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얼 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 - 서양과 나머지 세계
니얼 퍼거슨 지음, 구세희.김정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역사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냥저냥 재미나게 술술 읽히는 책. 시시콜콜한 에피소드들이 많아서 읽기에 즐거웠다. 저자의 국가적, 사회적, 종교적 배경과 그에 따른 입장들이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에 좀 웃었다. 서양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책에 대해서 "나는 킹 제임스 성경, 뉴턴의 '프린키피아', 로크의 '정부론', 스미스의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고찰', 다윈의 '종의 기원'을 꼽고 싶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라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링컨과 처칠의 연설문 등이 있다. 나의 코란으로 단 한 권을 고르라면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전체가 될 것이다." 란다. 이 못 말릴 영국인(사실은 스코틀랜드 출신). -_-

74
Conceptio culpa. Nasci pena. Labor vita. Necesse mori.

143-145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 경은 친구에게 이렇게 써보낸 적이 있다. "영국에서 유행하는 악습은 매춘과 음주고, 투르크에서는 남색과 흡연이라네. 우리는 여자와 술을 더 좋아하고 그들은 담배와 남색 상대를 더 좋아하는 셈이지." 아이러니하게도 개화된 전제주의의 선구자 프리드리히 대왕이 젊어서 오스만 궁전에서 살았더라면 더 행복했을지 모른다. 상당히 예민하고 지적이면서 동성애 성향이 있던 그는 성마르고 과시하기 좋아하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밑에서 금욕적이고, 때로는 가학적이기까지 한 교육을 받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담배 내각’의 상스러운 술친구들과 긴장을 푼 반면 그의 아들(프리드리히 2세)은 역사, 음악, 철학에서 위안을 찾았다. 엄격한 아버지의 눈에 그는 ‘남자다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말도 못 타고 총도 쏠 줄 모르며, 지저분한 데다 머리도 자르지 않고 사내가 바보같이 머리나 마는 여성스러운 소년’이었다. 프리드리히가 프로이센에서 도망치려다 붙잡혔을 때, 아버지 빌헬름 1세는 아들을 퀴스트린 성에 가두고 아들의 탈출 계획을 도운 친구 한스 헤르만 폰 카테(Hans Hermann von Katte)가 참수되는 모습을 지켜보게 했다. 친구의 시신과 잘려나간 머리는 왕세자 방에서 내다보이는 곳 바닥에 놓아두었다. 그는 퀴스트린에서 2년이나 갇혀 지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 군대를 향한 아버지의 열정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골츠 연대의 대장으로서 군사적 기술들을 연마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기술들은 적의 공격을 받기 쉬운 프로이센의 지리적 약점을 보완하고 주앙유럽을 가로질러 세력을 확장해나갈 때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었다. 프리드리히는 통치 기간에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8만 병력을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인 19만 5000명으로 키웠다. 프리드리히의 통치 기간이 끝날 무렵인 1786년에 프로이센은 백성 29명당 1명의 군사 규모로, 상대적으로 따져 보았을 때 세계에서 가장 군국화되어 있었다. 또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와 달리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군대를 전쟁터에 전략적으로 배치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1740년 왕으로 즉위한 몇 달 만에 그는 오스트리아부터 슐레지엔에 이르는 부유한 지방을 손에 넣어 유럽 대륙을 충격에 빠뜨렸다.


155-156
오늘날 포츠담은 여름에는 먼지 자욱하고 겨울에는 황량한 베를린의 또다른 초라한 교외에 불과하다. 구동독의 전형적인 특징인 흉측한 건물들로 지저분해진 풍경은 마치 거기에 ‘사회주의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대왕 시대 포츠담 주민들은 대부분 군이었다. 또 포츠담에 있는 건물들은 거의 모두 군사적 목적이나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영화 박물관은 원래 오랑주리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졌으나 이후 기병대의 마구간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시의 중심부를 걷다 보면 군 고아원, 연병장, 옛 승마 학교를 지나게 된다. 린덴 거리와 샤를로텐 거리가 만나는 곳에 군대 장식품으로 가득한 곳은 예전에 감시소였다. 당시에는 일반 주택도 꼭대기를 군인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한 층 더 지었다.
포츠담은 프로이센의 축소판 또는 캐리커처라 할 만한 곳이었다. 프리드리히의 부관 게로르크 하인리히 폰 베렌호르스트(Gerg Heinrich von Berenhorst)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프로이센은 군대를 거느린 국가가 아니라 국가를 거느린 군대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센의 군대는 단순히 왕권의 수단이 아니라 프로이센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였다. 지주들은 군대 지휘관으로 활동하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신체 건강한 소작농들은 사병으로서 외국 용병들을 대신했다. 프로이센이 곧 거대한 군대였고, 군대가 곧 프로이센이었다. 프리드리히 정권 말기에는 프로이센 인구 3퍼센트 이상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2배가 넘는 비율이었다.

296-300
1904년 8월 11일, 바터베르크 고원 근처에서 벌어진 하마카리 전투는 전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학살이었다. 헤레로족은 커다란 야영지에 모여 있었고 얼마 전 한 차례 독일군을 쫓아낸 터라 일종의 평화 협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트로타는 그들을 포위하고 맥심 총으로 대량 사격을 퍼부었다. 남자, 여자, 아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쓸어버렸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토로타의 의도대로 오마헤케 사막으로 도망쳤다. 장군의 말을 빌리면 ‘최후를 맞으러’ 간 것이었다. 사막 가장자리의 샘들은 독일군의 살벌한 감시를 받았다. 남서아프리카 참모의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물이 없는 오마헤케 사막은 독일군의 총이 시작한 일을 마무리지어 주었다. 바로 헤레로족의 박멸이었다." (중략) 폭동에 참여하지 않은 헤레로족은 정착민으로 구성된 "정화 정찰대(schuztruppen)’의 손에 붙잡혔다. 그들의 모토는 ‘모두 없어질 때까지 몰아내고, 매달고, 쏘아 죽이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하지 않은 사람, 주로 여자와 아이들은 다섯 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나중에 나마족도 이 수용소에 들어왔다. 반독일 폭동에 가담하는 실수도 모자라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독일군의 말만 믿고 무기를 내려놓는 더 큰 실수를 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수용소는 영국군이 보어 전쟁 당시 남아프리카에 세운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곳에서는 게릴라전이 한창이었고 그런 수용소의 목적은 보어군 보급 전선을 교란하는 것이었다. 사망률이 그리도 높았던 것은 위생 상태가 심각해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온 것뿐이었다. 하지만 독일이 다스리던 남서아프리카에서는 전쟁은 이미 끝났고, 그런 수용소는 죽음의 수용소로 만들기 위해 세워진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것은 뤼데리츠 근처의 상어 섬이었다. (중략) 반란 전 헤레로족은 8만 명에 이르렀으나 그 후에는 겨우 1만 5000명만 남았다. 나마족은 2만 명이 있었으나 1911년 인구조사를 했을 때에는 1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 나마족 죄수는 겨우 열 명당 한 명꼴로 살아서 수용소를 나갔다. (중략)
하지만 섬뜩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혹시 남서아프리카가 미래의 훨씬 더 큰 규모의 대량 학살을 위한 시험장은 아니었을까? 콘래드가 소설 ‘암흑의 핵심’에서 이야기했듯 유럽인이 아프리카를 개화하는 대신 아프리카가 유럽인들을 야만인으로 바꾸어놓은 것은 아닐까? 진정한 핵심은 어디인가? 아프리카인가? 아니면 아프리카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함께 유럽 문명이 수출한 것 중 가장 치명적인 사이비 인종 과학 실험실로 취급한 유럽인들인가? 아프리카인들을 향한 잔인한 행위는 나중에 끔찍한 방식으로 되돌아올 것이었다. 인종 이론은 식민지라는 변방에만 국한되기에는 너무나도 사악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기가 밝아오면서 그것은 유럽으로 돌아왔다. 서양 문명은 곧 가장 위험한 적을 만나게 돌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