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행복(幸福)의 파시즘

어제 강의 중에 교수님이 당신도 대학 다닐 때 지도 교수님께 배운 거라며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가슴에 새길 만한 말씀이라 생각되어 문망 여러분께도 들려드립니다. 사소한 걸로는 동양의 화투는 반시계 방향으로 움직이는데, 서양의 트럼프는 시계방향으로 움직인단 이야기로 동서양 문화의 차이에 대해 논하다가 갑자기 동서양 사람들은 삶의 이유가 다르다는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하시더군요. 그러더니 프리츠 분덜리히의 "아델라이데"와 박동진 선생의 "수궁가" 한 대목을 비교하며 들려주셨습니다. 서양의 미학은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의 구분이 있어 아름다움은 추구하고, 추한 것은 버리는 형태인데 반해서 동양의 미학은 아름다운 보다는 좋은 것, 즉 다듬지 않은 자연스러움, 자연의 에너지를 담아내는 것을 좋은 소리, 다시 말해 아름답다 여겼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 판단하게 되는 것도 외모의 미추보다는 그 사람의 기운이 어떠한가를 보았다고 하는데, 그것이 그 사람의 보이지 않는 힘이란 거죠.

동양의 의식 속엔 본래 "행복(幸福)" 이란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동양인들의 운명관에서 비롯되는데, 운명이란 끝없이 상승하는 것도, 그렇다고 끝없이 하강하는 것도 아닌 상승과 하강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순환 싸이클을 갖는데, 동양철학의 핵심을 담고 있는 "주역(周易)"은 이런 싸이클의 파장을 읽는 법을 가르치는 책이란 겁니다. 서양인의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는 운명의 개념은 선(폭이 없는 길)인데 반해 동양의 운명에는 선이 아닌 면적의 개념이 있다고 합니다. 즉, 최악의 경우에도  운명의 파장 안에는 높고 낮음이 있으므로 운명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나름의 노력으로 상위의 운명으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이죠. 또한 이런 의식 속에는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으며, 상승이 있으면 하강이 있다는 음양의 원리도 늘 숨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동양의 복(福)에는 늘 빛과 그림자가 함께 합니다. 그러나 서양의 행의 개념에는 이런 그림자의 요소가 없다는 거죠. 행은 언제나 빛이고, 좋은 것인 반면에 그 그림자는 멀리 쫓아내야 할 무엇으로 봅니다. 그런 까닭에 모두가 좀더 많은 행복을 얻기 위해 서로 투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양의 "happiness"란 개념이 동양에 들어오기 전까지 행(幸)은 요행, 다행, 불행과 같이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의 (운명)싸이클에 의해 영향받는 서양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lucky' 개념이었고, 복(福)이란 내가 싸워서 얻어내는 무엇도 아니지만, 남이 내 것을 빼앗아갈 수도 없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리신 천복(天福)의 개념(나의 운명 싸이클)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팔자 소관이랄 수도 있는 거였겠지요. 게다가 행이든 복이든, 빛과 그림자가 늘상 공존하므로 더 많은 행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던 것이고, 호사다마라고 언제나 그 뒤에 오는 그림자를 의식하며 교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서양의 행복이란 개념이 들어와 '언어가 인간의 의식을 지배한다'고, 서구식 행복의 개념, 즉 좀더 많은 행을 갖고자 서로 욕망의 질주를 벌이게 된 것이 현재의 난맥상을 빚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제 나름으로는 이것을 "욕망의 일원화"라고 이전에 나름대로 정리한 바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단일 민족의 민족공동체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원하는 욕망은 단일민족의 혈연보다도 단순하게 일원화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여러분 부자 되세요"인 셈이죠. 출세와 성공이 인생의 단일 지향점인 사회에서는 누구라도 그것으로부터 조금만 일탈하더라도 사회가 직접 처벌하지는 않더라도 사회가 간접적으로는 처벌을 내립니다. 예를 들어 이것을 "행복의 파시즘"이라 했을 때, 남들 대학갈 때 대학 안 가거나 못 가면, 일정한 연령에 도달해서 여전히 백수인 사람, 직장을 잡았어도 그것이 사회가 선망하는 류의 것이 아닐 때, 직장을 잡고 결혼했는데 아이가 없을 때, 늘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게 됩니다. 마치 술 자리에서 노래부르기를 강권하며 부르는 노래를 못하면 장가를 못가요. 아, 미운 사람" 으로 시작해서 줄줄이 이어지는 일종의 저주섞인 노랫말처럼 이런 "행복의 파시즘"은 우리 사회의 그 누구도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도록 만드는 원천이라 생각합니다.

저의 이런 주장은 물론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혁명적인 발상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묘수(대안)을 마련해내고 있지 못하는 동안, 우리는 어쩔 수 없이라도 자본주의 체제와 불공평한 동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라도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는 걸 뭐라 비판할 수는 없는 일이고, 동거하는 틀의 내부에서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일탈하는 삶의 태도가 비판받고, 처벌당하는 것만큼이라도 모면하고, 두둔할 수는 있겠죠. 또, 모르죠. 이런 일탈 행위가 자본주의의 틀의 내부로부터 균열을 주는 혁명적 행위가 될지도... 한동안 우리는 노동이 천대받는 세상을 끝장내자는 식의 구호를 들었는데, 최근 저의 생각은 노동이 존중받는 세상을 끝장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근대자본주의의 맹아(프로테스탄트 윤리의식)가 틀 잡기 전까지 노동은 신의 섭리에 반하는 행위였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 노동은 노예들이나 하는 행위였고, 중세인들에게 노동은 일정한 시간 단위 안에서만 허용되어야 했지요. 즉, 노동 자체가 인류를 좀더 나은 세상으로 진화시켰다고 믿는 것은 어쩌면 자본주의와 좌우파를 막론한 전체주의식 논법일지도 모른다는 거죠. 이미 노동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충분할 만큼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언제나 문제는 잉여노동이 만들어낸 잉여가치가 제대로 분배되지 않는다는 분배 정의의 문제인 거죠. 우리만이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이 노동보다는 유희를 찬미하는 시대가 된다면, 지금처럼 하루 8시간 노동, 주5일 근무를 이야기하는 지금의 시대가 지구 환경에는 물론 우리들 자신에게도 얼마나 야만적인 시대였던가를 말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참 꿈 같은 얘기인가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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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26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바람구두 > 지식인의 구체적 사실과 해답

"지식인은 항상 구체적 사실과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서 그는 항상 구체적 해답을 가져야 한다" - 싸르트르

세상을 살다보면 반드시 쉬운 질문들과 맞닥뜨리게 되진 않는다.
예를 들어 어제 내가 준비해간 발제의 끝이 요상하게 흘러서 갑자기 "노무현 식 어법"이 대중사회론과 무슨 관련이 있을지 몰라도 생뚱맞게 그런 질문이 나온다거나, 갑자기 노동운동으로 파고 들어간 문화운동패가 현재 생산해내고 있는 문화적 틀거리들이 과거 80년대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고 단호하게 정의내리는 질문 아닌 질문(사실상 이런 류의 질문이 세미나 자리에서 오고간다는 건 개인적으로 탄핵의 대상이라고 생각한다)을 받으며 다시금 지식이 제 아무리 축적된 세상에 살아도 인간의 질문이란 늘 거기에서 거길 왔다갔다 하는 게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오늘 김명인 선생 홈피에 놀러갔더니 어제 나의 고민과 매우 흡사한 고민을 털어놓은 것을 읽었다.

수업준비를 위해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다시 읽다가 이 명제에 덜컥 부딪쳤다. 내가 일상 속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일은 예외없이 '구체적 보편'으로서의 하나의 '사건'이다. 나는 과연 이 구체적 보편들의 연쇄 앞에서 구체적 해답(혹은 대답)을 해 나가고 있는가. 다시 묻는다. 나는 과연 지금도 묻고 대답하는 사람인가? 나는 과연 지금도 내 속에 들어 있는 모순들을 직시하는 사람인가?

이 질문을 바꿔보면 한 마디로 "나는 지식인인가? 나는 지식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가?" 하는 성찰을 담고 있는 것이다.  늘상 곁에서 뵙는 분이긴 하지만 지독한 결벽주의자라고밖에 할 수 없는 성정이다. 지식인 나부랑이의 권위 따위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에서 혼자 면벽수도하는 사람처럼 지식인됨을 묻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들어가면 도통 해법이 나오질 않는다.

왜? 왜 해법이 나오질 않는가 하면 엘리트와 대중 사이에서 계몽의 서사는 헤맬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단호하게 대중을 쓰레기로 처결하여 계몽의 대상, 문화 수용의 대상일 뿐인 존재로 규정할 수도 없고, 과거 민중주의적 시각에서 대중을 혁명의 주체로 설정하자니 대중이 이를 거부하는 양태를 보인다(최소한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그 어떤 권위도 존중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결정적인 순간엔 평소엔 팽개쳐두던 지식인들의 한 마디를 요구한다. 지금 이런 구체적인 보편으로서의 사실(건)이 있다. 이에 대해 구체적인 해답(혹은 솔루션)을 제공하라는 요구받는다. 매스미디어는 그런 점에서 지식인의 보잘 것 없는 권위를 가장 유효적절하게 이용하는 매체이다.

노동운동 속으로 파고 들어간 문화운동의 틀이 변하지 않았다고 규정하는 건, 현장에서 문화운동을 하고 있는 이들에겐 폭력이다. 왜? 현장의 상황을 전혀 고려치 않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문화의 형식으로 "대자보"는 당나라 때 최치원도 효과적으로 써먹은 방식인데, 문화판에서 왜 여전히 "대자보"를 붙이는가 하고 묻는다면 거기에 대해 무어라 대답해야 하나? 대답은 여전히 그 방식이 유효적절하기 때문이다. 즉, 상황이 변화하지 않은 이상 현실 사회 구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현장문화운동의 방식만 변화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이 된다. 이를 노동운동에 대한 우리 사회의 현재 불만에 대입시켜 보면 결론은 이렇다.

세상은 이렇게 극심하게 변화(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했고, 대의 민주주의의가 성취되었고,  세계화 이후 기업의 경영 환경이 변화되어 경쟁이 심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왜 노동조합이 현상황의 발목을 잡는가? 이것이 구체적 사실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 해답은 무엇이 있을까? 얼마전 한국노총 위원장으로 재선출된 이용득 신임위원장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좋다. 협조해주겠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경영 참가를 보장해 달라는 것이었다. 좀더 구체적이고 진지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이 이야기들이 어제오늘 나온 이야기도 아니고,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법안 문제를 이야기해온 것이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하지만 누구 하나(정치권과 기업) 귀기울여 듣지 않고(다른 말로 하자면 노사정 모두의 이야기가 최소한 양적, 질적의 비례라도 맞춰서 다뤄져야 하는데), 이제 와서 현상적으로 드러난 몇몇 사안들을 가지고 집중타를 날린다.

지식인의 대답이 설령 구체적인 해답(단박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그런 것이 있을리도 만무하지만)일지라도 ... 당신에게 전해지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멀다. 설령, 전해진다손치더라도 귀기울여 들어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인가?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너무나 많긴 하지만... 일단 내 속이 부글부글해서 한 마디 올려본다. 아무래도 난 대중주의자는 못될 팔자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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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형 간염


 부제 : 국가 인권 위원회에서 ‘B형 간염 보유자들이 겪고 있는 취업 불이익을 철폐하는 방안이 본격 추진될 전망이다.’ B형 간염 환자들이 어찌하다 인권적 차별에 이르게 되었는가?


* 간경변(간경화)로 피고용인(노동자)이 사망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 환자는 입사 당시 만성 B형 간염이 있었고, 사망 당시에는 간경변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유가족들은 회사를 상대로 회사의 근무한 것이 즉 노동으로 인해 악화되었다고 주장하며 산업 재해 보험 신청을 하는 소송을 하였습니다.

 추정하건대 원고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판사는 일응 추정(추정에는 사실 추정, 법률상의 추정, 일응의 추정이 있습니다.)에 의거하여 노동으로 인한 간 질환을 악화를 선고하였습니다. 또한 추정하건대 판사님은 마음이 좋으신 분이었을 테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환자의 유가족은 산재보험의 혜택을 받게 되어 그나마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이 닫힌계였다면 노동자가 일을 하다가 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였고 이 어려운 가족을 사회가 도와주었다가 됩니다. 하지만 이 판결은 이렇게 좋은 결과만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회사 측에서는 B형 간염 환자가 입사할 경우 업무와 관련이 있을 수도 또는 없을 수는 있는 상황, 악화 요인을 완전하게 배제할 수 환자가 질병의 자연 경과로 나빠질 경우에 회사 측은 관리의 책임, 즉 산재의 책임을 지게 된 것입니다. 안전 관리를 하지 않아 직원이 사망한 것과 만성 B형 간염 환자가 병이 악화되어 사망한 것과 구분이 안 되는 산업 재해 사건의 수 즉 통계적 숫자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산재 소송 등 법적 문제와 회사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 의학적(과학적)으로 방지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산재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만성 B형 간염 환자의 입사를 막는 것입니다.


 한번 더 추측을 하면, 아마 의사도 이와 같은 일에 어느 정도 역할을 기여했을 것입니다. 보호자의 ‘노동이 간질환 악화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느냐?’라고 주장한다면 의사는 ‘알 수 없다. 잘 모르겠다. 가능성은 있다.’라고 이야기했을 테고, 아니면 인간적 동정적 측면으로 산재 판정에 도움을 주었을 언급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기 시작하면서 의학적 판단 즉 노동(회사 일을 하는 것)이 간 질환을 악화시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의학적 견해(내용적으로 무관하다는 뜻)을 바탕으로 취업에 차별을 철폐하려 하지만 현재 이미 많은 사회적 비용을 치른 후 입니다. 사회적 비용은 일할 수 있는 많은 B형 간염 환자가 취업에서 배제되는 불이익을 받은 것으로서 고통은 개인이 담당했습니다.


* 이와 같은 파급 효과를 생각했을 때,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담당 판사님이나 의사님은 같은 판결과 같은 진단을 다시 내릴까요.


* 갈대님이 이야기했듯이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할 때에는 모든 사실을 다시 확인하여야 한다고 했지만 그 정도까지는 확인이 안 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제 나름대로 찾아보았지만 정확한 연도(1980년 중반으로 기억)나 사건 번호는 확인하지 못했고, 때문에 유명한 변호사님(이름을 대면 알라디너 많은 분들이 이름을 알 정도의 지명도가 있는 분)께 사건의 개요를 구두로 확인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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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5-03-16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2005년 3월 16일자 페이퍼'치료거부'나 2004년 6월 30일 페이퍼 신문기사 인용'치료 중단'이 이와 같은 예상치 못한 파급 효과를 가져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혹시 위의 판례에 내용에 대해 부정확한 내용이 있다면, 또는 추정된 내용에 오류가 있다면 미리 사과드리며, 정확한 판례(사건 번호)를 아시는 분은 저에게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마립간 2005-03-16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응의 추정은 형사 사건같은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데, 산업 재해 보험이 사회 보험적 성격이 있기 때문에 내려진 판례라고 합니다.

조선인 2005-03-16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딴 얘기인데 신체건강한 총각이 전문대 조리학과를 다니며 정말 열심히 노력해서 한식, 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따고 군대는 심각한 평발 때문에 면제된 뒤 졸업 후 바로 유수한 호텔에 합격하였으나, 최종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았을 때 비로소 B형 간염 보균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 총각은 그후 10년이 넘도록 백수로 놀고 있다지요. 요리 외에 다른 적성을 찾지 못하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죠.

마립간 2005-03-16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저는 조선인님이 하신 그 총각에 관한 이야기가 좀 딴 애기가 아니라 위 재판 판례의 실질적 피해자라고 봅니다.

코마개 2005-12-21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판 2002두349
서울고등 2002누11471
 

*  서울 신문 기사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본인 치료거부로 사망 때 병원 측도 40% 책임 있다.


 대법원 3부(주심 박재윤 대법관)는 14일 농약을 마시고 자살을 기도해 병원 응급실로 후송됐으나 위 세척 등 치료를 거부해 숨진 홍모(48)씨의 유족들이 “담당의사가 강제 위세척 등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서 병원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병원이 유족에게 9900만원을 지급하도록 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홍씨가 치료를 거부하더라도 병원은 결박하거나 진정제를 투여해 반항을 제압한 뒤 위 세척을 실시하는 등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아울러 “응급환자의 경우에는 의료행위의 중지가 환자의 생사를 결정하므로 환자의 자기결정권보다는 의사의 생명보호의무가 우선한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재판부는 홍씨가 위세척 등을 여러 번 거부했고 치료 뒤에도 후유증이 있을 수 있는 점을 감안해 병원 책임을 40%로 제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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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5-03-16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면 진정제를 투여한 후 생기는 부작용에 대해서는 면책이 되는건가요?

마립간 2005-03-16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학적으로 판단이 되면 환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로 치료해야 된다... 그러다가 합병증이나 후유증이 생기면 어떻하나 위세척하다가 흡인으로 인한 질식사의 위험도 있는데 (강제로 위세척하다가 질식사라도 발생하면, 게다가 흡인 질식의 가능성을 한층 더 높일 가능성이 있는 진정제를 투여하라고 @.@ 의식 상태도 확인해야 하는데.)... 환자의 자기결정권보다 우선하는 의무는 옳은 이야기인가...(결박? 제압?) 그리고 환자는 치료를 받지도 않을 것인면서 병원에는 왜 왔지?

마립간 2005-03-16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戶庭無塵님, 당연히 면책이 안 되겠죠.
판결문 전문을 읽지 않아서... 어째든 위의 기사가 판결문을 잘 요약했어도, 또는 기자님이 잘못 기사를 썼던 간에... 우울합니다.

조선인 2005-03-16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우울하네요. 환자의 자기결정권보다 의사의 생명보호의무가 우선한다... 참 많은 고민이 되네요.

마태우스 2005-03-16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살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는 게 아닐까요? 치료거부를 하는데 어떻게 치료를 하는지....

호랑녀 2005-03-16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살할 수 있는 권리, 행복추구권... 위헌신청 함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저거 기사... 아무래도 100%는 아니지 싶어요. 뭔가 저 경우에 특수한 케이스가 있지 않았을까요? 저렇게 이해 안 되는 판결이 대법에서 나다니요...

마립간 2005-03-16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녀님, 호랑녀님의 말씀대로 판례문에 조금 다른 내용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사람들이 영향력을 받고 사회적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위와 같은 기사입니다. 판례 원문을 찾아 읽고자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전출처 : stella.K > 1 억을 세어보시겠습니까 ?


작성자 : 오원 조회수 1086 추천수 24 다운횟수 :0
◆ 1 억을 세어보시겠습니까 ?

無量大數(무량대수)와 不可思議(불가사의).......그 뜻은 ?


▼ 1 억을 세어보시겠습니까 ?

세상이 억억거리고 있습니다.

누구는 몇 억을 꿀걱했고, 누구는 몇 백억을 쳐잡수고,
또 다른 넘은 몇 천억을 떼처먹고,
다른 어떤 패거리들은 몇 십조를 공적자금이란 이름으로
흔적도 없이 말아먹고,.....
각종 기금은 임자없는 돈이랑가,...... 마구 새나갑니다요.
로또복권 당첨금이 백 억대로 올라가 온통 복권에 인생을 건듯이
휘돌아갑니다요. 심마니 아닌 '억마니공화국'입니다요.

온통 '억억'거리고 있습니다요...........억억억억억억억....

대체 1 억이란 수는 얼마만한 수일까요?


십=일의 10 배
백=십의 10 배
천=백의 10 배
만=천의 10 배
십만=만의 10 배
백만=십만의 10 배
천만=백만의 10 배
억=천만의 10 배.

일 억=일천 만의 10 배, 요기까지는 10 배의 단위로 수가 커집니다요.
누구나 다 아는 것이죠.

그렇다면 1 억을 세어본다면 얼마의 시간이 소요될까요?
1초에 한 수를 세었다고 하면, 1 분에 60 까지 셀 수 있겠죠.
60 x 60 x 24 x 365 = 31,536,000 / 1 년에 셀 수 있겠죠.
안먹고 안싸고 안자고 안쉬고 세어봐야 3 년 가까이 걸립니다요.
하루 8 시간 일한다치고 계산하면 9 년쯤 걸리겠죠.
일요일 빼고 휴가 빼고 공휴일 빼고 감기 걸린 날 빼고.... 그리고
도둑놈 중에 도둑넘 뽑는 선거날도 빼고...하면, 12 년 정도가 필요하죠.

좋다 이겁니다. 1 초에 한 수를 세는 걸 전제했습니다만,
12,345,678 을 '일천이백삼십사만오천육백칠십팔' 몇 초 걸립니까?
5 초 걸린다고 보면, 12 x 5 = 60. ^^^ 오매 60 년 걸립니다요. 60 년 !

그런데, 엄마 뱃속을 나와 바로 수를 셀 수 있는가요? 택도 없습니다요.
대여섯살은 되어야 수(數)가 정리가 되겠죠. 60 + 6 = 66 년.

다 좋다 이겁니다. 66 년. 숫자 세는동안 틀리는 일이 없겠습니까?

구천구백구십구만구천구백구십구, 다음에 '억' 해 버리면 될 것을
팔천구백구십구만구천구백구십일 해 놓으면 어떻하느냐 이 말입니다. 다시
팔천구백구십구만구천구백구십이....아,아, 덥다 ! ! 더위 먹었나 원 ! !

평생을 세어도 다 못세는 것이 억입니다요. 억! 억!! 억!!! 으이, 억만이 같이...


▼▼ 1 경(京)은 1 조(兆)의 1 만배



다음은 兆, 요기서부터는 만배 단위로 올라갑니다요.


조=억의 1 만배. 다음은 京

경=조의 1 만배. 다음은 垓

해=경의 1 만배. 다음은 자(禾+弟).

자=해의 1 만배. 다음은 양(禾+襄).

양=자의 1 만배. 다음은 溝

구=양의 1 만배. 다음은 澗

간=구의 1 만배. 다음은 正

정=간의 1 만배. 다음은 載

재=정의 1 만배. 다음은 極

극=재의 1 만배. 다음은 恒河沙


항하사=극의 1 만배. 다음은 阿僧祈

아승기=항하사의 1 만배. 다음은 那由他

나유타=아승기의 1 만배. 다음은 不可思議

불가사의=나유타의 1 만배. 다음은 無量大數

무량대수=불가사의의 1 만배.


양을 알 수 없는 큰 수, 무량대수까지 있습니다요.
무량대수는 억의 몇 배가 됩니까?
계산이 됩니까?
생활은 좀 나아지셨습니까?



이들은 주로 중국과 인도에서 전래한 數詞(수사)인데,
원래 '항아사'는 '갠지스 강의 모래 알 개수와 같은 큰 수'를 뜻하기 때문에
그보다 더 큰 수는 상상의 수로 보면 되겠습니다.

한 번 세어보실랍니까 ?

 

 

oh, o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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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5-03-14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무량대수 10의 68제곱 아니면 88제곱? (1뒤의 영이 68개 또는 88개)

"극"의 다음부터는 0 이 8개씩 늘어 난대요.
항하사(恒河沙)=10....(0 이 56개)
아승기(阿僧祗)=10....(0 이 64개)
나유타(那由他) 10....(0 이 72개)
불가사의(不可思議)=10....(0 이 80개)
무량대수(無量大數)=10....(0 이 88개)

* 작은수
할, 푼(분), 리, 모, 사, 흘, 미, 섬, 사, 진, 애, 묘, 막, 모호, 준순, 수유, 순식, 탄지, 찰나, 육덕, 허공, 청정(10의 -21승)도 있습니다. (한자 생략)

* 소수일 때는 분, 리, 모 라고 하지만 비율로 말할 때는 "할(割)"이 0.1 에 해당하고 분, 리, 모 등은 모두 한 칸씩 밀려 난대요.

마립간 2005-03-14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학교 때 많이 쓰던 할, 푼, 리는 요즘 야구 타율에서 언급되고, 찰나도 짧은 순간의 의미로 많이 쓰는 용어죠.

무흔 2005-03-26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의 단위 중 자와 서는 어느 것이 맞는지... 아증지와 아승기 중 어느 것이 맞는지 궁금합니다. 아승기는 인도말 이니깐 아증지가 맞을 듯 합니다. 한번 확인해 주세요.

마립간 2005-03-26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잘 모르겠지만, 아는 阿한자를 쓰고 승僧(사람인변) 또는 증은 僧(마음심변)한자를 쓰고 기는 祇로 지는 紙라고 써, 아승기, 아증지 모두 통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인도 말을 음차했기 때문이겠죠. 어느 것이 정답이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