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김명남 엮고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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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번역자 김명남은 199@년 KAIST 학부 입학시험의 여학생 수석 합격자였다. 내가 이 사실을 아는 이유는 그 해 봄에 김명남이 대학 입학을 위해 2년 만에 ‘수료’ 하고 떠난 과학고등학교에 내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 학교에는 ‘김명남 전설’이라고 부를 만한 일화들이 여럿 돌아다니고 있었다. 입학 두 달 후, 스승의 날을 맞아 모교를 찾아온 ‘1기 선배님들’ 중에서, 친구들 틈에 작은 몸을 숨기듯이 하고 생글생글 웃고 있는 커트 머리 여자애를 ‘저 사람이 김명남이구나.’하고 눈여겨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14년 후, 도서관에서 우연히 빌린 “시크릿 하우스”라는 책을 통해 그 대단했던 선배가 과학자가 아닌 번역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놀라움과 반가움에 이어 ‘역시나’ 하는 납득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시절 ‘김명남 전설’을 말씀하시던 여러 선생님 중에서도 가장 열렬한 찬미자는 영어를 가르치신 김정희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우리 꼬마 명남이”를 무척 자랑스러워하셨던 김정희 선생님의 구호는 “grammar보다 usage!!"였다.. 선생님은 주교재였던 성문종합영어 외에도 영어의 usage를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교재들을 어리버리한 고1 아이들 위에 폭격처럼 쏟아부으셨다. 여러 가지 주제의 잡지 기사들, 휘트먼과 프로스트의 시들, 영한대역의 ”이솝 이야기“, ”아이아코카 자서전“, ”역사란 무엇인가“ 등에 나는 일찌감치 두 손 들고 항복해 버렸고, 수업 시간마다 나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는 단어들에 대한 쪽지시험을 거의 백지로 내면서, 열등생의 암울함을 곱씹어야 했다. 이 책에 실린 아홉 편의 글 중 가장 큰 존재감을 가진 글이 ”권위와 미국 영어 어법 Authority and American Usage"이었던 덕분에, 좀 이상했지만 미워할 수 없었던 옛 선생님에 대한 그리운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선생님의 애제자였던 김명남은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인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에 대한 열렬한 애호를 마음껏 드러내고 있다. “나는 이 책의 표제작인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만큼 짜릿한 글을 어디에서도 읽어본 적이 없다.”라는 그의 말은 책날개와 광고 문구에도 인용되었다. “번역가 김명남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글이라니 어디 한번 읽어 보자.”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집어든 독자는 아마 나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많은 독자들이 “역시나 좋은 글이군.”이라는 감상을 가지고 책을 덮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글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 외에 마음속에 남는 것은 이번에도 납득이다. “이러니까 김명남이 좋아하겠구나.”라는 납득. 그 납득의 이유는 저자와 번역자가 공유하고 있는 재능과 성실함이다. 첫 번째 글을 읽을 때부터, 월리스라는 사람은 표지 그림의 머릿수건과 장발과 수염이 만들어내는 인상과 달리 ‘자유로운 영혼’은 아니라는 느낌이 왔다. 에세이를 가장한 광고에 분노하고, 학생들이 써낸 작문의 틀린 영어 어법에 좌절하고, 9.11 테러 이후의 애국적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패닉에 빠지는, WASP 남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고민하고 미국에 대한 애증에 시달리다 결국 자신이 자신이라는 것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는 이 남자는, 사실은 무섭게 성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의 글들이 소리 높여 주장하고 있었다.

 

  타고난 기질, 부모의 가치관, 그리고 정성스러운 교육에 의해 어린 시절부터 확실하게 몸에 붙은 그런 성실성이 비범한 재능과 만나서 만들어내는 결과들은 보는 이를 흐뭇하게 한다. 김명남의 번역이 그렇고, 월리스의 에세이가 그렇고, 그 둘이 만나서 이루어낸 이 보물 같은 작은 책이 그렇다. 

미국인들이 꿈꾸는 궁극의 휴가가 죽음과 부패의 거대한 원시 엔진 속에 들어앉는 일이라는 사실은 언뜻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7NC 호화 크루즈에서, 우리는 죽음과 부패를 넘어서는 승리의 환상을 다양하고 교묘하게 구축할 수 있다. 한 가지 방법은 엄격한 자기 개선을 통해서 ‘승리’하는 것이다. 각성제를 맞은 듯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선원들의 선박 유지 보수 활동은 다이어트, 운동, 비타민 보조제, 성형수술, 프랭클린 다이어리 시간 관리 세미나 등등 개인적인 자기 관리에 대한 노골적인 비유나 마찬가지다. 죽음을 외면하는 방법은 또 있다. 관리가 아니라 자극이다. 열심히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노는 것이다. 7NC의 쉼 없는 활동, 파티, 축제, 명랑함과 노래는 아드레날린, 흥분, 자극이다. 그것은 당신에게 활기와 생기를 안긴다. 당신의 존재를 불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
- P31

호화 크루즈 여행에서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절망은,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나의 본질적이고 새삼 불쾌한 미국인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일부 비롯한다. 그리고 이 절망은 항구에서 절정에 달한다. 난간에 서서 어쩔 수 없이 그 안에 속하는 사람들 무리를 내려다볼 때, 이 위에 있든 저 밑에 있든 나는 미국인 관광객이고, 따라서 그 정체성상 크고, 살찌고, 벌허고, 시끄럽고, 거칠고, 오만하고, 자기 생각뿐이고, 응석꾸러기이고, 외모에 신경 쓰고, 창피해하고, 절망하고, 탐욕스럽다. 우리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알려진 솟과 육식동물이다.
- P106

가족 내 오래된 농담에 따르면 SNOOT가 "언어 감각은 지속적으로 갈고 닦아야 한다 Sprachgefuhl Necessitates Our Ongoing Tendance"의 약자인지 "우리 시대의 문법 바보 Syntax Nudniks Of Our Time"의 약자인지는 당신이 둘 중 어느 쪽에 속하느냐에 달려 있다.
- P189

나는 대학에서 강사로 영어를 가르친다. 주로 작문이 아니라 문학이다. 하지만 나는 어법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나머지, 매 학기 똑같은 일을 벌인다. 학생들이 제출한 첫 페이퍼를 읽으면, 정규 강의 계획서를 당장 내버리고 3주에 걸친 ‘응급 어법 및 문법 교정 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내 태도는 정맥주사를 쓰는 약물 사용자들에게 HIV 예방법을 가르치는 사람의 태도와 같다. (중략) 나는 화가 나고, 그런 내가 옳다고 확신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각자 고향의 고등학교 위원회를 고소해야 한다고 말하고, 이 말은 진심이다. 아이들은 겁에 질린다. 나한테, 그리고 나를 위해서.
- P190

솔직히 민주적 정신의 조건인 엄정함, 겸손함, 스스로에 대한 솔직함은 어떤 문제들에 관해서는 유지하기가 워낙 어려워서, 우리는 그냥 기성의 여러 교조적 진영들 중 하나를 받아들이고 싶은 욕망에 저항하기가 어려운 지경이다. 그냥 그 문제에 관해서 그 진영의 노선을 추종하고, 그 진영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힘으로써 유연성을 잃고 다른 진영들은 모두 사악하거나 정신이 나갔거나 둘 중 하나라고 믿고, 나아가 그 다른 진영들에게 소리치는 데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것이다. 내가 볼 때, 복잡한 동시에 감정까지 격한 문제에서는 민주적 정신보다 교조적 정신을 품는 편이 단연코 더 쉽다. 그리고 현대 미국 영어 어법에서 ‘정확성’을 둘러싼 문제는 바로 그 복잡한 동시에 감정까지 격한 문제에 해당한다.
- P193

기술주의는 미국 영어 교육을 아주 신속하고 철저하게 장악했기 때문에 1970년경 이후 중학교에 들어간 사람이라면 누구나 글쓰기를 기술주의적 방식으로 배웠다. ‘자유롭게 쓰기’, ‘브레인스토밍 하기’, ‘일기 쓰듯 쓰기’ 등의 기법을 통해서. 이것은 글쓰기를 소통 수단이라기보다는 자기탐구와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보는 시각이고, 체계적 문법, 어법, 의미론, 수사법, 어원은 내다버리는 시각이다.
- P208

모든 사전 편찬자에게는 이데올로기가 있다. 사전 제작이 이데올로기를 회피하거나 초월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 자체가 특정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생각이다.
- P216

아이들은 학교에서 집단-포함과 집단-배제를 배운다. 전자에는 보상이 주어지고 후자에는 벌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배우고, 친밀함과 포함의 신호로서 방언이나 구문이나 속어를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 아이들은 곧 담론 공동체를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영어나 사회 수업에서 배우는 것이다. 놀이터, 버스, 점심시간에 배운다. 또래들이 스누틀릿을 배척하거나, 그에게 끔찍한 사중 웨지를 가하거나(wedgie는 남의 팬티를 바지 엉덩이 위로 끌어당겨 드러내는 장난이다 - 옮긴이), 그를 붙들고 돌아가며 침을 뱉을 때, 그 현장에서는 진지한 배움이 이뤄지고 있다. 스누틀릿을 제외한 모두가 배운다. 사실 스누틀릿이 배우지 못한다는 점이야말로 그가 애초에 핍박받는 이유다.
- P243

스누틀릿이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또래 집단은 가족을 제치고 제일 중요한 집단으로 올라선다. 이 집단은 정의상 전통적 권위를 거부하는 집단이다. 그런데 이들이 인식하는 주류 성인 사회의 방언이 표준 문어체 영어이기 때문에, 표준 문어체 영어만큼 전통적 권위를 잘 상징하는 것은 또 없다. 사춘기가 속어와 암호와 하위 방언의 하위 방언이 사방에서 폭발하는 시기인 것, 부모들이 갑자기 자식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하소연하는 시기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 P245

유행어의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모든 문장은 최소한 두 가지 소통 기능을 수행하고 -하나는 명식적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 다른 하나는 화자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 두 기능 사이에 균형을 잡기 마련인데, 유행어는 그 균형을 깨뜨린다는 것이다. 유행어가 "별 목적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가너의 말은 틀렸다. 유행어는 오히려 화자를 특정 모습으로 내세우려는 목적을 너무 많이 수행한다. (설령 그 목적이 유행을 잘 아는 사람인 척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는 일종의 헛소리 감지 안테나가 있어서, 그 불균형을 무의식적으로 포착해낸다. 스누트가 아닌 사람들조차 유행어를 짜증스럽고 진저리나게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 P259

어쩌면 내가 직업상 이런 글을 너무 많이 읽는다는 점과 내 타고난 스누트성이 결합된 탓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나는 학술 영어가 그저 하나의 방언이 아니라 표준 문어체 영어가 그로테스크하게 타락한 형태가 아닐까 싶어 걱정스럽다. 나는 이 언어를 과장되고 부조리한 대통령 영어나 우스꽝스러운 경건함을 띤 비즈니스 언어보다 더 혐오한다. 그리고 내 철저한 경멸과 불관용을 지지해줄 사람으로 권위자 중의 권위자를 댈 수 있으니, 그는 바로 조지 오웰이다. 오웰은 이미 50년 전에 학술 영어를 "모호함과 순수한 무능의 혼합"으로 규정하고 "거의 아무 의미 없이 길기만 한 문장이 수시로 나온다"라고 지적했다.
- P263

대학 신입생 작문 수업에서도 학생들의 나쁜 글은 게으름이나 무능의 결과가 아니라 두려움의 결과인 경우가 훨씬, 훨씬 더 많다. 선생이 학생들의 두려움을 파악하고 돕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그들에게 또 다른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는 데까지는 채 이르지도 못할 때가 많다.
- P265

수사적 용어로 말하자면,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윤리적 호소, 논리적 호소(=논증의 타당성 혹은 건전성), 감정적 호소(=논증의 감정적 영향) 사이의 구분이 거의 무너졌다. 혹은 세 종류의 호소가 서로 영향을 너무 많이 주고받기 때문에 이제 오직 ‘이성’에만 근거해서 논증을 전개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 P266

철두철미한 규범주의자들이 오늘날 미국 문화에서 아주 미미한 주벼부 집단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미국인의 대화란 기본적으로 논쟁이기 때문이다. 미국인은 실수, 무정부 상태, 고모라풍 퇴폐보다는 신권정치, 독재정치, 그 밖에도 그 목적이 논쟁이나 설득이 아니라 토론 자체를 무기한 중단시키는 것인 이데올로기를 훨씬 더 두려워한다.
- P273

한편 강경한 기술주의자들은, 스스로 냉철한 과학주의를 따르며 가치보다 사실을 선호한다고 공언함에도 불구하고, 수사적으로는 주로 파토스에, 즉 본능적으로 와 닿는 감정적 호소에 의존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때 관여하는 감정은 1960년대에서 비롯한 좌파적 감정이다. 권위적 관습, 엘리트주의적인 거만함, 고지식한 제약, 궤변, 백인 남성 위주의 편견, 속물성, 모든 형태의 뚜렷한 자부심 등등에 대한 반감이다. 요컨대 문법학자들의 깐깐한 감시와 버클리풍 엘리트들의 나른한 지적에 드러나는 태도에 대한 반감인데, 공교롭게도 바로 이 두 집단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아서 가장 자주 눈에 띄는 스누트들이다. - P273

방법론적 진영이든 철학적 진영이든 유사 진보적 진영이든, 모든 기술주의자는 본질적으로 선동가다. 그리고 사실 기술주의자들에게는 교조적 규범주의자야말로 가장 귀중한 자산이다. 미국인은 교조주의와 엘리트주의적 둔감함에 본능적으로 반감을 품으니, 교조적 규범주의의 존재는 기술주의의 감정적 호소에 기꺼이 귀 기울일 청중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 P273

관광객으로서의 나는 경제적으로는 유의미하지만 실존적으로는 혐오스러운 존재가 된다. 시체에 들러붙은 벌레 같은 존재가 된다.
- P313

이 밖에도 도스토옙스키의 많은 인물들은 -프랭크가 "엄청난 생명력"이라고 불렀던 것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살아 있다. 그저 그들이 인간의 여러 유형이나 여러 측면을 능숙하게 그려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그럴싸하고 도덕적이고 설득력 있는 플롯 속에서 행동하면서 모든 인간의 가장 심오한 부분, 가장 갈등이 많은 부분, 가장 진지한 부분, 즉 가장 많은 문제가 걸려 있는 부분을 드라마화하기 때문이다.
- P354

요컨대, 도스토옙스키는 정말로 중요한 것들에 관해서 소설을 썼다. 그는 정체성, 도덕적 가치, 죽음, 의지, 성적인 사랑 대 영적인 사랑, 탐욕, 자유, 집착, 이성, 믿음, 자살에 관해서 소설을 썼다. 게다가 자신의 인물들을 대변인으로 격하시키거나 자신의 책들을 팸플릿으로 격하시키지 않고서도 그 일을 해냈다. 도스토옙스키의 관심은 늘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즉, 어떻게 진짜 인간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 P355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프랭크의 전기를 다 읽은 미국의 진지한 독자/작가는, 왜 현재 우리의 소설가들이 고골이나 도스토옙스키에 비해 (심지어 레트몬토프나 투르게네프처럼 좀 더 경량급 작가들에 비해서도) 주제 면에서 얕고 가벼우며 도덕적으로 빈곤한지를 골똘히 생각해보게 될 것이라고. 프랭크의 전기를 읽은 우리는 절로 이렇게 자문하게 된다. 왜 우리는 우리의 예술이 심오한 신념이나 절실한 질문으로부터 늘 어느 정도 아이러니한 거리를 두도록 만들까? 그래서 오늘날의 작가들은 그런 신념이나 질문을 우스개 취급한다. 설령 다루더라도 텍스트간 인용이나 부조화스러운 병치 따위의 형식적 장난으로 위장하여, 진짜 절박한 내용은 무슨 다면적 낯설게 하기 전략 따위의 쓸데없는 짓으로 별표 사이에 가둬두곤 한다.
- P364

그러니 그는 -우리는, 우리의 소설가는- 진지한 예술을 통해서 어떤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일은 감히 시도하지 않을 (못할) 것이다. 그런 작업은 메나르의 "돈키호테" 같아 보일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비웃거나 우리 때문에 당황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고 이 상황은 기정사실이다), 우리의 진지한 소설들의 진지하지 못함을 누구 탓으로 돌려야 할까? 문화? 비웃는 사람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만약 도덕적으로 열정적이고 열정적으로 도덕적인 소설이 그와 동시에 독창적이면서도 아름답도록 인간적이기까지 하다면, 감히 비웃지 않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작품을 어떻게 만들까? 어떻게 -오늘날의 작가가, 제아무리 재능이 있는 작가라도- 그것을 시도할 배짱이라도 부릴 수 있을까? 확실한 공식이나 약속은 없다. 하지만 본보기는 있다. 프랭크의 전기는 바로 그런 본보기 하나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정말로 교훈적으로 보여준다.
- P368

모든 인간 문화는 가짜 신화이든 정치경제적 서사이든 이야기를 통해서 스스로를 독립된 문화로 규정한다. 모든 사람은 여러 사건과 변화로 구성되고 최소한 시작과 중간이 있어서 남에게 들려줄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로 자기 인생을 이해한다. 우리는 시공간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이야기는 인간에게 내재된 속성이다.
- P429

그런데 오늘날 CY작가들의 입장에서, 미국 독자들이 가장 많이 노출되는 이야기 패턴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아무리 너그러운 기준으로 봐줘도, 이야기 예술로서 텔레비전은 몹시 저급한 형태다. 텔레비전은 변화시키거나, 계몽시키거나, 확장시키거나, 새로운 방향을 알려주려고 애쓰는 이야기 예술이 아니라 -심지어 꼭 ‘즐겁게 해주려고’ 애쓴다고도 할 수 없다- 그저 관심을 끌고자 하는 이야기 예술이다. 텔레비전의 유일한 목적은 -공공연히 인정되는 목적은- 지속적 시청을 확보하는 것이다.
- P429

텔레비전의 최대 매력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관심을 잡아둔다는 점이다. 시청자는 자극을 계속 겪으면서도 쉴 수 있다. 아무것도 주지 않고 받기만 한다. 이 점은 오로지 지속적 관심과 후원만을 목표로 삼는 모든 저급 예술이 다 마찬가지다. 재미와 편안함을 동시에 제공한다는 바로 이 특징이 그런 예술의 호소력이다.
- P429

쓰레기 소설은 구조와 호소력 면에서 대체로 텔레비전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독자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관심을 붙잡아 두기만 하기 때문이다.
- P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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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조커 3 - 완결 블랙펜 클럽 45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이규원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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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반 전에 처음 읽고, 이번에 다시 읽었는데, 이게 이렇게 재미있었나 싶어서 깜짝 놀랐다.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글을 잘 쓸 수가 있나, 라고 생각했는데, 알라딘 들어와서 별점 보고 또 놀람. 한국의 미스테리 독자층의 취향이랑은 잘 안 맞나?;; 정식으로 리뷰 쓸까 귀찮은데 그만둘까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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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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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에 한국에 번역된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을 전부 다 읽었다.

아주 즐겁게 읽은 것도 있고 (<밤의 나라 쿠파>!!!)

지루한 것도 있지만, (<사막>이랑 <골든 슬럼버>)

대체로 다 편안하게 술술 읽혔고 그런 대로 재미있었다.

오웰의 <1984>를 읽는 도중에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가 생각나서 빌려다가 다시 읽었는데,

평화로운 시대에 평화로운 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작가라서

전쟁을 경험한 오웰과는 위기감의 수준이 비교가 되지 않지만,

(<마왕>과 <모던 타임즈>에 나오는디스토피아란 게 남자가 군대에 가는 나라이다ㅋ.)

역시 술술 읽혔고 그런 대로 재미있었다. ^^

인간이 인간답게 활동하는 것은 무리를 짓지 않을 때뿐이다.- P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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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사키 류조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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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에노키즈 이와오의 젊은 시절 별명은 센이치(千一)였다.

천 마디 말을 하면 그 중에 하나만 사실이고 나머지는 다 거짓말이라는 의미.

사람을 죽이고 도피하면서도 그는 숨을 쉬듯이 거짓말을 계속하며 사기로 도피 자금을 마련해 간다. 

체포된 후 취조 과정에서 그는 도피 중에도 여자는 계속 있었다는 것을 자랑하는데, 

여자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잘난 척하는 것이 이 사람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라는 느낌이다.

그 감각으로는 중학교 중퇴에 전과가 있는 가난뱅이라는 자신의 본모습에 만족할 수 없으니까,

부잣집 아들이라느니, 교수라느니, 변호사라느니 하는 거짓말을 계속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겠지.



이렇게까지 극단으로 나가는 사람은 잘 없지만, 

비슷하게 자신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사실 적지 않다.

이번 생은 망했지만, 나는 사실은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야.... 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

주인공이 대대로 내려온 가톨릭 집안의 자식이고, 어렸을 때 신부가 될 생각을 했다는 것도 씁쓸한데,

종교라는 것의 본질도 결국은 허세와 거짓말이 아닌가 해서이다.

사형을 앞둔 주인공을 찾아가는 신부가 시신을 인수하러 온 친척에게

사실은 자기가 주인공의 중학교 1년 후배라고 말하는 대목은 그래서 좀 소름이 돋았다.

종교도 국가도 본질은 거짓말이라면,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나왔듯이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이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라면)

그런 점에서 이 글은 인간의 가장 깊숙한 부분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제목에 대해서는 

작가가 주인공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설명했으니, 그대로 받아들여주면 된다.

주인공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작가의 역할, 

거기에 대해 판단하고 갚아주는 것은 신의 역할.

그러니까 '나'는 신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이 범죄가 세상에 대한 주인공의 복수라고 보는 것은 재미는 있지만 너무 나간 해석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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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케 이야기 2 대산세계문학총서 55
오찬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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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권위를 빌려 권력을 잡은 무인들의 혈투가 주된 내용이니 황실 사람들이 계속 등장하는데,

'천황', '상황', '황후', '태후', '태자'. '친왕'을 '임금', '상왕', '왕비', '대비', '세자',  '대군'으로 

일일이 격하시킨 번역이 너무나 거북했다. 

남의 나라 문학 작품에 그런 짓을 하면 번역자의 민족적 자존심이 높아지나.

중국 황제만이 황제이니 다른 나라는 황제의 칭호를 써서는 안 된다는 속국적 발상이 우스꽝스럽고,

한국이 못 썼던 황제의 칭호를 일본이 썼던 게 배가 아파 그랬다면 그 옹졸함이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이런 사람을 교수님으로 부르며 그 밑에서 일본 문학을 배우는 학생들이 걱정될 정도로.

역자는 일본인 은사들 앞에서 자신이 헤이케 모노가타리에 무슨 짓을 했는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을 읽고 싶어 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 같지도 않으니, 

앞으로도 제대로 된 한국어 번역판이 나올 가능성이 낮을 것 같아 안타깝다.

내용이 재미있어서 더 안타깝다.

1권 349-350
대장군 코레모리(平維盛)는 관동의 물정에 밝은 나가이 출신의 사이토 사네모리(齊藤實盛)를 불러 "사네모리, 관동팔주에는 그대만 한 강궁이 얼마나 있나?" 하고 물었다. 그러자 사이토는 껄껄 웃더니 "대장군께서는 그럼 소인을 강궁을 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계셨단 말입니까. 소인은 고작 주먹 길이 열셋 되는 화살을 쏠 뿐입니다. 소인만큼 쏠 수 있는 사람은 팔주 안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강궁 소리 듣는 사람 치고 주먹 길이 열다섯이 안 되는 화살을 쏘는 사람은 없습니다. 활도 힘센 장사 대여섯이 겨우 부리는 강력한 활을 사용합니다. 이런 강궁들이 쏘면 두세 벌 포개놓은 갑옷도 그냥 꿰뚫습니다. 호족 한 사람의 병력이 적어도 오백 기를 밑도는 일이 없는데, 말을 타면 떨어질 줄 모르고 험한 산길을 달려도 말이 넘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전투 시에는 아비가 죽건 아들이 죽건 개의치 않고 죽으면 그 주검을 넘고 넘어 싸웁니다. 관서 무사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아비가 죽으면 공양을 한 후 상이 끝나야 다시 싸우고 아들이 죽으면 슬퍼하느라 싸울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군량미가 떨어지면 봄엔 논을 갈고 가을엔 추수한 후 싸움을 시작하고 여름은 덥다 싫어하고 겨울은 춥다고 마다하지만 관동에서는 일체 이러한 일이 없습니다. 카이와 시나노의 미나모토 군은 지리에 밝아 후지산 기슭에서 배후로 돌아올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장군을 겁주려고 그런다고 생각하실지 모르나 그렇지 않습니다. 전투란 사람 수가 아니라 계략 쓰기에 달려 잇다고 합니다. 소인은 이번 싸움에서 사아 다시 서울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보지 않습니다." 하고 답하니 이 말을 들은 타이라 군의 병사들은 모두 벌벌 떨었다.

67-69
사츠마 태수(薩摩国司) 타다노리(平忠度)는 어디쯤에서 말머리를 돌렸는지는 모르나 호위 무사 다섯에 시동 하나뿐인 단 7기만으로 다시 도성으로 돌아가 고조에 있는 휴지와라 슌제이(藤原俊成) 대감 집을 찾았으니 집 앞에 당도해 보니 문이 굳게 잠겨 밀어도 열리지 않았다. (중략) "주상께서 이미 도성을 뜨셨고 저희 집안도 이제 운이 다한 모양입니다. 이렇게 찾아뵌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얼마 전 대감에게 당대의 뛰어난 노래를 모아 편찬하라는 어명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 제 작품을 단 한 수만이라도 체택해 주시는 은혜를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면 일생의 영예가 될 것이라 기대했었는데 곧바로 난리가 일어나는 바람에 그 어명이 취소되고 말아 소장도 참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조용해지면 다시 어명이 내릴 터인데 이 두루마리 속에 쓸 만한 것이 있거든 한 수만이라도 넣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한 은혜를 입게 된다면 풀숲 그늘에 묻혀서도 기뻐할 것이고 저 멀리 저승에서나마 대감을 오래오래 지켜드릴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읊어온 수많은 노래 가운데 가작으로 생각되는 100여수를 모아 적은 두루마리를 갑옷 이음새 틈에서 꺼내 슌제이 대감에게 건넸다. (중략) 난리가 가라앉은 후 슌제이는 "천재집(千載集)"이라는 노래집의 편찬을 맡게 되었는데, 타다노리의 얼굴하며 남긴 말들이 새삼스레 생각나 감회를 억누를 수 없었다. 맡기고 간 두루마리 안에는 실을 만한 노래가 얼마든지 있었으나 이미 역적의 몸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밝힐 수 없어, ‘고도(古都)의 꽃’이라는 제목으로 읊은 노래 한 수를 ‘무명씨’의 작품으로 하여 채택하였다.
さざなみや 志賀の都は 荒れにしを 昔ながらの 山桜かな

151-153
요시나카(源義仲)는 시나노를 떠나올 때, 토모에(巴 御前)와 야마부키(山吹)라는 시녀 둘을 데리고 상경했다. 야마부키는 몸이 아파 서울에 남았으나 토모에는 내내 행동을 함께 했는데, 특히 이 토모에는 긴 머리에 얼굴이 백옥 같아 요ㅇ모가 빼어났을 뿐만 아니라 보기 드문 강궁에 마상이건 도보건 간에 한 번 칼을 뽑았다 하면 그 어느 누구와 대적해도 지지 않는 일기당천의 무예를 지니고 있었다. 사나운 말을 잘 다룰 뿐 아니라 아무리 험난한 길이라도 잘 다녀서 요시나카는 전투가 벌어지면 토모에에게 견고한 갑옷을 입히고 대도와 강궁을 들려 일군의 지휘관으로 명해 내보냈다. 수차례에 걸쳐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 이번에도 수많은 병사들이 낙오하고 전사했으나 마지막 일곱 기가 남을 때까지 토모에는 전사하지 않고 살아 남아 있었다. (중략) 요시나카는 토모에를 향해 "너는 여자이니 어서 어디로건 떠나거라. 나는 싸우다 죽겠다. 누군가에게 붙잡히게 될 것 같으면 자결할 생각인데 내가 마지막 전투에 여자를 대동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그렇구나." 하고 타일렀다. 그래도 떠나지 않아 몇 번이나 설득했더니 토모에는 "어디 쓸 만한 적이 없나. 마지막으로 싸우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하고 기다리는데 무사시 지방의 이름난 장사 온다노 모로시게(恩田師重)가 20여 기를 이끌고 나타났다. 토모에는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 온다 옆에 말을 대고 힘껏 잡아채더니 자기가 타고 있던 안장 앞가리개에 밀어붙여 옴짝달싹 못하게 한 후 목을 비틀어 벤 다음 집어던졌다. 그런 다음 갑옷을 벗어던지고 관동 방면을 향해 떠나갔다.

154-155
"소인 한 사람을 천 기쯤으로 여기십시오. 화살이 일고여덟 대 남아 있으니 잠시 활로 적을 막고 있겠습니다. 저기 보이는 숲은 아와즈 송림이라 하는데 저 송림에서 자결하십시오"라고 하고는 말을 채찍질하여 가는데 또 새로운 군사 50여 기가 나타났다. 이마이(今井兼平)가 "주군께서는 저 송림으로 가십시오. 저는 이 적병들을 막고 있겠습니다"라고 하니 요시나카(源義仲)는 "서울에서 죽었어야 하는 내가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은 너와 한 데서 죽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로따로 죽기보다는 한곳에서 싸우다 죽기로 하자"며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내달리려 하개에 이마이는 말에서 뛰어내려 말머리를 붙잡고 "무인이란 평소 아무리 군공을 세우더라도 죽을 때 자칫 잘못하면 두고두고 불명예가 되는 법입니다. 주군께서는 지금 지치셨고 후속의 아군도 없습니다. 적군에게 에워싸여 이름도 없는 잡병에게 밀려 말에서 떨어져 전사라도 하게 되시면 그렇게도 일본국에 이름을 떨친 요시나카 장군을 내 부하가 해치웠다고 떠들어댈 테니 이야말로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무 말 마시고 어서 저 송림으로 가십시오" 하고 설득하자 요시나카는 알았다며 아와즈 송림으로 향했다.
이마이는 혼자서 50기 속으로 뛰어 들어가 등자를 밟고 일어서서 "평소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겠지만 이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도록 하여라. 나는 요시나카 장군의 유모 아들 이마이노 카네히라로 금년에 서른셋이다.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은 요리토모 어른께서도 알고 계실 테니 내 목을 가지고 가서 보여드리도록 하여라" 하며 쏘고 남은 화살 여덟 대를 시위에 얹어 연거푸 쏘니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자리에서 적군 여덟 명이 말에서 고꾸라졌다. 다음에는 칼을 뽑아 들고 이리 치고 저리 베며 휘두르고 다니니 정면으로 맞서는 자가 없어 적을 수도 없이 베어 쓰러뜨렸다. (중략) 이시다가 칼 끝에 목을 꽂아 높이 쳐들고 "근래 일본 땅에 명성이 자자한 요시나카 장군을 이시다가 죽였노라"하고 큰소리로 외치자 싸우고 있던 이마이가 듣고서 "이제 누구를 막기 위해 싸울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여길 보아라, 관동 사람들아. 일본 제일의 용사가 자결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마" 하며 칼끝을 입에 물고 말에서 거꾸로 뛰어내리니 칼이 전신을 관통해 죽고 말았다. 이리하여 이와즈 전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7-199
뭍에 막 오르려 하는 것을 쿠마가이(熊谷直実)는 말을 옆에 갖다 대고 붙잡고 땅으로 굴렸다. 내리누른 채 목을 베려고 투구를 들추어 보니 겨우 16-7세의 소년이었는데 엷게 화장을 하고 이를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들 나이 또래에다 더할 나위 없이 고운 용모를 하고 잇어 어디에다 칼을 들이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뉘시오? 이름을 알려 주시오. 내 살려드리리다" 하자 소년은 "너는 누구냐?" 하고 물었다. "내놓을 사람은 못 되오만은 무사시 사람 쿠마가이노 나오자네라 하오."하고 이름을 밝혔다. 그러자 소년은 "그렇다면 너에게 내 이름을 밝힐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너에게는 좋은 상대일 테니 내가 이름을 밝히지 않더라도 목을 가지고 가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아라.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중략) 쿠마가이는 너무도 안쓰러워 어디다 칼을 대야 할지 몰라 눈앞이 캄캄해지고 제정신이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어 울면서 목을 벴다. "아, 무인만큼 죄 많은 직업이 또 있을까. 무사 집안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기막힌 일을 겪지 않아도 됏을 것을. 너무도 끔찍한 짓을 하고 말았구나"하고 한탄하며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었다. 한참 있다가 그러고만 있을 수도 없어 내갑의를 벗겨 목을 싸려 했더니 허리에 비단 주머니에 넣은 피리를 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무참한 일이 있나. 오늘 새벽 성안에서 피리를 분 게 바로 이 소년이었구나. 지금 아군에게는 수만 기가 있으나 싸움터에서 피리를 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역시 고귀한 사람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구나"하며 요시츠네에게 보였더니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후에 알아보니 그 소년은 수리대부 타이라노 츠네모리(平經盛)의 아들로서 대부 아츠모리(敦盛)라 했고 나이는 열일곱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부터 쿠마가이는 출가하여 구도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이 깊어졌다. 비단 주머니에 들어 있던 피리는 피리의 명수였던 조부 타다모리(忠盛)가 토바 천황에게 하사받은 것이라 했다. 여러 아들 중에 츠네모리가 물려받아 가리고 있던 것을 아츠모리가 재능이 뛰어나 가지고 있게 된 것이라 했는데 이름을 코에다(小枝)라 했다. 음악이란 불도에서 보자면 광언기어인 셈이어서 미망에서 오는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로 인해 한 무인을 불도의 세계로 이끌었으니 대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62-263
나치에서 수도하고 있던 승려 중에 코레모리(維盛)를 잘 알고 잇던 이가 있었는데 동료에게 말하기를,
"저기 저분이 누군가 했더니 시게모리(重盛) 대감의 장남인 삼위중장이시네 그려. 저 어른이 아직 사위소장으로 았던 안겐 원년(1178) 봄에 법황의 오십 세 수연이 있었지. 당시 시게모리 대감께선 좌대장이셨고 숙부 무네모리(宗盛) 경은 우대장이었는데 두 분은 어전 계단 아래 앉아 계셨고 그 밖에 토모모리(知盛) 중장과 시게히라(重衡) 경을 비롯한 일문들이 대례날처럼 차려 입고 원을 그려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저 어른이 머리에 벚꽃 가지를 꽂고서 청해파(靑海波)를 추셨는데 마치 이슬에 젖어 함초롬해진 꽃과 같은 자태로 소매를 바람에 펄럭이며 춤을 추시니 일대가 환히 빛나 보였다네. 황후께서 관백 대감을 통해 옷 한 벌을 상으로 내리셨는데 시게모리 대감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에 걸치고서 법황께 절을 올리셨어. 그러니 이보다 영예로운 일이 어디 있겠나. 그 옆에 있던 정신들이 얼마나 부러워했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을 일이지. 한때 대궐 궁녀들 사이에서 소설의 옛 주인공을 방불케 한다는 말을 들었고 이내 대신 자리에 오를 줄 알았는데 저리 초췌한 모습으로 변하시다니 예전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네그려. 변화무쌍한 게 세상일이라지만 참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군."
그러더니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우니 옆에 있던 수도승들도 따라 울어 소매가 흠뻑 젖고 말았다.

280
서울에서는 새 천황(後鳥羽天皇)이 첫 제사를 올리기 위해 목욕재계하는 행차가 있었는데 좌대신 사네사다(實定) 공이 행사를 주관하였다. 재작년 안토쿠 천황(安徳天皇)의 목욕 행차 때는 무네모리 내대신이 행사를 주관했었는데 용대기(龍大旗)를 앞에 세우고 장막 안에 정좌한 모습은 머리부터 발끝가지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고 보련을 호종한 삼위중장 토모모리, 도승지 시게히라 경을 비롯한 타이라 일문 및 근위부 무사들의 차림은 비할 바 없이 완벽했다. 그러나 이날은 판관대부 요시츠네가 행차의 선두에 섰는데, 시골 출신인 기소노 요시나카와는 달리 촌스러운 구석은 없었으나 그래도 타이라 사람들 중에서 제일 빠지는 사람을 골라 세운 것보다도 못해 보였다.

305
요시츠네(源義経) 역시 적진 깊숙이 들어가 싸우고 있었는데 타이라 군 병사들이 배 안에서 쇠갈퀴를 가지고 요시츠네의 투구 드림을 휙휙 하고 두세 차례 걸쳐 잡아당겼다. 부하들이 대도와 협도를 휘두르며 막아내어 위기는 모면했으나 그 와중에 활이 쇠갈퀴에 걸려 물에 빠지고 말았다. 요시츠네가 몸을 숙여 채찍으로 끌어당겨 건지려 하자 부하들이 그냥 버리라고 말렸으나 듣지 않고 몇 차례나 시도한 끝에 간신히 주워들더니 웃으며 물러섰다. 나이 많은 무사들이 혀를 차며 "왜 그리 무모한 짓을 하십니까? 설사 천 냥 만 냥 하는 활이라 할지라도 어찌 목숨과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하자 요시츠네가 "내가 활이 아까워서 그런 줄 아느냐. 내 활이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힘을 써야 시위를 걸 수 있는 활이거나 숙부님 활처럼 강궁이었다면 일부러라도 떨어뜨려서 적이 줍게 했을 것이다. 이렇게 힘없는 활을 적이 주워 가지고 ‘이게 미나모토 군의 대장군 요시츠네의 활이란다‘하며 비웃을까 봐 목숨을 걸고 건져온 것이다"하고 이유를 설명하니 맞는 말이라며 모두 감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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