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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우크라이나의 기자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어르신들을 만나며 기록한 인터뷰 모음집이다. 특별한 점은 남성이 아닌 여성들의 이야기만을 다루었다는 것. 남성들의 전쟁 일화는 충분히 차고 넘칠 만큼 존재하지만, 여성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수면 아래에 있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남녀노소 다 겪는 전쟁이 어째서 남자들의 전유물이란 말인가. 하여 저자는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들의 가슴속 깊은 곳에 박혀있던 감정과 설움을 끄집어내어 만천하에 공표하였다.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인터뷰에 응해준 수많은 이들의 울분을 받아주어야 했고, 어떤 이들에게는 괜한 짓 한다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저자 스스로도 이 일이 옳은 행동인지를 의심하였으나, 인터뷰를 할수록 그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드러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이 기자의 사명이자 본분이 아니던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2022년 초에 일어난 러시아-우크라 전쟁이 지금도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길든 짧든 그 폐해는 말도 못할 것인데 군인이나 민간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할 거 없이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숨죽여 목숨을 부지중일 테고,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았대도 앞날을 생각하면 그저 막막함뿐이다. 말 그대로 누구에게나 참혹한 전쟁이지만, 이번에는 책의 기획대로 여성들의 입장을 주목해보았다.
집안에 모든 남자들은 전쟁터로 나갔고, 희생자와 사망자가 늘어나면서 결국 여자들도 전선으로 나아간다. 어떤 이는 강제적으로, 누군가는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체격과 나이, 경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일단 불려가서 간호사든 조종사든 저격수든 보직을 주는대로 부여받고 속성 교육과 훈련을 받는다. 마음의 준비도 안된 채 총질을 해야 하고, 사지가 잘린 아군을 돌봐야 하며, 옆자리 동료가 한순간에 목숨을 잃는 광경을 날마다 목격해야 했던 소녀 병사들. 장총보다도 키가 작은 어린이부터 결혼을 앞둔 신부까지, 전쟁은 수많은 청춘과 꿈들을 앗아가버렸다. 총성이 울리자 그녀들의 찬란했던 우주는 그만 호흡을 멈추었다.
이 책을 기획하며 저자는 수많은 방문과 인터뷰를 하고 방대한 양의 편지와 전화를 받았다. 그 사연들을 다 담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책 중반쯤에 그런 말이 나온다. 남자들은 전쟁의 지식을 기억하지만, 여자들은 전쟁의 감정을 기억한다고. 단순히 성별 차이가 아니라 여성성을 강제로 박탈해버렸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일화들이 그것과 연결되어있다. 남성 치수의 군복과 속옷과 군화를 지급받았고, 2차 성징이 찾아와도 신경 쓸 틈이 없었으며, 생명을 낳는 게 아닌 생명을 멸하는 신분이 돼버렸다. 가장 기억나는 일화는 참전 서류를 없애버린 분이었는데, 그게 있으면 아무도 자신과 결혼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결혼은커녕 집도 없이 살다가 병에 걸렸는데, 그 서류가 없어서 어떤 혜택도 못 받는다고 했다. 아아, 정말 눈물이 다 난다. 이 많은 울분을 저자는 어떻게 감당해냈을까.
가만 생각해보면 인생 자체가 곧 전쟁이다. 우리네 인생은 별다른 훈련도 못 받고 전쟁터에 투입된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총알과 포탄, 밟는 곳마다 펑펑 터지는 지뢰, 깜빡이도 없이 껴드는 탱크와 전투기. 싸워야만 살아남는 현실이 전시상황과 다를 게 뭐가 있을까. 길어지는 코시국과 러시아-우크라 전쟁으로 세계 경제가 바닥을 치고 있다. 하여 전 인류가 전쟁을 간접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근데 미안하지만 국가적 문제보다도 당장 내 생계부터 해결하는 게 급선무란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난 피곤에 절은 채로 귀가해 몸져눕는다. 근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이 정도면 나는 배부른 삶이구나 싶다. 다들 이렇게 정신승리라도 하면서 삽시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