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이제 서양에서 저항과 협력을 윤리적으로 판단하는 일은 중심과제가 되지 못한다. 강제력에 대한 협조는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인정받게 된 것이다. 협력은 복잡한 이슈이며 다양한 형태를 취했다는 사실도 당연시된다. 우리 사회에서 발견되는 "저항하지 않으면 다 협력자"라는 식의 이분법적 판단은 서양 학계에서 이미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다. 태평양전쟁 중 일본에 중국 지역을 연구한 브룩(Timothy Brook)은 언뜻 보기에 협력은 민족주의의 반대 같지만, 20세기에 나타난 협력은 전적으로 민족주의적 용어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협력주의자나 민족주의자는 그 신념에서 다를 바 없으며 그들은 모두 민족의 언어로, 민족을 대신해서, 민족의 이익을 위해 발언했다는 것이다.
80 한편, 저항과 협력은 권력의 분배와 연관되어 있었다. 호프만(Stanley Hoffmann)은 프랑스의 군사적 패배가 권력 구조 밖에 있던 많은 사람에게 기득권층과의 사적인 관계를 청산할 기회를 제공했다고 지적한다. 아프리카 토착사회에서도 억압받은 집단들의 권위주의자적 지배자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제국주의 세력에 협력하였다. 일본에 점령된 중국에 대한 연구도 협력자들은 국민당 정부하에서 닫혀 있던 정치적 기회의 개방을 바랐고 그 기회를 이용했으며 중국인 협력자 가운데서는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도 많이 포함되었다고 지적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대중은 굳이 협력에 동좋지 않았다고 해서 저항을 지지한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놀랄 정도의 수동적 태도를 보였는데,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하루하루 삶의 어려움, 그리고 당국의 정책이 그러한 태도를 더욱 조장하였다. 최근 연구는 평범한 사람들은 일상생활에 대한 관심에 지배되기에 저항에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적대적이 될 수 있으며, 지배체제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도 대결을 피하며, 레지스탕스에 적대감을 보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어찌 되었든 일상생활을 영위한 대중의 협력 행위와 그들의 상충하는 목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98-99 더욱 중요한 사실은 윤치호에게 자유란 우선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의미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는 영국을 세계 최고 수준의 문명국으로 인정하였는데, 그는 영국인들이 이 세상의 "실질적 지배자"가 된 이유를 "개인의 독립을 공동체적 의존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 데서 찾았다. 윤치호는 민족을 위하여 개인의 복리를 희생하라고 강요하는 폭력을 거부하였다. 당시 위세를 떨치던 민족주의의 조류 속에서도 ‘민족’이라는 집단적 관념에서 역사를 바라보지 않고 개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점은 놀랄 만하다.
101-102 19세기 말 조선왕조가 극도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윤치호는 조선이 청나라의 지배에 떨어지는 것보다는 영국이나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되면 나라가 망한다 해도 조선 사람들은 많은 부분 "고통이 제거"된 상황을 맞을 것이고 "여러 이득"을 향유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국가가 사라지도 지배층이 변하여도 국민 개개인이 예전보다 더 많은 안정과 행복을 얻게 되면 그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국가의 목적은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유지해 주는 것이고 만약 정부가 포악하여 국민을 압제하고 수탈한다면, 그런 정부하의 독립이란 무의미한 것이 되며, 동족에 의한 가혹한 통치보다는 오히려 이민족에 의한 관대한 지배가 낫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106 "물지 못하면 짓지도 마라"가 이를테면 윤치호의 좌우명이었고, "물지도 못하면서 방바닥을 두드리며 울부짖는" 조선 사람들을 가엾게 여겼다. 3.1운동 당시 윤치호는 만세만 가지고는 절대로 일본을 굴복시킬 수 없으며 일본인들은 무장하지 않은 저항에는 꼼짝도 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였다. 외치는 것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아무리 정당해도 일본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만들 힘이 없는 한, 그러한 선동은 조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 세상은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를 쫓아내는 곳이다. 울고 짜고 해봐야 소용없다." "조선 민족은 이 철과 혈의 세상이 어린아이 같은 울음으로 제거되기라고 믿는 어리석음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따라서 윤치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고나 그리스같은 작은 나라들이 히틀러의 잔인한 세력에 저항했을 때 감탄하기보다는 이상하게 여긴다.
120 윤치호는 무엇보다도 3.1운동에 동조하지 않았기에 친일파라는 악명을 얻었는데, 그가 반대한 이유는 국민이 독립이 무엇인지를 모르면서 단지 선동에 따라 독립을 외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즉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듯이 독립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선동가들에게 설득당하거나 협박당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일본의 과도한 반응을 비난하고, 애국심이 발동한 젊은이들이 위험을 향해 뛰어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지만, 동시에 그들을 그런 死地로 몰아넣는 "무책임한 선동가"들에게 분노를 느꼈다.
111-113 조선 정부의 행태에 대한 윤치호의 비판은 러일전쟁 시기에 최고조에 달하였다. 2주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이 러시아를 묵덴에서 몰아내고, 일본 정부는 조선을 노예로 만들려는 정책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데,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조선의 황제는 "관직을 팔아넘기고, 장난감 궁궐을 짓고, 굿을 해서 산천의 신들에게 러시아가 이길 것을 빌고 있다"는 것이었다. 윤치호가 판단하기에 다른 사람들도 황제를 혐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중략) 또한 왕비 민씨에 대해서 윤치호는 한 마디로 "그 영리하고 이기적인 여인이 미신 섬기는 것의 반만큼이라도 백성을 열심히 섬겼더라면 그녀의 왕실은 오늘 안전했을 것"이라고 평했다. 권좌에 있는 내내 왕비의 신념은 "우리 세 사람만 안전하다면 무슨 일이든 일어나도 상관없다"였다. 그 세 사람은 왕, 왕비, 왕자인데, 그러한 극단적인 이기심이 파멸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129 윤치호는 경제적 도움을 줄 때에도 실용성 여부를 가장 먼저 고려하였다. 많은 사람이 윤치호에게 경제적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예를 들어 하루 한나절 사이에 아홉 명이 찾아와 돈을 요구한 적도 있었다. 그는 실용적인 공부를 하겠다는 학생들에게 기꺼이 도움을 주었고 실용적 결과과 예상되는 제안을 하는 사람에게 돈을 대주었다. 그러나 그는 철학을 공부한다는 조선 학생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영국에 유하한 5촌 윤보선이 "단지 문학공부를 위해!" 학비로 800파운드를 보내 달라고 했다는 사실에 고소를 금치 못한다. 윤치호는 또한 동경에 있는 조선 유학생들의 99%가 사회학, 철학, 정치학 등에 "코를 묻고" 있는데 그들의 "게으른 혀를 굴리는 데 사회주의는 이상적인 분야"라고 조롱조로 적고 있다.
143 윤치호가 공산주의를 싫어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연구자들은 그가 공산주의를 싫어한 이유를 그의 보수적 성향에서 찾지만, 사실상 그 혐오감의 핵심은 공산주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결국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남의 노고에 얹혀살기를 조장한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점에서 유교 사회의 윤리와 공산주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보았다. "조금 먹고 살 만한 사람들에게 달라붙어 있는" 친척, 친구들을 볼 때 조선은 옛날 옛적부터 공산주의를 해왔다는 것이 윤치호의 주장이다. 조선 사람들이 볼셰비즘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이유도 유교와 공산주의의 기생주의가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데 공산주의는 유교보다 더 나쁘다. 유교는 구걸하는 것을 용서할 만한 ‘약점’으로 만들지만, 조선 버전의 볼셰비즘은 강도짓을 ‘무산자의 영광’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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