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보충 수업이 끝나는 날이었다. 나름 유종의 미를 거두고 해피했던 시간이 오전 9시 40분. 

야곱과의 약속은 저녁 6시 반이었다.  

너무 길게 남아있는 시간. 영화 솔트를 보고 싶었지만 오늘 언니랑 보기로 되어 있어서 꾸욱 참고 시원한 교무실에서 버티기 한 판! 

SK이벤트에 당첨되어서 가게 된 퓰리처상 사진전. 

예술의 전당 주변에선 뭘 맛있게 먹어본 적이 없었는데, 어제 들어갔던 소위 맛집도 그냥 그랬다.  

모든 메뉴가 8천원부터 시작을 해서 순두부도 8천원, 내가 고른 콩국수도 8천원. 땅값이 비싸서 그런가 보다...하고 패쓰. 하지만 다시 가진 않으리.  길 건너 곤드레 비빔밥을 눈여겨 보았으니 다음 번엔 여기서 먹어야겠다.

이번 사진전은 목요일과 금요일만 야간 연장 전시를 한다. 보통 8시에 끝나지만 요 이틀은 10시까지 운영.  

게다가 8시엔 도슨트도 있다. 때마침 우리가 들어간 시간이 도슨트 시작할 때.  

사람도 워낙 많았고, 145점으로 무지 많은지라 194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10년 단위로 하나 내지 두 장의 사진만 설명을 듣는데도 모두 40분이 걸렸다. 열심히 해설을 해주신 분께 감사의 박수를 짝짝짝! 

사진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마음의 울림이 컸다. 어떤 사진은 보는 순간 너무 먹먹해서 눈물이 막 글썽거렸다.   

 

전시장 입구의 이벤트 코너에 전시 관람을 쓰게 되어 있었는데 입장 전에 보니 '무서웠다'는 표현이 무척 많았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홈페이지에 소개된 사진들 중에서 얼마 간을 옮겨 본다.  

 

전시회 사진 중 유일하게 한국 사진이다. 안타깝게도 전쟁 사진이다. 때는 11월. 다리는 폭격으로 끊어졌고, 사진 아래쪽은 이미 강물이어서, 헤엄쳐서 건너야 하는 긴박한 순간. 기자 자신도 손이 얼어 사진을 찍기 어려웠다고 한다. 아직도 정정한 모습을 하고 계신 기자 분은 사진전 오픈식에도 참여하셨다 한다. 올해 97세. 여전히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는 모습이 근사했다.  

 

트럭의 핸들이 고장이 나버려서 난간을 들이 받고, 뒤따르던 차가 같이 사고가 났다. 매달려 있는 사람을 표시하느라 '하얀 화살표'를 그어놓았다. 저 사람을 구출하자마자 트럭이 다리 아래로 떨어졌다고 한다. 1초의 사이로 생사가 엇갈린 순간.  

이렇게 갑작스러운 사고가 발생했을 때 준비된 상태가 아니라 갑자기 사진을 찍는 일이 발생하는데, 아마추어 사진가 중에서 그렇게 퓰리처 상을 받게 된 경우가 제법 나온 듯하다. 그렇게 순간의 역사가 역사의 순간이 되어버리기도... 

 

퍼레이드 도중 행렬을 빠져나온 어린 아이에게 행렬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해주는 친절한 경찰관. 

그가 굽힌 허리의 각도 이상의 친절이 느껴진다. 저 천진난만한 표정의 아이라니... 

전쟁과 기아와 온갖 사고 사진 속에서 잠시 눈과 마음을 쉬게 해주는 고마운 사진이었다.  

 

참으로 드라마틱한 사진이다.  

감전사고로 전신주에 매달린 채 축 늘어진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 올라가 인공호흡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는 살아날 수 있었다.  클림트의 키스보다도 더 아름다운 키스로 보인다.   

 

 

유명한 사진이다. 기자는 우연히 이 장면을 목격했는데 설마하니 쏠 줄은 몰랐다고 한다. 사진을 찍기 무섭게 바로 사내는 머리에 총을 맞은 채 시체가 되어 뒹굴었다 한다. 이 장면만 본다면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의 비윤리성을 먼저 떠올리게 되겠지만, 기자는 다시 물었다고 한다. 사진 속의 희생자는 처형자 쪽의 가족 6명을 죽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누가 누구를 먼저 욕하기 힘든 상황. 전쟁은 그렇게 인간을 서로 처참하게 만든다.  

역시 많이 알려진 사진이다. 중앙의 소녀는 네이팜탄이 터지는 바람에 옷도 다 태워먹고 너무 뜨겁다고 살려달라고 외치며 달리는 중이다. 다행스럽게도 소녀는 살아남았고, 지금은 유엔에서 일하고 있다고 들은 것 같다.  

뱅크시가 패러디한 사진이 먼저 떠올라서 이 심각한 순간에 웃을 뻔했다. 야곱에게 이 책을 선물했던 터라 우린 같은 감정에 서로 민망해 했다. 

 

순간 포착을 잘 해낸 클린턴이다. 기자 역시 느꼈다고 한다. 클린턴이 꼬마를 보는 순간, 이 아이와 말을 할 거라는 걸. 

아이의 눈 높이에 맞추어서 친근한 표정을 짓는 대통령 후보. 그것이 계산된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혹은 진심이든... 효과는 확실해 보인다.  

 

코소보를 탈출하는 난민들. 제 몸은 빠져나가지 못한 채 어린 아이만은 구출해 내려고 애쓰는 부모의 마음. 아무 것도 모르는 저 아이는 곡예하듯 공중에 떠 버린 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사진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이스라엘 군인을 상대로 힘겨운 바리케이트를 쳐버린 팔레스타인 여인.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역부족인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두시간을 보고 나니 허리가 아파서 환장할 즈음에, 잠시 눈을 정화시켜주는 폭간 등장.  

대통령 후보 시절에 폭우 속에서 선거 유세를 하던 장면이었다고 한다. 공화당 후보는 궂은 날씨를 핑계로 나서지 않았던 그 시간에 묵묵히 비에 젖어 we can do it을 외치는 사나이. 유권자의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퓰리처 상 수상 상금은 1만 달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1만 달러는 적은 돈은 아니지만,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돈은 결코 아닐 것이다. 분쟁이 끊이지 않고 폭약이 터지는 무수한 위험한 현장에 단지 상금이나 명예를 위해서 뛰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상의 사명감과 인류애도 분명 저들 기자들에게 깃들어 있었을 것이다.  

당장 눈앞의 사람을 구해주는 것만큼이나, 그 끔찍한 현장들을 전 세계인들에게 알려야 하는 무거운 임무가 그들의 것이었다. 그렇게 역사적 순간을 우리는 공유하게 되었다. 아프고 아름답다.   

 

 

포토존이다. 야곱은 워낙 사진 찍기를 싫어하고, 야곱이 찍어준 내 사진은 눈이 감긴 채 나왔다.ㅜ.ㅜ

전시장을 떠나기 전 언제나 지나칠 수밖에 없는 기념품 샵. 도록을 판다. 가격은 25,000원. 원래 사진집은 비싼 거고, 이 훌륭한 사진들을 두고두고 보는 것에 과한 가격이 아닌데도, 늘 인터넷 서점의 할인과 적립과 기타 등등의 부상에 익숙한 우리는 꽤 열심히 고민했다. 지난 번 세실 비치 전 때처럼 전시 끝날 즈음에 오면 반값이 되어 있진 않을까 기대도 하고, 온라인 서점에서 다른 퓰리처상 관련 사진집이 있지 않을까 마구 머리를 굴렸다.  

계속 미련이 남았는데 일단은 집에 가서 검색부터 하자며 돌아왔는데, 새벽에 확인한 검색 결과는 나를 난감하게 했다.  

12만원. 게다가 절판. 

하하핫...;;;; 

역시 도록을 샀어야 했어! 

다시 검색해 보니 지금 전시 중인 도록을 온라인에서도 팔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배송료 2,500원. 

역시, 현장에서 샀어야 했어..ㅜ.ㅜ 

도록만 사러 다시 들르기엔 멀기만 한 예술의 전당.  

아, 터너에서 인상주의 화가까지 - 영국 근대 회화 전을 가야 하는 것일까? 

도록을 사면 평일 관람권을 준다는데 이걸 사야겠다고 결심하고 장바구니에 담았다. 

결제 직전, 스톱! 

이틀만 참으면 1일이다. 그래, 내일 모레 주문해야지...;;;;; 

그렇게 퓰리처상 사진전은 나를 또 다른 지름신으 길로 불러들이고 있다. 새삼스럽지 않은 순환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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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0-07-30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공호흡하는 사진이요. 저는, 저는, 두 사람이 연인인 줄 알았다는. 털푸덕. ㅠ_ㅠ;

정말 멋진 사진들이에요. 저도 가보고 싶은데, 기회가 될런지 모르겠어요. 이럴 때 서울에 살고 싶어요. 좋은 감상, 잘 읽었습니다. ^^

마노아 2010-07-30 18:33   좋아요 0 | URL
설명 없이 보면 그렇게도 보일 거예요. 그런데 연인이라고 생각하고 보아도 참 애틋한 장면으로 보여요.
'생명의 키스'라니, 제목도 참 잘 지었어요.
서울의 가장 큰 장점은 문화혜택 같아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이런 기회를 누려야 할 텐데요. ^^;;;

루체오페르 2010-07-30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울림과 느낌이 있는 사진들입니다. 마노아님의 문화생활 덕분에 저도 잘 봤습니다.^^
감성이 참 풍부하신것 같아요.

마노아 2010-07-30 18:33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도록이 아른아른 거렸는데, 다음에 가서 사오겠다고 결심을 해버리니 마음이 편해졌어요. 으하핫^^;;;

saint236 2010-07-30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또 다른 지름신의 길로 불러들이고 있다. 새삼스럽지 않은 순환구조다." 왜 이리 공감이 가지?

마노아 2010-07-30 18:34   좋아요 0 | URL
아, 알라디너들의 숙명이지요. 피해갈 수 없어요.^^ㅎㅎㅎ

pjy 2010-07-30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고도는 지름신....참 여러 알라디너를 굽어살펴주시는--;

마노아 2010-08-01 14:17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참 생명력이 길어요.^^;;;

gimssim 2010-07-30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잘 봤습니다.
꼭 한 번 가보고 싶은데 물리적인 거리가 만만치 않아서 마음을 내지 못하고 있어요.
가슴 먹먹해 옵니다.

마노아 2010-08-01 14:18   좋아요 0 | URL
더 울컥하게 만드는 사진이 많았는데 홈페이지에는 사진이 많이 걸려있질 않네요.
다음에 사진집을 손에 쥐게 되면 더 많이 올려볼게요.^^

무스탕 2010-07-30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이 전시회 보고 싶어요. 전시회 시작한다고(했다고?) 뉴스에서 알려줄때부터 보고싶었는데 참 시간 안맞네요. 끝나기 전에 가서 볼수 있으려나.. -_- 근데 가더라도 작정을 하고 가야겠네요. 2시간이 넘는 관람이라니요! @_@

키스하면 전 두가지가 생각나요. 하나는 영화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장면이고, 하나는 토모 마츠모토의 'kiss'요^^

마노아 2010-08-01 14:19   좋아요 0 | URL
도슨트를 듣지 않으면 한 시간 반 정도로 볼 수 잇을 거예요.
시네마 천국은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했어요.
만화 키스는 꽤 재밌었지요.^^

BRINY 2010-07-31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충수업 끝나셨군요. 축하드려요.
저희는 17일간이나 해서, 다다음주 화요일까지 해야해요. 아...

마노아 2010-08-01 14:19   좋아요 0 | URL
저희는 10일 씩 1,2기인데 저는 1기만 참여했어요.
2기까지 하면 방학이 달랑 일주일 남던데 그건 못하겠더라구요. 어휴...
브라이니님 화이팅!!

루체오페르 2010-07-31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첨부해주신 동영상 보고 놀랐습니다.
퓰리처상의 영향으로 퓰리처에 대해 막연히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양면성이 있었다니...그야말로 두 얼굴의 사나이네요.
마치 록펠러의 이중성을 보는것 같습니다.
역시 세상은 보이는 것 그대로가 다 진실은 아니네요.

마노아 2010-08-01 14:20   좋아요 0 | URL
지식채널은 그렇게 양면성의 이야기를 담은 주제를 많이 보여줬던 것 같아요.
두 얼굴의 대통령에서 링컨도 그랬거든요.
보이는 것 이상의 진실을 얘기하는 것, 참 소중해요.

마녀고양이 2010-08-01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보고싶은 사진전이예요.
그런데 저희 집에서 예술의 전당은 너무너무너무 멀어요.
진짜 가는데 2시간반~3시간 잡아야 하니. ㅠㅠ

보고오신 마노아님 부러워염~

마노아 2010-08-01 21:21   좋아요 0 | URL
그나마 일산에서 3호선 타고 쭈욱 오면 되긴 하지만 확실히 멀어요.
울 집도 같은 서울 안에서 움직이건만 1시간 반은 잡아야 하거든요.
강남 서초 구민들이 마구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답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