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 역사를 경계하여 미래를 대비하라, 오늘에 되새기는 임진왜란 통한의 기록 한국고전 기록문학 시리즈 1
류성룡 지음, 오세진 외 역해 / 홍익 / 201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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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87
저녁이 되자 임금께서는 개성부에 묵었다. 임금께서 남문 밖 관청에 행사하셨는데, 대간들이 교대로 글을 올려 영의정 이산해가 사람들과 결탁하여 나라를 그르쳤다며 탄핵을 주장했다. 그러나 임금은 이를 윤허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다음 날에도 대간들이 계속 파직을 요청해 결국 영의정이 파면되었다. 내가 영의정으로 승진하고 최흥원은 좌의정에 윤두수는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신할을 해임하고 개성부로 오게 하였다. 이날 정오에 임금께서 친히 개성의 남성 문루에 가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각자 생각하는 것을 말하게 하였다. 그러자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서 엎드리나 임금께서 물으셨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가?" 그 사람이 대답했다. "바라옵건대 정 정승을 불러들이시옵소서." 이때 정철은 평안북도 강계에 귀양 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임금께서 "잘 알았다."라고 대답하시고는 즉시 정철을 불러 행재소에 오도록 명하시고 저녁에 행궁으로 돌아오셨다. 나는 죄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유홍을 우의정으로 삼고 최홍원과 윤두수가 차례로 승진해 영의정과 좌의정이 되었다. 왜군이 아직 한양에 이르지 않았다는 소식이 들리자 사람들은 모두 임금이 한양을 버리고 떠난 것은 실수였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승지 신잡을 한양으로 보내 형세를 살피고 오도록 하였다. 5월 3일에 왜군이 한양에 들어오니 유도대장 이양원과 도원수 김명원은 모두 도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201
하루는 명나라의 여러 장수들이 식량이 떨어졌다는 핑계를 대며 제독에게 군사를 데리고 돌아가자고 청하였다. 이에 제독이 화를 내며 나와 호조판서 이성중, 경기 좌도 관찰사 이정형을 불러서 뜰 아래 무릎을 꿇게 하고는 큰소리로 꾸짖으며 군법을 시행하려고 하였다. 나는 계속해서 사죄하다가 나랏일이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제독이 나를 불쌍하게 여겼는지 다시 명나라 장수들에게 화를 내며 말하였다.
"너희들이 예전에 나를 따라 西夏를 정벌할 때, 군사들이 여러 날 동안 먹지 못하여도 감히 돌아가자는 말을 하지 못하였고 결국에는 대업을 이루었다. 그런데 지금 조선에서 우연히 며칠 동안 식량을 공급받지 못하였다고 감히 회군하자는 말을 하는가? 너희들은 가고 싶으면 떠나라. 나는 적을 섬멸하지 않고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나 응당 말가죽으로 내 시신을 싸소 돌아갈 뿐이다."
제독의 말에 여러 장수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였다. 문 밖으로 나와서 나는 제때 식량을 공급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개성 경력 심예겸의 곤장을 쳤다. 그 뒤 강화에서 식량을 실은 배 수십 척이 있다라 서강 뒤편에 도착하여 겨우 무사할 수 있었다. 이날 저녁에 제독은 총병 장세작을 보내 나를 위로하고 또 군사에 관해 논의하였다.

293
우리나라 사신이 북경에서 돌아오면서 금석산의 하씨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 묵은 적이 있는데, 그 집의 주인이 이런 말을 하였다.
"조선의 역관들이 ‘당신에게 3년 묵은 술, 5년 묵은 술이 있으면 아끼지 말고 즐겁게 드시오. 오래지 않아 병란이 일어나면 당신에게 술이 있다 한들 누가 그 술을 마시겠소?’라고 하였다네. 이 말 때문에 요동 사람들은 조선이 중국에 대해 다른 뜻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고 많은 사람이 놀라고 당혹스러워한다네."
사신이 돌아와서 그 일을 아뢰자 조정에서는 역관 중 반드시 말을 만들어내고 사건을 일으켜 나라를 모함하려는 자가 있다고 판단했다. 여러 역관들을 잡아다가 인정전 뜰에서 국문하여 압슬과 단근질까지 하였으나 모두 인정하지 않고 죽어버렸다. 이는 신묘년에 일어난 일로, 이듬해인 임진년에 과연 왜변이 일어났다.

322-334
심유경은 평양에서 적진을 오가며 적지 않게 애를 썼다. 그러나 그는 강화를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최후에 왜군은 오랫동안 부산에 머무르며 바다를 건너가지 않았다. 그때 명나라 책봉 사절 이종성이 적진에서 도망쳐서 돌아갔다. 그러자 명나라 조정에서는 심유경을 부사로 삼아 정사 양방형과 함께 왜국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나 끝내 성과를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고니시 유카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등도 돌아와 해안 지방에 주둔하였다. 이에 명나라와 우리나라에서는 논의가 자자하게 일어나고 그 책임이 모두 심유경에게 돌아갔다. 심지어는 심유경이 왜군과 공모해서 배반할 것 같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우리나라의 승려 송운(사명대사-역주)이 서생포의 적진에 들어가 가토 기요마사를 만나고 돌아오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왜군은 명나라를 침범하려 하고 있으며 도리에 맞지 않는 흉악한 말을 하였다." 이에 즉시 그 내용을 명나라 조정에 자세히 아뢰었다. 이 소식을 들은 명나라 사람들은 더욱 분노하였다. 심유경은 자신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곧 김명원에게 편지를 써서 자초지종을 설명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하고자 하였다.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세월이 빨리 흘러 지나간 일들이 마치 어제 일과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 왜군이 귀국의 국경을 침범하여 바로 평양까지 쳐들어왔으니 그들의 안중에는 원래 조선 팔도는 없었던 것입니다. (중략) 저는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격문을 보내 그를 불러내어 건복산에서 만나 서쪽으로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약속대로 몇 달 동안 감히 서쪽을 넘어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명나라 대군이 도착하여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를 이뤄냈습니다. 만약 그때 제가 오지 않았더라면 왜군은 그 전에 조승훈의 부대를 무찔렀던 기세를 몰아 의주까지 쳐들어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중략) 마침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의 국왕으로 책봉한다는 조건을 걸고 여러 왜장들을 구슬려 부산이라는 궁벽한 바닷가에 그들을 손을 묶어두고 3년간 책봉의 명을 기다리며 감히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이어서 책봉에 대한 논의가 결정되자 저는 명을 받들고 한양에서 양국 간의 화의를 돕고, 귀하와 이덕형 등을 다시 만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지금 왜국에 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책봉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이 물러날지 모르겠습니다. 귀하의 나라에서는 뒷수습을 잘 할 계획이 있습니까?" (중략) 뒷수습을 잘 하는 일은 귀국의 책임이라고 하시고서, 어찌 원대한 계획은 들려오지 않고 황제의 궁궐 아래에서 우는 계획만 있을 분입니까? 병서에서 말하길, 약자는 강자에 맞설 수 없고, 적은 수로 맣은 수를 당해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중략) 저는 귀국의 謀臣과 책사들이 다방면으로 이간질하고 소문을 내어, 안으로는 위태로운 말로 우리 조정의 분노를 사고, 밖으로는 약한 군졸을 도발하게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중략) ‘명나라를 우러러보고 명나라에 의지하는 것을 萬全之計로 여기고, 마땅히 명나라의 명을 따르고 처분을 기다림으로써 무한한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였으니, 부디 잘못된 계책을 써서 날마다 고생만 하고 졸렬한 결과를 맞이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지극히 부탁드리며, 할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이미 줄입니다.

(중략) 평양성 전투 이후에 다시 적진에 들어가는 일을 사람들은 모두 어렵게 여겼다. 심유경이 마침내 무기나 군사가 아닌 언변으로써 많은 왜군들을 몰아내고 수천 리의 땅을 되찾았다. 그런데 마지막 하나의 일이 잘못되어 큰 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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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8-12-10 0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사 교육이 임진왜란의 실상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를 잘 가르쳐 준 책. 국가를 방위할 능력이 없었던 조선을 둘러싸고 명과 일본의 외교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알지 못하면 이 전쟁에 대한 인식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의병 전설은 그야말로 지엽적인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