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잘 둔 덕에 특강할 기회도 많다. 이번 한 달은 온 데 쫓아다니느라  글다운 글 한 줄 못쓰고, 읽어야 할 책은 산더미처럼 밀렸다. 읽고 쓰려 새벽까지 깨어 있느라 크게 좋아하지도 않는 커피만 달고 산다. 이러다가 읽고 써야 할 자로서의 내 정체성을 잃어버릴까봐 조금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노동의 신성함을 그 누구보다 찬양하는 나 같은 사람은 주어진 일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감사히 여기고 열심히 하는 편이다.

 

 

  시간 없어서 글 못쓴다고 하는 건 백프로 핑계다. 번듯한 직장이 있으면서도 독자에게 만족을 주는 글쟁이들이 제법 있지 않은가. 시간 핑계를 대며 글 제대로 쓸 수 없는 자괴심에 빠져 있는데, 그 맘에 한 가지 더 보태는 일이 생길까 걱정이다. 내 특강 주제는 '소중한 나'이다. 한 마디로 스스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인식하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이다. 학업 못지 않게 학생들 정신 건강도 중요하기 때문에 일선 학교에서는 이런 프로그램도 계획했을 것이다. 

 

 

  자아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단계 중 갈등 부분이 있는데, 그 항목 중 하나에 가족과의 갈등도 포함되어 있다. 학생들은 비교적 자신의 심리 상태를 적나라하게 표출한다. 멍석만 잘 깔아주면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내어준 자료지에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써낸다. 자신이 가족에게서 들은 상처의 말들을 적나라하게 적어 보는 코너가 있다. 내가 엄마로서 행한 온갖 악행들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해준 뒤 자신들이 겪은 모욕적인 말들을 적어 보라고 하면 수위 높은 말들이 가끔씩 나온다. 흔하진 않지만 솔직함을 넘어 적나라한 가정사가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수업 자료는 원한다면 담임선생님께 참고가 되라고 제출한다. 대부분 평범한 가정 일상과 학교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가끔 너무 심하다 싶은 자료지를 작성한 학생들이 있다. 언어폭력을 일삼는 부모가 있다는 반증이다. 이런 부모에 대해 아이들은 불신과 원망의 말로 자신의 심정을 대변한다. 이 경우 담임 선생님은 학부모 상담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학업 성취도와 부모에 대한 인식은 별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성취도가 높다고 방치하다 보면 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좀 더 깊은 상담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건, 학생들이 작성한 그 자료가 혹시라도 진실이 아니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재미로 쓴 작성지가 오해를 사서 상담의 대상이 된다면 괜히 내 쪽에서 미안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오래 관찰한 담임 선생님이 그것을 판단하지 못할 리 없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소중한 나를 찾겠다고 특강까지 들었는데, 담임 선생님께 부정적인 이미지만 심어주게 됐다면 이 또한 내 책임이 아닌가 하는 소심증이 발동하는 것이다. 작성지 하나가 아이들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겠지만 괜한 걱정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래 저래 진정으로 '나의 소중함'을 안다는 건 힘들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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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11-27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팜므님.
아이들을 많이 만나시나봐요... 참 예뻐요, 학생들.
예전에 저는 학생들을 겁을 내곤 했는데 - 마치 어찌 다뤄야할지 모르겠는 도자기처럼 - 이제 조금은 익숙해지니, 이쁜 면들과 아픈 면들이 보여요. 아직 성인이 아니라서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이, 두렵게 지내는 아이들을 보면 더욱 속상해집니다. 그래서,

진실이 아닌 자료 한두개 섞여 있더라도
그런 글을 내뱉게 하고 학교에서도 알 수 있게 하시는 일은 정말 좋구나 하고 생각이 들어요.

네, 나의 소중함을 안다는 것은 너무 힘들어요, 저만 해도
이렇게 몸살이 나기 전까지 계속 전전긍긍 일을 벌이거든요..... 에긍...
또 뵐게요.

다크아이즈 2012-11-28 01:50   좋아요 0 | URL
달여우님 학교에 계시는군요. 님처럼 사명감을 가지고 계신 분들 보면 존경스럽습니다. 대부분 이쁜데, 통제 안 되는 아그들은 진짜 대책이 안 서더군요. 몇 십 년 새 학교 환경이 너무 달라져서 신기하게 보였어요.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 식민지 조선을 파고든 근대적 감정의 탄생
소래섭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명랑’의 사전적 뜻은 ‘1.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하다. 2. 유쾌하고 활발하다.’이다. 한데 날씨가 명랑하다, 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 걸로 보아 요즘에는 2번 뜻인 유쾌하고 활발하다, 의 의미로 정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나는 명랑이란 말을 좋아한다. 안부 문자를 보낼 때 습관적으로 ‘명랑, 상큼, 발랄’이라는 말을 자주 쓰기도 한다. 이때의 명랑도 당연히 유쾌하고 활발하다, 의 의미인 것은 자명하다.

 

 

 한데 책 한 권 덕에 이 말에 대한 색다른 의미를 새길 기회가 생겼다. 작가 소래섭 강연을 들은 후였다. 어떻게 하면 시를 노래처럼, 노래를 시처럼 가까이 대할 수 있을까에 대해 청소년들을 상대로 연 인문학 강좌였다. 학생들 못지않게 일반인들에게도 유익한 강연이었다.

 

 

  일제강점기 때의 문학 전반이나 사회상에 관심이 많은 학자로 보이는 그의 몇몇 저서 중 단연 관심 가는 것은 것은『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이다. 당장 빌렸다. 한마디로 ‘명랑’에 관한 의미를 다시 짚어보게 하는 책이다. 작가에 의하면 적어도 일제강점기 때의 ‘명랑’이라는 낱말은 지금의 ‘유쾌하고 활발하다’라는 의미와는 좀 더 다른 의미로 쓰였다. 아마 오늘날의 ‘건전’, ‘모범’ 등의 단어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내려 갈수록 그 숨은 뜻은 ‘체제에 길들임’, ‘불온함을 용납 못함’등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통치 권력 입맛에 맞게 문화 시민으로 길들여지는 상태를 ‘명랑’이란 캐치프레이즈로 삼았던 것이다.

 

  보건, 위생, 치안 등 당시 급격한 도시화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도시 명랑화’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사람의 교양에서부터 도시 문화 전반에 이르기까지 관에서 통제하겠다는 의도였다.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들을 퇴치하는 것이 경성 명랑화의 주된 모토였다. 따라서 명랑의 반대말은 ‘음탕, 불결, 범죄’ 등이 될 수 있었다. 명랑한 것이 아니면 모두 없애야 할 것들이었다. 거리 방역사업에 몰두하고, 분뇨 정비 사업을 벌였으며, 이만 명이 넘는 걸인 퇴치에 사활을 걸었다. 사회 운동으로 시작해 자연스럽게 체제 순응적 모범 인간 만들기 프로젝트로 나아갈 수 있었다. 체제 순응적 학생을 만들고, 대중매체를 통제했으며, 불온한 행위는 퇴출시켰다. 불온한(?) 경성 전체가 명랑화 사업에 동원된 것이다.

 

 

  강요된 건전과 부자연스런 절제가 ‘명랑’이란 말로 포장되었던 당시 사회 의식이 오늘날에도 완전히 고리를 끊었다고는 할 수 없다. 경성의 불온함을 명랑하게 만들고자 했던 것처럼 아직도 우리 사회는 개별자의 건전한 불온조차 허락하지 않는 경직된 사회 구조이다. 프랑스와즈 사강이 말했던가. 사회에 민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통제를 위한 명랑이 아니라 개방을 위한 명랑일 때 ‘명랑’이란 말의 가장 밀도 높은 진정성이 담보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명랑이란 말이 그다지 명랑하게 쓰이지 않는다는 이 씁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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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7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제시대엔 '명랑'이 그런 의미였군요! 조선 시대 한글수필의 '명랑'이랑은 또 다르니, 아마 20세기 일제가 창조한 또 하나의 의미였겠지요. 오늘날은 '명랑'으로 불온을 실천하는 의미의 역전이 또 일어난 듯 하고요. (주로 우석훈씨가 '명랑'을 주장했던가요?) 여튼 잘 배우고 갑니다..^^
(늘 읽기만 하고, 댓글은 첨 단 거 같기도 하고, 전에 한 번 표 내고 간 거 같기도 하고..?!)

다크아이즈 2012-11-28 01:51   좋아요 0 | URL
섬님 브라보! 저야말로 명랑으로 불온을 실천하고픈 일인입니다. ^^*
우석훈의 주장, 제겐 굉장히 유의미하게 다가오네요. 땡깁니다.
 

 

 

 

  나는 숫자만 봐도 경기를 일으키는 부류이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고등학교 이학 년 올라가면서 수학을 포기했다. 미분이 뭔지 적분이 뭔지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는 나 같은 학생들이 많았다. 과외 금지 시대였기 때문에 사교육 열풍 같은 건 없었다. 따라서 상위 그룹 몇몇을 제외하곤 다들 고만고만한 수학 실력을 자랑(?)했다. 수학 좀 못한다고 대학 가는데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으니 행운시기였다고 해도 될라나. 요즘 같으면 어림없는 얘기다. 아직도 꿈속에선 수학 때문에 힘겨웠던 학창시절을 자주 만난다. 수학 또는 숫자에 대한 이런 내 트라우마를 이해 못하는 아들 딸 때문에 가끔 서운할 때가 있다.

 

  네 식구 다 모였다. 건강이나 근황 등 일상적인 얘기 몇 마디를 하고 나면 별 할 말이 없다. 서로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는데 동상이몽이다. 나는 미뤄둔 일거리를 어떻게 해결하나 고심 중이고, 남편은 운동 트레이닝 방식 변경에 신경 쓰는 중이고, 아들은 학창 시절 마지막 축제 준비로 들떠있고, 딸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드라마 주제 피아노곡만 무한 반복 연습 중이다. 진작 가족 공통 관심사를 개발하거나 공통 취미를 연마해둘 걸, 참 따로따로 노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한데 간식 먹을 때,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숫자나 퍼즐 맞추기 게임이 나오자 아들과 딸은 신이 났다. 지들 관심 있는 거 나오니까 저렇게 재밌어한다. 숫자나 도형의 조합을 위해 골머리를 썩이는 게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유도하는 대화에는 시큰둥하다가 하잘것없어 뵈는 숫자 놀이에 몰입하는 게 서운하기만 하다. 오랜만에 모였는데, 내가 낄 자리는 없다.

 

 

  오전에 참석했던 한 특강이 떠올랐다. <3 +4 = ? > 와 <? +? = 7>두 유형에 관한 부분이었다. 어떤 이는 정답이 딱딱 떨어지는 사유체계를 좋아한다. 또 어떤 사람은 정답이야 비록 정해져 있더라도 그 길로 가는 여러 방식을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전자의 경우 애매모호한 것을 못견뎌한다. 정답이 두 개 이상 같아 뵈는 언어 영역 문제들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그래서 정답이 딱 나와야 안심이 되는 수학 과학 같은 과목을 좋아한다. 나 같은 이는 그 반대다. 정답이 똑 떨어지는 수학적, 과학적 경험을 한 적이 거의 없으니 그런 건 생각만 해도 갑갑하고 두렵다. 대신 여러 생각이 가지치기하는 인문학적 책 읽기는 위안도 되고, 소화하기도 쉽다.

                      

 

 

 

 

 

 

 

 

 

 

 

 

 

  한 집안 두 방식이 공존하는 게 신기하다.  나와 성향이 완전히 다른 아이들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지만 거꾸로 걔들 또한 내가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르치거나 강요한다고 성향이 굳어지는 건 아니다. 후천적으로 영향을 받긴 하겠지만 아무리 봐도 성향은 선천적인 게 더 강한 것 같다. 그 선천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명랑한 소통을 모색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듯하다. 식구끼리도 충분히 다를 수 있다. 그건 절대 틀린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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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 자연스럽게 당당하기 프로젝트

 

  그녀는 혼자 뼈다귀해장국집에도 들어갈 줄 안다. 이제 식당에 혼자 들러 삼인 분의 삼겹살을 시켜 먹을 뻔치도 생겼다. 두 판 짜리 세트 피자를 주문하는 일도, 통닭 배달이 늦는 것에 대해 적당히 항의하는 것도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되기까지 몇 개월의 실전 연습이 필요했다. 그녀는 열일곱 살이다.

 

  열일곱은 어른도 아이도 아닌 나이다. 상대가 부모가 아닌 제 삼자의 어른이라면 소통에 아주 난감한 나이가 열일곱 살이다. 상대가 어른이라면 열일곱은 참 애매한 나이이다. 어른을 상대로 단독자로 뭔가를 요청하기엔 시건방져 보일까 걱정하고, 단체로 뭔가를 어필하기에도 반항끼 있어 보일까 애태우는 나이이다. 되바라지지 못한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기성 사회에 편입하는 과정이 쑥스럽고 불편스럽기만 하다.

 

  한 아이를 상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심각한 고민은 아니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적응기를 지켜봐주기만 하면 된다. 전형적 모범생인 그녀 고민의 예는 이런 거다. 배가 고파 분식점에 들어간다 치자. 종업원이 정중히 다가와 주문을 요청하는 일도 없지만, 왠지 자리에 앉아 음식을 시키면 분식점 주인에게 버릇없게 보일까봐 스스로 주방까지 걸어가 우동 한 그릇이요, 하고 조심스레 주문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을 공경하라고 배웠고, 될 수 있으면 모범생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으니까.

 

  주방까지 가서 공손히 음식을 주문한 내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으면 괜찮다. 한데 뭔지 모르게 속이 뒤틀리고 대접 받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자신이 싫다. 어른에게 모범생이고 싶은 욕구와 손님으로서 대접 받고 싶은 당당함이 상충한 것이다. 왠지 당당함을 선택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때부터 홀로서기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피자가 먹고 싶어도 엄마가 시켜주지 않으면 전화 한 통 못하고, 어른 상대라면 혼자서는 스타킹 한 짝도 사기가 어렵다. 어른 도움 없이 식당에 들러 한 끼 사먹는다는 것은 크나큰 용기가 필요하다.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어른들에게 먹히는 것이 싫은데, 자신도 모르게 그들이 원하는 행동에 길들여져 버린다.

 

  그런 자신을 벗어나기 위해 부러 친구들과 삼겹살도 먹으러 가고, 물횟집에도 들러 본다. 뼈다귀해장국집 문도 열어 보고, 피자집에도 주문 전화를 넣어본다. 생각보다 어렵진 않다. 예의를 벗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당당한 소비자 역할을 시도해본다. 의외로 아무렇지 않다. 어른 세계 어느 누구도 당당한 소비자 연습을 하는 열일곱을 질타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당연한 소비자 역할하기가 이리도 어렵다면 그건 기성 사회의 잘못이다.

 

  어른처럼 당당한 열입곱을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니 착한 이미지에 죽고, 모범생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열일곱은 행동거지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열일곱이 위선을 선택하는 건 욕할 일은 아니지만 칭찬할 것도 아니다. 억압된 위선의 부산물이 모범으로 비칠 수 있는 사회라면 그건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그들에게 자연스런 당당함을 연습시키는 건 기성세대가 할 일이다. 연습을 시켜서라도 열일곱 식 자연스러운 당당함은 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플라톤을 배우고 공자를 익히는 것만큼 실전 연습이 필요하다.

 

  17세라면 지금 당장, 엄마 손 빌리지 않고 피자 시키기 프로젝트를 수행할 일이다. 물론, 이미 그런 연습이 필요치 않은 당신들, 17세들도 많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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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1-22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열일곱은 위선이 어울리지 않지요.
차라리 건방이 낫지 싶어요.^^(어른 관점이지만)
좀 착하지 않게 보여도 당당하고 용감하면 좋겠구요.
나의 열일곱이 생각나네요. 조금은 성숙하고 당차고 생각이 많았던, 베레모 그 시절.^^


다크아이즈 2012-11-24 17:18   좋아요 0 | URL
프레님, 저 아이의 사소한 고민이 공감 됐던 건, 다 큰 우리딸도 아직 당당하고 의연한 소비자 역할에서 한참 멀거든요. 피자 한 판 시키는데도 매끄럽지 못해요. 속에 천불 납니다. 시간이 해결하겠지요?

저 아인 스스로 깨치고 예행 연습을 하고 있어서 무척 신선하게 보였답니다.

댈러웨이 2012-11-23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저는 열일곱 살에 이런 고민 안 했던 것 같아요. 모범생처럼은 보이고 싶긴 했지만요. 날라리였나? --; (매일 새벽 이렇게 글 쓰시잖아요. 이보다 더한 자극이 어디 있겠어요, 팜므느와르님!)

다크아이즈 2012-11-24 17:22   좋아요 0 | URL
댈러웨이님, 빙고~~ 저도 소심한 청소년기였는데 의외로 할 말은 할 수 있었던 체질(?)이었던 것 같은데, 소비자로서 안절부절못하거나 지나치게 굽신 모드인 울 아들 같은 놈 보면 약간의 연습이 필요하단 생각이...
저 학생의 사소한 고민이 무척 공감되었답니다.

매혹적인 자극제라면 댈러웨이님 윈!! ^^&
 

 

 

  인터넷 서점을 클릭하면 서재 코너가 있다. 누구나 원하면 자신만의 서재를 가질 수 있다. 그 서재의 여러 역할 중 가장 매력적인 것은 누구나 그곳에 독후감을 올릴 수 있다는 거다. 한데 그곳을 들락거리면서 의아했던 점은 타 분야에 비해 시집 리뷰가 드물다는 것이다.

 

 

  인터넷 서재를 벗어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반 문학 사이트나 개인 블로그에는 그야말로 시가 넘쳐 난다. 우리나라엔 시인만 해도 삼만 명이 넘는다니 그럴 만도 하다. 시인이 많은 나라이니 시집을 읽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들이 감상문을 올린다면 긴 글에 비해 더 많은 편수가 인터넷 서재에 등록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시집 리뷰가 드문 건, 시를 자기 식으로 해설한다는 게 쉽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신춘문예의 계절이 다가온다. 예비 문학도들이 가장 예민해질 시기이다. 젊은 시절부터 신춘문예 당선시집은 웬만하면 사 모았다. 당선시들 중 내 취향에 맞는 작품들을 만나면 심사위원께 큰절을 하고 싶을 정도이다. 어쩜 이리 탁월한 선택을 했을까 싶어서다. 풀썩이는 맘 자락에 단비를 주는 시를 발견하는 시안(詩眼)이라니.

 

 

  나아가 어쩌면 나도 시를 쓸 수 있지 않을까 가늠해보곤 했다. 작은 고민 끝에 얻은 결론은 시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시는 짓는 게 아니라 절로 써지는 거다. 한마디로 그분이 오셔야 된다. 시인은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만들어진 시인은 시인이라 불릴 수는 있겠지만 진짜 시인은 아니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생래적 시인이 못되는 나 같은 사람은 좋은 시를 찾아 감상하면 된다. 시작의 고통을 덜 수 있는데다 영혼의 요기까지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한데 요즘 유행하는 시들을 곁에 두고 읽자니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천상 시인인 사람들이 사라졌을 리는 없다. 문제는 내게 있다. 참신하고 재기발랄한 시들을 접수하기엔 내 문학적 상상력이 너무 늙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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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2012-11-2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그에 빵 터졌어요. 시는, 어려워서, 한 편 한 편 붙잡고 있으면, 마음이 또 심란해지기도 해서, 쉽지가 않아요, 다시 손에 잡기가.

그나저나 저는 팜므느와르님의 어떤 페이퍼를 보고 선생님이라고 갑자기 부르고 싶어졌어요. ㅎㅎ

다크아이즈 2012-11-22 01:14   좋아요 0 | URL
댈러웨이님 맞아요. 시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심란해서 감히 리뷰를 안 올리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 크~ 글에서 빵 터져야 되는데 태그 보고 터지는 분들 더러 있으니 난감일세~ 입니다. ㅎㅎㅎ

선생님과는 거리가 먼 걸요. 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