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記錄 170614
≪낯선 시선≫
p86 ‘어른’의 존재를 당연시하는 심리는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향수 때문이다. 전 前근대저 사고다. ; 그런 면도 있지만, 나는 우리나라의 가부장제에 대한 향수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외에 우리나라의 오랜 특성인 ‘관계성, 가족 확장성, 심정주의’에 대한 향수다. 왜 오랫동안 이런 우리나라의 특성은 불알후드 brotherhood로서 비판받아 왔다. 그러나 다시 공동체 의식, 특히 육아와 관련된 공동체 주의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아이가 원한 것, 따스한 위로가 제공되는 사회는 반대급부로 연장자에 대한 예의와 존경을 바라는 사회이기도 하다.
나의 오랜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은 ‘동전의 앞뒷면으로 비유’되는 서로 상보적인 것을 동시에 주장하는 것이다.
동전이 원판 모양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앞면( 긍정적인 면)의 확대는 뒷면 (부정적인 면)의 확대를 유발한다. 우리나라 사람 심리에 대한 언급한 허태균 교수님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우리 한국사람 스스로가 비판하는 부정적인 심리, 문화는 그 심리 문화로 말미암아 많은 긍정적인 문화와 결과를 남겼다”고 하셨다.
내집단 편향 Ingroup bias. 이 용어는 여러 책에서 접해서 이 내용을 소개할 적절한 책은 떠오르지 않는다.
In-group favoritism, sometimes known as in-group–out-group bias, in-group bias, or intergroup bias, is a pattern of favoring members of one's in-group over out-group members. This can be expressed in evaluation of others, in allocation of resources, and in many other ways (Wikipedia)
알라딘 지인 한분이 평소에 ingroup bias에 대해 불알후드(brotherhood를 의미)라는 약간 비꼬는 형태로 비판을 해 왔다. 그러던 중, 어느 글에서 공동 육아에 대한 글을 올렸다.
- 마립간 ; 과거에 우리나라는 (한국 문화의 특징인) 관계성, 가족 확장성, 심정주의에 의존해서 ; 넘어진 아이들을 자신의 아이들처럼 어른들이 일으켜 주었죠.
- 마립간 ; 관계성, 가족 확장성, 심정주의 ‘의 앞면이 공동체의 공동 육아라면 뒷면은 불알후드 겠죠. 구체적으로는 아이가 원한 것, 따스한 위로에 대한 반대 급부로 연장자에 대한 예의와 존경을 바라는 사회이기도 하고요.
- 알라디너 지인1 ; 양면의 장점만 고루 활용되면 좋은 사회가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a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속한 집단 A 내의 사람에 대해 배려, 존중, 공감 등 뛰어난 인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a 앞에 집단 B에 속한 b라는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a가 b를 도와줄까, 아니면 도와주지 않을까? 나는 도와주는 것에 내기를 걸겠다. a는 배려, 존중, 공감이 있는 사람이니까. 반대로 c라는 사람이 이기주의, 독선, 공감하지는 못하는 사람이라면 집단 내에 대해서도 집단 외에서도 비인간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윤리-도더걱 모순은 없다.
그런데 집단으로 관점을 바꾸면 집단내 ingroup의 배려, 존중, 공감, 연대는 집단외 outgroup를 배척한다. 반면 집단외에 대해 열린 마음, 관용 등이 작용하면 집단의 배려, 존중, 공감, 연대가 약화된다.
알라디너 지인1의 의견처럼 ; 양면의 장점만 고루 활용되면 좋은 사회가 이루어질 것 같은데, 실제는 그 두 가지가 상보적으로 이뤄진다.
또 다른 알라디너 지인2이 ‘동물 복지’에 관해 ‘보신탕을 먹지 않음’이 ‘개와 고양이의 복지 (문맥상 복지보다는 인간과 친밀관계에 있는 동물에 대한 존중)’으로 확대되고 이것은 모든 생명 존중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개인의 관점에서는 맞는 말인데, 집단 (즉 인간 집단)에서는 개-고양이를 ingroup 함으로써 닭-돼지-소 등의 동물을 outgroup화 한다. 페미니즘에 언급되는 현학적인 용어로 더 강한 타자화 他者化된다. 과거의 소는 젊어서 논밭 일을 하고 또 죽어 고기를 제공하지만, 사육하는 사람과 가족과 비슷한 교류가 있었다. 지금은 가게 mart에서 팩에 싸인 고기일 뿐이다. 내가 보기에 보신탕-캣맘의 논쟁은 인간 사회가 outgruop에 속했던 두 포유류를 ingroup한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과거에는 outgroup의 배척이 윤리적으로 더 문제였다. 교통, 통신, 지식의 보급으로 outgroup 배척이 약화되면서 지금은 ingroup 연대의 약화가 더 문제가 되어 작은 사회 small community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여러분은 능력만큼 노동하고 필요만큼 소비하는 사회를 상상할 수 있나? 나는 체험하고 있다. 바로 우리 가족이다. 나는 능력만큼 일하고 있는데, 딸아이는 필요만큼 소비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ingroup bias 때문이다. 어느 알라디너가 마립간, 당신 딸과 나는 인간으로서 동등하니, 나도 당신 딸처럼 마립간 노동에 의해 발생한 재화를 필요만큼 사용하게 해 달라고 요구한다면 ; 나는 거부할 것이다. 당신 내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