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성평등으로 돌아본 사상寫象

 

* 마립간이 정의한 용어

1. 안다. - 머리로만 아는 것.

2. 이해한다. - 머리로도 알지만, 옛 경험을 통해 감정의 변화를 알고 있는 경우.

3. 동감한다. - 현재 시점에서 감정의 변화를 함께 하는 것.

 

* 존 롤스는 무지無知의 베일 Veil’을 이야기했고, 마이클 센델은 정의론의 대가의 이 주장을 반론하면서 스타교수가 된다. 한 성 gender밖에 경험할 수 없는 인간은 다른 성의 경험을 알 수는 있어도, 이해하거나 동감할 수 없다.

 

* Qualia

우리는 박쥐나 전기가오리의 qualia를 알 수 없다. 사람으로서 qualia를 공유하는지 알 수 없지만, 성별의 qualia 역시 알 수 없다.

 

* 호락논쟁 湖洛論爭

양성 평등에 관한 인성이 생물학적-환경적인 한계를 뛰어 넘을지, 또는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한다는 전제하에 어디까지를 생물학적-환경적 한계를 봐야할 것인지 논란이 남는다.

 

* 보편성과 특수성

내가 가장 처음 읽은 사회과학 책이 <철학의 기초이론>이었는데, 보편성과 특수성의 단어에 감탄했었다. 자유주의 여성주의와 문화적 여성주의

 

* 인류의 진보

사르트르는 <변증법적 이성 비판>에서 인류 문화가 진보한다고 했고,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그렇지 않다고 했다. 둘 어느 의견을 지지하더라도 모순은 남는다. 남녀불평등은 양성평등으로 진보하고 있을까?

 

* 주관과 객관

인간이 인식하는 모든 것은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뇌의 재해석이 이뤄진 뒤에 인식하게 된다. 100% 객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 종속적 주체에서 독립적 주체 虛心로 변화할 수 있는가?

 

* 나는 의와 인을 통합할 수 있는 통찰이 궁금했다. 다른 버전으로 자연주의 오류도덕적 이상주의 오류를 통합하는 통찰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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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요읽기

<손대지마> 에일리 노래

 

딸아이가 가무歌舞에 정진精進 중이다. 노래는 에일리의 ‘손대지마’이다. 아이의 노래를 듣던 중 재미있는 가사가 내 사고를 움직인다.

[글 내용 중 (19금)도 포함]

 

딴 사람 만나고 내겐 집에 가서 잤다고 ... 설명하려 하지마

 

이야기를 좀 더 길게 풀어보자. ; 남자 A가 여자 B와 사귀고 있는 상황이다. A가 B에게 집에 들어갔다고 이야기를 한 시간에 A가 여자 C를 만나고 있었다. 이 만남의 상황을 B가 알게 되었다. (B가 목격했을 수도 있고, 목격자 D로부터 전해 들었을 수도 있다.)

 

이 상황이 A가 B에게 설명할 상황인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내 의견은 충분히 설명이 필요한 상황으로 판단한다. A가 귀가 하던 중 우연히 사촌 여동생 C를 만났을 수도 있다. 혹은 10년 만에 학교 동창인 C를 만났을 수도 있다. A는 구차하게 B에게 상황을 설명하느니, 적당히 둘려대려고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 거짓말이 오해를 더 키우게 되었지만 설명이 있는 상황과 없는 상황은 다르다.

 

좀 가사를 바꿔보자.

딴 사람과 성관계를 하고 내겐 집에 가서 혼자 잤다고 ... 설명하려 하지마

 

이 상황에서 가능한 설명이 있을까? 예를 들면 이런 설명 ; A가 C와 성관계를 한 것은 A가 C와 성관계를 함으로써 C에 들렸던 귀신을 내쫓아 C의 목숨을 구했다. 성관계는 A나 C의 욕망 때문이 아니다. B는 A에 대한 오해를 풀었다.

 

나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적절한 설명을 찾기가 힘들다. 사실 판단에서 가치 판단으로 넘어갈 때, 대개의 경우 맥락을 고려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 어떤 이는 모든 판단에서 맥락을 고려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살인은 대개의 경우 나쁜 것이지만 전쟁 중의 살인은 맥락이 고려된다. 만약 조금 바뀐 가사의 적절한 상황 설명이 가능하지 않다면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참-거짓이 존재하는 것이다.

 

과연 맥락을 떠나 참-거짓이 존재하는 명제가 존재하는가? 바뀐 가사의 상황에서 가능한 설명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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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부姑婦 갈등

- 고부 갈등과 장서丈壻 갈등, 모녀母女 갈등, 그리고 부자父子 대결

 

곰곰생각하는발 님의 글에 댓글로 남겼던 것을 정리한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고부 갈등이 크게 이슈화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고부 갈등이 적었던 것이 아니라, 너무 보편적이었기 때문이다. 시댁이 싫어 시금치도 안 먹는다나. 그리고 고부 갈등의 이유가 ‘남성 중심의 유교적 문화가 (한) 원인이다’라고 했다. 남성 중심의 유교 문화가 약화되면 같은 의미로 양성 평등이 강화되면 고부 갈등은 완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남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여자들끼리 왜 그래.’)

 

1990년대에 들어서면 과거보다 양성 평등이 실천되면서 고부 갈등은 예전보다 줄었다(라는 기사가 나왔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시모와 며느리 갈등이 줄면서 장모와 사위의 갈등이 늘었다는 것이다. 나는 좀 의아하게 생각했다. 시댁의 관계에서 처가의 관계로 갈등의 전환은 이해가 되는데, 왜 시모-며느리 대척점인 장인-사위가 아니고 장모-사위인가 하는 것이다. 얼마 후 이와 관련된 또 다른 기사가 나왔는데, 이번에는 예전 고부 갈등과 같은 갈등이 친정어머니와 딸 사이에서 늘고 있다는 것이다.

 

왜 가정 내 불화 주체에 아버지, 장인, 아들보다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며느리, 딸이라는 여성 주체가 더 많이 언급될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갈등이 없을까? 당연히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갈등이라는 용어보다 대결이라는 어울린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근본적 이유를 부자간의 대립, 아버지에 대한 강한 반발로 설명한다. 영화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와 루크 스카이워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나의 궁금증은 ; 나의 직관에 의하면 부자의 대결과 고부 갈등과는 느낌이 다르다. 이런 나의 직관이 맞는가? 신경 생리학적으로 뇌의 다른 부분이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인식의 체계에서 다른 정신 기제를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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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9-04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롭습니다. 제가 보기엔 아직 양성평등사회'는 아니라고 봅니다. 여전히 기울어진 사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고부 갈등이 줄어들자 장모 사위 갈등'이 늘어났다는 것을 잠시 생각해 보니....
옛날에는 며느리들이 친정은 거의 못 가고 시댁에만 가고는 했는데
요즘은 그래도 시댁과 친정 고루고루 다니지 않나요 ? 옛날보다는 남편이 아내 친정 가는 경우가 많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빈도수가 높다 보니 갈등이 생기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완전 추측해봅니다.


마립간 2014-09-04 12:27   좋아요 0 | URL
실제로 -> 과거보다 로 수정합니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여)
과거에 비해 양성 평등 쪽으로 향했다이지 양성 평등이 실현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과거와 비교하여 시댁 대비 처가의 접촉 빈도수가 높아 갈등이 생긴 것에 동의합니다. (신문 기사에서도 그와 같이 설명합니다.) 제 의문은 왜 갈등의 주체가 남성보다 여성이냐하는 것입니다.

아무개 2014-09-04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소견으로는 가정생활의 주체가 '여성'이기 때문에
가정생활내에서 발생하는 갈등상황의 주체도 '여성'일수 밖에 없는거 같습니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육아를 '돕는다' 또는 집안일을 '돕는다' 라고 표현합니다.
육아와 집안일을 내가 '한다'라고 하는 사람들을 저는 거의 제 주변에서 듣거나 본적이 없습니다.
주체적으로 가정일을 하는 것이 아닌거죠.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은 압니다만, 제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것들에 대한 저의 판단입니다.

그러니 다른 쪽, 가정일의 주체가 되는 여성들끼리의 갈등이 빈번할수 밖에 없지 않나 싶네요.


마립간 2014-09-04 14:10   좋아요 0 | URL
아무개 님의 말씀을 타당성있게 생각합니다. 윗 글 말미에 사회문화적 요인때문인가를 넣으려다 말았습니다.

저의 궁금증은 ; 가족 내 관계 갈등의 원인에 신경 생리학적인 요인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죠. 넓게 보면 문화-유전 공진화로 인해 양쪽 모두에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요.

페크pek0501 2014-09-04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볼 땐 인식 체계의 문제 같아요. 어머니들은 아들을 며느리에게 빼앗겼다는 인식이 있어요.
예를 들면 어머니인 자기에게 갖다 주던 월급을 결혼 뒤엔 며느리에게 월급을 갖다 준다든지... 모든 걸 어머니와 상의하던 아들이 이젠 며느리와 상의하게 되어 소외감을 느낀다든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인데 이젠 아들이 사랑하는 일순위는 어머니가 아니라 며느리가 되었다는 것 등으로 서운한 게 많은 상태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젊은 여자가 이젠 아들의 반려자라며 아들이 애지중지하니 상처 받을 일이 많아지고 그래서 갈등이 생긴다고 봐요.

장인과 사위보단 장모와 사위가 갈등이 많은 건 아무래도 접촉 빈도수가 높다는 것, 장인보단 장모가 살림에 많이 관여한다는 것, 그리고 성격의 문제가 있어요. 여자가 남자보다 섬세하죠. 장인은 대충 생각하는 반면 장모는 여자라서 따지는 게 많다는 것이에요. 또 가정에 대한 집중도가 남자-장인보단 여자-장모가 아무래도 높겠죠.

흥미로운 문제를 써 주셨네요. 앞으로 연구해 볼 만한 문제예요.

마립간 2014-09-04 17:23   좋아요 0 | URL
알라디너 여러 분의 댓글을 통해 다차원 해석으로 상황이 대강 설명이 된 듯 합니다.

공통 관심사에 의한 주체들의 갈등이라면 ... 해석은 되었어도 보다 명확한 해결책이 떠오르지는 않군요.^^
 

 

* 인지적 진화의 정향定向성


생물의 진화에 있어 수직적 가치관, 즉 위계질서에 의한 우열이 존재하는가? 쉽게 질문하자면 도마뱀보다는 원숭이가 우월한 생명체이고, 원숭이보다는 인간이 우월한가? 나는 여기에 답변으로 보류한다. 굴드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도마뱀이나 원숭이나 사람, 모두 생명체일 뿐이다. 즉 수평적 가치관의 적용을 언급했을 것 같다.

진화심리학에 같은 질문은 던져본다. 어떤 인지認知 행태가 다른 인지 행태보다 더 우위에 있나? 나는 보수주의자로 잠정적으로 ‘그렇다’고 대답한다. 단순 자연수 덧셈보다는 분수의 개념을 이해하는 상태가 더 우위에 있다고 판단한다. 다시 질문을 던진다. 어떤 인지 행태가 다른 인지 행태보다 더 도덕적 우위에 있나? 예를 들면 생존 욕구보다 이타심이 도덕적으로 더 우월한가? 나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그렇다고 대답하기를 기대한다’고 답한다.

 

청소년 시절 나는 나름대로 위계를 만들었다. 1) 책임, 2) 진리, 3) 정情 (유대 관계), 4) 낭만 (예술 정서)이다. 2) 진리(신념윤리)가 3) 정(책임윤리)보다 앞서기 때문에 나의 가치관은 퇴계 이황보다 남명 조식의 가치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1) 책임은 3) 정과 일맥상통하기도 하지만 칸트의 도덕의무론에 가깝다.

 

최진기 선생님은 정의론 강의에서 6가지 잣대를 소개해 주셨다. 시장주의, 민주주의, 밴덤 공리주의, 맑스주의,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 센델/아리스토텔레스의 미덕론. (시장주의를 빼면 5가지, 칸트의 의무론은 언급만하셨다.)

 

간디의 7대 사회악도 함께 소개한다. 1) 원칙없는 정치, 2) 노동없는 부, 3) 양심없는 쾌락, 4) 인격없는 교육, 5) 도덕없는 상업, 6) 인간성없는 과학, 7) 희생없는 종교

 

마이클 센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4가지 잣대를 제시했다. 공리주의, 칸트주의, 자유주의, 공동선 (언급은 롤스의 평등 정의론 포함.)

 

조너선 하이트는 TED 강의에서 정의의 기준으로 5가지 기반을 제시한다. 1) 배려-피해, 2) 공평성-부정, 3) 충성심-배신, 4) 권위-전복, 5) 고귀함-추함. 나는 인터넷 강의를 듣고 의문을 가졌는데, 자율성은 5가지 기준으로 해석되는 것인지, 즉 파생된 잣대인지, 아니면 독립적인 잣대(단자monad, 모듈)가 되는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바른 마음>에 의하면 p328 내 연구 팀에서도 자유/압제 기반을 (임의로나마) 여섯째 기반으로 인식하게 되었고’라는 표현이 있으나 왜 ‘임의로나마’라는 표현을 삽입했는지 잘 모르겠다.

 

도덕의 기반 5가지 중 진보는 1) 배려-피해, 2) 공평성-부정의 기반을 강하게 사용하는 반면, 3) 충성심-배신, 4) 권위-전복, 5) 고귀함-추함의 기반은 약하게 사용한다. 보수주의자는 5가지를 고루 사용한다. 여기서 나는 이런 반론을 할 수 있다. 진보주의자는 5가지 기반을 고루 사용하나 보수주의자는 3)~5)의 세 가지 기반을 과도하게 사용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 당황스러운 것은 진보주의가가 1) ~2)의 기반을 강하게 사용하는 과정이 3)~5) 기반을 억제함으로써 이뤄졌다는 것이다. 인지 발달, 인지 진화에 정향성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시간의 정향성을 놓고 볼 때, 충성심, 권위 인정, 고귀함의 추구는 인간 본성에 가깝고 (인간 사회를 통한) 진화를 통해 배신, 전복, 추함의 인정 등이 생겼다는 것이다. 특히 5)번은 종교 발달과도 연관을 갖는데, 즉 종교인은 내재적 인간본성에 충실한 반면, 무신론자는 진화과정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영spirit에 대한 개념도 고차원적인 인지활동이 아니라 원시적primitive한 인지활동이다. 5개 기반(모듈) 중에서 2개의 기반을 사용하는 쪽(다양성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시간의 정향적 인지 진화가 이뤄졌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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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시험하다

 

곰곰생각하는발 님과 <춘향전>의 어사출또 후 이몽룡이 춘향에게 수청들라고 제안하는 장면을 두고 간단하게 의견을 주고받았다.

 

내가 꽤 오래 전부터 가졌던 의문이다. 유년 시절에 TV에서 어떤 장면을 봤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께 여쭤봤고, 어머니는 “사랑은 시험하는 것이 아니야.”라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답을 듣고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에 TV에서 봤던 줄거리(TV였는지도 불확실하지만)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사랑을 시험하고 그 과정에서 일이 꼬여 불행한 결말이 났(을 것이)다. 만약 사랑을 신뢰하여 시험하지 않았다면 결말은 행복하게 났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의 교훈은 사랑은 시험하지 말라는 것.

 

사랑을 믿음으로 치환하여도 같은 논리나 느낌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을 분류하고 정의하려면 이 또한 이야기가 길어지니, 사랑을 무정의 용어로 사용한다. 마립간의 정의에 따르면 사랑은 천년 정도는 변하지 않아야 가히 ‘사랑이다’라고 할만하다. 그리고 마립간의 판단에 따르면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사랑의 의미는 단일하지 않다. 즉 사랑이라는 의식 작용은 단일 ‘정체성’을 갖지 않는다.

 

마립간의 정의에 맞는 사랑이라면 사랑을 시험할 필요가 없다. 인생이 길어야 100 년이니 일생 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시험을 한다고 해도 모두 통과할 것이다. 그러나 통상적인 개념에서 사랑은 변할 수 있다고 한다. 광고 카피처럼.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만약 움직이는 것도 사랑이라고 한다면, 사랑이 움직였는지 안 움직였는지 시험하는 것이 부도덕한 것인가? 아이들 중에는 동생이 생기면서 퇴행을 하거나 아프다는 증상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의 많은 경우가 엄마의 사랑을 놓고 동생과의 경쟁 관계에서 큰 아이가 엄마의 사랑을 시험하는 것이다. 비록 무의식에 이뤄지는 것이지만.

 

화목한 가정을 위해 사랑의 표현을 자주하라고 한다. 부부 간에, 부모 자식 간에. 이것은 사람에게는 사랑에 대한 불안감이 기본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불안감을 사랑의 표현으로 해소하는 것이 더 긍정적이겠지만, 좀 미숙한 방법인 사랑의 시험을 했다고 해서 많이 부도덕적인지 모르겠다. 사랑과 믿음이 깊으면 눈에 띠는 행동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이심전심 以心傳心, 염화미소 拈華微笑로 표현될 수 있은 것들이다. 하지만 그런 깊은 의식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미숙함을 거쳐 성숙함에 도달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공부를 열심히 하여 성적이 좋은 학생이 긍정이지만, 공부를 게을리한 학생을 (물론 본분을 다하지 못했으니 부도덕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많이 부도덕하다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런 판단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랑의 시험은 불행한 결말을 가져올 수다.’ 하지만 도덕은 결과로만 판단할 수 없다. 게다가 사랑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4:12)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히브리서 11:17)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 (야고서 1:13)

 

성경을 살펴보면 ; 사람은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은 사람의 믿음을 시험하나 하나님의 시험은 시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다 긴 이야기는 욥기Job 자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시험할 수 있다. (당위성이 아니라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할 이유가 없다. 창세 이후 사람은 불완전했고, 하나님은 완전했으므로. 순종이 리더십의 결과물인 것처럼, 사랑의 시험 여부는 관계의 결과물일 뿐이지, 당위성도 전제 조건도 아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판단할지 모르겠다. 하나님을 사람을 시험할 수 있다. 시험을 줄 능력자 권리자이시니까. 사람은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것이니까. 나는 이 논리에 반론이 없다.

 

(우리 집에 <춘향전>이 없네. 분명히 읽으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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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8-21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지적이시군요.ㅎㅎ. " 사랑을 표현 " 하는 것과 " 사랑을 시험 " 하는 것은 동일한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립간 님 글 읽다가 문득 ( 퍼득, 갑자기, 불현듯 ) 든 생각인데, 만약에 남편이 아내의 사랑을 시험해 보고자 한다고 했을 때 그렇다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 적어도 열렬히 사랑하지는 않는, 식은 사랑.. ) 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정말 아내를 사랑하게 되면 의심을 할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남편은 시험을 할 자격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만약에 아내를 시험해서 아내의 사랑이 거짓이라고 판명이 된다고 해도 남편은 아내를 나무랄 자격이 없습니다.
수학적 계산에 의하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 개인적으로는 " 사랑을 시험하는 것은 아니다 " 정도가 아닐까요 ? ㅎㅎㅎㅎ

제가 춘향전에서 이몽룡을 비판한 것은 이몽룡은 춘향을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점이었습니다. 아, 이거 말이 길어지니 저도 따로 글을 쓰도록 하죠.....ㅎㅎㅎㅎㅎ

마립간 2014-08-21 10:53   좋아요 0 | URL
사랑을 표현하는 것과 사랑을 시험하는 것이 동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유가 불안감으로 동일하다는 것이죠. 명백히 사랑의 표현은 긍정적인 반면, 사랑의 시험은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가치판단에서 원인적 판단이 아니라 결과적 판단이라는 것이죠. 다른 의견은 곰곰발 님 글을 보고 쓰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