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22장 내가 기술한 역사에는 설화가 없어서 듣기에는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사에 관해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다라 언젠가는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 미래사에 관해 명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 역사 기술을 유용하게 여길 것이며,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이 책은 대중의 취미에 영합하여 일회용 들을 거리고 쓴 것이 아니라 영구 장서용으로 쓴 것이기 때문이다. (인용자 주 – 원문은 ‘영원을 향한 재산’) - P45
1권 23장 지난날 최대의 전쟁은 페르시아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은 두 번의 해전과 두 번의 지상전으로 일찌감치 결판이 났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지속되는 내내 헬라스에 미증유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토록 많은 도시가 비헬라스인들 또는 헬라스인들 자신에게 함락되어 폐허가 된 적은 없었다. 어떤 도시는 함락된 뒤 주민이 완전히 바뀌기까지 했다. 그토록 많은 난민이 발생한 적도, 전쟁이나 당파싸움으로 그토록 많은 인명이 손실된 적도 없었다. - P45
2권 8장 양쪽 모두가 원대한 포부를 품고 전쟁에 전력을 쏟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든 처음 시작할 때는 누구나 열성을 다하는 법인 데다, 당시에는 펠로폰네소스에도 아테나이에도 전쟁이 뭔지 몰라 전쟁이 싫지 않은 젊은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 P147
2권 17장 친척 집에서 피난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되고, 대부분은 시내의 공터나, 아크로폴리스와 엘레우시니온 신전과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일부 장소를 제외한, 신과 영웅들의 모든 신전에서 살았다. 아크로폴리스 밑에 펠라르기콘이라는 지역이 있는데, 그곳에 살면 저주받는다 하여 거주가 금지된 곳이었다. 어떤 퓌토 신탁의 끝부분도 같은 취지의 말을 한다. "펠라르기콘 지역은 사용하지 않는 편이 더 낫느니라." 하지만 사태가 위급하여 사람들은 그곳에도 집을 짓고 살았다. 내 생각에 이 신탁은 사람들이 예상한 것과는 정반대로 이루어진 듯하다. 아테나이에 재앙이 닥친 것은 사람들이 이 지역에 불법적으로 정착했기 때문이 아니라 전쟁 때문에 사람들이 그곳에 살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 P156
2권 22장 페리클레스는 그들이 현재 상황에 화가 나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을뿐더러 나가 싸우지 않는다는 자신의 결정이 옳다는 확신에서 민회나 다른 회의를 일절 열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하면 이성보다는 분노의 영향을 받아 나쁜 결정을 내리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는 도시를 수호하며 되도록 은인자중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기병대를 내보내 적군의 정찰대가 도시 근교 농촌에 침입하여 해코지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 P159
2권 43장 페리클레스 연설 온 세상이 탁월한 사람들의 무덤입니다. 고향 땅에 세운 비문만이 이분들에 관해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 땅에서도 이분들에 대한 기억은 기념비가 아니라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 P174
2권 64장 페리클레스 연설 여러분은 또 아테나이가 온 세상에 가장 명성을 드날리는 것은 어떤 역경에도 굽히지 않고 어느 국가보다 전쟁의 인명 손실과 노고를 더 많이 감내함으로써 역사상 최대의 힘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후세 사람들은 우리의 이 힘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만물은 쇠퇴하게 되어 있는 터라 우리 또한 언젠가는 쇠퇴한다 해도, 후세 사람들은 우리가 헬라시은들 중에서 가장 많은 헬라스인들을 지배했고, 가장 큰 전쟁들에서 각각의 국가 또는 모든 국가에 굳건하게 맞섰으며, 우리가 살던 도시는 모든 것이 완비된 헬라스 최대의 도시였다고 기억할 것입니다. - P188
2권 65장 그는 2년 6개월을 더 살았고, 전쟁에 관한 그의 선견지명은 그가 죽은 뒤 더욱 인정받았다. 왜냐하면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인들이 은인자중하며 함대를 증강하고, 전쟁 동안에는 제국을 확장하려 하지 않고, 도시를 위험에 빠뜨릴 모험을 하지 않는다면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테나이인들은 모든 점에서 정반대로 했으며, 분명 전쟁과 무관한 다른 업무에서도 개인적인 이익이나 야망에 이끌린 나머지 아테나이에도 그 동맹국들에도 해로운 정책을 추구했다. (중략) 페리클레스는 명망과 판단력을 겸비한 실력자이자 청렴결백으로 유명했기에 대중을 마음대로 주물렀으며, 대중이 그를 인도한 것이 아니라 그가 그들을 인도했다.(아래에 계속) - P190
(위에서 계속) 그는 또 부적절한 수단으로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아첨할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그는 높은 명망을 누리고 있어 대중에게 화를 내며 그들이 한 말을 반박할 수 있었다. 예컨대 그는 그들이 지나칠 만큼 자신들을 과신하는 것을 볼 때면 충격적인 발언으로 그들을 불안하게 만드는가 하면, 그들이 공연히 낙담하는 것을 볼 때면 그들에게 자신감을 회복시켜주곤 했다. 그리하여 이름은 민주주의이지만 실제 권력은 제일인자의 손에 있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의 후계자들은 수준이 그만그만했으며, 서로 일인자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국가 정책조차 민중의 기분에 맡겼다. - P190
3권 27장 그 사이 뮈틸레네인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펠로폰네소스에서 함대가 나타나지 않는 데다 식량이 떨어진 까닭에 아테나이인들과 협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살라이토스도 함대가 도착할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고는 전에는 경무장만 하던 민중에게 중무장을 지급했다. 아테나이인들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일단 무구를 손에 넣자, 민중은 더 이상 정부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한데 모여 지배계층이 식량을 공개하고 모두에게 분배하기를 요구하면서, 그러지 않으면 자기들이 협정을 맺고 아테나이인들에게 도시를 넘겨 주겠다고 했다. - P245
3권 47장 디오도토스 연설 그러나 반란에 가담하지도 않았고 무기를 손에 넣자마자 자진하여 도시를 여러분에게 넘겨준 뮈틸레네 민중을 죽인다면 첫째, 여러분은 은인을 죽이는 죄를 저지르게 될 것이고, 둘째 지배계층이 가장 원하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죄 있는 자나 죄 없는 자나 똑같은 별을 받게 된다고 미리 여러분이 밝힌 까닭에, 지배계층이 반란을 일으키면 민중은 처음부터 그들 편이 될 테니 말입니다. 설령 민중에게 죄가 있더라도 그들에게는 죄가 없는 듯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전히 우리의 동맹군인 하나의 계층이 우리의 적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 P262
3권 49장 아테나이인들은 격렬한 토론을 벌이다가 거수표결에 들어갔는데, 표수는 거의 같았지만 디오도토스의 안이 가결되었다. 그들은 즉시 다른 삼단노선을 급파했는데, 먼저 떠난 삼단노선보다 늦게 도착하여 도시가 파괴된 모습을 보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삼단노선은 하룻밤 하루 낮쯤 앞서가고 있었다. 뮈틸레네 사절단은 이 두 번째 함선에 포도주와 보릿가루를 대주며 먼저 파견된 함선을 따라잡으면 후하게 보답하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래서 선원들은 항해를 서둘렀는데, 항해 도중 포도주와 올르브유에 갠 보릿가루로 끼니를 대신하고 교대로 취침하며 계속해서 노를 저을 정도였다. 다행히 역풍은 불지 않았다. 먼저 떠난 함선은 내키지 않는 임무를 띠고 가는지라 항해를 서두르지 않았고 나중에 떠난 함선은 그렇게 항해를 서두른 덕분에, 첫 번째 함선이 한발 먼저 도착하여 파케스가 결의문을 읽고 결의 사항을 집행하려는 순간 입항하여 학살을 막을 수 있었다. - P263
3권 68장 라케다이몬인들은 플라타이아이인들이 자신들에게 불의한 짓을 했다고 믿고 그들을 다시 한 명씩 앞으로 불어내어, 이번 전쟁 중에 라케다이몬인들과 그들의 동맹군에게 도움을 준 적이 있느냐는 같은 질문을 던졌고,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하는 자는 예외 없이 모두 끌고 나가 죽였다. 그들은 자그마치 2백명 이상의 플라타이아이인들과, 함께 포위당한 아테나이인 25명을 그렇게 죽였다. 여자들은 노예가 되었다. 도시는 당쟁 때문에 추방당한 메가라인들과 플라타이아이인들 중에 살아남은 親라케다이몬파가 1년 동안 점유하게 해주었다. 그 뒤 그들은 도시를 기초부터 완전히 허물고 헤라 신전 옆에 사방 2백 푸스의 숙박소를 지었는데, 1층에도 2층에도 사방에 방을 넣었다. (중략) 플라타이아이는 아테나이의 동맹국이 된 지 93년 만에 그렇게 끝장났다. - P279
3권 81장 에우뤼메돈이 함선을 이끌고 도착해 이레를 머무르는 사이 케르퀴라인들은 자신들이 적으로 간주한 시민들을 계속 학살했다. 희생자들에게는 민주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죄명이 씌워졌다. 그러나 더러는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죽었고, 더러는 빚을 준 까닭에 채무자의 손에 죽기도 했다. 죽음은 온갖 모습으로 다가왔고, 그러한 상황에서 있을 법한 모든 일이, 아니 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기도 했고, 신전에서 끌려나와 신전 옆에서 살해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 P286
3권 82장 이번 내란(인용자 주 – stasis)은 그처럼 잔혹한 양상을 띠었고, 처음 발생한 내란인 만큼 충격적이었다. 실제로 나중에는 헬라스 세계전체가 동란에 휘말려들었다고 할 수 있다. 나라마다 서로 경쟁관계인 정파가 있어서, 민중파 지도자들은 아테나이인들을, 소수파는 라케다이몬인들을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평화 시 같으면 불러들일 핑계도 생각도 없었겠지만, 각 정파가 반대파에게 피해를 주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전시에는 변혁을 꾀하는 자들이 외부에서 원군을 불어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아래에 계속) - P286
(위에서 계속) 이런 내란은 헬라스의 도시들에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었는데, 이런 고통은 사람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 한 잔혹함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고, 주어진 여건에 따라 양상이 달라져도 되풀이되고 있으며 언제나 되풀이될 것이다. 번영을 누리는 평화 시에는 도시든 개인이든 원하지 않는데 어려움을 당하도록 강요받는 일이 없으므로 더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한다. 그러나 일상의 필요가 충족될 수 없는 전쟁은 난폭한 敎師(인용자 주 – 난폭함의 교사, 폭력의 교사)이며, 사람의 마음을 대체로 그들이 처한 환경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뜨린다. - P286
3권 82장 여러 도시의 정파 지도자들은 한쪽에서는 대중의 정치적 평등을, 다른 쪽에서는 건전한 귀족정치를 내세우며 그럴듯한 정치 강령을 표방했다. 그러나 그들은 말로는 공공의 이익에 봉사한다면서도 사실 공공의 이익을 전리품으로 여겼다. 그들은 반대파보다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하며 극단적인 잔혹 행위를 일삼았으며 정의나 국익을 무시하고 반대파보다 더 잔인하게 보복했다. 그들은 그때그때 자신이 속한 정파를 즐겁게 해주는 것만을 행동 기준으로 삼았으며, 당장의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불법적인 투표로 유죄판결을 내리거나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 쪽도 종교적 경건함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수치스러운 행위를 미사여구로 정당화할 수 있는 자들은 명망이 높아졌다. 중립을 지키려던 시민들은 투쟁에 참가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든, 그들만이 살아남게 될까 시새움을 샀기 때문이든, 극단으로 흐르는 두 정파의 희생양이 되었다. - P288
4권 46장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과 같은 시기에 에우뤼메돈과 소포클레스는 아테나이 함선을 이글고 퓔로스를 떠나 시켈리아로 항해하던 중 케르퀴라 섬에 들러 시내의 케르퀴라인들과 손잡고 이스토네 산에 둥지를 튼 케르퀴라인들 토벌 작전에 나섰다. 이들은 내란이 일어난 뒤 본토에서 건너와 여러 농촌 지역을 차지하고는 큰 손해를 끼쳤다. 아테나이인들은 그들의 요새를 공격하여 함락했다. 그러자 높은 곳으로 떼 지어 달아나던 그들은 용병 부대를 넘겨주고 자신들의 무구를 인도하고 아테나이 민중의 처분을 기다린다는 데에 동의했다. 장군들은 휴전협정을 맺고 그들을 아테나이로 호송할 수 있을 때까지 구금하기 위해 프튀키아 섬으로 태우고 가며, 만약 그들 중 한 명이라도 도주하려다 체포되는 날에는 휴전조약은 그들 모두에게 효력을 상실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아래에 계속) - P348
(위에서 계속) 케르퀴라의 민중파 지도자들은 포로가 아테나이에 도착하면 아테나이인들이 죽이지 않을까 염려되어 (인용자 주 – 죽이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다음과 같은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섬세 있는 포로 가운데 몇 명에게 가까운 친구들을 들여보내, 아테나이 장군들이 지금 포로들을 케르퀴라의 민중파에게 넘겨주려 하니 되도록 속히 도주하는 것이 상책이며 자기들이 배를 대주겠다고 호의를 가장해 설득하게 했던 것이다. - P348
4권 47장 설득이 주효하여, 그들이 배를 대주자 포로들은 출항하려다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휴전조약은 효력을 잃었고, 포로들은 모두 케르퀴라인들에게 넘겨졌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아테나이 장군들의 책임이 작지 않았다. 그들은 비록 자신들은 시켈리아로 가야 하지만 아테나이로 포로들을 호송하는 명예를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는데, 이러한 태도가 음모자들을 대담하게 행동하도록 부추기고, 음모자들의 논리가 설득력 있게 들리도록 했으니 말이다. 포로들을 넘겨받자 케르퀴라인들은 큰 건물에 가두었다. 나중에 그들이 포로들을 20명씩 한데 묶은 채 데리고 나가 두 줄로 나란히 늘어선 중무장보병 사이를 지나가게 하니, 개인적으로 원한이 있는 자가 보일 때마다 이들이 치고 찔렀다. 그리고 채찍을 든 자들이 그들 옆에서 걸어가며 조금이라도 늑장을 부리면 몰아세웠다. - P348
4권 48장 모두 60명이 건물에서 끌려나가 그렇게 살해되었지만, 건물 안에 잇던 포로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이들이 이감되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결국 누구에게 전해 듣고 사실을 알게 된 포로들은 아텐이인들에게 자기들이 죽기를 원한다면 손수 죽여달라고 간청했다. 이제 포로들은 건물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했고, 누가 들어오면 한사코 막겠다고 말했다. 케르퀴라인들 또한 억지로 문 안으로 밀고 들어가려 하지 않고, 건물 꼭대기로 올라가 지붕을 헐더니 아래로 기왓장을 던지고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아래에 계속) - P349
(위에서 계속) 안에 있던 포로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방어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자신들을 향해 쏜 화살을 목구멍 안으로 밀어넣거나, 마침 건물 안에 있던 침대들에서 뜯어낸 끈이나 입고 있던 옷을 찢어 만든 띠로 목을 매달아 자살하기 시작했다. 이런 처참한 고통이 진행되는 사이 밤이 되어, 거의 밤새도록 그들은 온갖 방법으로 죽어갔는데, 더러는 자살하기도 하고 더러는 지붕 위에 있는 자들이 쏜 화살을 맞고 죽었다. 날이 밝자 케르퀴라인들은 짐마차들에 포로들의 시신을 아무렇게나 던져넣고 도시 밖으로 싣고 나갔다. 요새 안에서 사로잡힌 여자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산속 케르퀴라인들은 케르퀴라의 민중파에 의해 이렇게 몰살당했고, 그토록 격렬하던 내전도 적어도 이번 전쟁 동안에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다른 정파에는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이 아테나이인들은 원래 목적지인 시켈리아로 항해해가서 그곳 동맹군과 힘을 모아 전쟁을 계속했다. - P349
4권 80장 국가 노예들에 대한 그들의 정책은 언제나 자신들의 안전에 주안점을 두었다. 실제로 그들은 건장하고 젊은 국가 노예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 두려워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기까지 했다. 라케다이몬인들은 전쟁터에서 라케다이몬을 위해 가장 훌륭하게 봉사했다고 주장하는 국가 노예들에게는 자유를 줄 테니 빠짐없이 출두하라고 포고했다. 그러나 그것은 책략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자유의 몸이 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야말로 라케다이몬에 반기를 들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약 2천 명이 뽑혔는데, 이들은 자신이 자유의 몸이 된 줄 알고 머리에 화관을 쓰고는 신전들 주위를 돌았다. 그러나 라케다이몬인들은 얼마 뒤 그들을 제거해버렸는데, 그들이 각자 어떻게 살해당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라케다이몬인들은 이번 기회에 7백 명의 국가 노예들을 기꺼이 내보내며 브라시다스 밑에서 중무장보병으로 복무하개 했다. - P373
5권 11장 브라시다스를 들어올려 싸움터 밖으로 구출한 자들은 아직 숨을 쉬고 있는 그를 시내로 옮겼다. 그는 자신의 부대가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얼마 뒤 죽었다. 나머지 군대는 클레아리다스와 함께 추격에서 돌아와 적군 전사자들의 무구를 벗기고 승전비를 세웠다. 그 뒤 국비로 브라시다스의 장례식이 치러졌는데, 동맹군 전원이 완전무장하고 호송하는 가운데 지금 장터 있는 곳 앞에 그를 묻어주었다. 암피폴리스인들은 그의 무덤 주위에 담을 쌓고 그 뒤로 그를 영웅으로 모시며 재물을 바쳤고, 그의 명예를 높이고자 경기대회를 창설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주었다. 또한 그에게 자신들의 식민시 창건자라는 칭호를 부여하며 하그논을 위해 세운 건물들을 허물고, 하그논이 그곳을 창건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을 모조리 없애버렸다. - P423
5권 14장 실제로 암피폴리스 전투가 끝나고 림피아스가 텟살리아에서 철수한 직후부터 어느 쪽도 전투를 다시 시작하지 않았고, 양쪽 다 마음이 평화에 가 있었다. 아테나이인들은 델리온에서 타격을 입은 데다 얼마 뒤 암피폴리스에서도 타격을 입은 터라, 이전에 운이 따라줄 때는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믿고 자신감에서 화평 제의를 거부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자신감이 없었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의 잇단 실패에 고무되어 동맹국이 대거 반기를 들지 않을까 두려워했고, 퓔로스 사건 뒤 유리한 환경에서 평화조약을 맺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아래에 계속) - P424
(위에서 계속) 라케다이몬인들도 나름대로 그럴 이유가 있었으니, 전쟁이 그들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테나이의 영토를 유린하면 몇 년 안에 아테나이의 힘을 꺾을 수 잇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대신 스팍테리아 섬에서 스파르테로서는 전대미문의 재앙을 당했고, 퓔로스와 퀴테라를 거점으로 그들의 영토에 대한 약탈 행위가 자행되었으며, 국가 노예들은 계속해서 도주했다. 또한 남아 있는 자들도 국외에 잇는 친구들의 사주를 받아 과거에 그랬듯 현재 상황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 P424
5권 15장 그런 점들을 고려하여 양쪽은 평화조약을 맺기로 결심했다. 라케다이몬인들이 그러기를 더 열망했는데 섬에서 포로로 잡힌 자들을 돌려받아야 했던 것이다. 이들 포로 가운데 스파르테인들은 정부 요인ㄷㄹ이거나 요인들의 친족이었기 때문이다. - P425
5권 26장 나는 사건의 의미를 이해할 만한 나이에 정확히 알려고 주의를 기울이며 전쟁을 처음부터 끝까지 체험했으며, 또 암피폴리스에서 군대를 지휘하다가 20년 동안 조국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그래서 양쪽 사정을, 추방된 사람의 입장에서 특히 펠로폰네소스 쪽 사정을 잘 볼 수 있었는데, 그런 여가는 내가 본 것을 냉정하게 고찰할 기회도 주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10년 전쟁 뒤에 불화를 겪고 조약이 파기되고 뒤이어 전쟁이 시작된 경위를 기술하려 한다. - P434
5권 103장. 멜로스 대화. 아테나이 발언 위기를 맞으면 희망이 위안이 되겠지요. 다른 재원을 충분히 갖고 희망에 기댄다면 희망 때문에 해를 입기는 해도 파멸하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가진 것을 한판에 모두 거는 사람은 망한 뒤에야 희망이 무엇인지 알게 되겠지요. (희망은 본시 낭비벽이 심하다오.) 그래서 희망이 무엇인지 알고 조심할 수 있을 때는 이미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지요. 여러분은 미약하고 백척간두에 서 있는 만큼 스스로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그 밖에도 여러분은 다급해진 자들의 흉내를 내지 마시오. 그들은 인간적인 수단으로 아직 자신을 구할 수 있는데도 눈에 보이는 희망이 사라지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이를테면 예언이나 신탁처럼 희망을 품게 하여 파멸로 인도하는 온갖 것들에 의지하지요. - P484
6권 13장. 니키아스 연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대개 욕심은 실패하고 선견지명은 성공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지금 백척간두에 서 있는 조국을 위해 이번 발의에 반대표를 던지시고, 시켈리아의 헬라스인 이주민이 효과적인 장벽인 자신들과 우리 사이의 경계를 계속해서 존중하는 한 자신들의 나라에 살며 스스로 자신들의 업무를 처리하는 쪽으로 결의하십시오. - P503
6권 18장. 알키비아데스 연설 다른 제국들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가 이만한 제국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헬라스인들이든 비헬라스인들이든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우리가 언제나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리고 우리는 우리 제국이 얼마나 커지기를 원하는지 딱 잘라서 말할 수 없습니다. 현 단계에서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예속된 자들은 통제하고 다른 자들은 예속시킬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남을 지배하지 않으면 남이 우리를 지배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자코 있는 것은 여러분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잇어도, 여러분은 그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에 맞춰 생활 방식을 완전히 바꾸기 전에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곳에서의 전쟁이 이곳에서의 우리 힘을 증강시켜준다고 확신하고 출항합시다. - P504
6권 33장 헤르모크라테스 연설 헬라스인들이든 비헬라스인들이든 본국에서 멀리 파견된 대군이 성공한 예는 드뭅니다. 침략군이 현지 주민과 그들의 이웃보다 수가더 많은 경우는 없으며(위협을 느끼고 모두가 똘똘 뭉치기 때문입니다), 침략군이 이국에서 보급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실제로 그 때문에 자멸해도 승리의 영광은 그들이 공격하려 한 자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아테나이인들 자신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페르시아 침략군이 뜻밖에도 대패한 뒤 그들이 강국으로 떠오른 이유는, 페르시아인들이 아테나이를 목표로 출정했다고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하거늘 우리의 경우에도 같은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이 어디 있습니까. - P518
6권 39장 아테나고라스 연설 민주정체는 현명하지도 공정하지도 못한 체제이며, 재산가가 통치자로서는 최적임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첫째, ‘민중’은 국가 전체를 뜻하는 반면 소수자에 의한 정부인 ‘과두정체’는 국가의 일부를 의미할 뿐이며, 둘째, 국고를 관리하는 데는 부자들이 최적임자이고 조언자로는 지성인들이 최적임자이며, 여러 가지 논의를 듣고 결정하는 데는 대중이 최적임자인데 민주정체에서는 이들이 개별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동등한 지분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두정체는 위험은 대중에게 분담시키면서도 이익은 소수자가 대부분 차지하거나 독차지합니다. - P525
6권 69장 그래서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 쉬라쿠사이인들은 자신들의 조국을 위해 그리고 그들 각자는 자신의 생명과 앞으로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 한편 아테나이인들은 남의 나라를 정복하고 패배시킴으로써 자신들의 나라에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려고 싸웠다. 아르고스인들과 그 밖의 다른 자치 동맹군은 아테나이인들이 목표로 한 것을 정복하도록 도와줌으로써 그 대가로 두고 온 조국을 다시 볼 수 있기 위해 싸웠다. 종속된 동맹군은 주로 당장 목숨을 구하려고 최선을 다해 싸웠는데(그것은 이기지 않으명 기대할 수 없었다), 그 밖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아테나이가 계속해서 정복하도록 도와주면 자신들에 대한 억압에 줄어들 것이라는 희망도 품었다. - P547
7권 29장 그래서 이렇듯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잇던 아테나이인들은 추가 지출을 줄이기 위해, 너무 늦게 도착하여 데모스테네스와 동행할 수 없게 된 트라케인들을 바로 돌려보냈던 것이다. 귀국하는 그들을 인솔하는 책임은 디에이트레페스가 맡았는데, 그는 에우리포스 해협을 통과하게 되어 있는 만큼 바닷가를 따라 항해하면서 적군에게 되도록 많은 피해를 입히라는 지시를 받았다. (중략) 그는 뮈칼렛소스에서 16스타디온쯤 떨어져 있는 헤르메스 신전에서 몰래 숙영하고 날이 새자 그다지 크지 않은 도시를 공격하여 함락했다. (중략) 트라케인들은 시내로 쳐들어가 집과 신전을 약탈하고 노소 불문하고 주민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이든 여자든 만나는 족족 죽였고, 짐 나르는 가축과 다른 생명체도 보이는 족족 죽였다. 이들 트라케인은 두려워할 것이 없을 때는 야만족 중에서도 가장 피에 굶주린 부족이기 때문이다.(아래에 계속) - P602
(위에서 계속) 그래서 그들은 이때 사방이 아비규환이고 온갖 형태의 죽음이 널브러져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곳에서 가장 큰 학교로 쳐들어가 막 교실에 들어간 아이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겪은 어떤 재앙보다 더 크고 더 갑작스럽고 더 무시무시한 재앙이 온 도시를 덮쳤다.
7권 30장 그사이 테바이인들이 이 소식을 듣고 구원하러 달려와서는 트라케인들이 멀리 가기 전에 따라잡아 약탈품을 되찾고 그들을 싣고 온 함선이 정박한 에우리포스 해협의 바닷가로 겁에 질린 그들을 추격했다. 그들 가운데 죽은 자들은 대부분은 헤엄칠 줄 몰라 배에 오르려다가 죽었고, 배를 탄 자들은 육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고는 화살의 사정거리 밖에다 함선을 정박시켰다. (아래에 계속) - P602
(위에서 계속) 퇴각할 때 트라케인들은 질서정연했는데, 그들은 먼저 공격해오는 테바이 기병대에 맞서 감자기 달려나갔다가 밀집대형을 이루고 후퇴하는 트라케 특유의 작전을 펼침으로써 자신들을 잘 지켜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과정에서 죽은 자들은 많지 않았지만, 상당수가 약탈하려고 시내에 남아 있다가 잡혀 죽었다. 트라케인들은 1천3백명 중에서 모두 250명이 죽었다. 테바이인들과 다른 동맹군으로 구성된 구원 부대에서는 테바이의 보이오티아 연맹 지휘관 중 한 명인 스키르폰다스를 포함하여 약 20명의 기병과 중무장보병이 죽었다. 뮈칼렛소스는 인구의 대다수를 잃었다. 뮈칼렛소스는 그런 재앙을 당했다. 도시의 규모를 고려할 때 그것은 전쟁 중에 발생한 어떤 재앙보다 더 동정을 살 만한 사건이었다. - P602
7권 86장 쉬라쿠사이인들과 그들의 동맹군은 군대를 한데 집결시킨 다음 전리품을 챙기고 되도록 많은 포로를 끌고 도시로 돌아갔다. 그들은 끌고간 아테나이인들과 그들의 동맹군 포로를 채석장들에 수용했는데 그것이 이들을 붙들어두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는, 귈립포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목을 베었다. 귈립포스가 반대했던 이유는, 승리한 데다 적정들을 라케다이몬으로 끌고 가기까지 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략) 일부 쉬라쿠사이인들은 니키아스가 고문당하면 자신들과 접촉한 사실을 토설하여 모두의 성공에 재를 뿌리지 않을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중략) 그래서 이들이 동맹군을 설득하여 그를 처형하게 했다. 그러나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 시대의 헬라스인들 중에서는 그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평생토록 덕을 함양하고 실천하는 일에 헌신했으니 말이다. - P649
7권 87장 쉬라쿠사이인들은 채석장들에 수용된 포로를 가혹하게 다루었다. 그들은 좁은 구덩이에 다수가 한꺼번에 갇혀 있는 데다 지붕이 없어서 처음에는 뙤약볕과 숨 막히는 더위 때문에 고생이 심했고, 가을로 접어들면서는 밤공기가 싸늘해지자 급변하는 기온 탓에 환자가 속출했다. 공간이 협소한 까닭에 그들은 모든 것을 한곳에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부상이나 기온 변화 등으로 죽은 자들의 시신이 켜켜로 쌓여 있어 악취가 진동했다. 그들은 또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렸다. 8개월 동안 그들에게는 1인당 하루에 물 1코튈레(4분의 1리터)와 곡식 2코튈레씩 배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런 곳에 갇힌 자들이 겪을 것으로 생각되는 온갖 고통을 겪었다. 약 70일 동안 포로들은 모두 그렇게 살았다. 그 뒤 아테나이인들과 그들 편에서 싸운 시켈리아나 이탈리아의 헬라스인 이주민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노예로 팔렸다. 포로들의 수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분명 7천 명을 밑돌지는 않았다. - P650
8권 1장 이 소식이 아테나이에 전해지자, 사람들은 현장에서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 도주해온 병사들한테서 정확한 보고를 받고도 한동안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군대가 전멸했다는 것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 되자 그들은 마치 자기들은 거기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은 양 원정을 촉구한 정치가들을 원망했으며, 예언자들과 점쟁이들과 그 밖에 그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탁을 풀이하며 자신들에게 시켈리아를 정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불어넣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격분했다. 어느 쪽을 보아도 고통밖에 없어서, 이번 사건으로 그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유례없이 경악했다. - P654
8권 1장 하지만 그들은 자원이 남이 있는 한 항복하지 않았고, 대신 어디든 구할 수 있는 곳에서 선재를 구해와 함대를 의장하고, 군자금을 모으고, 동맹국들, 특히 에우보이아가 여전히 우군으로 남도록 노력하기로 결정했다. 또 국고 지출에 경제와 개혁의 원리를 도입하고,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의제를 사전 협의할 수 있도록 원로회를 선출하기로 결의했다. 민주정체에서 흔히 그러하듯, 민중은 이제 공포감이 휩싸인 나머지 어떤 종류의 규율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결의 사항들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다. - P655
8권 82장 그 밖에도 이런저런 말을 듣고 사모스의 아테나이인들은 즉시 알키비아데스를 이전의 장군들과 함께하도록 장군으로 뽑아서 모든 것을 그에게 일임했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이 무사히 구원받고 4백 인을 응징하게 될 것이라는 현재의 희망을 세상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약속에 현혹되어 그들은 적군이 지척에 있다는 사실도 무시하고 당장이라도 페이라이에우스 항을 향해 출발하고자 했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다수가 재촉하는데도 가까이 있는 적군에게 등을 돌리고 페이라이에우스 항으로 항해하기를 딱 잘라 거절했다. 그는 이제 장군으로 선출된 만큼 먼저 배를 타고 팃사페르네스를 찾아가 전쟁을 수행하 계획을 짜야 한다고 말했다. (중략) 사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나이인들을 팃사페르네스에 대한 압력 수단으로, 팃사페르네스를 아테나이인들에 대한 압력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 P714
8권 86장 그리고 5천 인도 모두 번갈아 정부에 참여하고 있으며, 병사들의 가족들은 카이레아스가 모함하려고 보고한 것과 달리 학대받기는커녕 아무 피해도 입지 않고 안전하게 자신의 재산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사절단은 그 밖에도 많은 말을 했지만, 청중은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병사들은 다시 분통을 터뜨리며 이런저런 제안을 했는데, 대부분이 페이라이에우스를 공격하자고 했다. 이때 알키비아데스가 처음으로 조국에 크게 공헌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모스의 아테나이인들이 본국의 동포들을 공격하려고 출항하려 했을 때그랬더라면 적군은 의심의 여지없이 당장 이오니아 지방과 헬레스폰토스를 점령했을 것이다) 알키비아데스가 그들을 제지했으니 말이다. 그 순간 다른 사람은 아무도 군중을 제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본국의 동포들을 공격하려고 출항하는 것을 막았으며, 私感에서 사절단에게 분통을 터뜨리는 것은 창피한 짓이라고 나무라며 그러지 못하게 제지했다. - P718
8권 96장 에우보이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해지자 아테나이인들은 전에 없이 공황 상태에 빠졌다. 당시에는 엄청나 보이던 시켈리아의 대참사도, 그 밖의 다른 일도, 아테나이인들을 이처럼 두려움에 휩싸이게 하지는 않았다. 하긴 어떻게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모스에 있는 군대는 반란을 일으켰고, 예비 함선들도 거기에 승선할 선원도 남아있지 않았으며, 본국에서는 당파싸움으로 언제 내전이 벌어질지 모르는 마당에 함대를 잃고, 설상가상으로 앗티케 자체보다 더 중요한 생명선인 에우보이아마저 잃는 이런 엄청난 타격을 받았는데. 그러나 그들의 가장 크고 가장 직접적인 두려움은 적군이 승리에 고무되어 지킬 함대도 없는 페이라이에우스 항으로 곧장 자신들을 공격해 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당장이라도 적군이 그곳에 나타날 것으로 예상했다. - P729
8권 96장 아닌 게 아니라 펠로폰네소스인들이 좀 더 대담했더라면 어렵지 않게 그렇게 할 수 잇었을 것이다. (중략) 그러나 전에도 여러 번 그런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도 라케다이몬인들은 아테나이인들에게 가장 상대하기 편한 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해양 국가인 아테나이에는 민족성의 현격한 차이가 큰 도움이 되었는데, 말하자면 아테나이인들은 민첩하고 진취적인 데 반해 라케다이몬인들은 느리고 모험을 싫어했다. 이 점은 쉬라쿠사이인들에 의해 입증되었다. 그들은 아테나이인들과 성격이 가장 비슷했고, 그래서 이들을 상대로 가장 잘 싸웠던 것이다. - P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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