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를 생각하다 - 식탁의 역사
비 윌슨 지음, 김명남 옮김 / 까치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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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와 르네상스 유럽에서 사람들은 어디든 자기 칼을 가지고 다녔고, 식사할 때 그것을 꺼내 썼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용 식사용 칼을 칼집에 담아 허리띠에 매달고 다녔다. 남자의 허리띠에 매달린 칼은 적을 방어하는 데에는 물론이거니와 음식을 자르는 데에도 유용하게 쓰였다. 칼은 요즘의 손목시계처럼 도구인 동시에 의상이었다. (중략) 6세기의 문헌 ‘성 베네딕투스의 계율’은 수도사들에게 잠자리에 들기 전에 허리띠에서 칼을 풀라고 상기시킨다. 자기 칼에 찔리면 안 되니까. (중략) 칼에는 폭력성이 잠재되어 있는지라 남자만 배타적으로 사용했다는 그릇된 통념이 있지만, 실제로는 여자도 차고 다녔다.
- P81

중국 부엌칼의 또다른 중요한 능력은 먹는 사람이 칼질할 필요가 없게 해주는 것이다. 중국에서 식사용 나이프는 불필요할뿐더러 조금 역겨운 것으로 간주된다. 식탁에서 음식을 써는 것은 푸주한의 일과 비슷하다고 여긴다. 부엌에서 칼이 제 역할을 다했다면 먹는 사람은 균일한 음식 조각들을 젓가락으로 집기만 하면 된다. 부엌칼과 젓가락은 완벽한 공생관계이다. 부엌칼로 썰고, 젓가락으로 먹는다.
- P91

자기만의 칼을 가지는 풍습은 기독교, 라틴어 알파벳, 법치(法治)와 마찬가지로 서양 문화의 기틀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렇지 않게 되었다. 부엌 도구에 대한 이런저런 믿음은 문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많은데, 문화적 가치란 영구불변하지 않는다. 칼에 대한 유럽인의 태도는 17세기부터 격변했다. 최초의 변화는 당시 새로 탄생한 포크와 나란히 칼을 식탁에 미리 차려두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자 칼은 이전까지 간직했던 마법을 박탈당했다. 사람들은 칼을 개인적으로 주문 제작하는 대신 똑같은 칼들을 상자째 사고팔았고, 누가 어느 자리에 앉느냐와는 무관하게 미리 식탁에 차려두었다. 두 번째 변화는 식사용 칼이 무뎌진 것이었다. 칼이 자르는 힘조차 박탈당한 것이다. 칼의 존재 의의는 자르는 데에 있다. 자르지 못하는 칼을 일부러 만든다는 것은 고상한 격식, 달리 말해서 수동적 공격성을 갖춘 문명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요즘도 우리는 그 변화의 영향을 겪으면서 살고 있다.
- P94

역사에 남은 최초의 진정한 포크는 11세기 베네치아의 총독과 결혼한 비잔틴 제국의 공주가 썼다는 두 갈래 황금 포크였다. 성 베드로 다미아노는 그녀가 신이 주신 두 손을 놔두고 그렇게 생경한 도구를 선호한 것은 ‘지나친 고상함’이라고 힐난했다. 철없는 공주와 우스운 포크 이야기는 그로부터 200년 뒤에도 종교계에서 회자되었다. 공주가 포크로 먹은 응보로 흑사병에 걸려 죽었다고 이야기가 윤색되기도 했다.
- P239

그런 포크는 17세기까지도 이상한 물건으로 인식되었는데, 이탈리아만은 예외였다. 왜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 지역보다 앞서 포크를 채택했을까?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파스타. 중세 이탈리아에서는 마카로니와 베르미첼리가 벌써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 사람들은 국수처럼 긴 파스타를 푼테루올로(송곳)라는 긴 나무 꼬챙이로 먹었다. 그러나 꼬챙이 하나로 미끄러운 파스타 가닥을 감기에 좋다면 두 개는 더 좋을 것이고, 세 개는 훨신 더 좋을 것이다. (중략) 포크가 국수를 먹기에 유용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탈리아인은 다른 요리에도 포크를 쓰기 시작했다. - P241

1608년 이전 언젠가 이탈리아를 유람했던 엘리자베스 시대의 여행가 토머스 코리에이트는 "다른 어느 나라에도 없는" 풍습을 목격했다. 고기를 써는 동안 "작은 포크"로 붙잡는 풍습이었다. 코리에이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전형적인 이탈리아인은 "사람들의 손이 다 깨끗한 것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손으로 음식을 만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중략) 코리에에이트가 이탈리아를 여행했던 때로부터 100년이 지난 1700년 무렵에는 온 유럽에 포크가 전파되었다.
- P241

냉장고에 신선 식품을 잔뜩 쌓아두는 것은 - 채소 보관실에는 양상추를, 우유는 몇 리터씩, 마요네즈는 몇 병씩, 로스트치킨을 통째, 냉장육이나 크림이 든 디저트를 몇 킬로그램씩 -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일이었다. 아메리칸 드림은 본질적으로 풍요에 대한 꿈이기 때문이다. 냉장고는 부엌의 새 구심점으로서 화덕의 자리를 넘겨받았다. 옛날 사람들은 따뜻한 불가에 모였지마나 요즘 사람들은 싸늘한 냉장고를 중심에 두고 일상을 조직한다. 냉장고에 관한 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미국인이 되기를 갈망한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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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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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고 유머러스하고 긍정적인 태도가 호감을 준다.


신기한 건, 저자가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해서 구설수에 올랐던 것. 무책임하게 아이를 낳는 사람들이야말로 문제가 아닌가. 자신의 삶도  컨트롤하지 못하면서 타인과의 로맨틱한 관계를 갈망하고 아이까지 낳다니,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엄마도 다른 형제들처럼 일찍 집을 떠났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전도유망한 학생이었으나, 열여덟 살에 임신을 하는 바람에 대학 진학을 미뤄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남자 친구와 결혼했고, 새로운 생활에 정착하려 했지만 정착은 엄마에게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다. 어릴 때 너무도 잘 보고 배운 탓이었다.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어릴 때 집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다툼과 사건이 반복되지 엄마는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학위도 남편도 없는 열아홉 살의 엄마 곁에는 어린 딸, 린지 누나뿐이었다. - P90

내 아빠인 돈 보먼은 엄마의 두 번째 남편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1983년에 결혼했다가 내가 걷기 시작할 즈음에 갈라섰다. 2년쯤 지나고서 엄마는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아빠는 내가 여섯 살 때 친권을 포기했다. - P114

3학년을 다니던 도중에 우리 가족은 미들타운과 할모, 할보를 떠나 밥 아저씨가 살던 프레블 카운티로 이사했다. (중략) 5학년을 마칠 때쯤 매킨리가 200번지를 떠나 300번지로 이사했고, 그 무렵 칩 아저씨가 나타났다. 칩 아저씨는 우리와 같이 살지는 않았으나, 우리 집을 제집 드나들 듯했다. 6학년을 마칠 즈음 우리 가족은 여전히 매킨리가 300번지에서 살고 있었지만, 칩 아저씨는 스티브 아저씨로 대체됐다. (중략) 7학년이 끝날 때는 맷 아저씨가 나타났고, 엄마는 맷 아저씨의 집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면서 나도 같이 데이턴으로 이사하길 바랐다. 8학년을 마쳤을 때 엄마는 내게 데이턴으로 들어오라고 했고 나는 친아빠의 집을 잠깐 거친 후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9학년을 마치면서 얼굴 한 번 본 적 없었던 켄 아저씨와 그의 자녀 셋이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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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군도 6 열린책들 세계문학 26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김학수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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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잘사는 사람이 재빨리 집단 농장에 들어와서 그대로 있는 예도 있었다. 반면에 가입 신청을 하지 않은 고집 센 가난뱅이는 강제로 이주되었다. 이것은 중요한 일이다. 아주 중요한 일이다! 문제는 <꿀라끄 박멸>이 아니라 집단 농장으로의 강제 가입이었다. 혁명에 의해 주어진 토지를 농민으로부터 빼앗고, 그 토지에 사람들을 농노로 묶으려면 죽음을 가지고 위협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것은 제2의 내전이며, 이번에는 농민과 싸우는 내전이었다. 이것은 <위대한 전환기>, 또는 글자 그대로 <위대한 단절기>였다. 이 시기에 무엇이 두 동강 나서 끊어졌는지는 아무도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러시아의 등뼈였다.
- P42

자유를 옹호하는 서방의 <좌익> 사상가들이여! 좌파 노동당원들이여! 미국, 독일, 프랑스의 진보적인 대학생들이여! 당신들한테는 이것으로 아직 부족하겠지. 당신즐은 나의 이 책만으로는 아직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손을 뒤로 돌려라!>는 명령이 있을 때, 당신 <자신>이 우리 나라의 수용소군도에 발을 들여놓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을 한 번에 알게 될 것이다.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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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군도 5 열린책들 세계문학 262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김학수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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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의 행복한 24년간을 몸소 느끼며 체험한 이 사람들은(인용자주: 볼로소프 군단) 이미 1941년의 시점에서, 다른 세계의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유사 이래 이 지구상에, 자칭 <소비에뜨>라는 볼셰비끼보다 더 흉측하고 피투성이의, 게다가 간교하고 유연한 체제는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학살된 사람의 수에 있어서, 장기간에 걸친 이데올로기를 깊이 심는 데 있어서, 그 구상의 깊이에 있어서, 철저한 획일화와 전체주의화에 있어서 지구상의 어느 체제도 그것과 비견될 수가 없었다. 아니, 그 당시 이미 지구 제국을 떨게 했던 미숙한 히틀러 체제도 여기에 미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그들이 무기를 든 날, 설마 그들이 자기 스스로를 억압하려고 했겠는가? (아래에 계속) - P46

(위에서 계속)
볼셰비즘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며, 다시금 잔혹한 지배를 강화시키며, 그리하여 다시 한번 볼셰비즘이 그들을 무참히 짓밟게 하려 그저 투쟁을 시작해야 했을까? (오늘날까지도 세계 어디서도 아직 시작하지 앟았던 싸움을?) 아니, 예전에 볼셰비즘 자신이 사용했던 수법을 당연히 사용했다. -마침 1차 대전으로 약해진 러시아의 몸에 파고들었듯이, 2차 대전에서도 덤벼들어야 했다.
- P46

여기서 감히 말하지만, 만일 이 전쟁에서 우리 국민이 멀리서나마 총을 치켜들고 스딸린 정부를 위협하거나, <인민의 어버이>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욕설을 퍼붓지 않았더라면, 우리 국민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희망이 없는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 P51

나는 형기의 중간 시기를 죄수들에게 좋은 식사와 음료를 제공해 주는 따뜻하고 깨끗한 황금의 섬에서 지냈다. 그 대가로 나는 극히 적은 일을 하면 되었다. 하루에 12시간 책상에 앉아서 당국의 의향에 따르면 되었다. 그런데 나는 느닷없이 편안한 생활에 취미를 잃어버렸다. 나는 이미 옥중 생활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려고 했다. (중략) 옥중 생활은 나에게 그을 쓰는 능력을 개발시켜 주었고, 나는 그 욕구에 일체의 시간을 썼으며 책상에 앉아서 하는 일에 게을러졌다. 여기서 지급되는 버터나 사탕보다 두 발로 똑바로 서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몇 사람은 <두 발로 선> 다음에 <특수 수용소>로 호송되었다.
- P59

나는 수용소에 들어가 처음에는 일반 작업에서 벗어나려고 무척 애를 썼으나, 잘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투옥되고 6년째가 되어서 에끼바스뚜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번에는 거꾸로, 수용소에 대한 속단이나 술수,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쳐 버리고자 마음먹었다. 그런 것들은 더 본질적인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운 좋게 특권수가 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잡역부로 떨어져 처참한 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교양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여기 도형 수용소에서 기술을 배워 전문직을 가지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들(나와 올레끄 이바노프)은 보로뉴끄의 작업반에서 기능인, 즉 석공이 되었다. 나중에는 운명의 장난에 의하여, 나는 주물공이 되었다.
- P152

처음에는 자신이 없고 불안했다. 나는 옳은 선택을 한 걸까? 나도 할 수 있을까? 육체노동에 어울리지 않고 머리가 큰 우리는, 모두 같은 작업을 하고 있어도 남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의식적으로 나 자신을 밑바닥으로 내려가게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떤 공통된, 돌멩이가 많은 바닥에 단단하게 발을 디디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가 시작되었다. 나의 인격은 그 시기에 완성되어 갔으며, 그 이후에 내 인생에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그때 익숙해진 시선과 습관에 충실했다.
- P152

그리고 찌꺼기를 깨끗이 제거하고 머리가 맑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내가 이미 2년 전부터 서사시를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서사시는 매우 유익해서, 나의 육체에 어떤 이상이 있어도 그것을 잊게 하는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때로는 자동소총을 가진 병사들이 고함을 질러, 의기소침하여 대열 속에서 걷고 있을 때도, 나는 끓어오르는 시와 형상의 압력을 느끼며, 마치 대열의 상공을 날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빨리 <작업 현장>에 도착하여 어디엔가 몸을 숨기고, 그 시를 종이에 쓰고 싶다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 순간에 나는 자유롭고 행복했다.
- P153

우리는 이미 스똘리삔 차량에 있었을 때 모스끄바의 까잔역의 확성기에서 한국 전쟁이 발발한 것을 알았다. 전쟁 첫날 오전 중에 남한 측의 강력한 방위선을 돌파하고 10킬로미터나 적진 깊숙이 침입하면서도, 북한 측은 남한으로부터 습격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물리를 모르고 전투 경험이 없는 군인이라 할지라도 첫날에 진격한 쪽이 먼저 습격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이 한국 전쟁은 우리를 흥분시켰다. 소동을 좋아하는 우리는 폭풍이 불기를 바랐다! 폭풍이 불어야 했다. 폭풍이 없다면, 만일 폭풍이 없다면, 우리는 천천히 죽어 가야 했다.
- P61

무엇보다 중계 형무소의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뉴스였다. 거기서는 스딸린의 진격 작전이 실패로 끝났다. 이미 국제 연합군이 소집되었다. 우리는 한국을 스페인으로, 3차 대전의 시작으로 보았다. (아마 스딸린은 이 전쟁을 예행연습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특히 이 국제 연합군들은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얼마나 멋있는 깃발 아래 모였던가! 이 기치 아래에서야말로 누구나 결집할 수 있지 않겠는가!
- P74

옴쓰끄의 무더운 밤, 찌는 듯한 더위에 땀투성이 살덩이가 되어 호송차에 억지로 실렸을 때 우리는 호송차에서 교도관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이 악당들아, 이제 봐라! 이제 트루먼 대통령이 너희들을 혼낼 테니까! 너희들 머리 위에 원자 폭탄을 터뜨릴 거야!" 그리하여 교도관들도 겁에 질려 침묵했다. 그들에게 우리의 공세는 차츰 두드러지고 우리 자신들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우리는 너무나 정의를 갈망하여 사형 집행인들과 함께 폭탄을 맞아도 좋다는 기분이었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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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군도 4 열린책들 세계문학 261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김학수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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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박된 죄수들은 5명에서 7명씩 마차에 실려서 <고르까>라는 수용소의 묘지로 운반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이미 준비되어 있는 커다란 구덩이 속에 떠밀려 그대로 <생매장>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잔인성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사람을 운반하고 들어 올리는 작업에서 죽은 사람을 다루기보다는 산 사람을 다루는 쪽이 훨씬 더 편하다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작업이 아다끄에서 밤마다 여러 날 계속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방식에 의해서 우리 당의 도덕적 정치적 통일은 달성되었던 것이다.
- P66

슬라바는 전쟁 전에 아홉 살 때부터 도둑질을 하게 되었고 우리 군대가 왔을 때도 도둑질을 했으며 종전 후에도 계속했다. 그는 열다섯 살이라는 나이치고는 어른스러운 침울한 웃음을 띠며 앞으로도 계속 도둑질을 하며 살아갈 작정이라고 했다. "그런데 말이에요." 그는 제법 논리적으로 말했다. "노동자 ㅁ노릇이나 하면 빵과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구경할 수 없잖아요. 나는 아이 때 너무 고생을 했으니까 앞으론 좀 잘살아보고 싶어요." "독일군이 쳐들어왓을 때는 뭘 했니?" 나는 그가 언급하지 않은 2년간, 즉 독일군 점령 기간에 대해 물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독일군이 들어왔을 때는 일을 했지요. 독일군 치하에서 어떻게 도둑질을 해요? 그랬다가는 당장에 총살이에요."
- P162

연소자들은 어른들의 수용소에 와서도 그들의 행동의 주요한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즉, 모두 한패가 되어 일제히 적을 습격하기도 하고, 일제히 적을 물리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힘을 강화시켜 여러 가지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들의 의식 속에는 해도 되는 짓과 해서는 안 되는 짓을 분간하는 힘이 전혀 없으며 선과 악에 대한 관념조차 없다. 그들에게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모두 선이고 자기를 방해하는 것은 모두 악이다. 그들이 방약무인하게 행동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유리한 처세술이기 때문이다. 힘이 통하지 않을 때는 거짓 연기를 하거나 속임수를 쓰기도 한다.
- P162

<남의 가랑이 들쑤시지 말라고!>, <(건드리지도 않는데) 오 납작 엎드려?> (이 말의 괄호 부분은 비슷한 낱말로 바꿨지만, 원래의 것을 그대로 쓰면 다음에 오는 <엎드리다>라는 동사가 아주 음탕한 뜻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듣는 사람을 흠칫하게 만드는 표현이 특히 군도의 여자 주민의 입에서 튀어나올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당황하게 된다. 그녀들은 비유에 에로틱한 소재를 즐겨 사용한다. 연구 논문이 지니는 도덕적 제한 때문에 그런 에로틱한 표현들을 열거하지 못함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 P239

제끄는 항상 <현재보다 더 나쁜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운명의 함정과 악마들의 습격을 기다리면서 살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설사 생활이 조금 완화되는 경우에도, 무언가 잘못되어 일어나는 일시적은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항상 재난에 대비하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운명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남의 운명에도 동정하지 않는 제끄의 냉엄한 정신이 형성되고 성숙되어 가는 것이다. 정신적인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 제끄는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일이 거의 없다. 밝은 쪽으로도 어두운 쪽으로도. 절망 쪽으로도 기쁨 쪽으로도.
- P257

대체로 제끄들은 <유머>를 높이 평가하고 좋아한다. 그것은 군도 첫해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주민들의 심리적 바탕이 건전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들은, 눈물은 자기변명이 될 수 없으며 웃음은 얼마든지 좋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 유머는 그들의 변함없는 동맹자로서 그것 없이는 아마도 군도에서의 생활을 이어 갈 수 없었을 것이다.
- P266

우리 나라 곳곳에서 우리는 이런 것을 보게 된다. -개를 끌고 가는 경비병이 누구를 잡으려고 앞으로 뛰어나가는 석고상이 있다. 따시껜뜨시에는 이런 동상이 NKVD 부속의 사관학교 앞에 서 있는데, 랴잔시에서는 마치 시의 상징처럼 미하일로프 방면에서 시로 접근하면 눈에 들어오는 유일한 기념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고도 혐오의 몸서리도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마치 그것이 당연한듯이, 개를 부추겨 사람한테 덤벼들게 하는 모습의 동상에 아주 익숙해져 버렸다.
우리들에게 덤벼드는데.
- P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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