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도 - 그림으로 읽는 『구운몽』 키워드 한국문화 3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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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출판을 한 인쇄 선진국이지만, 소설을 출판한 일은 많지 않았다. 구운몽 전에는 전등신화, 삼국지연의를 비롯한 중국소설과 한국소설로는 금오신화가 출간되었지만, 구운몽 간행과는 성격이 다르다. 전자의 출간 주체는 교서관, 지방관청 등 관청이지만, 구운몽은 출간 주체가 민간으로 상업적 성격이 더욱 강하기 때문이다. 책 맨 마지막에 ‘숭정재도을사금성오문신간’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숭정재도을사’는 명나라 마지막 연호인 숭정 연간 후 두 번째 을사년이라는 뜻으로 1725년을 가리키고, 금성은 전라도 나주를 가리키며, 오문은 남문이다. 보통 성 남문 근처에는 서민들이 사는데, 전라도 나주의 민간에서 누군가가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소설 민간 출판이 서울이 아니라 전라도 나주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나주는 전라도의 질 높은 종이를 쉽게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구한 목판 출판의 전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다 강과 바다를 끼고 있어서 수운을 통해 유통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20쪽

조선시대 그림 가운데 상당수가 병풍에 그려졌는데 이는 조선 사람들이 병풍과 생사를 함께 했기 때문이다. 조선 사람들은 병풍 앞에서 태어나, 병풍 앞에서 먹고 자며, 병풍 앞에서 죽어, 병풍 뒤에 놓였다가, 무덤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병풍이 이처럼 중요한 생활 가구이다 보니, 웬만한 집안에서는 병풍 한 좌 갖추지 않은 집이 없었다. 가난한 집에서는 행사 때 다른 집에서 빌려야 했다. 물론 병풍에는 그림만 있지는 않았다. 글씨를 쓴 것도 많고, 글씨와 그림의 중간이라 할 ‘문자도’ 병풍도 있었다. 심지어 아무런 글씨나 그림이 없는 백지 병풍도 있었다. 또 그림 병풍만이 아니라 자수 병풍도 있었다.

-38쪽

병풍은 말 그대로 바람이나 시선을 막는 방폐의 기능을 한다. 지금의 칸막이와 같다. 벽이 그리 바람을 잘 막아주지 못하던 시절, 병풍은 매서운 바람을 막아준 바람막이였다. 또한 상갓집에 쳐두는 백지 병풍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공간 분할의 기능도 했다. 다목적 가구였던 셈이다. 병풍은 훌륭한 실내장식 소품이기도 했는데, ‘산수도’ 병풍을 쳐두면 자연을 실내로 옮겨온 느낌이 들고, ‘모란’ 병풍을 두면 금방 방 안이 꽃밭이 되어버린다. 이런 분위기 조성의 기능은 예식에서는 그 행사에 걸맞은 역할을 한다. 혼례에는 교자상 뒤에 두어 결혼의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들고, 환갑잔치 때는 잔칫상 뒤에 두어 축수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또 병풍에는 시구나 교훈적 잠언을 적기도 하고 어떤 기관의 규칙이나 행사의 절차를 적어두기도 했다. 병풍은 훈련과 교육의 자료이기도 했던 것이다.

-39쪽

양소유와 마찬가지로 작가 김만중도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김만중은 아예 유복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익겸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청나라 군대와 싸우다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했다. 그의 나이 스물세 살이었다. 서포는 불행한 출생과 달리 대단한 가문 배경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순절하기 전해에 과거에서 일등으로 급제한 촉망받는 신예였다. 할아버지 김반은 이조참판이었고, 증조부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제자이자 송시열의 스승으로 조선 예학의 대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나중의 일이지만 형 김만기의 딸은 인경왕후, 곧 숙종의 첫 왕비가 되었다. 외가 또한 이에 못지않은데 외할아버지는 이조참판 윤지이며, 외증조부는 선조 임금의 부마인 윤신지이고, 외고조부 윤방과 그의 아버지 윤두수는 모두 최고 관직인 영의정을 지냈다. 김만중은 본가나 외가 모두 최고 관료의 집안이었고, 동시에 왕실의 척족이었다. 최고 명가의 자손이었던 것이다.

-83쪽

그런데 김만중의 이런 개인사가 아니더라도 소설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를 제거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특히 조선처럼 가부장권이 강한 사회에서는 아버지를 그대로 두고는 주인공을 자유롭게 활동시킬 수가 없다. 아버지를 멀리 귀양 보내든지, 아니면 일찍 죽게 하든지, 구운몽처럼 신선 세계로 보내든지, 주인공과 아버지를 분리시켜야 비로소 주인공은 자유로울 수 있다.

-84쪽

사마상여에게 탁문군이 시를 지어 헤어질 뜻을 비친 시 ‘백두음’

산꼭대기의 눈 같은
구름 사이의 달 같은, 희고 밝은 내 마음
당신이 두 마음이 있다 하니
이제 헤어집시다
오늘은 이별주를 나누지만
내일 아침은 물가에서 작별하리
물가를 서성이니
물은 무심히 흘러가네
쓸쓸하고 쓸쓸해라
시집 올 때 울 일 없으리라 했더니
한마음 가진 사람 만나
머리 희도록 헤어지지 않으리라 했더니
낚싯대 흔들며
팔짝팔짝 뛰는 물고기 낚듯, 구애할 때 언제던고
남자는 모림지기 그 뜻이 무거워야지
어찌 돈만 따르느뇨
-86쪽

칠보시는 후한의 무인 조식과 관련된 것이다. 조식은 삼국지의 간웅 조조의 아들이다. 형 조비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동생을 경쟁자로 여겨 죽이려 했다. 조비는 동생에게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 한 수를 지어내라는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렸다. 조식은 다음의 시를 지었다.
콩을 삶으려 콩대를 태우니
콩이 가마 속에서 흐느끼네
본래 한 뿌리에서 났는데
무얼 그리 급히 들볶나

콩이 가마 속에서 흐느낀다는 말은 콩대를 태울 때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을 가리키는 듯하다. 콩대가 타야 콩이 익는다. 결국 한 뿌리, 즉 한 부모에게서 나서 콩대 너는 어찌 이리 나를 눈물짓게 하느냐는 말이다. 콩이 바로 시인 자신이다. 형을 원망하는 뜻을 담고 있다. 조비는 이 시를 듣고 동생을 살려주었다고 한다.
-88쪽

구운몽은 그 이야기의 중심이 한 남성과 여덟 여성의 결연에 있다. 따라서 구운몽도도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로 충만해 있다. 이런 분위기가 어울리거나 필요한 곳은 어디일까? 단정한 선비의 사랑방에 두기는 선비의 맑고 근엄한 정신세계와 어울리지 않고 남녀칠세부동석을 어릴 때부터 들어온 잘 배운 규수의 방에 두기에는 너무 외설적일 수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구운몽도와 가장 어울리는 공간은 향락 공간, 곧 기생방이라 할 수 있다.

-91쪽

종교나 이념은 강한 목적성을 지니기에 그것을 퍼뜨리려고 이야기에 그림을 넣지만, 오락성이 강한 소설책에 꼭 그림을 넣을 이유가 없다. 소설은 그림이 없어도 독자를 흡인할 수 있는 힘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소설에 그림이 빠지는 일은 거의 없다. 물론 이는 현대소설이 아니라 고전소설의 경우다. 요즘이야 영화다 텔레비전 드라마다 시각 이미지가 넘쳐나기에 굳이 소설에까지 그림을 넣으려 하지 않지만, 소설이 거의 유일한 오락물이던 시절에는 소설 또한 그림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다.

-93쪽

단테의 신곡이나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그리고 아서 왕 이야기나 돈키호테 등 중세 서양의 저명한 소설 속에 모두 삽화가 들어 있음은 물론이고, 중국소설은 상도하문이라고 하여 책 상단에는 그림을 넣고 하단에는 글을 넣는 방식을 취하거나, 아니면 책 처음이나 중간에 한 면이나 두 면을 그림으로 채운 경우가 적지 않다. 일본에서는 오히려 그림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그림의 여백에 글을 써넣은 작품이 많다. 현대의 만화책 같은 소설이다. 오죽하면 글이 많은 소설을 ‘그림보다는 글이 많아서 읽는 데 치중해야 하는 책’이라 하여 ‘독본(요미혼)’이라고까지 불렀을까.

-94쪽

그러면 왜 유독 조선에만 소설에 그림이 없을까? 글과 사상을 중시한 유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문자를 중심에 둔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상업의 미발달이 큰 원인이라 생각된다. 소설에 그림을 넣자면 품이 많이 들고 품이 많이 들면 제작비가 비싸진다. 비싼 소설에 돈을 쓸 수 있는 수요자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소설에 삽화를 넣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아주 거친 종이나 이미 사용한 종이의 이면에 베낀 필사본 소설과 저질 종이에 조잡한 판각으로 빼곡히 글씨를 박아 인쇄한 판각본 소설을 보면, 이런 소설에 삽화는 사치라는 생각마저 든다. 조선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상업 출판이나 소설 출판이 늦게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도 작았다. 18세기 이후에야 상업적 소설 출판이 본격화하였으니, 그 사정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96쪽

구운몽도는 민화다. 민화라고 해서 화가가 서민 또는 아마추어이고, 향유층이 하층 백성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민화는 궁중 화원이 그린 것도 있고, 또 궁중 화원은 아니더라도 전문 화가의 그림이 많다. 1830년 불탄 경희궁을 중건하고 남긴 기록인 ‘서궐영건도감의궤’를 보면 중건 사업에 참여한 화가로 ‘궁중 화원’이 셋이고, ‘방외화사’로 서울 화사가 사십 명, 평양 화사가 열 명 동원되었다고 한다. 또 경상도 통영 같은 곳에는 관아에 화원방을 두었고, 여기에서 수십 명이 근무했다고 한다. 통영에는 중앙에서도 화사군관 한 사람을 파견하였는데, 그 화사들 가운데는 김두량처럼 궁중 화원으로 명성을 떨친 화가도 적지 않았다. 이처럼 조선 후기 화가들은 궁중 안팎은 물론 경향 간에도 교류했고, 이들 화가들이 주로 민화를 그렸다.
-112쪽

일찍이 민화를 수집한 조자용 선생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민화를 수집하던 초기, 즉 1950년대에 민화는 대부분 기와집에서 나왔다고 한다. 민화의 수요층이 대개 부유층이었던 것이다. 또한 궁궐 침전에 갖다 놓은 ‘요지연도’ 병풍, ‘모란도’ 병풍 등을 볼 때, 궁궐을 포함해 상층 또는 부유층이 주로 민화를 소비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민화는 그림의 한 종류일 뿐이지 그 향유층과는 별 상관이 없다. 그래서 요즘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조선시대에 쓴 용어 그대로 속화(俗畵)라는 말을 쓰기도 하며, 김호연 선생 같은 분은 아예 겨레그림이라고도 하였다. 구운몽도도 먼저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곳에서 소비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113쪽

그림은 이야기의 핵심을 인상적으로 전달하는 도구다. 동시에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독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림은 이야기를 만나 살아있는 화제(畵題)를 얻고, 이야기는 그림을 만나 전달의 동력을 얻는다.

-131쪽

조선시대에 기행문을 와유록이라 했다. 책을 읽으며 누워서 여행을 한다는 말이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병풍을 ‘와유’하게 하는 물건이라 했다. 이렇게 보면 구운몽도는 누워서 편안히 즐기는 구운몽이다.

-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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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1-11-09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2쪽 팔선녀는 앞앞에 놓인 >>앞에 놓인
146쪽 예송논쟁에서 임금이 죽은 다음 왕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할지>>>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