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눈도 왔고, 모처럼 한가했고, 기분도 꽤 좋았다. 뭔가 번호 매겨가며 근황 글을 쓰고 싶었는데 카메라 연결선이 보이질 않는다. 두 시간을 찾다가 언니한테 전화를 해보니 언니가 들고 나갔다 한다. 아씨...;;;;
그래서 노선을 바꿨다. 근래의 문화생활로. ㅎㅎㅎ
내셔널 지오그래픽 전시회를 다녀온 이후로는 일거리가 생겨서 급히 '기후'에 관한 공부를 했다. 책도 많이 봤지만 다큐도 많이 챙겨봤는데 여러 다큐 중에서 단연코 BBC가 최고였다. 그 생생함은 심지어 징그러운 화면을 볼 때조차도 압도적이어서 아름답다고 느낄 정도. 특히 남극의 황제 펭귄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다. 새끼를 낳고 기르고 책임지는 모성애와 부성애는 저리도 본능적일까 경이롭기까지 했다.
장동건이 더빙을 맡은 '지구'는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얘기를 담아놓아서 집중력이 떨어졌고, 최근에 진행하고 있는 '툰드라'는 mbc의 아마존과 북극의 눈물에 비해서 감성을 덜 자극시켰다. 그래도 고현정의 나래이션은 꽤 실감이 났다. 최근 사랑하고 있는 현빈의 '아프리카의 눈물'은 확실히 김남길의 목소리에 견주질 못했다. 김남길은 성우보다 더 성우스런 목소리였는데...
한참 원고 때문에 바쁠 때에 뮤지컬이 당첨됐다. 모니터링 참석하겠냐고 했는데 처음에 연락온 날짜는 수영 간다고 거절했다. 그런데 다음날(수능날) 또 연락이 왔다. 그래서 빼지 않고 다녀왔다. 유니버설 아트센터에서 공연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학교 2학년인지 3학년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가을날이었다. 식구들이 모두 TV를 보고 있었고 나는 TV반대 방향으로 누워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었다. 시끄러운 TV소음과 식구들의 웃음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리고 작품 속 주인공이 가여워서 눈물이 또르륵 흘렀다. 참 좋았더랬는데, 지금은 생각나는 게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뮤지컬 보면서 화드득 놀랐다. 책 속에서 무슨 게임을 할 때 롯데가 다른 사람들보다 베르테르의 뺨만 더 세게 때려서 베르테르가 속으로 기뻐하던 장면, 롯데는 결국 결혼을 하고 그가 권총 자살했다는 것 정도만 기억에 남는다.
뮤지컬은 기대보다 재밌었다. 내가 간 날은 박건형이 베르테르를 맡았던 날인데 베르테르의 이미지보다는 훨씬 건장할 법한 그가 의외로 그 유약한 남성의 연기를 무척 잘해냈다. 노래도 좋았고, 한참 보다 보면 같이 슬퍼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피곤하다고 노래 몇 곡은 졸았지만 맹세코 성실히 모니터링 하고 왔다. ㅎㅎㅎ R석이었는데 무려 십만원 좌석이어서 화들짝 놀랐다. 작품은 좋았지만 10만원씩 주고는 보지 않을 정도랄까?
(사진 펑!)
11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는 두 개가 당첨이 됐다. 하나는 GS25에서 주관한 러브콘서트였고 하나는 mbc 아이콘 공개녹화였다.
러브콘서트는 빼빼로 하나 사서 응모한 것이 당첨되었는데 출연진이 샤이니, 비스타, 씨스타, 노라조, 이승환이었다. 2시 시작해서 4시에 끝나는 거였고, 아이콘은 2회 연속 녹화로 7시에 시작해서 10시에 끝나는 일정이었다. 잠실에서 일산이라니. 너무 극과 극이다. 게다가 아이돌이 많이 나오니 괜히 부담스러워서 아이콘만 가기로 결심을 굳혔다.
아이콘은 생긴지 얼마 안 된 프로그램이다. 아름다운 이들을 위한 콘서트의 준말인데, '라라라'를 폐지하고 나서 mbc가 토요일 낮 12시 대에 방송하는 프로그램이다. 세상에, 난 밤인줄 알았다. 낮 12시 주말에 전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음악 프로라니, 오래 못 가겠다 싶었다. 아니나다를까. 진행도 엉망이고 프로그램이 너무 엉성하다. 급조한 티가 너무 나서 아이콘도 얼마 못 가겠다 싶었다. 당장은 사회자가 슈주 멤버라서 인기를 조금 끌지 모르겠지만...
암튼, 2주 분량을 녹화하는데 첫 출연자는 박미경이었다. 이 날 모두 14팀의 가수들이 나왔는데 여자 출연진 중에선 최고의 실루엣이랄까. 여전히 최고로 날씬하다. 박미경의 가창력이 너무 좋으니 코러사가 따라가질 못했다. 안쓰러운 기분. 서영은은 살이 많이 쪘고, 새 노래는 나한테 별로, KCM은 목소리를 너무 안으로 삼켜서 휘성이 나온 줄 알 뻔...;;; 린은 시커먼 웨지힐을 신었는데 경사가 너무 가파라서 무대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아 불안했다. 그리고 이름만 알고 있던 '노라조'는 그 회 녹화분의 주인공이었다. 해피송, 고등어, 카레, 슈퍼맨을 메들리하듯이 쉬지 않고 이어서 불렀는데 가사가 어찌나 웃기던지 배꼽 잡고 웃었다. 슈퍼맨은 최근 강승윤이 광고하는 모 국제전화 노래의 원곡이었다.
이어서 나온 것은 요조. 무릎 길이의 스커트가 다리를 너무 짧아 보이게 만들어서 슬펐다. 코디가 안티이거나, 코디가 없거나...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온 김장훈은 요조와의 듀엣 곡을 너무 못 불러서 화가 좀 났다. 이들의 무대는 이번 주 토요일에 방송된다.
10분 간의 잠깐 휴식. 이어서 그 다음주 녹화를 시작한다. 나중에 보니 두번째 녹화분을 지난 주에 먼저 방송했다. 아니, 그럼 먼저 찍어야지...ㅜ.ㅜ 공장장님 보겠다고 3시간을 넘게 앉아 있자니 너무 힘들어서...;;;;
그 사이 화장실에 가보니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내가 본 올해의 첫 눈이었다. 유리창 안쪽에서 바라보는 눈은 참 예뻤다. 이럴 때 밖에서 기다려주는 남친이 있어야 하는데...ㅎㅎㅎ
두번째 녹화의 첫 시작은 에이트가 열어줬다. 슈퍼스타 K 1을 2보면서 찾아봤는데 그때 이 노래를 불렀던 조는 전원 모두 합격했더랬다. 이효리가 노래 들으면서 울었던 그 곡. 참 좋았고, 이어서 정수라가 나왔다. 굉장히 뜻밖의 출연이었는데 본인도 엄청 멋쩍어 했다. 그걸 보니 또 왠지 안쓰럽기만 하고, 오래 전에 무슨 프로에서 생방송 중에 여자 출연진 몸무게를 재게 해서 정수라가 펑펑 울었던 기억도 났다. 그리고 몇 년 뒤 살 빼자마자 어깨 다 드러나는 옷부터 입고 나왔던 기억도 나고, 그때도 참 안쓰러워 했던 기억도 새삼 다시 났다. 오랜만에 노래를 듣게 된 정수라는 트롯 분위기였다. 흐음, 선곡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거다.^^
팀은 내가 좋아하는 '사랑합니다'를 불렀으면 좋으련만 다른 곡을 불렀고, 호란은 이 날 14팀 녹화한 사람 중에 워스트 드레서를 자랑했다. 무슨 푸대자루 하나를 목만 뚫어서 입고 나온 느낌이랄까. 화면을 챕쳐해 오고 싶은 기분이다.(지난 주는 외출해서 나도 녹화방송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왕년에 이름 자 날렸던 신촌블루스, 사랑과 평화, 들국화의 멤버가 모여 만든 슈퍼세션이 나왔다.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들국화 멤버가 메인 보컬로 부른 마지막 곡이 제일 좋았다.
진행이 너무 엉망이어서 굉장히 대충 찍는데도 불구하고 촬영이 꽤 지연되었다. 그런데 다음으로 나온 안녕 바다가 노래를 부르다가 중단하고 다시 녹화했다. 이유는 알 수가 없는데 삑사리가 날 것 같아서 미리 멈춘 게 아닐까 짐작한다.ㅎㅎ 앞쪽에서 가사를 놓쳐도, 인터뷰가 엉켜도 한 번도 안 멈추고 녹화를 했던 거라서 좀 걱정이 됐다. 저 치 녹화 끝나고 혼나는 것 아닌가 하고. 걱정도 많다.ㅎㅎㅎ 그리고 마지막은 역시나 울 공장장님. 언제나 마지막 무대 서는 편이기 때문에 늘 기다림이 길다. 노래 세 곡을 불렀는데 이런 표현 자주 안 쓰지만 참 '쩔었다'. 요새 물오른 가창력.ㅎㅎㅎ
낮에 '러브 콘서트' 다녀온 사람들 말로는 러브 콘서트 분위기가 훨씬 좋았더란다. 아이돌 팬들이 뜻밖에도 자기들 좋아하는 무대 끝나고도 자리 지키면서 열심히 환장해 주었다고. 흠. 거길 갔었어야 했는데...ㅎㅎㅎ
못다한 환장은 크리스마스 공연 때 다 풀리라. 개끼(개와 토끼의 합성어란다. 사진 속 저 놈!)와 함께.
11월의 마지막 날에는 엘시크레토를 보았다. 광화문 시네큐브에 예매를 했는데 언니가 전화를 해서 내 좌석을 묻는다. 그러더니 자기는 내 옆자리라고 하는 게 아닌가. 따로 예매했는데 나란히 붙어 앉는다고 나는 막 신기해 했는데, 알고 보니 내 좌석 묻고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옆자리 예매한 거였다. 본인은 나처럼 한가운데에 절대 안 앉는단다. 비상 사태에 뛰쳐나가려면 문쪽으로 앉아야 한다고. 흐음, 그렇구나...
엘 시크레토는 참 좋았다. 음악도 적절했고, 스릴러의 긴장감도 충분히 장악하고 있었고, 마무리는 무척 아름다웠다. 여배우는 나이가 변해가는 스펙트럼이 잘 보였는데, 남배우는 너무 나이가 많았던 탓인지 젊을 때와 구분이 잘 안 가는 게 사소한 아쉬움이었다.
12월의 첫번째 영화는 더 콘서트. 의외로, 정말 의외로 아주 웃겼다. 전혀 웃길 것 같지 않은 데에서 소박하고 소소하게 웃겨서 즐거웠고, 마지막의 연주 부분은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났다. 30년 동안 맞춰보질 못했는데, 리허설조차 서질 못했는데, 그리 완벽한 무대가 나온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기지만, 그들 마음 속에서는 30년 내내 쉬지 않고 울렸을 차이코프스키였을 테니, 그런 것쯤은 무시해도 좋다. 어거스트 러쉬는 뭐 말이 되어서 그리 좋았던가. 여주인공이 참 예뻤는데 어디서 봤나 했더니 타란티노 감독의 바스터즈에 나왔던 여자다.
소셜 네트워크는 토요일에 만난 친구와 서로 안 본 영화를 고르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영화였다. 이거 말고는 워리어스 웨이 뿐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영화는 보고 나면 장동건이 미워질 것 같아서..ㅎㅎㅎ
영화는 대사가 너무 빨라서 자막 읽기가 벅찼다. 그리고 2시간의 런닝 타임은 지루했다. 20분 정도는 잘라도 좋았으련만. 그럭저럭 볼만은 했지만 썩 재밌지는 않았다.
여기까지가 대략 11월 중순부터 12월 초까지의 문화생활이었다. 뮤지컬과 방송 녹화와 영화를 여러 편 보았는데 수많은 배우들과 뮤지션을 만난 시간이었지만, 이 모든 걸 다 합친 것보다 어저께 만난 알라디너들과 더 많이 웃었던 것 같다. 어제 만났던 알라디너들은 모조리 간밤 내 꿈에 출연했다. 어제 이름만 찬조 출연했던 아프님은 꿈에서도 이름만 찬조출연했다.
확실히, 내게 가장 또렷한 문화생활은 알라딘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