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보에 도달해 보니 모두 지붕을 이엉으로 엮은 초가집들이라 무척 초라한 느낌이 들었다. 묻지 않고도 이곳이 고려보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병자호란 발발 이듬해인 정축년(1637년)에 끌려 왔던 이들이 마을 하나를 이루었던 것이다. 중국 동쪽 편 천여 리에 논은 없는데, 이곳에서만은 논이 있다. 떡과 엿 등이 조선과 흡사했다. 이전에는 사신 일행이 당도해서 하인배들이 술이나 음식을 사 먹을 때 값을 받지 않는 일도 더러 있었다. 아낙네들도 내외를 하지 않고, 고국 이야기가 나오면 눈물짓는 이도 적지 않았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점차 잇속을 챙기려는 하인들이 생겨나 술과 음식을 먹고도 값을 치르지 않으며, 그릇이며 의복까지 토색(돈이나 물건 등을 억지로 달라고 하는 것)하기도 하였다. 주인이 고국의 옛정을 생각하여 까다롭게 굴지 않으면 틈을 노려 도둑질을 일삼곤 하였다. 이런 탓에 고려보 주민들은 차츰 고국 사람들에 대해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사신 일행을 만나면 술과 음식을 감추어 두고 잘 팔려고 하지 않았고, 사정사정해야만 겨우 팔되 바가지를 씌우거나 선불을 요구했다. (아래에 계속)-48-49쪽
(위에서 계속) 그럴수록 하인들은 온갖 속임수를 동원해 사기를 침으로써 분풀이를 하고, 그러다 마침내 서로 원수를 대하듯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을 지날 때면 일제히 소리 높여, "이놈들아, 네놈들 할애비가 오셨거든 어찌 나와서 절을 하지 않느냐"고 욕하면, 고려보 사람들 역시 우리들을 향해 맞받아친다. 이런 지경에 도리어 우리는 이곳 고려보 풍속이 틀려먹었다고 욕을 해대니, 이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48-49쪽
호질 후지
연암 박지원이 말한다. 이 글에는 비록 지은이의 성명은 없으나 아마 가까운 시기에 중국 사람이 비분강개를 이기지 못하여 지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운세가 긴밤의 어둠으로 접어들면서 오랑캐의 재앙이 맹수보다도 사납다. 선비들 가운데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는 글귀나 모아서 세상에 아첨을 해대는 형편이다. 이들이 하는 짓이란 무덤을 파헤치는 것과 비슷하여 시랑조차도 잡아먹기를 달게 여기지 않을 정도이다. 이제 이 글을 읽어 보면 말이 대부분 이치에 어긋나고 그 뜻은 거협, 도척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천하의 뜻있는 선비라면 어찌 한시라도 중국을 잊을 수 있겠는가. (아래에 계속)-63-65쪽
(위에서 계속) 지금 청나라가 세상을 다스린 지 겨우 4대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 통치자들은 모두 문무를 겸비하고 장수를 누렸다. 지난 백 년은 태평스런 시대로서 천하가 두루 편안하고 조용했다. 이런 상황은 한, 당 시절에도 없었던 일이다. 이렇듯 평화를 유지하면서 치적을 이루어가는 뜻을 살펴보니, 이 또한 하늘이 내린 제왕이 아닌가 싶다. 옛날 누군가가 일찍이 하늘이 순순히 명령한다는 말씀에 의문을 느껴 맹자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맹자께서는 분명히 하늘의 뜻을 체득하셔서 말씀하셨다. "하늘은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과 일로써 보여 주신다." 나는 언젠가 이 대목을 읽다가 강한 의혹이 들어, 감히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행동과 일로써 보여 주신다면, 오랑캐가 중화의 문물을 변개시키는 것은 엄청난 치욕이다. 그러니 저 백성들의 원통함이 어떠하겠는가. 또 향기로운 제물과 비린내 나는 제물은 각기 그 덕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니, 그렇다면 귀신들은 대체 어떤 냄새를 찾아오시겠는가." (아래에 계속)-63-65쪽
(위에서 계속) 그런 탓에 사람이 처한 입장에서 본다면, 은나라의 우관이든 주나라의 면류관이든 다 나름의 때를 따라 마련된 것일 뿐이다. 유독 청나라 사람의 홍포에 대해서만 꼭 의심을 던질 이유가 없다. 이에 그동안 하늘이 정한다는 입장(天定)과 사람들이 뜻이 우선이라는 견해(人衆)가 유행하였고, 하늘과 사람이 서로 관련이 있다는 원리(人天相與)는 도리어 후퇴해서 기수(氣數)의 형세에 따르게 되었다. 현실 세계를 옛 성현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부합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곧장 천지의 기수가 이렇구나 한다. 슬프다! 이것이 정말 기수의 문제란 말인가. 안타까운 일이다. 명마라의 왕택(王澤)은 이미 메말랐고, 중국의 뜻 있는 선비들도 변발로 머리를 바꾼 지 백 년에 세월이 흘렀다. 그럼에도 자나깨나 가슴을 치며 명나라 황실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인 연유인가. 차마 중국을 잊지 못해서일 것이다. (아래에 계속)-63-65쪽
(위에서 계속) 그런가 하면, 청나라가 스스로를 도모하는 방식도 어설프기 짝이 없다. 과거 오랑태 출신 왕조의 마지막 임금들이 늘 중화를 본뜨다가 쇠망하고 만 경험을 경계하여, 철비를 새겨서 전정에 묻었다. 그랬으면서도 스스로는 자신들의 의관을 부끄러워하면서 오히려 강약의 형세에 마음을 쏟으니 이 얼마나 어릿거은 일인가. 문왕의 지략과 무왕의 공렬로도 도리어 은나라 말기의 쇠망을 구제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사소한 의관제도를 굳이 고집할 필요가 있읋가. 만약 싸움에 편리한지 여부를 가지고 그 의관을 살핀다면, 북쪽과 서쪽 오랑캐의 복장인들 전투용 복장으로 선택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서북 오랑캐들로 하여금 중국 풍속을 따르게 할 수 있어야 진실로 강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온 천하의 인민들을 욕된 구렁에 몰아넣고 홀로 호령하기를, ‘너희들이 잠깐 수치를 참고 우리의 풍속을 따른다면 진정 강하게 될지니’라고 하지만 그렇게 해서 정말 강해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래에 계속)-63-65쪽
(위에서 계속) 설령 자기 복장을 강요한다고 해서 저 신시, 녹림의 사이에 눈썹을 붉게 물들이거나 머리에 노란 두건을 둘러서 스스로 다른 이들과 구별하고자 한 것처럼 되지는 못할 것이다. 가령 어리석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쓰고 있던 홍모를 벗어 땅에 내팽개친다면, 청나라 황제는 앉은 자리에서 천하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지난날 스스로 강하다고 자부하던 것이 도리어 쇠망의 실마리가 된다면, 철비를 세워 후세에 교훈으로 삼고자 한 일이 참으로 부질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이 글이 원래는 제목이 없었는데, 그 속에서 ‘호질’이란 두 글자를 뽑아 제목으로 삼아 중원의 어지러움이 맑아지는 날을 기다리고자 한다. -63-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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