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도 - 그림으로 읽는 『구운몽』 키워드 한국문화 3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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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출판을 한 인쇄 선진국이지만, 소설을 출판한 일은 많지 않았다. 구운몽 전에는 전등신화, 삼국지연의를 비롯한 중국소설과 한국소설로는 금오신화가 출간되었지만, 구운몽 간행과는 성격이 다르다. 전자의 출간 주체는 교서관, 지방관청 등 관청이지만, 구운몽은 출간 주체가 민간으로 상업적 성격이 더욱 강하기 때문이다. 책 맨 마지막에 ‘숭정재도을사금성오문신간’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숭정재도을사’는 명나라 마지막 연호인 숭정 연간 후 두 번째 을사년이라는 뜻으로 1725년을 가리키고, 금성은 전라도 나주를 가리키며, 오문은 남문이다. 보통 성 남문 근처에는 서민들이 사는데, 전라도 나주의 민간에서 누군가가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소설 민간 출판이 서울이 아니라 전라도 나주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나주는 전라도의 질 높은 종이를 쉽게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구한 목판 출판의 전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다 강과 바다를 끼고 있어서 수운을 통해 유통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20쪽

조선시대 그림 가운데 상당수가 병풍에 그려졌는데 이는 조선 사람들이 병풍과 생사를 함께 했기 때문이다. 조선 사람들은 병풍 앞에서 태어나, 병풍 앞에서 먹고 자며, 병풍 앞에서 죽어, 병풍 뒤에 놓였다가, 무덤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병풍이 이처럼 중요한 생활 가구이다 보니, 웬만한 집안에서는 병풍 한 좌 갖추지 않은 집이 없었다. 가난한 집에서는 행사 때 다른 집에서 빌려야 했다. 물론 병풍에는 그림만 있지는 않았다. 글씨를 쓴 것도 많고, 글씨와 그림의 중간이라 할 ‘문자도’ 병풍도 있었다. 심지어 아무런 글씨나 그림이 없는 백지 병풍도 있었다. 또 그림 병풍만이 아니라 자수 병풍도 있었다.

-38쪽

병풍은 말 그대로 바람이나 시선을 막는 방폐의 기능을 한다. 지금의 칸막이와 같다. 벽이 그리 바람을 잘 막아주지 못하던 시절, 병풍은 매서운 바람을 막아준 바람막이였다. 또한 상갓집에 쳐두는 백지 병풍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공간 분할의 기능도 했다. 다목적 가구였던 셈이다. 병풍은 훌륭한 실내장식 소품이기도 했는데, ‘산수도’ 병풍을 쳐두면 자연을 실내로 옮겨온 느낌이 들고, ‘모란’ 병풍을 두면 금방 방 안이 꽃밭이 되어버린다. 이런 분위기 조성의 기능은 예식에서는 그 행사에 걸맞은 역할을 한다. 혼례에는 교자상 뒤에 두어 결혼의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들고, 환갑잔치 때는 잔칫상 뒤에 두어 축수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또 병풍에는 시구나 교훈적 잠언을 적기도 하고 어떤 기관의 규칙이나 행사의 절차를 적어두기도 했다. 병풍은 훈련과 교육의 자료이기도 했던 것이다.

-39쪽

양소유와 마찬가지로 작가 김만중도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김만중은 아예 유복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익겸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청나라 군대와 싸우다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했다. 그의 나이 스물세 살이었다. 서포는 불행한 출생과 달리 대단한 가문 배경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순절하기 전해에 과거에서 일등으로 급제한 촉망받는 신예였다. 할아버지 김반은 이조참판이었고, 증조부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제자이자 송시열의 스승으로 조선 예학의 대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나중의 일이지만 형 김만기의 딸은 인경왕후, 곧 숙종의 첫 왕비가 되었다. 외가 또한 이에 못지않은데 외할아버지는 이조참판 윤지이며, 외증조부는 선조 임금의 부마인 윤신지이고, 외고조부 윤방과 그의 아버지 윤두수는 모두 최고 관직인 영의정을 지냈다. 김만중은 본가나 외가 모두 최고 관료의 집안이었고, 동시에 왕실의 척족이었다. 최고 명가의 자손이었던 것이다.

-83쪽

그런데 김만중의 이런 개인사가 아니더라도 소설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를 제거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특히 조선처럼 가부장권이 강한 사회에서는 아버지를 그대로 두고는 주인공을 자유롭게 활동시킬 수가 없다. 아버지를 멀리 귀양 보내든지, 아니면 일찍 죽게 하든지, 구운몽처럼 신선 세계로 보내든지, 주인공과 아버지를 분리시켜야 비로소 주인공은 자유로울 수 있다.

-84쪽

사마상여에게 탁문군이 시를 지어 헤어질 뜻을 비친 시 ‘백두음’

산꼭대기의 눈 같은
구름 사이의 달 같은, 희고 밝은 내 마음
당신이 두 마음이 있다 하니
이제 헤어집시다
오늘은 이별주를 나누지만
내일 아침은 물가에서 작별하리
물가를 서성이니
물은 무심히 흘러가네
쓸쓸하고 쓸쓸해라
시집 올 때 울 일 없으리라 했더니
한마음 가진 사람 만나
머리 희도록 헤어지지 않으리라 했더니
낚싯대 흔들며
팔짝팔짝 뛰는 물고기 낚듯, 구애할 때 언제던고
남자는 모림지기 그 뜻이 무거워야지
어찌 돈만 따르느뇨
-86쪽

칠보시는 후한의 무인 조식과 관련된 것이다. 조식은 삼국지의 간웅 조조의 아들이다. 형 조비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동생을 경쟁자로 여겨 죽이려 했다. 조비는 동생에게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 한 수를 지어내라는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렸다. 조식은 다음의 시를 지었다.
콩을 삶으려 콩대를 태우니
콩이 가마 속에서 흐느끼네
본래 한 뿌리에서 났는데
무얼 그리 급히 들볶나

콩이 가마 속에서 흐느낀다는 말은 콩대를 태울 때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을 가리키는 듯하다. 콩대가 타야 콩이 익는다. 결국 한 뿌리, 즉 한 부모에게서 나서 콩대 너는 어찌 이리 나를 눈물짓게 하느냐는 말이다. 콩이 바로 시인 자신이다. 형을 원망하는 뜻을 담고 있다. 조비는 이 시를 듣고 동생을 살려주었다고 한다.
-88쪽

구운몽은 그 이야기의 중심이 한 남성과 여덟 여성의 결연에 있다. 따라서 구운몽도도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로 충만해 있다. 이런 분위기가 어울리거나 필요한 곳은 어디일까? 단정한 선비의 사랑방에 두기는 선비의 맑고 근엄한 정신세계와 어울리지 않고 남녀칠세부동석을 어릴 때부터 들어온 잘 배운 규수의 방에 두기에는 너무 외설적일 수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구운몽도와 가장 어울리는 공간은 향락 공간, 곧 기생방이라 할 수 있다.

-91쪽

종교나 이념은 강한 목적성을 지니기에 그것을 퍼뜨리려고 이야기에 그림을 넣지만, 오락성이 강한 소설책에 꼭 그림을 넣을 이유가 없다. 소설은 그림이 없어도 독자를 흡인할 수 있는 힘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소설에 그림이 빠지는 일은 거의 없다. 물론 이는 현대소설이 아니라 고전소설의 경우다. 요즘이야 영화다 텔레비전 드라마다 시각 이미지가 넘쳐나기에 굳이 소설에까지 그림을 넣으려 하지 않지만, 소설이 거의 유일한 오락물이던 시절에는 소설 또한 그림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다.

-93쪽

단테의 신곡이나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그리고 아서 왕 이야기나 돈키호테 등 중세 서양의 저명한 소설 속에 모두 삽화가 들어 있음은 물론이고, 중국소설은 상도하문이라고 하여 책 상단에는 그림을 넣고 하단에는 글을 넣는 방식을 취하거나, 아니면 책 처음이나 중간에 한 면이나 두 면을 그림으로 채운 경우가 적지 않다. 일본에서는 오히려 그림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그림의 여백에 글을 써넣은 작품이 많다. 현대의 만화책 같은 소설이다. 오죽하면 글이 많은 소설을 ‘그림보다는 글이 많아서 읽는 데 치중해야 하는 책’이라 하여 ‘독본(요미혼)’이라고까지 불렀을까.

-94쪽

그러면 왜 유독 조선에만 소설에 그림이 없을까? 글과 사상을 중시한 유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문자를 중심에 둔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상업의 미발달이 큰 원인이라 생각된다. 소설에 그림을 넣자면 품이 많이 들고 품이 많이 들면 제작비가 비싸진다. 비싼 소설에 돈을 쓸 수 있는 수요자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소설에 삽화를 넣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아주 거친 종이나 이미 사용한 종이의 이면에 베낀 필사본 소설과 저질 종이에 조잡한 판각으로 빼곡히 글씨를 박아 인쇄한 판각본 소설을 보면, 이런 소설에 삽화는 사치라는 생각마저 든다. 조선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상업 출판이나 소설 출판이 늦게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도 작았다. 18세기 이후에야 상업적 소설 출판이 본격화하였으니, 그 사정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96쪽

구운몽도는 민화다. 민화라고 해서 화가가 서민 또는 아마추어이고, 향유층이 하층 백성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민화는 궁중 화원이 그린 것도 있고, 또 궁중 화원은 아니더라도 전문 화가의 그림이 많다. 1830년 불탄 경희궁을 중건하고 남긴 기록인 ‘서궐영건도감의궤’를 보면 중건 사업에 참여한 화가로 ‘궁중 화원’이 셋이고, ‘방외화사’로 서울 화사가 사십 명, 평양 화사가 열 명 동원되었다고 한다. 또 경상도 통영 같은 곳에는 관아에 화원방을 두었고, 여기에서 수십 명이 근무했다고 한다. 통영에는 중앙에서도 화사군관 한 사람을 파견하였는데, 그 화사들 가운데는 김두량처럼 궁중 화원으로 명성을 떨친 화가도 적지 않았다. 이처럼 조선 후기 화가들은 궁중 안팎은 물론 경향 간에도 교류했고, 이들 화가들이 주로 민화를 그렸다.
-112쪽

일찍이 민화를 수집한 조자용 선생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민화를 수집하던 초기, 즉 1950년대에 민화는 대부분 기와집에서 나왔다고 한다. 민화의 수요층이 대개 부유층이었던 것이다. 또한 궁궐 침전에 갖다 놓은 ‘요지연도’ 병풍, ‘모란도’ 병풍 등을 볼 때, 궁궐을 포함해 상층 또는 부유층이 주로 민화를 소비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민화는 그림의 한 종류일 뿐이지 그 향유층과는 별 상관이 없다. 그래서 요즘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조선시대에 쓴 용어 그대로 속화(俗畵)라는 말을 쓰기도 하며, 김호연 선생 같은 분은 아예 겨레그림이라고도 하였다. 구운몽도도 먼저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곳에서 소비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113쪽

그림은 이야기의 핵심을 인상적으로 전달하는 도구다. 동시에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독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림은 이야기를 만나 살아있는 화제(畵題)를 얻고, 이야기는 그림을 만나 전달의 동력을 얻는다.

-131쪽

조선시대에 기행문을 와유록이라 했다. 책을 읽으며 누워서 여행을 한다는 말이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병풍을 ‘와유’하게 하는 물건이라 했다. 이렇게 보면 구운몽도는 누워서 편안히 즐기는 구운몽이다.

-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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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1-11-09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2쪽 팔선녀는 앞앞에 놓인 >>앞에 놓인
146쪽 예송논쟁에서 임금이 죽은 다음 왕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할지>>>대비
 
서울, 밤의 산책자들 현대문학 테마 소설집 2
전경린 외 지음 / 강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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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긴 숨을 쉬어요. 오후가 저녁으로 기우는 시간에 날마다 뼈들이 아파왔어요. 존재가 인내하던 불안의 끈을 놓쳐버리고 안도감 같은 공허의 검은 안개 속으로 실려 가는 거예요. 꾸물꾸물 저녁을 챙겨먹고 원고를 보거나, 서랍 정리 같은 것을 하거나,텔레비전을 보며 밤 시간을 보내고 세수를 한 뒤 커튼을 내리기 위해 창으로 다가가면, 밤이 보였어요.

밤은 검정색 헝겊으로 귀를 틀어막은 짐승 같았지요. 그 실어와 난청의 밤 저편에 낙산 언덕이 안개 속에 금모래를 뿌려놓은 듯 아련히 반짝거렸어요. 낙타가 앉아 있는 모습이라고 하죠.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뿌려진 불빛들이 모여 낙타의 형상을 이루고 내 창을 향해 걸어올 것만 같았어요.-21쪽

나는 미소까지 지으며 고개를 까닥했어요. 그리고 마취된 입술을 겨우 움직여 말을 걸었어요. 카페를 하나봐요...... 하지만, 여자는 냉담했어요. 순간적으로 나를 밀어내고 돌아서는 작은 도마뱀 같은 초록빛 시선이 당황스러웠지요. 나를 가만히 놔둬요. 나도 당신들을 가만히 놔둘 게요...... 나는 그녀들의 꽃말을 생각했어요. 그녀들과 나의 닮은 점을 그때서야 깨달았어요. 이웃들과 달리,우리는 서로 심판하지 않아요. 그 여자들에게 우리는 자기들의 카페와 주방 바깥의 사람, 인생 바깥의 사람,스쳐갈 뿐 알고 싶진 않은 외국인,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서로의 증인이 되지는 못하는 사람들, 그녀들과 우리, 서로가 무채색 배경에 지나지 않는 타인들이었지요. 서로 심판하지 않기 위해 더욱더 무관심해진 타인들,그것이 이웃이었어요.-25쪽

어느 날, 세월이 흐른뒤, 어느 날 말이에요, 당신이나 내가 세상과 작별했다면,우리, 홀러다니는 소문으로 그 소식을 알리지 말아요. 예의를 갖춘 정식 부고를 주고받고 싶어요. 별세의 날이 다가올 즈음 비밀스러운 주소 하나를 누군가에게 맡기는,그 정도 부탁은 가족에게 할수 있지 않을까요...... 또다시 오랜 시간이 흘러간 뒤에 말이에요. 우리가 낙엽처럼 가벼워져서 한걸음으로 훌쩍 공기 속으로 넘어가게 될 때요.-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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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11-06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5쪽, 제가 밑즐 그은 부분에 마노아님도 밑줄 그으셨네요.
:)

마노아 2011-11-06 22:16   좋아요 0 | URL
헤헷, 통했어요. 찌르르~~
 
싫어요! - 흑인 민권 운동의 역사를 새로 쓴 한마디 더불어 사는 지구 37
파올라 카프리올로 지음, 김태은 옮김, 이우건 그림 / 초록개구리 / 2011년 9월
절판


흑인이 미국 군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감사나 존경은커녕 오히려 더 엄한 벌을 주는 빌미가 되었다. 흑인 전쟁 용사들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못한 대우를 받았다. 선거인 명부에 등록하려고 하면 여지없이 거부당했다. 조국을 위해 싸웠다고 해서 ‘무례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 ‘버르장머리 없는’ 흑인들을 본래 자리로 되돌려 놓아야만 한다고 여겼다.

-45쪽

미국 유색인 지위향상 협회는 운송 회사에 흑인 승객을 존중해 달라는 청원서를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청원서를 내야 할 때가 되자, 로자는 더 이상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신념이 굳은 로자는 종이 한 장 달랑 들고 백인을 찾아가서 애원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당당히 맞서 싸워서 권리를 찾아야지, 친절을 조금만이라도 베풀어 달라고 구걸하러 가고 싶지는 않았다.

-60쪽

로자는 창가 자리에 계속 앉아 있을 작정이었다. 너무 늙어서도 아니었고, 고된 하루 일을 마치고 몇 정거장도 서서 갈 수 없을 만큼 피곤해서도 아니었다. 로자가 정말로 진저리가 난 것은 백인들의 횡포에 흑인들은 언제나 항복하거나 포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70쪽

버스는 이제 반쯤 비어 있었다. 겁에 질린 흑인 승객 몇몇과 화가 치민 백인 승객들만이 조용히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의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의는 이루어졌다. 그러나 남부의 방식대로였다.
"왜 잘에서 안 일어났죠?"
경찰 한 명이 로자에게 매섭게 물었다.
그러자 로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왜 당신들은 우리를 학대하는 거죠"
한 번도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경찰은 어리둥절해졌다.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요."
경찰은 결국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러나 법은 법이니까 당신을 체포하겠어요."
-71쪽

경찰차 안에서, 두 경찰 중 한 명이 로자에게 다시 물었다.
"왜 안 일어났죠?"
그러나 이번에 로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로자는 아주 위대한 행동을 했다. 비록 얼핏 보기엔 단순해 보이지만 이것은 결정적인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로자는 아직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로자는 자신을 순교자나 영웅으로 여길 만큼 건방지지도 않았다. 그저 진저리가 났던 것이다. 로자는 포기하는 것에 진절머리가 난 흑인 여성이었을 뿐이다.
-73쪽

닉슨의 말이 옳았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도 인종 분리 버스를 타서는 안 되었다. 로자가 자기 자리를 내주는 걸 거부한 것은, 그날 그 버스에서만 그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그러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한 일이었다. 그 자유란, 미국의 역사가 로자에게 가르쳐 준 대로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권리였다. 그러한 행동을 한 이상 이제 뒤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81쪽

여러분은 100년 전부터 로자와 같은 불쌍한 여자들 덕에 먹고 살고 있어요. 그러나 그들을 위해서 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겁에 질린 학생들처럼 굴지요. 그래요, 맞아요. 우리는 평생을 교복을 입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복을 벗어 버릴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진정 인간이 되려면, 지금 당장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96쪽

(마틴 루서 킹)
"오랫동안 우리는 정말 놀라울 만큼 큰 인내심을 보여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녁 우리는 자유와 평등보다 덜 소중한 것에 만족하려는 우리의 인내심에서 벗어나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 가운데 하나는 바로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권리입니다. 여러분이 용기 있게 싸운다면, 우리가 우리의 존엄성과 기독교적인 사랑으로 함께 싸운다면, 우리의 투쟁을 역사책은 다음과 같이 기록할 것입니다. ‘위대한 민중이 살았다. 그들은 문명의 핏줄에 새로운 의식과 존엄성을 가져온 흑인 민중이었다.’라고. 이것이 우리의 도전이요, 우리가 꼭 이뤄 내야 할 책임입니다."
-99쪽

사실 로자는 이제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결정적인 말은 이미 지난 목요일 버스에서 다 했기 때문이다. 그 확고하고 절대적인 "싫어요!"라는 말 한마디를, 이제는 마침내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02쪽

1975년 12월, 승차 거부 운동이 일어난 지 20주년이 되던 해에 로자는 마침내 몽고메리로 돌아갔다. 로자의 나이 62세였다. 믿기 어렵겠지만 몽고메리 시 당국의 초대를 받아서였다.

-123쪽

로자의 유해는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비행기로 몽고메리로 옮겨진 뒤에 다시 워싱턴으로 옮겨져 국회 의사당의 원형 건물에 안치되었다. 여성을 이처럼 우러러 받드는 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1865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유해가 놓였던 바로 그 관대 위에 놓인 로자의 관을 보초병이 말없이 지키는 가운데, 5만 명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 다가가 ‘민권 운동의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보냈다.
그로부터 3년 뒤에, 검은색 피부를 가진 남자 버락 후세인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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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11-01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책 읽고 싶었어요.

마노아 2011-11-01 15:16   좋아요 0 | URL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책이었어요. 뭉클했답니다. :)
 
헬프 2
캐서린 스토켓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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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간 건 아마 모르실 거예요. 결혼만 하지 않았다면 졸업했을 거예요. 대학 졸업장을 못 받은 것이 평생 한이 되었지요. 하지만 그것을 보상해주는 소중한 쌍둥이 아이들이 있어요. 아이들을 투갈루 대학에 보내려고 십 년 동안 날 남마다 돈을 모았지만 등골이 휘게 일했는데도 둘을 모두 보낼 돈은 마련하지 못했어요. 아이들은 똑같이 똑똑하고 똑같이 배움에 대한 열의가 높아요. 하지만 돈은 한 명을 보낼 만큼이라,그래서 여쭙겠는데, 만약 제 입장이라면 누구를 대학에 보내고 누구를 타르 칠 하는 일을 시키겠어요? 한 명에게 인생의 기회를 주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그 아이에게 다른 한 명만큼 너도 사랑한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그럴 수는 없지요. 어떻게든 그것을 가능하게 할 방법을 찾을 거예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이지요.-26쪽

"모자라는 등록금이 겨우 75달러였다는 이야기도 썼던가요? 미스 힐리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대요. 매주 조금씩 갚겠다고 힐리가 안 된다고 했대요. 진짜 기독교인이라면 건강능력 있는 사람에게는 자선을 베풀지 않는다면서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접 배우게 하는 게 더 친절한 거라면서요."-29쪽

그들을 덮치려고 한 백인 남자들에게 분노하는 이야기도 있다. 위니는 몇 차례나 강제로 당했다. 클레온타인은 그 작자의 얼굴에서 피가 날 때까지 싸웠더니 다시 덮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사랑과 경멸이 나란히 공존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대부분은 백인 자녀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만 참석하려면 반드시 제복을 입어야 한다. 이런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유색인의 입으로 들으니 처음 듣는 것처럼 새롭다.-40쪽

콘스탄틴이 아른거린다. 나는 그녀에게 고마워하지 않았다. 진심을 다해서는 한 번도.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44쪽

이게 지금 생시인가? 백인 여자가 정말 나를 구하려고 백인 남자를 친 건가? 아니면 이 작자가 내 두개골을 으스러뜨려서 내가 여기 엎어져 죽은 건가......– -123쪽

미스 셀리아는 화장을 하지 않았고,머리에 스프레이도 뿌리지 않았고, 잠옷은 낡은 프레리 드레스처럼 보인다. 그녀가 코로 깊게 숨을 들이쉰다. 이제야 알겠다. 그녀가 십 년 전에는 가난한 백인 소녀였다는 것을. 강인했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당하고 살지 않았다는 것을.-125쪽

"선생님이 그러는데 검은색은 더럽고 나쁜 얼굴을 가졌다는 뜻이래요."
아이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서럽고 애처롭게 운다.
미스 테일러. 기껏 내가 메이 모블리에게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색깔로 판단하지 않는법을 가르쳐놓았더니 기어코. 가슴에서 단단한 주먹 같은 게 느껴진다. 1학년 때 선생님을 누가 기억하않겠는가? 배운 것은 기억하지 못할 수 있겠지만, 분명히 말하는데, 지금까지 이만큼 아이들을 키워봤으니 안다. 그들은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다.– -285쪽

그를 되받아치기가 겁난다. 내가 그렇게 하면 그가 나를 떠날까 겁난다. 나도 이것이 어처구니없디는 것을 잘 알고,내가 이렇게 나약하다는 사실에 몹시 화가 난다! 나를 미친 듯이 두들겨 패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나는 왜 바보 같은 술주정뱅이를 사랑하는가? 한번은 리로이에게 물었다. "이유가 뭐예요? 왜 나를 때려요?" 그는 허리를 숙여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당신을 때리지 않으면, 미니, 당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 누가 알겠어."
나는 개저럼 침실의 한구석에 몰려 있었다. 그가 나를 벨트로 때리고 있었다. 내가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리로이가 나를 개처럼 때리는 짓을 그만두었다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누가 알겠는가.-290쪽

나는 루 앤이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걸 지켜보며 사람의 진심은 절대 알 수 없는 거구나, 생각한다. 내가 루 앤의 하루하루를 조금 더 편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을까. 내가 그녀에게 조금만 더 잘했줬다면. 이것이 책의 핵심 아니었나? 여자들이 우리는 그저 두 사람이야, 우리를 가르는 건 그렇게 많지 않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어, 하고 깨닫는 것.
하지만 루 앤은 이 책을 읽기도 전에 이미 핵심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 핵심을 놓친 것은 나였다.-300쪽

내가 책을 쓰지 않았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한다. 월요일에는 브리지를 했을 것이다. 내일밤에는 연맹 모임에 가서 뉴스레터를 나눠줬을 것이다. 금요일 밤에는 스튜어트와 저녁을 먹으러 가서 늦은 시각까지 같이 있었을 것이고,토요일에는 피로가 풀리지 않은 몸으로 테니스를 치러 일어났을 것이다. 피곤하고 평안하지만 갑갑했을 것이다.
어느 오후 힐리가 자기 가정부를 도둑으로 몰아붙이지만 나는 가만히 앉아서 듣고만 있었을 것이기에. 엘리자베스가 자기 아이의 팔을 세게 꼬집지만 나는 못 본 척 시선을 돌렸을 것이기에. 스튜어트와 약혼하지만 짧은 드레스도 입지 못하고,머리도 기르지 못하고, 그가 위험하다며 용납하지 않을까봐 두려워 유색인 가정부에 대한 책을 쓰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기에. 내가 힐리와 엘리자베스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켰다고 거짓말은 할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말에 더는 동의하는 척할 필요가 없다.-301쪽

"내 말 잘 들어요,미스 스키터. 나는 아이빌린을 보살필 거고 아이빌린은 나를 보살필 거예요. 여기에서 당신에게 남은 건 주니어 연맹에 속한 당신의 적들에게 시달리고 당신 어머니 때문에 술잔을 기울이는 일뿐이에요. 당신은 이곳에서 다리란 다리는 깡그리 태웠어요. 이 타운에서는 새 남자친구도 절대 사귀지 못할 거고,그건 모두가 알지요. 그러니 뉴욕까지 그 하얀 궁둥이를 흔들면서 걷지 말고 뛰어가란 말이에요!"-310쪽

"윌리 메이는 이제껏 다른 백인 여자들이,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자기를 어떻게 대했는지도 다 말해줬대요. 그 백인 여자는 가만히 듣고요. 윌리 메이가 거기서 일한 게 삼십칠 년인데 한 테이블에 앉은 건 처음이었대요."-316쪽

나는 아이의 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아이도 내 눈을 본다. 오, 이 아이의 눈빛은 천 년을 산 사람처럼 원숙한 영혼의 눈빛이다. 그리고 맹세하건대, 저 아래 깊숙한 곳에서 아이가 자라면 어떤 여자가 될지 보인다. 미래가 반짝 불을 켠다. 키가 크고 자세가 꼿꼿하다. 당당하다. 머리 모양은 훨씬 예쁘다. 그리고 내가 머릿속에 심어준 말들을 기억한다. 다 자란 숙녀가 되어서도 기억한다.
그 순간 아이는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착해요." 아이가 계속 말한다. "나는 똑똑해요. 나는 소중해요."-340쪽

나는 아이가 또다시 서럽게 울고불고하는 소리를 들으며 뒷문을 열고 나간다. 나 또한 울면서,내가 메이 모블리를 얼마나 그리워할지 알면서, 제 엄마가 좀더 많은 사랑을 주기를 기도하면서 진입로를 걸어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미니처럼 자유를 느낀다. 자기 머릿속에 갇힌 채 자기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는 미스 리폴트보다 내가 더 자유롭다. 그리고 미스 힐리보다도 더. 저 여자는 앞으로 평생 자기는 그 파이를 먹지 않았다고 사람들을 설득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감옥에 갇힌 율 메이를 생각한다. 미스 힐리 역시 자신의 감옥에, 그것도 무기징역으로 갇혀 살 것이다.-342쪽

햇살이 환하다. 나는 눈을 크게 뜬다. 사십 년 남짓한 세월을 그래온 것처럼 버스 정류장에 선다. 내 삶이 삼십 분 만에...... 송두리째 끝났다. 어쩌면 나는 계속 글을 써야 할 것이다. 신문에 싣는 글만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을, 내가 아는 모든 사람과 내가 겪은 모든 것에 대해. 어쩌면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 내 나이는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 생각에 울음과 웃음이 동시에 터진다. 어젯밤만 해도 나는 내 인생에 새로운 것은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343쪽

(옮긴이의 말)
흑인과 백인을, 더 크게는 인종과 인종을 갈라놓는 선이 점차 사라지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한편으로 확산되고 변형되는 것도 사실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의 핵심은 우리는 그저 두 사람이야, 우리를 가르는 건 그렇게 많지 않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어, 하고 깨닫는 것이라고. 우리는 이 말에 진심으로, 얼마나 동의하는가.-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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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 1
캐서린 스토켓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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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쪽 방으로 가면서 속으로는 열불이 나서 쿵쿵거린다. 꼬마 아가씨가 저 침대에 누운 것이 어젯밤 여넓시부터니까 당연히 기저귀를 갈아줘야 한다! 미스 리폴트, 당신도 엉망진창으로 지저분한 화장실에 열두 시간 앉아 있어봐!-33쪽

생각하면 할수록 허허,우습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집에는 안에 욕실이 두 개 있고 바깥에 또하나를 짓고 있다. 그런데도 이 남자가 용변을 볼 장소는 여전히 없다.-41쪽

미스 스키터는 나더러 현실을 바꾸고 싶지 않은지 묻는다. 미시시피 주 잭슨을 바꾸는 것이 전구를 갈아 끼우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듯이.-48쪽

나는 백인 여자들이 이것저것 집어 줘도 잘 받지 않는데,그건 그들이 내가 빚진 것처럼 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93쪽

어머니의 규칙에 따라 가끔이라도 유지니아라는 본명으로 나를 불러준 사람은 콘스탄틴이 유일했다. "진짜 못난이는 가슴속에 살지요. 못난이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야비한 사람이거든요. 아가씨도 그런 사람일까요?"
"모르겠어요. 안 그런 것 같아요."

"아침마다, 죽어서 땅에 묻힐 때까지 이렇게 다짐해야 해요.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야 해요. 저 바보들이 오늘 내게 지껄인 말을 믿을 것인가?"-110쪽

비밀을 함께 나눌 사람이 있다는 건 참으로 짜릿한 일이었다. 나이가 비슷한 형제나 자매가 있다면 이런 기분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담배나 어머니의 눈을 피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당신이 기형적으로 키가 크고 머리가 곱슬곱슬하고 생김새가 특이하다는 이유로 당신의 어머니가 조바심치며 어쩔 줄 몰라할 때 누군가 당신을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누군가 말없이 눈빛으로, 나랑 같이 있으면 괜찮아요, 해주는 것이다. -114쪽

하지만 콘스탄틴과 나눈 대화가 늘 달콤한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열다섯 살이 됐을 때 새로 전학 온 여자애가 나를 가리키며 "얘는 황새야?"라고 했다. 그러자 힐리마저 쿡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며 그애가 한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나를 잡아당겼다.
"콘스탄틴은 키가 얼마나 커요?" 내가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따.
콘스탄틴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나를 보았다. "아가씨는요?"
"180." 나는 울먹였따. "벌써 남학생 농구부 코치보다 커요."
"나는 185니까, 스스로를 동정하는 건 그만두세요."
콘스탄틴은 내가 올려다볼 수 있는,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유일한 여자였다.-114쪽

미스 셀리아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내가 돌아가고 그들이 미스터 조니의 어머니 집으로 출발하기 전에 나에 대해 알리기로 했다. 하지만 미스 셀리아가 지꾸 이상하게 구니 말을 뒤엎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안 돼요, 아씨. 나는 종일 혼잣말을 한다. 비누에 붙은 머리카락처럼 나는 그녀에게 들러붙을 작정이다.-231쪽

"그날 아침에 해고되어 돌아온 나는 새 작업화를 신은 채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망연자실 서 있었다. 어머니가 한 달 치 전깃불 값을 들여 사준 구두였다. 수치심이 무엇인지, 그것의 색깔이 무엇인지 깨달은 건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수치심은 내가 늘 생각한 것처럼 먼지 같은 검은색이 아니었다. 수치심의 색깔은 어머니가 밤새 다림질을 해서 번 돈으로 장만한 새 제복의 흰색,얼룩하나 없고 일하다 묻은 먼지 한 톨 없는 흰색이었다."-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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