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0 1장 ‘노동의 의미: 노동 윤리의 생산’은 노동윤리의 기원을 살펴본다. 노동윤리는 근대 시대 초기부터 빈곤층을 정규 공장 노동으로 유인하고, 빈곤을 뿌리 뽑고, 사회안정을 확립하는, 이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해결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실제로 노동윤리는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새로운 공장제도가 자리 잡는 데에 필요한 복종을 가르쳤다. 2장 ‘노동윤리에서 소비미학으로’에서는 근대 사회가 초기에서 후기 단계로 꾸준히 이행해 가는 과정을 다룬다. ‘생산자의 사회’에서 ‘소비자의 사회’로, 노동윤리가 이끌어가는 사회에서 소비의 미학이 지배하는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소비자 사회에서 대량 생산은 더 이상 대규모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난날 ‘산업예비군’이었던 빈곤층은 ‘결함 있는 소비자’로 다시 정의된다. 이로써 이들에게는 쓸모 있는 사회적 역할-실제적이든 잠재적이든-이 주어지지 않으며, 그것은 빈곤층의 사회적 지위와 그 개선 가능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아래에 계속)
(위에서 계속) 3장 ‘복지국가의 성장과 몰락’은 복지국가의 성장과 몰락을 추적한다. 그것이 2장에서 설명한 이행 과정과 얼마나 연관이 있는지, 그리고 개인의 불행에 관하여 집합적 책임을 지지하는 대중적 합의가 갑작스레 등장하는 배경, 또한 오늘날에 와서는 그 원칙에 반대하는 합의가 지난날처럼 갑작스레 등장하는 배경을 살펴본다. 4장 ‘노동윤리와 새로운 빈곤층’은 그 모든 것의 결과로서, 빈곤층이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문화적으로 정의되는 방식을 다룬다. 최근에 유행하는 개념인 ‘최하층계급’을 탐구하며, 그것이 궁핍의 광범위한 형태와 원인을 권력의 지원 속에 하나의 범주로 응축시키는 도구로 주로 이용되고 있음을 밝힌다. 그 하나의 범주에 속하게 된 이들은 그들 모두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결점으로 뒤덮인 이미지를 지니게 되고, 따라서 하나의 ‘사회 문제’로 드러난다. (아래에 계속)
(위에서 계속) 5장 ‘세계화 속의 노동과 잉여’에서는 빈곤층과 빈곤의 미래를 고찰한다. 또한 노동윤리가 오늘날 발전된 사회의 상황에 더 적절한, 새로운 의미를 줄 수 있을지 살펴본다. 실재하지 않는 사회를 측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통적인 도구의 힘을 빌어 빈곤을 퇴치하고 정복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생계의 권리를 노동력 판매로부터 ‘분리’하고, 사회적으로 인식된 노동의 개념을 노동시장이 인정하는 개념을 넘어서 확장시키는 것 같은, 새로운 해법을 찾아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런 질문들을 마주하여 실제적인 해법을 찾아내는 일은 얼마나 절박한 것인가?
73-74 빈곤이라는 현상은 물질적 결핍과 신체적 고통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가난은 사회적이면서 심리학적인 조건이기도 하다. 인간 실존의 적절성이 그 사회가 정의하는 남부럽잖은 생활수준에 따라 측정될 때, 그 수준을 지키지 못하는 무능력은 그 자체로 괴로움과 고통, 굴욕의 원인이다. 그것은 ‘정상의 삶’이라고 인정되는 모든 것에서 배제되었음을 뜻한다. 그것은 ‘기준에 미치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 결과 자존감이 낮아지고 수치스러움이나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가난은 또한 그 사회에서 ‘행복한 삶’이라고 여겨지는 기회들과 단절되고 ‘삶이 제공해야 하는 것’을 받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 결과 분노와 적의가 생기고, 그것은 폭력 행위나 자기 경멸의 형태로, 또는 둘 다로 배출된다. (아래에 계속)
(위에서 계속) 소비자 사회에서 ‘정상의 삶’이란 소비자의 삶이고, 소비자들은 공개적으로 전시되는, 만족과 생생한 경험의 기회들 가운데에서 선택하느라 바쁘다. ‘행복한 삶’은 많은 기회를 거의 또는 전혀 놓치지 않고 붙잡는 것으로 정의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망하는 기회를 잡아야 하고, 그 기회를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잡아서는 안 되며 되도록 먼저 잡아야 한다. 다른 모든 형태의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비자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은 행복한 삶은 말할 것도 없고 정상의 삶에 다가갈 수 없는 이들이다. 그러나 소비자 사회에서 또는 단순히 정상의 삶에 다가갈 수 없다는 건 부족한 소비자, 또는 결함 있는 소비자가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소비자 사회에서 빈곤층은 무엇보다도 흠과 결점이 있고 그릇되며 모자란 –다시 말해 부적합한- 소비자라고 사회적으로 정의되고 스스로 정의된다.
78-79 제러미 시브룩 Jeremy Seabrook이 독자들에게 상기시키듯이, 오늘날 사회의 비밀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주관적 결핍감의 개발’에 있다. ‘사람들이 현재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사회의 기초 원리에 ‘가장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유한 이들이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그 모든 것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지금 갖고 있는 것은 무시되고 위축되고 왜소해져야 한다. ‘부자는 보편적인 숭배의 대상이 된다.’
208-211 오늘날 빈민들의 고통은 공동의 대의로 수렴되지 않는다. 결함이 있는 소비자들은 혼자서 쓸쓸하게 자신의 상처를 쓰다듬는다. 기껏해야 아직 해체되지 않은 가족들, 비슷하게 가난한 친구들과 함께 상심을 달래는 게 고작이다. 결함 있는 소비자들은 외롭고 버려졌다고 느낀다. 오랜 기간 혼자 버려지면 그들은 외톨이가 된다. 그들은 사회가 어떻게 돕는지 알지 못하고, 도움을 받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으며, 축구 도박이나 복권 당첨 말고 어떤 것이 자신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는다. (아래에 계속)
(위에서 계속) 불필요하고 쓸모가 없고 버려진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가장 간단한 대답은 이것이다. 눈밖에 있다. 먼저 그들은 새로운 소비자 사회의 내부인인 우리가 다니는 거리와 공공장소에서 사라져야 한다. (중략) 신체적 격리를 완벽하게 하기 위해 정신적 분리로 보완할 수 있다. 그러면 빈민들이 도덕적 공감의 세계로부터 분리된다. 빈민들을 거리에서 없애는 한편으로 그들을 인간 사회에서, 윤리적 의무의 세계에서 쫓아낸다. 그 방법은 궁핍의 언어로 씌어졌던 이야기를 타락의 언어로 다시 쓰는 것이다. 평상시의 질서에 문제가 감지되어 대중적 항의가 일어날 때마다 그에 맞춰 검거되는 ‘유력한 용의자들’은 빈곤층에서 제공된다. 빈곤층은 죄를 짓고 도덕 기준이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미디어는 기꺼이 경찰과 협력하여, 선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대중들에게 범죄, 마약, 난교에 빠진 ‘범죄 분자’들이 등장하는 선정적인 장면을 보여 준다. 범죄 분자들은 비열한 거리의 어둠 속에 은신한다. (아래에 계속)
(위에서 계속) 이에 따라 빈곤의 문제가 무엇보다도, 그리고 아마도 법과 질서의 문제일 뿐이라는 요지가 전달된다. 빈곤의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은 범법 행위에 대처하는 방식과 같아야 한다. 인간 사회에서 대중의 의식에서도 사라진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안다. 순전히 민폐로 전락한 하나의 현상 전체를 제거하려는 유혹은 강렬하다. 그 현상은 고통 받는 타인을 보고 생겨나는 윤리적인 마음으로도 완화시키거나 누그러뜨릴 수 없다. 옥에 티를 없애려는, 질서 잡힌 세상과 정상적 사회라는 깨끗한 캔버스에 떨어진 얼룩을 지우려는 유혹은 강하다. 알랭 핑켈크로트 Alain Finkielkraut는 최근의 저서에서, 윤리적인 마음이 사실상 침묵하고, 공감이 사라지고, 도덕적 장벽이 걷힐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우리를 일깨워 준다. (아래에 계속)
(위에서 계속) "나치 폭력이 저질러진 건 폭력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이었다. 가학증 때문이 아니라 장점 때문에, 즐거워서가 아니라 수단이기 때문에, 야만스러운 충동을 발산하고 양심의 가책을 외면해서가 아니라 상위 가치라는 이름으로, 전문적 능력과 앞으로 꾸준히 수행될 과제를 갖고 저질러졌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그 폭력은 사람들의 침묵 속에서 저질러진 것이었다. 스스로 품위 있고 윤리적이라고 생각했으나, 폭력의 희생자들, 오래 전에 이미 인류 가족의 구성원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이들이 왜 자신들의 도덕적 공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이 침묵을 지킬 때 저질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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