르려는 속셈은 아닌지" 의심했다.

316-319
활동 초기인 1881년에 타고르는 아편 교역의 핵심 중개상인 할아버지와 정치적 거리를 두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귀족 환경과 서구식 교육에서 출발한 그의 지적 영적 여정은 벵골 동포들과 매우 다른 종착지에 이르렀다. 1891년에서 1901년까지 벵골 지역의 시골에서 체류한 기간은 이 점에서 결정적이었다. 인도인 촌락들 근처에서 살았던 경험은 타고르가 캘커타의 중간계급과 뚜렷이 다른 세계관을 갖는 데 일조했다. 이 체류를 통해 그는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곤경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을 뿐 아니라, 자연풍경을 사랑하고 가정적이고 파편적인 일상을 존중하게 되었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산업화 이전 문명이 기계화된 근대 문명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확신을 줄곧 잃지 않았다. 또한 인도의 자기쇄신은 촌락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중략) 타고르는 아시아인이 "유럽의 방식을 따라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문명의 유일한 유형이자 인간의 유일한 목표"라고 믿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보았다. (중략) 1917년부터는 에세이와 연설로 민족주의를 체계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 해에 그는 미국에서 청주에게 국민국가란 "깔끔하게 뭉친 인간 더미들을 생산하는 정치의 기계"라고 말했다. "오늘날 어디에서나 받아들여지는 이 국가라는 관념이 이기심 숭배를 도덕적 의무로 가장하려 들 때.... 그것은 바로 인류의 생필품을 강탈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격까지 하는 것이다."

332
1923년 타고르의 방문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한때 타고르의 작품을 번역한 마오둔 같은 급진주의자들은 타고르가 중국 청년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다. "우리는 동양 문명을 찬미하는 노래를 목청껏 부르는 타고르를 환영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국내의 군국주의자들과 국외의 제국주의자들에게 억압당하는 우리에게는 꿈꿀 시간이 없다." 젊은 급진주의자들은 이미 타고르를 초대한 량치차오를 공격하고 있었고, 중국에서 타고르의 통역을 맡은 낭만파 시인 쉬즈모에게도 계속 모욕을 퍼부었다.

339-340
삶이 저물어가던 1938년 타고르는 절망했다. "팔자가 기박한 우리는 어디를 올려다보아야 하는가? 일본을 쳐다보던 시절은 끝났다." 3년 뒤 타고르는 죽었다. 타고르를 중국으로 초대했던 량치차오는 그에 앞서 1929년에 비교적 이른 나이인 56세로 숨을 거두었다. 이보다 4년 전에는 캉유웨이가 죽었고, 량치차오는 옛 스승을 개혁의 선구자로 칭송하는 추도사를 낭독했다. 베트남인 판보이쩌우는 프랑스에 체포되어 처형 직전까지 몰렸다가 정치적 거세를 당한 뒤 1940년에 옛 제국의 중심지 후에에서 죽었다. 이들 대부분은 젊어서는 국내의 자강을 주창했으나 말년에 이르러서는 냉철한 정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지 않았으며 자국 내에서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이집트, 터키, 이란 같은 나라들에서는 미몽에서 깨어난 이슬람 근대주의자들이 강경한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근본주의자들에게 밀려났다. 아시아 전역의 비밀결사와 비밀조직(그리고 파리, 베를린, 런던의 커피하우스)뿐 아니라 대학과 신학대학, 공식 노동조합에서도 개로운 전투적 민족주의자와 반제국주의자가 등장하고 있었다. 이들 다수는 타고르가 말년의 에세이에서 극성스러운 "동양의 남학생들"이라고 경고한 부류였다. "결국 이 위대한 문명들을 파괴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조숙한 남학생들 같은 부류, 즉 영리하고, 피상적으로 비판하고, 스스로를 숭배하고, 이익과 권력의 시장에서 기민하게 흥정하고, 덧없는 것을 효율적으로 다룬 사람들, 종국에는 자멸하는 정념의 힘에 이끌려 이웃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 자신도 불길에 휩싸인 사람들이다." (중략) 타고르는 일본의 아시아 본토 침략과 더불어 분출하기 시작해 여전히 아시아 전역에서 분출하고 있던 격렬한 증오를 이상하리만치 경고하고 두려워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352-353
훗날 바모는 1943년 대동아회의에서 1955년 반둥회의로 이어질 정신이 형성되었다고 말했다. 아시아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가 반둥회의에 참석했고, 1961년 비동맹운동을 결성했다. 1940년대에 이 정신의 활력을 한껏 북돋운 것은 다른 무엇보다 유럽이 약하다는 발견이었다. 알아프가니와 량치차오를 비롯한 아시아 전역의 제1세대 지식인과 활동가들의 더디고 절망적인 노력 -발행 부수가 아주 적은 다수의 정기 간행물과 늦은 밤에 우중충한 방에서 나눈 대화- 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일본은 반서구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아시아인이 유럽의 박해자로부터 얼마나 빨리 권력을 되찾을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중략) 일본은 오랫동안 치열하게 투쟁한 뒤, 결국 폭격과 핵폭탄으로 ‘응징’을 당하고서야 항복했다. 1916년 일본에서 타고르가 "도덕적 맹목과 애국주의 숭배를 용의주도하게 배양하는 국가들은 갑작스레 비명횡사할 것이다."라고 했던 불길한 예언이 현실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점령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토착민을 언제까지나 복종 상태에서 묶어두려던 유럽의 힘어 현저히 약해졌다. 유럽인은 충격을 받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전 식민지로 되돌아갔다. (중략) 그러나 그들은 어디에서나 오랜 전쟁 기간 동안 유럽인이 부재하거나 포로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을 하는 동안 벼려진 새로운 집단 정체성과 맞닥뜨렸다.

356
서구가 마지막까지 고집스럽게 품고 있던 아시아에 대한 착각 -폭력을 행사하면 토착민이 고분고분히 복종하리라는 확신- 은, 1975년에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 옥상에서 미국인과 베트남인을 태운 미군 헬기들의 가까스로 철수했을 때 산산히 깨졌다. 4년 뒤 이란인은 친미 독재를 무너뜨렸으며, 이란에 대한 서루의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파괴하는 활동의 일환으로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을 습격해 이곳 직원들을 인질로 잡았다. 그 무렵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서 경제적으로 되살아나고 있던 일본은 범아시아적 야망에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냉전이라는 새로운 대치 국면 때문에 일본이 아시아의 많은 부분을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이 가려졌다. 말레이 반도의 주요 민족주의자 무스타파 후사인은 대다수 아시아인을 대표해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점령은 가혹한 고난과 만행이라고 묘사되었음에도 긍정적인 어떤 것, 항복한 이후에야 따서 먹을 수 있는 달콤한 열매를 남겼다." 말하자면 범아시아주의는 일본에 이로웠다는 점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이 행동에 나서는 것을 허용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1905년 러일전쟁부터 시작된 일본의 활동에 따라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361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가장 유명했던 유학자는 량수밍이다. 그는 간디식의 자급자족하는 도덕적 마을 공동체를 중국 전역에 건설할 것을 구상했다. 실제로 량수밍은 자신의 이론을 실천에 롬겨, 산둥성에서 중국의 시골을 유교화하려는 향촌 건설 운동을 시작했다. 1938년, 또 다른 시골 활동가 마오쩌둥은 량수밍을 찾아가 그의 운동에 관해 오랜 시간 의견을 나누었다. 마오쩌둥 자신은 유교를 공개적으로 매섭게 비판하면서도 일찍이 받아들인 유교의 도덕주의를 결코 떨쳐버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오쩌둥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에는 캉유웨이의 조화로운 세계라는 공상이 눈에 띄게 가미되어 있었다. 1949년 연서레서 마오쩌둥은 "서구의 부르주아 문명, 부르주아 민주주의, 부르주아 공화국 계획은 중국 인민이 보기에 모두 파탄이 났습니다."라고 확언한 뒤, 이제 "인민의 공화국은 계급을 철폐하고 大同世界로 들어설"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 대동세계는 캉유웨이가 "실현할 방도를 찾지도 않았고 찾을 수도 없었던" 세계였다. 1958년 공산당 간부들은 중국 전역에 인민공사를 설립할 때 캉유웨이의 책에서 배우라는 지시를 받았다.

372-374
195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도시 지역에 사는 무슬림의 비율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새로운 통신매체와 엘리트층의 과시적인 소비, 만연한 불평등을 목격한 무슬림들은 이슬람을 다시근 열렬히 받아들였다. (중략) 서구 열강들이 강요한 근대화와 경제 성장 과정은 새로운 계급들을 창출하고 그들 사이에 권력을 재분배함으로써 이슬람 사회의 오랜 결속을 근본적으로 깨뜨렸다. 신흥 도시 엘리트층의 근대적 교육기관과 관료제에서 등장했으며, 전통적인 권위의 원천에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 다수는 시골의 빈민층을 쥐어짜는 방법으로 부유해졌다. 그 결과 희생자들, 특히 종교 지도자, 소도시 상인, 지방 관료, 반쯤 시골 출신인 사람 -알아프가니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던 부류- 처럼 이 과정에서 가장 멀리까지 밀려난 사람들 사이에 불만의 저수지가 만들어졌다. (중략) 탈식민 시대에 이집트, 튀니지, 인도네시아, 알제리 같은 무슬림 국가들은 식민국가의 정책, 특히 대중적 이슬람을 미심쩍게 여기는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며, 공적 생활에서 이슬람에 역할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제한하려 했다. 그러나 무슬림 나라들에서 인구의 절대다수는 이슬람 신앙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중략) 서구화된 세속적인 탈식민 엘리트들은, 이슬람에 세속적 발전과 경제적 통합이라는 국가의 과업에 걸림돌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대개 이슬람 단체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많은 나라들에서처럼 그런 근대화 노력이 실패했을 때, 또는 대중의 고통을 초래했을 때, 이슬람의 위세는 더 강해졌다.

377
1948년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사이드 쿠틉의 비통은 한층 더 깊어졌다. 서구의 많은 국가들은 600만 명이 조직적으로 살해된 유대인을 위해 그들의 나라를 마련해주는 것을 도덕적 당위로 여겼다. 뒤이은 전쟁에서 시온주의자들은 아랍의 연합군대를 격파한 뒤,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고 있던 아랍인 수십만 명을 추방하고 이스라엘이 독립국임을 선언했다. 이 전쟁은 아랍 국가들 가운데 가장 근대적이던 이집트에게는 특히 쓰라린 패배였다. 이스라엘은 서구 열강 앞에서 아랍이 무력하다는 것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그런 존재로 남아있다.

393-394
많은 나라들에서, 특히 근대화에 실패하거나 제대로 시도조차 못한 중동과 남아시아에서 수억 명의 무슬림들은 오랫동안 종교적 정치적 복수를 꿈꾸며 암흑 속에서 살았다. 서구가 규정한 근대 세계에 진입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결국 그들은 스스로 뿌리를 자르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 인생에서 수많은 격변과 트라우마의 근원인 서구를 증오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9월 11일에 대규모 살인을 저지른 악랄한 범인들을 수백만 명이 남몰래 지지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중략) 재앙적인 오판이었던 ‘테러와의 전쟁’은 불난 집에 부채질한 꼴이었고, 오르한 파묵이 두려워한 대로 "이슬람 나라와 빈곤에 찌든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 즉 굴욕감과 열등감을 낳는 조건에서 사는 사람들이 느끼는 서구에 대한 적의"를 강화했다. (중략) 2006년 이래로 서구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퍼뜨리기보다 체면을 지키는 데 주력하면서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늦춤에 따라, 무슬림들의 분노도 점차 누그러졌다. 그럼에도 오늘날 대다수의 무슬림들은 서구가 여러 차례 이슬람을 침략했으나 실패했고, 그 과정에서 파산했다는 확신을 두루 공유하고 있다. 이런 확신은 전 세계의 이슬람 설교사들을 새롭게 고무했으며,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텔레비전 전도사, 유튜브 비디오, 웹사이트, 오디오 녹음 등을 통해 그들 고국의 인구만큼이나 많은 유럽의 무슬림 이민자들에게 전파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슬람의 천년왕국설은 서구에 거주하는 무슬림들 사이에서 특히 관심을 받고 있다. 서구 국가들이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실패했다고 확신하는 그들은, 오늘날 세속적인 환경에서 이슬람이 도덕적 종교적 권위의 새로운 원천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406-410
헌신적인 혁명가들로 이루어진 전위대라는 레닌의 생각은 천두슈나 마오쩌둥 같은 공산당원뿐 아니라 쑨원에게도 호소력을 발휘했다. 쑨원은 레닌주의 노선을 따라 국민당을 재조직했고, 소비에트의 원조를 받아 중국의 많은 지도자들을 길러낸 유명한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했다. (중략) 쑨원은 중국의 과제가 중국 대중을 혁명운동에 동원하는 것임을 인식했다. 그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하기까지 했다. 또한 1924년 경에는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중국의 경제적 곤경, 특히 농업의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쑨원은 너무 일찍 죽었고, 그의 후계자인 장제스는 군사 전술가임을 자처했찌만 토지개혁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지주층과 도시의 금융업자, 사업가들과 연합한 장제스는 쑨원의 급진적인 개혁을 이어나가는 데 실패했고, 마오쩌둥과 공산당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중략) 일본의 침공은 국민당의 부패와 잔혹성을 부추긴 것만큼이나 마오쩌둥의 대의에 도움이 되었다. 중국 대중의 반제국주의를 적극 활용한 공산당은 일본을 패퇴시키는 데에 실제로 기여한 바가 별로 없을 때조차도, 저항하는 중국의 지도 세력처럼 보였다. 공산당이 중국 사회를 재조직하기 위해 선호한 또 다른 촉매는 계급투쟁이었다. 1945년 이후 국민당과 내전을 치르면서도, 공산당은 대개 무자비하게 토지개혁을 비롯해 계급에 토대를 둔 사회화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중략) 중국이 서구를 가능한 한 빠르게 따라잡기를 바랐던 마오쩌둥은 터무니없는 목표를 정했다. 예를 들어 그는 1950년대 중반에 동포들에게 15년 내에 영국의 산업 생산량을 따라잡을 것을 요구했다. 이 실착은 중국을 마비시킨 일련의 대참사로 귀결되었다. 1959년에서 1961년 사이에 기근에 이은 식량 부족으로 중국인이 3000만명 넘게 죽었다.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은 적어도 초기에는 1960년대에 중국 혁명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나, 곧 내전으로 변질되었다. 1976년에 마오쩌둥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중국은 정통 공산주의보다 자유무역과 결합한 맹자의 공적 소유라는 경제적 이상에 더 기댄 듯한 원칙 -순전히 실용적인 원칙이라고 제시되긴 했으나- 에 입각해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되돌아보면, 공산주의는 중국에서 대중을 동원하고 통합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점점 더 효과를 발휘해온 듯하다. 20세기 초의 중국 활동가들은 근대 세계에서 부와 권력을 추구할 수 있는 통합된 국민국가를 만들어내려 했으나 실패했다. 도시의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농민들까지 두루 참여하는, 기반이 넓은 민족주의를 창출하는 데 성공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사기가 꺾인 농민들에게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고 기운을 불어넣음으로써 새로운 군대를 창설했고, 공산당과 행정관료층을 결합해 도시와 농촌 구석구석까지 손을 뻗는 강력한 국가관료제를 수립했다. (중략) 중국공산당은 더는 교조적 정통성을 고집하지 않음에도 중국의 안정과 안보, 번영을 보장하는 공산당의 독점적 지위는 도전받지 않고 있다.

433-434
에너지 자원이 한정된 세계에서 인도와 중국이 소비지상주의적인 중간계급과 더불어 부상하는 오늘날, 지난 세기를 격렬한 폭력으로 물들였던 경제적 경쟁과 무력 분쟁이 이번 세기마저 황폐화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중략) 경제 성장을 끝없이 추구하도록 부채질하는 희망 -인도와 중국의 소비자 수십억 명이 언젠가 유럽인과 미국인의 생활양식을 누릴 것이라는 희망- 은 알카에다가 꿈꾸는 공상 못지 않게 터무니없고 위험한 공상이다. 이 공상은 전 세계의 환경을 더 빨리 파괴하고 있고, 수억 명의 가진 것 없는 사람들 사이에 허탈한 분노와 절망의 저수지를 만들고 있다. 서구 근대성의 보편적인 승리라는 이런 씁쓸한 결과로 말미암아, 동양의 복수는 어딘지 음울하고 모호하게 변해가고 있으며, 서구가 거둔 모든 승리는 패배나 다름없는 승리로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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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8-11-22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어가는 동안, 내가 알고 있던 자잘한 지식들이 세계사의 큰 흐름 안에서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아가는 신기하고 기쁜 경험을 했다. 동시에 학교에서 배운 한국사가 쓰레기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국민국가의 편협한 눈으로 재단된 하찮은 세부들이나 외우게 하면서,아이들의 말랑말랑한 머리를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세뇌시키는 한국사 교육 극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