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행복(幸福)의 파시즘

어제 강의 중에 교수님이 당신도 대학 다닐 때 지도 교수님께 배운 거라며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가슴에 새길 만한 말씀이라 생각되어 문망 여러분께도 들려드립니다. 사소한 걸로는 동양의 화투는 반시계 방향으로 움직이는데, 서양의 트럼프는 시계방향으로 움직인단 이야기로 동서양 문화의 차이에 대해 논하다가 갑자기 동서양 사람들은 삶의 이유가 다르다는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하시더군요. 그러더니 프리츠 분덜리히의 "아델라이데"와 박동진 선생의 "수궁가" 한 대목을 비교하며 들려주셨습니다. 서양의 미학은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의 구분이 있어 아름다움은 추구하고, 추한 것은 버리는 형태인데 반해서 동양의 미학은 아름다운 보다는 좋은 것, 즉 다듬지 않은 자연스러움, 자연의 에너지를 담아내는 것을 좋은 소리, 다시 말해 아름답다 여겼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 판단하게 되는 것도 외모의 미추보다는 그 사람의 기운이 어떠한가를 보았다고 하는데, 그것이 그 사람의 보이지 않는 힘이란 거죠.

동양의 의식 속엔 본래 "행복(幸福)" 이란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동양인들의 운명관에서 비롯되는데, 운명이란 끝없이 상승하는 것도, 그렇다고 끝없이 하강하는 것도 아닌 상승과 하강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순환 싸이클을 갖는데, 동양철학의 핵심을 담고 있는 "주역(周易)"은 이런 싸이클의 파장을 읽는 법을 가르치는 책이란 겁니다. 서양인의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는 운명의 개념은 선(폭이 없는 길)인데 반해 동양의 운명에는 선이 아닌 면적의 개념이 있다고 합니다. 즉, 최악의 경우에도  운명의 파장 안에는 높고 낮음이 있으므로 운명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나름의 노력으로 상위의 운명으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이죠. 또한 이런 의식 속에는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으며, 상승이 있으면 하강이 있다는 음양의 원리도 늘 숨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동양의 복(福)에는 늘 빛과 그림자가 함께 합니다. 그러나 서양의 행의 개념에는 이런 그림자의 요소가 없다는 거죠. 행은 언제나 빛이고, 좋은 것인 반면에 그 그림자는 멀리 쫓아내야 할 무엇으로 봅니다. 그런 까닭에 모두가 좀더 많은 행복을 얻기 위해 서로 투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양의 "happiness"란 개념이 동양에 들어오기 전까지 행(幸)은 요행, 다행, 불행과 같이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의 (운명)싸이클에 의해 영향받는 서양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lucky' 개념이었고, 복(福)이란 내가 싸워서 얻어내는 무엇도 아니지만, 남이 내 것을 빼앗아갈 수도 없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리신 천복(天福)의 개념(나의 운명 싸이클)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팔자 소관이랄 수도 있는 거였겠지요. 게다가 행이든 복이든, 빛과 그림자가 늘상 공존하므로 더 많은 행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던 것이고, 호사다마라고 언제나 그 뒤에 오는 그림자를 의식하며 교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서양의 행복이란 개념이 들어와 '언어가 인간의 의식을 지배한다'고, 서구식 행복의 개념, 즉 좀더 많은 행을 갖고자 서로 욕망의 질주를 벌이게 된 것이 현재의 난맥상을 빚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제 나름으로는 이것을 "욕망의 일원화"라고 이전에 나름대로 정리한 바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단일 민족의 민족공동체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원하는 욕망은 단일민족의 혈연보다도 단순하게 일원화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여러분 부자 되세요"인 셈이죠. 출세와 성공이 인생의 단일 지향점인 사회에서는 누구라도 그것으로부터 조금만 일탈하더라도 사회가 직접 처벌하지는 않더라도 사회가 간접적으로는 처벌을 내립니다. 예를 들어 이것을 "행복의 파시즘"이라 했을 때, 남들 대학갈 때 대학 안 가거나 못 가면, 일정한 연령에 도달해서 여전히 백수인 사람, 직장을 잡았어도 그것이 사회가 선망하는 류의 것이 아닐 때, 직장을 잡고 결혼했는데 아이가 없을 때, 늘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게 됩니다. 마치 술 자리에서 노래부르기를 강권하며 부르는 노래를 못하면 장가를 못가요. 아, 미운 사람" 으로 시작해서 줄줄이 이어지는 일종의 저주섞인 노랫말처럼 이런 "행복의 파시즘"은 우리 사회의 그 누구도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도록 만드는 원천이라 생각합니다.

저의 이런 주장은 물론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혁명적인 발상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묘수(대안)을 마련해내고 있지 못하는 동안, 우리는 어쩔 수 없이라도 자본주의 체제와 불공평한 동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라도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는 걸 뭐라 비판할 수는 없는 일이고, 동거하는 틀의 내부에서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일탈하는 삶의 태도가 비판받고, 처벌당하는 것만큼이라도 모면하고, 두둔할 수는 있겠죠. 또, 모르죠. 이런 일탈 행위가 자본주의의 틀의 내부로부터 균열을 주는 혁명적 행위가 될지도... 한동안 우리는 노동이 천대받는 세상을 끝장내자는 식의 구호를 들었는데, 최근 저의 생각은 노동이 존중받는 세상을 끝장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근대자본주의의 맹아(프로테스탄트 윤리의식)가 틀 잡기 전까지 노동은 신의 섭리에 반하는 행위였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 노동은 노예들이나 하는 행위였고, 중세인들에게 노동은 일정한 시간 단위 안에서만 허용되어야 했지요. 즉, 노동 자체가 인류를 좀더 나은 세상으로 진화시켰다고 믿는 것은 어쩌면 자본주의와 좌우파를 막론한 전체주의식 논법일지도 모른다는 거죠. 이미 노동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충분할 만큼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언제나 문제는 잉여노동이 만들어낸 잉여가치가 제대로 분배되지 않는다는 분배 정의의 문제인 거죠. 우리만이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이 노동보다는 유희를 찬미하는 시대가 된다면, 지금처럼 하루 8시간 노동, 주5일 근무를 이야기하는 지금의 시대가 지구 환경에는 물론 우리들 자신에게도 얼마나 야만적인 시대였던가를 말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참 꿈 같은 얘기인가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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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26 15: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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