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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무선) ㅣ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2
다자이 오사무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5월
평점 :
슬플 때면 우울한 노래를 듣게 되듯이, 책도 꼭 그런 것만 읽게 된다. 아플 때가 가장 서럽다는 자취생들의 심정이 내내 지속되는 기분이랄까.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없으니 이렇게라도 현실을 도피하여 어딘가에 기대고 싶은 거겠지. 하여 상태가 멀쩡할 땐 손이 안 가던 <인간 실격>을 드디어 읽게 됐다. 확실히 침울할 때 읽어주니까 감정이입이 잘 돼서 볼만했다. 이렇게 저자의 삶과 심연을 대변하는 작품은 참 양날의 검과 같다. 저자에게 푹 빠지거나 혹은 완전히 손절하거나. 일단 나는 후자다. 필독 도서고 뭐고 간에 나는 진짜 일본 문학이랑은 안 맞는 거 같아. 같이 실린 <사양>은 진짜 영 아니어서 <인간 실격>만 리뷰하겠다.
부끄러운 생애를 살았노라고 자백하는 주인공 요조. 타고난 익살꾼으로써 모두에게 사랑받으며 살았지만 정작 그의 심장은 뛰는 법을 몰랐다. 애정을 갈구할 줄만 알았지, 누구와도 진심을 나눠본 적이 없는 그였다. 스스로도 남들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통제와 방치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제 가면을 들키고도 솔직해지지 못하는 모습은, 제 존재를 부정하기 바빴던 요조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동양 버전의 <데미안>이라고 봐도 될 듯.
험한 세상을 위태로이 살아가는 요조가 꼭 지금의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겉보기엔 남들과도 잘 지내고 결혼도 하고 적절히 유흥도 즐기며 사는 평범남이지만, 공허함으로 가득 찬 그 가슴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대체 무엇이 그를 공허하게 만드느냐. 딱히 이유랄 건 없다. 그냥 그렇게 설계되었을 뿐, 갖가지 이유와 환경 탓을 해본들 찐따의 DNA가 어디 가질 않으니까. 이 같은 유형에게는 일반적인 이해방식으로 접근해선 안된다. 이상주의자에게 부와 명예와 쾌락 따위는 잠시 있다 사라지는 급여 통장의 잔액 같은 개념일 뿐이니까.
요조는 겉과 속이 확연히 다른 자신을 환멸 하면서도 방치해두었다. 같잖은 강약 약강의 태도를 보였지만 옳고 그름의 분별력은 있는지라 그렇게 두 사이에 끼어서 방황하며 살아간다. 자신보다 훨씬 매운맛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넘쳐나는데도 스스로의 이질감을 용납하지 못하는 그를 통해 저자의 생애도 들여다본다. 눈앞의 현실이 자신과 맞지 않음에도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나름의 타협과 굴종을 택했을 저자를 절대 손가락질하고 싶지 않다. 세상과 직접 맞닥뜨릴 자신은 없을지언정 이렇게 글과 문학으로 저항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나. 내 스타일의 글은 아니었지만 그의 정신만큼은 높이 사준다.
장자가 말하길, 인생은 잘 놀다 가는 것이라 했다. 스스로를 찾지 못해 얼마간 방황할 수는 있어도 끝내 본인만의 진리가 있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 곧 삶에 대한 답이라 하겠다. 방송에 나와 심리상담을 받는 연예인들을 보라. 내 안에서 평화를 얻지 못하면 어떤 인정을 받아본들 공허할 뿐이다. 그 지독한 고독과 공허함에서 나오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요조와 오사무를 보며 또 한 번 인생을 배운다. 건강히 살다 가는 비결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가까이하는 거다. 뭔 당연한 소리를 그럴싸하게 말하냐 싶겠지만 그래도 잘 생각해보라. 요조는 그림 그리기를 놓지 않았고, 오사무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기쁠 때는 더없는 친구가 되어주고, 힘들 때는 유일한 출구가 되어준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지만 그래도 남보다 자신을 더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쓰고 보니 리뷰라기보단 인생 고찰 비슷한 게 돼버렸는데 뭐 어떠랴. 늘 그렇듯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