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은 성욕의 반대급부로 넣은 거야. 무분별한 생산을 제어하기 위해서, 성욕은 한정된 수명을 가진 개체들이 자신을 재생산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넣은 것이고, 우리에게는 성욕이 없으니 수치심이 있을 수가……" (저 이승의 선지자) - P14.15

‘이곳은 나다.‘
내 중음(中陰)이다.
어떤 생에서는 죽음을 넘나들다가 여기까지는 왔다가기도 했다. 돌아가서는 사후 세계를 보고 왔노라 흥분해 떠들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보고 간 것은 언제나 내 중음뿐이었다.
그마저도 제대로 회상한 적이 없다. 이승에 돌아가면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조잡한 육신에 갇히고 육신은 갖가지 방법으로 생각을 방해한다. 처리능력이 떨어지는 뇌, 마약과도 같은 호르몬, 가짓수가 적은 신경전달물질, 처리속도가 느린 신경세포, 모든 감각이 선명해진 지금과 비교하면 정신질환에 걸린 것과 다름이 없다. (저 이승의 선지자) - P15.16

"조심해. 타락하기 시작하면 타락하는 방향으로만 생각하게 되니까."
그가 짜던 것을 조물조물 마무리 지으며 말했다.
"정말로 타락하고 나면 자신이 타락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고." (저 이승의 선지자) - P18.19

합일하고 나니 지금이 좀 더 본질적인 형태의 ‘나‘라는 것을 쉽사리 이해한다. 분열되고 결핍된 조각인 채로 제 인격에 집착했던 마음이 하찮고 덧없게 느껴진다. (저 이승의 선지자) - P22.23

최근 인구가 폭발하고 인류의 지식도 폭발하면서 하계의 영역은 점점 불어나고 있다. 인류의 시야가 급속도로 확장하면서 선지자들은 부랴부랴 태양계를 만들고 은하계 구조도 얼기설기 짜야 했다. 어느 이상은 우선 비가지(非可知)의 영역으로 해 놓았지만, 인간의 시야가 더 넓어지면 전체 구조를 또 새로 짜야 할 것이다. 선지자들 입장에서는 귀찮은 일이라 아마 인류의 지식을 퇴보시키는 방향으로 개입할 가능성이 크다. (저 이승의 선지자) - P24.25

복희는 이승에 나처럼 많이 분열해서 들어가지 않는다. 정교하게 짠 한둘의 생을 택한다. 그는 이승에서도 거대했다. 약자였던 적이 없었고 고통을 이해한 적도 없었다. 노력 없이 얻은 재산으로 모자람 없이 살다가 편히 죽었다. 나는 내 모든 생에서 그를 알았지만 그는 내 존재를 알지 못했다. 나는 그의 회사 청소부였고 일꾼이었고 그의 동네에서 폐지를 줍는 노인이었다. 그가 즐겨 찾던 사창가의 창녀였고 그가 운영하는 기차역에 종이상자를 집 삼아 살던 노숙인이었다. (저 이승의 선지자) - P30

나는 그의 탐닉이 언짢았다. ‘쾌락‘은 백치 상태로 지상에 내려가야 하는 우리가 너무 빨리 죽어 돌아오는 일이 없도록 만든 방향성 유도장치일 뿐이다. 배움이 없어도 본능만으로도 먹고 자고 짝을 짓고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한편으로 호기심을 갖고 배움을 탐구할 수 있도록. 단지 업데이트 때마다 쌓여가는 더미 데이터며 오류를 고치지 않고 누덕누덕 땜질만 하다 보니 영 방향성이 지저분해진 것이다. 명계에서까지 탐닉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저 이승의 선지자) - P33.34

우리 중 누구도 틀릴 수 없다. 누구도 옳지 않기에. (저 이승의 선지자) - P35

탄재는 슬프게 대꾸하며 기어 나왔다.
"거지 같은 생을 주실거죠? 뭘 하실 거예요? 가난한 집이나 내전 중인 나라에 넣어서 공부를 못하게 하실 거죠? 그것도 배움이라고 하시면서요. 사실 벌이지만 죽어도 인정은 안 하시겠죠." (저 이승의 선지자) - P49

우리는 돌아올 때마다 이승의 구조를 어떻게 다시 짜야할지 토론했다. 초기의 하계는 명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곤죽으로 뒤섞여 있었고 불안정했고 말랑말랑했다. 간혹 작은 땅덩이를 만들고 뱀이나 거북이 같은 생물을 밑에 받쳐두거나 거대한 나무를 한가운데 박아두기도 해 보았지만 다 시원찮았다. 우리는 멀뚱히 세월만 보내고 돌아왔다. 무엇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죽었다.‘ 아무도 죽음을 피하려고 뭘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우리는 처음 장난감을 갖게된 아기처럼 멋대로 몸을 굴렸다. 심심풀이로 제 몸을 벼랑 아래에 내던지거나 떨어뜨려 부순 뒤에 왜 본래대로 돌아오지 않는지 어리둥절해 했다. (저 이승의 선지자) - P62.63

"신체가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면 영자화한다는 조건은 뺄 수 없어요."
아만이 말했다.
"썩어가는 몸을 끌고 다니는 건 낭비예요. 일단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게 맞아요."
"알아. 하지만 언제 우리가 몸이 훼손되지 않게 조심해 봤어야지."
우리는 스승 앞에서 야단맞는 제자들처럼 난처해 하며 답했다. 아만은 열심히 궁리했다.
"신체 훼손을 회피하도록 해 봐야겠어요. 아주 싫은 기분이 들어야 해요. 어디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깜짝 놀라게……"
내가 제일 먼저 그 조건을 추가한 유전자를 몸에 심고 들어갔다. 덕분에 몸은 좀 더 복잡해졌다. 통각 수용기를 달았고 감각 신경을 통해 외부 신호를 전하게 만들었다. (저 이승의 선지자) - P63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어요. 세상에, 그 고통이라니. 너무 끔찍해요."
"아니, 이건 중요해. 뭐랄까, 정말 상상도……"
생생한 삶의 기억이 몰아쳐 나는 잠시 더듬었다. 나는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몸부림쳤고 살고 싶다는 욕망에 발버둥 쳤다. 물어뜯듯이 삶을 추구했다.
"진짜 배움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는 그토록 격렬하게 뭘 추구해 본 적도 없어. 그렇게 모든 것이 생생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조잡한 세계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다음번에는 쾌감도 좀 넣어봐야겠구나."
아만은 다시 부끄러워했고 용서를 빌었다.
"둘을 잘 조화시키면 기본적인 삶의 방향은 유도할 수 있을 것 같다." (저 이승의 선지자) - P64

우리는 들어갈 때마다 하나씩 추가했다. 굶주림은 에너지 공급을 잊지 않도록 넣었다. 미각은 몸에 좋은 것을 찾으라고 넣었다. 따듯하고 찬 것을 가리게 했다. 공포를 심어 아직 닥치지 않은 위험도 피할 수 있도록 했다. 어둠이나 위험한 짐승, 독충에 대한 공포를 넣었다. 지식 없이도 생존이 가능하도록 성긴 지침을 넣었다. (저 이승의 선지자) - P64.65

"선생님,"
아만은 열에 들떠 말했다.
"전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 환희라니, 그토록 격렬한 마음의 불꽃이라니. 이토록 절절한 그리움이라니, 자신을 잊을 만큼 소중한 것이 있다니. 타인을 그처럼 자기 자신처럼 여기다니."
하계에서야 그럴듯한 말이었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아만의 말은 내게 ‘아아, 선생님, 1 더하기 1이 2였다니, 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요.‘ 하는 말처럼 들렸다. (저 이승의 선지자) - P66

인간종을 만든 이후로 그 경향은 급격히 심해졌다. 아만은 심하게 몰입했다. 인간은 생존력을 바닥으로 두고 지능에 거의 모든 것을 투자한 실험종이었다. 번식력도 전투력도 형편없어 생존경쟁에서 밀려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총량의 법칙상 그건 종의 다양성이 무너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리는 당황했고 개입해서 홍수나 가뭄으로 이 종을 줄일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만이 불같이 저항했다. 하계의 생태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까지는 납득했다. 그런 식의 멸망을 체험하는 것도 하나의 배움이 될테니까. 하지만…… (저 이승의 선지자) - P68

아이가 스승에게 저항한다는 것은 개체성이 확립되었다는 뜻이다. 지금 새로운 사조가 생겨난 것이다. 새 스승이 될 자격을 갖추었다. 그 방향이 설사 내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그 방향이 스승 모두의 마음에 차지 않는다 해도. 아니,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아이를 보낼 때가 되었다는 의미다. (저 이승의 선지자) - P81.82

"누구의 삶이든 우주를 바꾼다. 네가 한 생을 살고 돌아왔을 때도 모든 것이 변했다. 잊지 마라. 저 애도 나고 또한 너다. 저 애가 변하면 우리도 모두 같이 변한다." (저 이승의 선지자) - P84

우리가 하나가 되고 나면 서로가 그리 위대해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저 이승의 선지자) - P102

분열되어 있을 땐 건축물이요 예술품이었지만 균일하게 퍼지면 한낱 먼지요 흙더미일 뿐이다. 나는 하찮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저 이승의 선지자) - P145

나는 하계에서 ‘아만‘의 인격이라 부를 법한 것들을 나누어서 보았다. 경계는 불분명하기에 완전할 수는 없겠지만, 원형의 ‘아이사타‘로 회복할 수 있을 법한 경계까지 대강 나누어 보았다.
나는 그 전체에 말을 걸었다.
"아만."
풀 위에 잠시 앉았다 날아오른 잠자리며, 바삐 움직여 열심히 벌집을 만들고 있는 꿀벌이며, 조금전에 개미굴에서 흙 한 덩이를 지고 나온 개미며, 조금 전에 막 잠자리에 든 어린아이며, 아이의 젖을 물리는 어머니며, 친구들과 신세 한탄을 하며 술을 퍼마시고 있는 남자며, 어느 지하철 종이상자 속에 누워있는 노숙자들, 모두 같은 사람인 이들. 내부름에 그들 모두의 마음이 떨렸다. 대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조금 감이 좋은 이들은 뭔가가 가슴을 쓸고 간 기분에 잠을 깨거나, 잠시 멈춰 하늘을 보거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이승의 선지자) - P148

타인이 없는 세계에 어떻게 죄가 있겠는가. 타인이 없는 세계에는 잘못은커녕 그 무엇도 없다. 가치 있는 일도 없다. 선행도 희생도 덕목도 연심도 없다. 하지만 단 하나, 그것만은 잘못이었다. 그것만은 감히 ‘죄‘라 불러도 모자라지 않은 것이었다.
"세계는 타락했다. 내가 너를 타락했다고 규정했을 때." (저 이승의 선지자) - P159

타인을 상상하지 못하는 자에게 어찌 연민이 있을까. 타인을 상상하지 못하고 어떻게 사랑하고,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분리 없이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 영원과 불멸의 진실을 아는 자가 어떻게 삶을 소중히 생각할 수 있겠는가. 전체로서의 나는 전능했고 동시에 아무 가치가 없었다. 나는 완전무결했고 그렇기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타인이 없었던 시절의 우리에게 삶은 없었다. (저 이승의 선지자) - P161

정녕 이 미물의 타락이 세상 전체를 타락시킬 수 있을만큼 강할 것인가. 내 타락이 그만큼 대단할 것인가. (저 이승의 선지자) - P182

들어가기만 하면 고통이 사라질 줄도 안다. 물밀 듯이 들어오는 지혜와 깨달음이, 평온함과 행복감이 나를 가득 채울 줄도 안다. 파편일 뿐인 자아에 집착했던 나 자신을 돌이키며 비웃게 될 줄도 안다. 탄재가 죽지 않은 줄도 안다. 다른 모든 아이들이 죽지 않은 줄도 안다. 그들이 타인이며 별개의 생명을 가진 독립체라는 생각 전체가 착각인 줄도 안다. 알면서도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을 읽은 ‘나들‘이 안타까워했다.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생물처럼 굴지 마라, 나반. 너는 타락했고 정화가 필요하다."
그는 완전히 다른 가치관에 선 자의 자비심으로 위로했다. (저 이승의 선지자) - P186

경이로운 일이었다. 이처럼 거대한 존재, 모든 지식을 합일한 자가 이처럼 작은 존재의 머릿속 하나 들여다보지 못하다니. 아마 상대도 비슷한 경이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작은 존재가 이처럼 완벽하게 분리될 수 있다니. (저 이승의 선지자) - P193

"한 번뿐인 생이라. 색다른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죠." (저 이승의 선지자) - P194

아아,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는 타인이기에 의미가 있다고. 내가 만나는 무엇 하나 내가 아니기에 내가 사랑하고 연민하며, 내 삶을 다 바칠 수 있는 것이라고.
이승에 미혹된 선지자, 생존 프로그램이 왜곡해서 전하는 감각을 순수한 진실이라고 믿는 타락한 자.
내가 이 타락을 향유하니, 나를 어디로든 이끌라. 그 또한 하나의 배움일 것이니. (저 이승의 선지자) - P196

"그래도 이게 원래 세상이었던 거죠?"
"원래 세상이라는 것은 없어."
내가 답했다.
단 하나의 삶과 그 삶으로 매양 모습을 바꾸는 우주가 있을 뿐이다. (그 하나의 생에 대하여) - P235

아만은 내게 오래된 건물에 가보라고 했다. 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오래된 물건에는 신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내가 진정 나와 같은 것을 찾기를 원한다면 생물이 아니라 무생물에서 찾아보라 했다. 돌이나 바위에 말을 걸어보라고 했다. 파괴에 눈이 멀었던 인간의 시대를 거치고 살아남은 이들, 천 년을 살고 만 년을 산 이들에게는 지성이 깃들어 있으니 전심으로 말을 걸면 답을 해 준다고 했다. 정 내가 그리 외롭다면 그 방향으로 친구를 찾아보라고 했다. 그는 그러면서 문무대왕릉이나 경복궁, 석굴암이나 무영탑, 거북선 같은 것의 전설을 말해주곤 했다. (그 하나의 생에 대하여) - P236

그는 작아진 나머지 이제 잘잘못을 따지고 은원을 따진다. (그 하나의 생에 대하여) - P253

나는 내 모든 가능성을 안다. 또한 내 모든 모순을 안다.
(중략) 내가 타락이 세상에서 무엇을 배제하려 할 때 찾아오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하나의 생에 대하여)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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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이 책의 감수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나서 나는 상당히 궁금했다. 어떤 이유로 배로John D. Barrow는 인생의 마지막 저서를 이런 주제로 쓴 것일까? 흥미로운 것은 천문학과 우주론으로 학문적 커리어를 시작한 배로가 인생 말년에 ‘1더하기 1은 2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도달했다는 점이었다. 맥스 테그마크 같은 우주론 학자는 모든 존재가 하나의 수학적 구조라는 제안을 한다. 사실 기초물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의혹을 완전히 피하기는 힘들다. 가령 모든 물질이 소립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지만 소립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특정한 수학적 구조로밖에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리물리학자 로저 펜로즈는 구체적으로 "전자가 무엇인지 명료하게 설명하려면 ‘디랙방정식의 해‘라는 식으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김민형) - P11

책의 요점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가 어쩌면 저자의 또 다른 책 《세상 속의 세상The World Within the World》(1988)에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책에 ‘배로의 불확실성 원리‘로 알려진 제안이 나온다. ‘이해 가능할 정도로 단순한 우주는 그 우주를 이해할 만큼 고등한 두뇌를 포함할 수 없다.‘ 존 배로답게 기발하면서 이 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연상케 하는 문장이다. (김민형) - P12

여러분이 지금 읽으려는 책은 제가 마지막으로 쓴 책이고, 저는 이제 더 이상은 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저는 수에 대해 중요한 몇 가지를 말하려고 합니다. (중략)
"큰 바위로 강물이 나뉘듯이 우리는 지금 헤어지지만, 결국 우리가 다시 만날 것임을 나는 압니다."(아서 웨일리 편, 《한시 170수A Hundred and Seventy Chinese Poems》에서)

존 배로 - P14.16

배 하나 더하기 사과 하나는 무엇일까? 무엇의 둘일까? 이것은 배 두 개나 사과 두 개가 아니다. 이것은 그냥 두 개인가? 기호 ‘+‘와 ‘=‘는 무엇인가? 이것들은 진짜로 무슨 뜻일까? 똑같은 파동 둘을 더하는데 둘의 위상이 정반대이면, 파동 하나의 마루가 다른 파동의 골과 일치해서 영이 된다. 파동 두 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영에 영을 더하면 영이 둘이고, 이것은 영이다. 무한에 무한을 더하면 무한이 된다. 이것들의 합은 하나에 하나를 더해서 같은 것이 둘이 되는 패턴을 따르지 않는다. 사물은 의외로 단순하지 않다. 하나를 두 번 더해서 둘이 되는 데는 어떤 규칙이 있어야 할 것 같다. - P21.22

우리가 아는 모든 인도유럽 언어에서, ‘4’보다 큰 수는 그것이 세는 물건에 따라 형태가 변하는 형용사로 취급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와 ‘둘‘의 개념이 더 큰 수들의 개념보다 훨씬 오래되었음을 나타낸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1, 2, 3, 4, 어쩌면 5개까지는 한 덩어리로, 머리를 쓰거나 물리적으로 하나하나 세지 않고도 바로 알 수 있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 P23.24

일일이 세지 않으려면 전화번호를 세 자리나 네 자리씩 떼어서 기억하듯이 작은 덩어리로 나눠서 단기 기억을 활용해야 한다. 이렇게 나눠서 기억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손이 네 손가락finger(영어에서는 ‘four fingers and a thumb‘라는 표현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손가락에서 엄지를 제외하기도 한다―옮긴이)이어서 그런 것일 수 있다. 실제로 여러 고대 문명에서는 ‘손등 폭handbreadth‘이라는 길이 단위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네 손가락의 폭과 같다. 또한 한 자리 수를 뜻하는 영어 단어 ‘디지트digit‘는 손가락을 뜻하기도 한다. 손가락은 위스키 같은 증류주를 주문할 때 사용하는 단위로도 사용된다. 위스키 한 ‘손가락finger‘은 잔 바닥을 감싸쥔 한 손가락 폭의 높이로 잔을 채운 양이다. - P24

독자들의 입맛을 돋우는 또 한 가지 역설이 있다. 다음과 같은 무한급수를 생각하자.

S=1-1+1-1+1-1+...

이 급수는 영원히 계속된다.
얼핏 보면 S의 값이 0이 될 것 같다. 다음과 같이 두 개씩 괄호로 묶으면 각각의 괄호가 0이 되기 때문이다.

S= (1-1)+(1-1)+(1-1)+ ...

이제 S를 두 번 더하면, 이것은 2S와 같아야 한다.
2S=1-1+1-1+1-1+ +1-1+1-1+1-1+ …

그러나 S를 두 번 더해서 얻은 급수도 사실은 S와 같으므로, 다음과 같은 것이 증명된다.

2S=S, 따라서 2=1. (*)

공리 체계에서 논리적 모순이 하나라도 있으면 이것을 사용해서 모든 것이 참이라고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산술이 무너진다. 버트런드 러셀의 강연에서 어떤 학생이 2=1이 참이라면 모든 것이 참이라고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을 수긍하지 못해서, 러셀에게 러셀 자신이 교황임을 증명해보라고 했다. 러셀은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나와 교황만 포함하는 집합이 있다고 하자. 이 집합의 원소는 둘이다. 그러나 2=1이므로, 이 집합의 원소는 하나뿐이다. 따라서 나는 교황이다." 어쩐지 이상하다. (*) 표시한 방정식의 추론에 뭔가 잘못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S+S의 형태로 나타낸 1+1의 한 예일 뿐이다. S+S는 또한 4S이기도 하며(S=2S이므로), 따라서 1+1=4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로 이상하지 않은가? 일단 계속 읽어보자! - P27.28

오랜 옛날에는 세계 도처에서 ‘둘씩 셈하기‘라는 셈법이 나타났다. 이 셈법에서는 ‘하나‘와 ‘둘‘이라는 표지만을 사용하며, 이것들을 더해서 더 큰 양을 만들었다. 이 단순한 체계에서는 둘보다 더 큰 양을 ‘afar‘ 또는 ‘trans‘라고 불렀다. 라틴어에서 ‘trans‘가 ‘넘어서‘라는 뜻이고 ‘tres‘가 ‘셋‘을 뜻하는 것은 이러한 원시적인 셈법의 흔적이다. 프랑스어에도 이러한 흔적이 남아 있어서, ‘tres‘가 ‘매우very‘라는 뜻이고 ‘trois’는 ‘3’을 뜻한다. 특히 아프리카의 일부와 남아메리카, 뉴기니에서는 단순 반복으로 큰 수를 만드는 제한된 이진법이 사용된다. 예를 들어 3은 ‘둘-하나‘, 4는 ‘둘–둘‘, 5는 ‘둘-둘-하나‘와 같이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패턴이 무제한적으로 계속 확장되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명확하다. 이 체계에서는 ‘둘-둘‘과 ‘둘-둘-하나‘ 같은 조합이 별개의 것으로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합들은 요소들을 그저 이어 붙인 것으로 인지될 뿐이고, 더 이상의 확장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식과 추상화 능력이 더 발전하려면 더 큰 개념적 도약이 있어야 했고, 먼 옛날의 세계에서 이러한 도약은 일부 지역에서만 일어났다. - P32

10이 선택된 이유는 물론 우리가 열 손가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예외는 중앙아메리카의 유키Yuki 인디언들이 사용하는, ‘10‘이 아니라 ‘8‘을 기반으로 하는 체계이다. 그러나 그들도 수를 셀 때 손가락을 이용한다. 그들은 손가락이 아니라 손가락 사이를 이용해서 센다. 다른 여러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 문화에서는 손가락 사이에 끼우는 실을 이용해서 수를 센다.*

*나는 수학자들로 이루어진 청중과 일반 대중에게 왜 ‘8‘이 밑으로 선택되었을지 물어보곤 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고, 나중에 초등학생들(열 살까지)에게 강연하면서 그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한 어린 소녀가 즉시 바른 답을 했는데, 그 아이는 손가락으로 실뜨기 놀이를 했기 때문에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 P36.37

세 번째 유형인 자리 체계는 인도 문화에서 유래했고, 훨씬 더 경제적이다. 이 체계에서는 ‘자릿값‘ 개념을 도입해서, 기호의 위치가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로마인들에게 111은 3을 뜻했지만, 우리는 백과 십과 일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이 체계에서는 자리가 비어 있음을 나타내는 방법이 필요하다. 공백을 의미하는 기호가 있어야 백과 하나를 뜻하는 1 1을 열과 하나를 뜻하는 11과 구별할 수 있다. 바빌로니아, 마야, 인도에서 사용한 자릿값 체계에는 모두 1 1의 빈 자리를 표시하는 기호가 필요했고, 그렇지 않으면 기호들 사이의 틈이 빈 자리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이들은 깨달았다. 결국 ‘영‘ 기호가 발명되어 이 틈을 메웠고, 인도 체계에서 백과 하나를 101로 표기하게 되었다.*

*바빌로니아에서는 회계상의 이유로 마야에서는 미적인 이유로(이 때문에 큰 수를 나타내는 상형문자에 공백을 사용하지 않았다), 인도에서는 계산의 효율을 위해 0이 발명되었다. - P49

중국에 관심이 많았던 라이프니츠는 《주역》의 육효에서 이진수의 영감을 얻었다. 주역에 나오는 육효는 이진수 0에서 111111까지에 대응된다. - P58

이진수를 응용한 중요한 예로 촉각으로 감지하는 점자가 있다. 루이 브라유Louis Braille가 1829년에서 1837년에 걸쳐 점자를 개발한 뒤로 시각장애인들이 사용하고 있다(그러나 오늘날 영국에서는 등록된 시각장애인의 1퍼센트만이 점자를 사용한다). 점자는 이제까지 개발된 것들 중에서 최초의 이진 기록 방식이다. 보통의 인도유럽어를 기록할 때는 페니키아에서 유래한 알파벳 문자 26개를 사용하지만, 점자는 평평한 점과 볼록한 점 두 가지만 사용한다. - P58

나는 때때로 폰 노이만의 뇌는 사람의 뇌를 능가하는 종이 존재할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한스 베테 - P65

페아노Giuseppe Peano는 다섯 가지 규칙을 도입해서 모든 수와 산술을 정의했다. 요즘은 이것을 페아노 공리라고 부른다.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바로 뒤의 원소successor‘라는 지시이다. 이것은 수를 그다음 수로 넘기라는 지시이다. 예를 들어 1을 2로, 2를 3으로 넘긴다. 이것은 양들의 무한한 모임 (0, 1, 2, 3, … 이렇게 영원히 계속된다)이 어떻게 유한한 규칙들의 모임으로 만들어지는지 보여준다. 영에서 출발하고(페아노는 실제로 1을 사용했지만, 1은 0의 바로 뒤의 원소이므로 아무 차이가 없다) 음이 아닌 자연수를 정의하는 페아노 공리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영은 자연수이다.
2. 모든 자연수 바로 뒤에 자연수가 있다.
3. 영은 어떤 자연수에 대해서도 바로 뒤의 원소가 아니다.
4. 두 자연수의 바로 뒤의 원소가 같으면, 둘은 같다.
5. 어떤 집합이 영과 모든 수의 바로 뒤의 원소를 포함하면, 이 집합은 모든 자연수를 포함한다. 이것을 귀납의 원리라고 부른다.

이 모든 공리가 독립적이며, 따라서 반드시 이 모두가 필요하다. - P69.70

무엇보다도, 나중에 볼 것처럼 자연수는 셀 수 있는countable 무한이다. 이것은 무한 중에서 가장 작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잠재적 무한‘이라고 불렀고, 이 무한을 인정했다. 이것은 무한한 온도나 우주 어딘가에 있는 무한한 밀도처럼 ‘실재하는 무한‘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실재하는 무한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국소적 진공과 함께 거부한 개념으로, 국소적 진공이 있으면 저항이 사라져 운동이 유한한 시간 안에 무한한 속력에 도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 P76

이 영화[드니 빌뇌브 감독의 2016년 영화 <컨택트>(원제는 ‘도착‘을 뜻하는 ‘Arrival‘이고 한국에서는 ‘컨택트‘라는 제목으로 개봉)]는 정신의 작동과 그 붙박이 배선이 우리가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어떻게 결정하는지, 셈counting과 같은 정신적 과정들이 우리의 사고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 P79

산술이 어떻게 엄밀하고 논리적으로 건전한 기술記述을 제공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여러 가지 이유로 중요하다. 이 질문은 수와 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꾼다. 수와 셈은 단지 계란이나 동전을 세는 유용한 수단이 아니다. 수와 셈은, 그것이 세는 물건들을 벗어나서 순전히 규칙으로만 정의되는 논리 체계로 존재한다. 하나와 둘만 세는 원시적인 체계에서는 없던 그 무엇이 나타나는 것이다. 규칙을 바꾸면 새로운 수학 체계를 만들 수 있고, 이러한 수학 체계는 세계에 있는 어떤 것과도 대응되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규칙들이 일관되고 1=2와 같은 모순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학적 존재‘라는 용어는 이제 자주 볼 수 있고,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그러한 수학적 체계의 예가 실생활에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자기 일관성만을 의미한다. 이것이 수학적 존재의 의미이다. - P79.80

그러므로 요약하자면 클래스는 공통의 성질을 가진 사물들의 모임이다. 예를 들어 수의 클래스, 원의 클래스가 있다. 집합은 클래스의 원소인 클래스이며, 고유 클래스proper class는 집합이 아닌 클래스이다. 그러므로 모든 집합은 클래스이지만 모든 클래스가 집합은 아니다. 이제 거짓말쟁이 역설을 생각해보자. ‘이 문장은 거짓이다.‘ 그런데 사물의 두 가지 모임 즉 클래스와 집합이 있고, 이것으로 거짓말쟁이 역설을 물리칠 수 있다. 거짓말쟁이 집합은 실제로 고유 클래스이고, 집합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포함하지 않는 집합의 클래스는 이제 잘 정의되고, 이것은 그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다. 이것은 집합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을 포함할 수 없다.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 있을 수 없는 것과 똑같이, 모든 클래스들의 클래스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클래스에 대해 확인 가능한 공통 성질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 P89.90

괴델Kurt Gödel은 아무리 호의적으로 따져봐도 이상한 사람이었다. 시인 존 드라이든John Dryden이 1861년에 썼듯이, "위대한 지성과 광기는 매우 가깝다. 둘을 나누는 벽은 매우 얇다."
내가 괴델과 같은 시기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상주했던 학자들에게 괴델을 아는지 물어보면, 그들은 언제나 똑같이 대답했다. 괴델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 유명한 물리학자가 아주 젊었을 때 처음으로 고등연구소에 갔던 경험을 이야기해준 적이 있다. 그는 불완전성 정리와 양자역학과 관련된 주제를 괴델과 토론하고 싶었다. 그는 구내전화로 괴델에게 연락했는데, 교환원이 괴델을 직접 연결해주어서 기분이 좋으면서도 깜짝 놀랐다. 괴델에게는 접근하는 사람들을 막아줄 비서나 조수가 없었던 것이다. 괴델은 사무실에 방문할 시간을 잡아주었다. 이 젊은 물리학자는 괴델을 만난다는 생각에 굉장히 들떴지만, 약속 시간에 도착해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는 괴델에게 다른 중요한 일이 생겼을 것으로 짐작했다. 다음 날에 연구소에 처음 온 사람들을 환영하는 다과회에 갔더니, 괴델이 한쪽 구석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는 괴델에게 다가가 자기소개를 하고 나서, 약속 시간에 그의 사무실에 갔지만 만나지 못했고, 괴델이 다른 중요한 일이 생겨서 자리를 비웠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괴델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반대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지 않을 유일한 방법은 약속을 하는 것이지요." - P148.149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1에서 9까지의 수중 어느 하나를 무작위로 선택할 확률은 11퍼센트이다(정확히는 11.111…퍼센트이지만 큰 차이는 없다ㅡ옮긴이). 작은 수의 특성을 모른다고 하면, 소수점 아래 첫 번째 자리 수가 1이나 2가 될 확률은 각각 11퍼센트이다. 그러나 뉴컴-벤포드 법칙의 예측에 따르면 1이 나올 확률이 30퍼센트이고, 2가 나올 확률은 18퍼센트이다. 반면에 4보다 큰 수가 소수점 아래 첫 자리에 나올 확률은 무작위일 때 예상되는 11퍼센트보다 작다. 여러분만의 숫자들로도 알아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 P167

생물학자들은 자기가 생화학자라고 생각하고,
생화학자들은 자기가 물리화학자라고 생각하고,
물리화학자들은 자기가 물리학자라고 생각하고,
물리학자들은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하고,
신은 자기가 수학자라고 생각한다.

무명씨 - P169

요약하면, 수학적 플라톤주의는 수학적 대상(수 1, 2와 공식 1+1=2 같은 것들이 존재하며, 추상적 대상들(이는 그것들이 물리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뜻이다)도 존재한다고 본다. 게다가 수학적 대상은 어떤 지적인 존재가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과 무관하게 존재한다. 수數는 우리의 생각과 무관한 실재의 일부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지적인 외계인들이 우리와 같은 수학을 사용할 것으로 예상한다. 물론 그들의 수학은 그들의 언어로 되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손가락‘이 여덟 개여서 8진법 산술을 사용할지도 모른다! 사실, 천문학자들이 전파망원경으로 수십 년 동안 수행해온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SETI 프로그램은 우리가 발견한 수학과 물리학이 보편적인 진리이고, 고등한 외계인들이 신호를 보내고 받을 능력이 있다면 그들도 같은 것을 알고 있으리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 P174

많은 수학자들이 형식론자이다. 특히 순수 수학자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연구하는 수학을 과학이나 실세계의 다른 측면들에 응용하는 데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이런 수학자들은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창시자처럼 방대하고 복잡한 수학적 구조를 탐구하면서 즐길 것이다. 형식론자들에게 수학은 발명되는 것이지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규칙을 정하고, 공리 집합의 귀결을 탐구한다. 추론된 것은 우리의 마음속과 우리의 공책 속, 그리고 칠판에만 존재한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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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견의 치명적인 약점은 식민지가 불법이라고 새삼스레 주장해 주요한 논거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대법원이 일본제국의 식민지 시절을 합법으로 생각해 왔다고도 읽힙니다. 이런 점에서 다수의견은 식민지가 불법이라는 대전제를 스스로 허물고 있습니다. 이 지점을 별개의견은 지적합니다. "(청구권협정) 제5항은 피징용 청구권과 관련하여 ‘보상금‘이라는 용어만 사용하고 ‘배상금‘이란 용어는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 ‘보상‘이 ‘식민지배의 적법성을 전제로 하는 보상‘만을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위와 같이 협상 과정에서 양측이 보인 태도만 보더라도 양국 정부가 엄밀한 의미에서의 ‘보상‘과 ‘배상‘을 구분하고 있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양국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배상‘도 당연히 청구권협정의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상호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10장 강제동원) - P206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다루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은 조약입니다. 국가가 체결한 조약이 정의롭지 않거나 부당한 것이라고 느껴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권순일 대법관에게 물었습니다. "헌법 제6조 제1항은 헌법에 의하여 체결·공포된 조약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조약은 국가 간에 체결된 약정으로 국제법의 일부입니다. 정부가 체결한 조약의 내용이 부당하거나 헌법에 반한다면 국회에서 조약의 비준을 거부하거나 법원에서 무효를 선언해야 합니다. 조약은 국가 사이 거래의 산물이어서 법의 이념인 정의에 부합하는 것도 아니고, 체약국 국민의 법감정에 맞지 않는다고 이행을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일 청구권협정은 조약 자체에 분쟁 해결 방법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협정 제3조는 이 협정의 해석 및 실시에 관하여 양국 간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하고, 이렇게 해결할 수 없을 때는 이 협정에 규정된 방식으로 구성한 중재위원회의 결정에 따른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 이후 일본 정부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 간 협의와 중재위원회 구성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사실상 무대응으로 일관하다가 뒤늦게 거부했습니다. 과연 헌법상 국제법 존중 원칙에 맞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0장 강제동원) - P209.210

(권순일 대법관의) 반대의견에는 ‘대한민국이 소송에서 그 소멸시효 완성 여부를 다툴 것도 아니라고 본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한국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의 배상 요구를 받았지만 소멸시효를 주장하며 거부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2009년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는데 정부가 소멸시효를 주장했고 정부가 승소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반대의견은 별다른 설명 없이 건조하게만 적어 두었습니다. 권순일 대법관에게 배경을 물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강제징용 피동원자의 피해 배상금 명목으로 청구권 자금을 일본에서 수령한 것도 사실이고, 그러한 명목으로 수령한 돈을 피해자 배상이 아닌 경제개발 자금으로 사용한 것도, 그때 피해자 배상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징용 피해자의 배상 청구권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침해된 채로 남아 있다면, 이를 보상할 책무는 기본적으로 국가와 정부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헌법재판소는 2008년 시행한 국외강제동원자지원법은 너무나 적은 위로금*을 주어 위헌이라는 강제징용 피해자의 헌법소원에, 시혜적으로 주는 돈이니 기본권 침해가 없다고 했습니다(헌법재판소 2015.12.23. 선고 2010헌마620 전원재판부 결정). 국회에서 징용 피해자에게 정부가 위자료를 추가로 지급하는 법률안을 통과시켰으나 대통령이 재정의 어려움을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한 적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할 책무는 국가에 있습니다. 별개의견이 지적한 대로, 대한민국은 일본을 상대로 ‘피징용자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라면서 ‘나라로서 청구하는 것이며, 피해자 개인에 대한 보상은 국내에서 조치할 성질의 것‘이라고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피해자 보상은 정부가 책임질 일이지 피해자로 하여금 일본 정부나 일본 국민을 상대로 소송을 하도록 미룰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10장 강제동원)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 제4조 (위로금) 국가는 강제동원희생자 또는 그 유족에게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위로금을 지급한다. 1. 국외로 강제동원되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경우에는 강제동원희생자 1인당 2천만원 (‘대일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 제4조 제2항에 따라 금전을 지급받은 경우에는 강제동원희생자 1인당 234만원을 뺀 금액으로 한다) 2. 국외로 강제동원되어 부상으로 장해를 입은 경우에는 강제동원희생자 1인당 2천만원 이하의 범위 안에서 장해 정도를 고려하여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금액. - P2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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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거에 의존한 선택은 여러 차원들이 하나의 척도로 환산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상황에 적절하다. 이 경우 표준이론이 내세우는 바와 같이 두 대안의 여러 차원에 가중치를 주어 수량적으로 대체비율을 찾고 부드러운 무차별곡선을 따라 연속적으로 대체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 - P234.235

•강점과 약점
강점과 약점이 모두 두드러지는 사람과 강점과 약점이 모두 적은 사람 중 누가 우월한지는 말하기 힘들다. A는 공부(일)를 아주 잘하면서 인간관계가 좋지 않은 학생(직원)이고, B는 공부(일)를 어느 정도 하면서 인간관계도 나쁘지 않은 학생(직원)이다. 이들에 대해 누가 낫다 못하다 미리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들이 무차별한 것도 아니다. 업무에서는 A를 좋아하지만, 체육대회에서는 A를 싫어할 수 있다. 이런 어려움은 공부(일)와 인간관계라는 두 차원이 하나의 가치로 환산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래서 입시나 채용에서 누가 좋으냐고 물으면 대부분 A를 선택하고, 누구를 거부하겠느냐고 물어도 많은 사람이 A를 선택할 수 있다. 반면 B에 대해서는 선택하는 비율과 거부하는 비율이 모두 적을 수 있다. - P236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흡연의 유혹, 운동의 고통, 절주의 어려움, 산통을 낮게 평가했다가 임박하면 이들을 예정했던 것보다 훨씬 높게 평가하게 된다. 이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장기적인 의도와 단기적인 유혹 사이에서 갈등한다는 뜻이다. 이는 지수형 할인이 신뢰하는 인간의 동태적 일관성이나 개인의 판단이 지니고 있다는 일관성에서 벗어난다.
환경문제로 인해 1970년대에 발생했던 페루 멸치 어족의 급격한 감소나 1980년대 초에 발생한 캐나다 대구 어족의 급격한 감소는 미래의 어획량과 비교해 현재의 어획량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생긴 결과이다. 이 또한 쌍곡형 할인으로 발생한 문제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사례들에서 볼 수 있듯이 쌍곡형 할인에는 인내, 유혹, 자기통제self-control 등의 문제가 수반된다. 인간의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사전적인 속박precommitment이 필요하다. - P248

구체적으로 말하면, 행동경제학은 실질변수와 명목변수를 경제현상을 제시하거나 규정하는 틀이나 방식 혹은 사물의 차원으로 이해한다. 명목이자율이 5%인데 물가가 3% 증가했다면, 이자율의 명목적인 차원은 5%이고 실질적인 차원은 2%이다. 그런데 명목변수를 표현하는 화폐가 자연스럽고 두드러지기 때문에 실질변수와 다른 별도의 틀이나 차원으로 작용한다. 이에 따라 경제현상의 실질 차원과 명목 차원이 공존한다. 결과적으로 경제주체들은 수시로 명목적인 변동으로부터 실질적인 변동을 가려내지 못해 명목적인 수량 자체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 P251

사람들은 복잡한 분수를 보면 분모는 무시하고 분자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오판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비율이나 분수 전체가 아니라 절대적인 숫자 혹은 분자의 절대적인 크기가 부각되기 때문이다. 분모는 배경 정보인 데 비해 분자는 전면에 등장하는 정보이다. 이는 기저율을 무시하는 인간의 편향에도 부합된다. - P257

경제학은 화폐와 친하지 않다. 초기 경제학인 고전학파에서부터 화폐경제를 실물경제와 비슷하게 생각해왔다. 그리고 이런 경향이 현대의 신고전학파에서 극대화되었다. 미시경제학에서는 어떤 임의의 재화라도 화폐가 될 수 있어 실질적으로 화폐가 등장하지 않는다. 효용을 주는 재화와 서비스의 선택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화폐라는 존재는 극소화된다.
거시경제학에서는 화폐가 무시되거나 수량으로만 존재한다. 케인스주의가 화폐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데 비해 통화주의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화폐가 경제에서 중요한가Does money matter?‘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던 맥락이 여기에 있다. 특히 ‘파틴킨 논쟁Patinkin controversy‘ 등을 통해 고전적인 이분법classical dichotomy을 당연시할 정도이다. 이 이분법에 의하면 경제의 실물 부문과 화폐 및 금융 부문이 분리되어 있고, 화폐 부문은 실물 부문의 기초여건을 반영해 물가를 결정하는 데 그친다.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꼬리가 개를 흔들고wagging the dog‘,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의 유동화로 인한 위기가 발생해도 통화주의자는 기초여건을 강조한다. 이런 입장에서는 명목변수가 그 자체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할 수 없다. - P258.259

합리적 기대의 핵심적인 대상은 물가변동이다. 물가변동을 잘 예측하고 여기서 얻은 정보를 통해 화폐변수 혹은 명목변수와 실질변수를 구분하고 명목적인 변동과 실질적인 변동을 제대로 가려내는 것이 합리성이다. 이같이 구분하지 못하면 명목변수에 집착하는 화폐환상money illusion이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거시현상과 관련된 합리성은 무엇보다 화폐환상이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되는 것이다. - P263

그런데 물가는 재화 및 서비스의 가격들로 구성되므로, 물가(변동)에 대한 인식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가격(변동)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다. 이와 관련해 행동경제학과 경제심리학이 지적하는 여러 가지 불완전함을 논의해보자.
(중략) 셋째, 사람들은 어느 크기를 넘어서야 차이를 지각하므로 특정 수준(쌀 가마당 10만원)이 아니라 일정 범위(9만원~11만원)가 준거가 될 수 있다. 제도적인 차원이 아니라 심리적인 차원에서 가격 상한과 하한이 존재하는 셈이다. 이 경우 손실회피는 가격의 하한(9만원)은 손쉽게 내려가지만 상한(11만원)은 쉽게 올라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단 한 번의 가격하락으로도 준거의 하한은 내려가지만, 상한은 여러 차례 가격이 상승해야 비로소 올라간다. 소비자가 내는 가격이 아니라 노동자가 받는 임금에 대해서는 이와 반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 P265

체감물가를 재화 가격들의 등락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임금이나 소득까지 개입된 문제로 확장해서 볼 필요가 있다. 임금상승보다 물가상승이 더 쉽게 눈에 띄거나 두드러진다는 행동경제학의 관점에 의탁해볼 수 있다. 소비자들이 동시에 대부분 노동자라고 본다면 소비자들이 장터에서 물건을 구매할 때는 재화 가격뿐 아니라 임금도 고려할 것이다. 이때 재화 가격이 임금보다 더 두드러질 수 있다.
(이후 설명하는 바와 같이) 행동경제학에 의하면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효용이나 소득을 극대화하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효용이나 소득을 의식하고, 가격이나 임금의 공정성에 관심을 가진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시장의 균형임금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공정성을 요구한다. 여기에 화폐환상이 겹쳐 경기 변동이나 생산성 변동에 따른 명목임금의 삭감에 저항할 수 있다. 반면 임금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면 노동자들은 보다 많은 노력으로 응답한다. - P267

애컬로프G. Akerlof는 이러한 논리들을 수용함으로써 비자발적 실업을 설명하는 효율임금가설을 뒷받침했다. 상호성이 경영자와 노동자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높은 임금과 높은 생산성을 주고받는 선물주기를 낳는다. 또한 노동자가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임금이 존중받는다. 나아가 노동자 집단 전체에 적용되는 규준이 임금 결정의 준거가 된다. 이런 것들은 노동자의 사기에 영향을 미친다. 더불어 기업 내부에 있는 노동자의 임금이 외부자가 수용하는 임금보다 높다. 또한 내부자는 이보다 낮은 임금으로 외부자가 고용되는 것을 방관하지 않는다. - P268

사람마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나이 등에 따른 응분의 권리와 의무가 규범을 이루고, 이런 권리와 의무가 현재소득과 연결되어 있어, 현재소득이 소비와 저축을 결정한다. 이것이 본래 케인스가 주장했던 바이다. 따라서 현실은 항상소득가설이나 평생소득가설에서 벗어난다. 세일러가 강조하는 행동경제학의 정신적 회계도 소비에 대한 규범 때문에 발생한다.
소비자의 지출이 현재소득에 예민하게 반응하듯이, 기업의 투자도 현재의 현금흐름에 반응한다. 특히 소비자와 달리 기업의 경우 경영자와 소유자의 이익이 다르며, 최고경영자는 일자리에 대한 투자를 자신의 규범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기업은 주주가치를 극대화하기보다 현금의 흐름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다. 여러 세대에 걸친 사회보장을 위한 정부의 재정조달 방식이 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유산 등에 있어 나눔과 도와주기라는 가족 내의 규범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 P270

집착성향효과disposition effect도 중요하다. 이는 가격이 상승한 주식을 너무 빨리 팔고 가격이 하락한 주식을 너무 오래 보유하는 성향을 의미한다. 가격이 상승한 주식은 계속 보유할 만하고 가격이 하락한 주식은 팔 만한데 오히려 그와 반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특히 하락한 주식을 팔지 않는 것은 손실회피경향으로 인해 손실을 입었다는 것을 인정하거나 주식을 매도해 손실을 실현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투자자가 자부심을 유지하고 후회를 회피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전망이론의 구성요소인 민감성의 체감에 의하면, 투자자들은 이익이 발생하는 국면에서는 위험회피적이지만 손실국면에서는 위험을 감수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따르면 주가의 추가 하락으로 인한 고통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그것을 감수할 여지가 높아진다. 또한 정신적 회계에 따라 손실을 본 주식에 대해 손실이 회복될 때까지 계정을 마감하지 않는 것으로 같은 현상을 이해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자아 속에는 계획자와 행위자의 갈등이 있는데 감성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행위자가 계획자를 압도하는 자기통제의 문제로 이것을 해석할 수도 있다. - P284.285

표준이론에 근거한 포스너R. Posner의 법경제학에 의하면, 사람들은 소송을 결정할 때 기대이익이나 기대효용의 극대화 원칙에 따라 소송 비용을 제외한 예상 배상금을 계산해 소송 이전의 협상과 소송 여부를 선택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 행동경제학은 사람들이 절대액수보다 상대적인 크기에, 즉 기대수익보다 쌍방 간의 공정한 이익과 손실의 분배에 더 초점을 맞춘다고 반박한다. - P304

•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2008년 초에 주민들의 알 권리를 존중하기 위해 주정부 공무원들의 연봉을 누구나 확인할 수 있도록 제도화했다. 공개 이후 중간 이하의 급여를 받는 사람은 직장에 대한 만족도가 감소하여 이 중 일부는 이직했다. 이에 비해 중간 이상의 연봉을 받는 사람들은 공개 이후 만족도에 변함이 없었다. - P305

뿐만 아니라 진화를 위해 요구되는 환경에의 빠른 적응이 쾌락의 제자리걸음hedonic treadmill을 초래한다. 이것이 준거의존성이나 사회적 비교에 대한 진화론적인 설명이다. 진화적인 장치들은 평균적으로 유효할 뿐 개별적으로는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다. 이익과 손실의 비대칭성을 나타내는 손실회피도 환경에 대한 적응을 도와주지만, 동시에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
불행을 낳는 이런 진화적인 요인들을 극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친지를 늘리고 깊은 우정을 형성한다. 비슷한 사람을 배필로 삼으며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교육하고 이해한다. 불평등을 줄이고 동등함과 상호성을 강조하며 협조를 증대시킨다. 진화를 통해 형성된 여러 욕망들을 충족시킨다. 건강, 직업상의 성공, 친지에 대한 조력, 친근함, 자신감, 고급 음식에 대한 기호, 신변 안전 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을 확보토록 노력한다. 더불어 짝짓기, 자연적인 풍경 등에 대한 미적 즐거움, 안전하고 자원이 풍부하며 전망이 있는 서식처를 확보하도록 노력한다. - P316

그런데 다수이든 소수이든 대안을 배제하는 방식은 자유주의뿐만 아니라 자유온정주의로부터도 벗어난다. 자유온정주의libertarian paternalism는 특정 대안을 권유할 뿐 어느 것도 강제로 부과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것들을 선택하지 않도록 권유하는 방식이 아니라 선택하도록 권유하는 방식을 취한다. - P331

미시경제정책과 자유온정주의 모두 강제가 아닌 유인이나 유도에 의존하지만 양자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미시정책이 가격과 소득제약을 통해 작용할 뿐 선호를 존중하는 데 비해 자유온정주의는 선호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미시정책이 개인의 행위 및 선택에 생기는 변화가 아니라 산업이나 경제에 생기는 변화에 궁극적인 관심을 가진다면, 자유온정주의는 경제 전체나 산업 차원의 변화보다 근원적으로 개별 경제주체의 변화에 관심을 둔다. 따라서 미시정책은 조세 등의 유인을 통해 개인의 선택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데 그치며 특정 대안을 염두에 두지 않는 데 비해, 자유온정주의는 특정 대안을 선택하거나 피하도록 직접 유도한다.
이런 의미에서 미시경제정책과 달리 자유온정주의는 교육 또는 계몽으로 뒷받침되는 윤리, 도덕과 같은 수준에 놓여 있다. 이는 신고전학파가 개인의 합리성을 고집하는 반면 행동경제학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차이이다. - P332

행동경제학 내에서도 심리학자인 트버스키와 카너먼보다 사회과학자인 세일러와 선스타인이 경제구성원들의 이익이 서로 충돌할 가능성을 보다 넓게 인정한다. 예를 들어 생산자 혹은 기업이 광고 등 판매전략을 통해 선택의 맥락이나 초기대안을 조정함으로써 소비자를 약취할 수 있다. 또 우리사주의 비율을 얼마로 정할지를 놓고 고용주와 근로자 사이에 이익이 충돌하고 서로 다른 규정들이 경합을 벌일 수 있다.
행동경제학의 관점에서 초기대안이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사람들의 선호가 미리부터 완벽하게 정해져 있지 않아 선호가 구성된다는 뜻이다. 자유온정주의는 인지와 판단에 있어서의 편향 혹은 취약점을 보완할 대책을 필요로 한다. 또한 초기대안의 설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유리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해도, 또 한편으로는 정부나 기업의 정책결정자가 초기대안의 설정을 통해 의도적으로나 비의도적으로 시민이나 소비자를 이용하거나 착취하고 있지는 않은지도 점검해야 한다. 이는 초기대안의 설정이 어떤 효과를 주는지에 달려 있다. - P333.334

어떤 대안이 있는지 몰라서 제대로 선택하지 못하는 상황이 신고전학파 경제학과 행동경제학을 구분하는 근원적인 지점은 아니다. 양자 모두 정보가 충분히 공개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행동경제학도 개인의 선택에 집중하기 때문에, 예산제약의 차이나 소득분배에 대한 관심이 신고전학파보다 더 높아 보이지 않는다. - P336

대안이 너무 많은 경우뿐 아니라 대안들의 차원이나 속성들을 너무 많이 제시하는 경우에도 의사결정이 쉽지 않다. 따라서 중요한 속성들만 간소하게 제시하고 이에 대해 숫자가 아닌 ‘좋음‘이나 ‘나쁨‘ 등의 서술적인 평가를 첨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숫자들도 동일한 단위로 표시해 손쉽게 비교가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 좋다. - P337

반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대안들은 하나의 범주로 몰아 그것의 가중치와 선택을 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콜레스테롤이나 지방을 줄여 건강을 증진시키려면 건강식품은 ‘야채, 생과일, 견과류, 생선, 건어물‘ 등으로 세분한다. 반면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을 모두 ‘고기‘로 크게 분류해 배치한다. 금융자산에 대해서도 위험이 높은 자산은 하나로 묶는 것이 이에 대한 투자를 줄이는 방법이다. - P337

즉, 적극적인 의미의 정보제공, 선택에 대한 훈련과 몇 차례 이상의 경험이나 가상경험의 제공, 선택과 선택의 대안들에 대한 가정 및 학교 교육과 정부의 홍보, 선택의 금전적·비금전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제고 등을 표준이론과 행동이론이 공유하는 정책적인 합의로 간주할 수 있다.
표준이론이든 행동이론이든 모두 개인의 선택에 집중한다. 행동이론은 완벽에 가까운 합리성이 현실이 아니라고 주장할 뿐 표준이론과 거의 비슷하게 개인의 합리적 선택을 중요시한다. 심지어 개인이 합리적으로 선택하기만 하면 대부분의 경제사회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행동이론이 내세우는 규칙, 정책, 법과 제도는 무엇보다 개인의 합리성을 향상시키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 P341.342

그런데 과연 개인이 합리적으로 선택하기만 하면 대다수의 경제사회 문제가 해결되는가?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답하기는 힘들다. 개인의 선택에 맡겨지지 않은 경제사회 문제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선택으로 좁히더라도 행동경제학은 선호에 집중할 뿐 예산제약이나 소득이 사람들 사이에 다르다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다.
부유한 사람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도 합리적으로 선택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행동경제학의 도움으로 모두 더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소득불평등으로 인해 부자와 빈자의 선택범위가 다르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가난하지만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사람이 부유하지만 비합리적으로 선택하는 사람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부유한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이 일반적으로 더 합리적이라고 단정할 근거가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이 더 높다.
행동경제학이 강조하는 공정성이나 상호성에 대한 관심이 이를 완화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 고용, 환경, 금융, 기술 등 다른 경제사회 문제들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이 선택의 합리성을 증진시키려는 행동경제학의 정책이 기존의 미시·거시 경제정책과 다른 점이자 동시에 그것이 지니고 있는 한계이다. - P342.343

손실회피경향으로 인해, 원천징수액을 적게 책정하고 나중에 추가로 징수하는 것보다 원천징수액을 많이 책정하고 나중에 환급하는 것이 조세저항을 줄일 수 있다. 환급 자체에 대해서도 정책목표에 따라 달리 규정할 필요가 있다. 경기침체로 인해 소비를 촉진할 필요가 있으면 정책당국은 환급을 환불rebate이 아닌 의외의 추가소득bonus으로 규정하는 것이 낫다. - P355

환경을 저해하는 시설을 설치하려는 경우 돈으로 보상하려는 노력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주민들이 원하는 것은 현재 보유하고 있는 환경이지 돈이 아니어서 금전적인 보상이 소용이 없거나 심지어 거부감을 낳아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이럴 경우 병원이나 공원 등 다른 차원에서 환경을 개선하는 시설을 제공하는 방식이 보다 유효하다. - P357

1995년 이래 미국에서 이식할 장기를 기다리다 사망한 사람의 수는 4만 5,000명이다. 장기기증에서도 기증하지 않는 것을 초기대안으로 삼는 국가에서보다 기증하는 것을 초기대안으로 삼는 국가에서 기증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명시적으로 동의해야 기증이 되는 덴마크, 영국, 네덜란드, 독일에서는 기증 비율이 5~27%에 머물렀으나, 특별히기증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지 않는 한 기증이 되는 오스트리아, 벨기에, 프랑스, 헝가리, 폴란드, 포르투갈, 스웨덴에서는 86~99%로 나타났다.
초기대안이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이유가 사람들의 선호가 미리부터 정해져 있지 않아 장기기증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서 비로소 선호가 구성되기 때문일 수 있다. 이에 따라 정책결정 시 초기대안의 설정을 통해 정부나 기업이 사람들을 모르는 사이에 이용하거나 착취할 수도 있는데, 특히 명확히 판단하지 못한 상태에서 예컨대 장기를 기증하도록 오도될 위험 등을 경계해야 한다. - P360

행동경제학은 다른 학자들보다 베블런과 아주 가깝다. 습관이나 타성이 소비를 위시한 경제활동에서 중요하다는 지적은 I체계의 존재에 부합된다. 또한 행동경제학이 본격적으로 내세우지는 않지만 준거임금 등의 사회적 결정이나 사회적 선호 및 사회적 비교는 베블런에 근거하고 있다. 베블런은 진화이론을 강조했다. 기거렌처G. Gigerenzer가 지적했듯이 행동경제학은 심리, 생물, 진화론적인 관점과 결합할 때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P377

한국 사회에서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에서 기업의 존재를 강하게 의식하는 사람들은 집단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행동경제학은 표준이론과 달리 고립적인 인간이 아닌 사회적 선호를 가진 상호적인 인간을 강조하고 인간관계에 관심을 갖는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협력적인 인간이 조직의 비용과 부담을 줄여준다. 그렇더라도 행동경제학이 집단성을 강조하거나 중시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행동경제학은 집단의 존재를 수용할 필요가 있다. 표준이론의 경제적인 인간에 대해 행동경제이론이 문제해결형 인간을 내세웠다면, 뒤르켐Emile Durkheim 등에 근거하여 집단 속의 이원적인 인간을 추가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 P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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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배려하지 않은 논리는 시민에게 외면당했고, 논리로 무장하지 못한 결론은 금세 뒤집혔다. (프롤로그) - P6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이 아들과 생물학적 혈연관계가 없음을 알면서도 친자관계를 유지하여 왔다. 아들은 원고와 혈연관계가 없다는 사정을 알고도 원고와 친자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까지 자신의 생부가 누구인지 알고 있지 않다. 여전히 원고를 자신의 아버지로 생각하며 원고가 자신의 아버지로 남아 주기를 바라면서 이 사건 청구를 다투고 있다." 가족의 기준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1장 인공수정) - P20

이 판결(2019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친생부인 소송에 대한 전원합의체 판결)에는 별개의견을 견제하는 다수의견 보충의견이 있다. "법률 제정 당시 입법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안이라는 이유만으로 기존 법률의 적용 또는 유추적용 여부를 세심하게 검토하지 않은 채 법 형성이 필요한 사안으로 단정하고 새로운 법리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에 맞서는 내용이 권순일 대법관이 참여한 별개의견에 있다. "법원으로서는 문제가 된 사태의 해결을 위하여 이에 관련되는 헌법 규정 및 다른 법령과의 관계, 법이 추구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가치와 사회 일반의 보편적인 법의식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가장 적합한 분쟁 해결 기준, 즉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법‘을 형성하는 과정을 거쳐 사법권을 행사하여야 한다." (1장 인공수정) - P23

권순일 대법관 이야기입니다. "가족법 분야는 사회의 기본인 가족관계를 규율합니다. 관습, 전통, 법감정을 토대로 하는 가장 보수적인 분야입니다. 따라서 가족법 해석도 문언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민법 가운데 가장 자주 개정된 분야가 가족법입니다. 헌법재판소와 법원도 적극적으로 기존 관습을 바꾸어 왔습니다. 사회·경제적 변화와 양성평등 이념 강화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의 급변과 고민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가족법이 실은 법률도 해석도 자주 바뀌었다고 합니다. (1장 인공수정) - P25.26

권순일 대법관 인터뷰. "보통은 대법관 네 명이 심리하는 소부에서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했거나, 소부에서 의견이 일치됐더라도 다른 대법관들이 이견이 있으면 전원합의체에 회부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상고를 접수해 검토한 재판연구관실에서 중요성, 사회·경제적 파장, 법리 연구 필요성 등을 감안해 전원합의체에서 심리하자고 했습니다. 특히 인공수정과 친자관계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제기되는 문제였습니다. 민법 제정 당시에는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상황이었습니다. 국회가 법률을 손보지 않는 상황에서 대법원이 공론장을 마련해 법률 개정을 촉구하고, 다른 한편 여러 분야 전문가가 의견을 밝히고 법리 논쟁을 벌이도록 해 해결 방안을 모색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다수의견도 별개의견도 상고기각이라는 결론은 같았기에, 공개 변론에서 대법관들이 자신들의 결론을 국민에게 설득하려는 목적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셈입니다. 대법관들이 질문하는 이유에는 자기 입장을 시민에게 설득하려는 것도 있습니다. (1장 인공수정) - P26

이러한 (변호사의 형사사건) 성공보수 계약은 일본과 한국에만 있다.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 유럽연합(EU) 등에서는 성공보수 계약을 하지 않거나, 못하게 했다. 독일은 연방변호사법에서 성공보수 약정을 금지한다. 성공보수는 의회가 법률로 제한하기 전에도 금지였다. 19세기 말 명예법원, 20세기 초 제국대법원이 무효라고 했다. 변호사라는 직업과 지위에서 있을 수 없는 계약이라는 이유다. 2006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성공보수 금지조항을 위헌이라고 했지만, 이때도 예외 없이 모두 막은 부분이 문제였다. 성공보수 금지 자체는 합헌이었다. 지금은 당사자가 형편이 어려워 성공보수 약정을 해야만 권리를 지킬 수 있는 경우에 예외적으로 가능하다. 미국에서는 민사사건에서만 성공보수 약정이 가능하다. 형사사건, 가사사건, 입법로비부분에서 성공보수가 금지돼 있다. 미국변호사협회(American BarAssociation. ABA) 윤리장전은 형사사건과 가사사건 성공보수를 전면 금지하고 있다. 이러한 금지를 연방법원과 주법원 판례도 받아들여 형사사건 등에서 성공보수 약정은 무효라고 본다. 가사사건에 성공보수 약정이 금지되는 이유는 이혼이나 별거를 부당하게 조장하고, 당사자 사이의 화해를 방해하거나 배우자와 자녀의 생활에 쓰여야 할 자금이 변호사에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2장 변호사들) - P36.37

권순일 대법관이 집필한 판결은 이렇다. "변호사가 위임사무의 처리에 대한 대가로 받는 보수는 수임인인 변호사와 위임인인 의뢰인 사이의 자유로운 합의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형사소송은 국가형벌권을 실현하는 절차로서 당사자의 생명, 신체의 자유, 명예 등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변호사 직무의 공공성과 윤리성이 다른 사건에서보다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따라서 형사사건에 관한 변호사의 보수는 단순히 사적 자치의 원칙에 입각한 변호사와 의뢰인 사이의 대가 수수관계로 맡겨 둘 수만은 없다. 형사사건에 관한 변호사의 보수 중에서도 의뢰인이 위임사무의 처리 결과에 따라 또는 사건 해결의 성공 정도에 따라 변호사에게 특별한 보수를 지급하기로 약속하는 이른바 ‘성공보수 약정‘은 여러가지 부작용과 문제점을 안고 있고, 형사 절차나 법조 직역 전반에 대한 신뢰성이나 공정성의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 법적 효력에 관하여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계약은 자유이지만, 국가가 관여하는 경우가 있다. 흔하게는 노동계약에 국가가 법률로 개입하고, 극단적으로 장기매매 계약은 국가가 금지한다. (2장 변호사들) - P40.41

성공보수 무효 판결은 대법원에서 나왔습니다. 고등법원까지는 무효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건 당사자들에게는 대법원 판결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성공보수 6000만 원을 받을 수 있다는 고등법원 판결이 유지됐습니다. 성공보수 무효 효력 시점을 이 판결 선고 이후로 잡았기 때문입니다. 개인분쟁을 다루는 대법원이 사회문제만 해결한 셈이 됐습니다. 이 때문에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법원이 맞춤한 사건을 고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주심 권순일 대법관이 결론을 내놓고 사건을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 물었습니다. "이 사건을 만난 것은 대법원 연구관의 상고사건 신건(新件) 검토 보고서를 받았을 때입니다. 대법관들은 신건 사건을 빠짐없이 검토합니다.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나니 먼저 도덕적 분노가 가슴에 올라왔습니다. 피의자 가족이 형사 성공보수 1억 원을 마련하려고 아파트를 처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궁박한 피의자 가족의 처지, 허위정보가 떠도는 법률시장을 생각하기에 앞서 ‘세상에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연구관 검토 의견은 사건에 특별한 법률적 쟁점이 없으므로 이대로 종료하자는 심리불속행 기각이었습니다. 그렇게 끝낼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고뇌는 판결이 선고될 때까지, 제 자신 나중에 알게 되지만 판결 선고 이후에도 계속됐습니다." (2장 변호사들) - P44.45

이(2015년 7월 한국 대법원의 형사 성공보수 무효 판결이 무효 효력 시점을 이 판결 선고 이후로 결정한 장래효 판결이며 따라서 사법적극주의의 발현이라는 비판)에 대한 권순일 대법관 설명입니다. "장래적 판례 변경을 대법원이 선택한 전례가 있습니다. 2005년 여성을 종중원으로 인정한 전원합의체 판결이 대표적입니다. 다만 장래효를 택하면서도 당해 사건에만 예외적으로 소급 적용했습니다. 이 사건은 항소심에서 형사 성공보수는 6000만 원 범위 내에서 유효하다고 판단한 것인데, 변호사가 무효로 판단된 4000만 원 부분도 받겠다고 상고한 사건입니다. 변호사의 상고이유 부분만 상고심 판단 대상이었기 때문에 당해 사건에 대한 예외적 소급효 적용 법리까지 나갈 필요는 없었습니다. 2005년 여성 종중원 사건과 장래 무효 이론 적용이 다르다고 법원을 비판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대법원 판례를 변경하면서도 신중하게 접근한 것이므로 사법자제 원칙에 충실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2장 변호사들) - P48

사법과 입법의 차이에 관해 다시 물었습니다. "법관에게는 법을 해석할 권한만 있지, 만드는 권한은 없다고들 합니다. 대법원은 법해석을 담당하는 사법기관이지만 법해석이란 법정책을 선택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법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법을 제정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법의 기능과 사명을 생각하면 사법적극주의에 서야 할 때도, 사법자제 원칙에 충실해야 할 때도 있겠지요.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 같은 학자는 실정법 해석에 공정성, 정의, 적법 절차 등과 같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가치체계와 정합성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결국 규범이 의회에서 확정되는 것인지, 아니면 법원에서 확정되는지는 법철학적으로 매우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3장 불법체류) - P72

이(2020년 7월 한국 대법원의 선거와 허위사실 공표에 관한 전원합의체 판결의 다수의견)에 대해 유죄의견은, 무죄의견이 공직선거법에 정해진 ‘공표‘의 의미를 축소해 면죄부를 줬다고 비난한다. 허위인 사실은 어찌할 수가 없으니, 나머지 구성요건인 공표에 해당하지 않는 편법을 썼다는 것이다. "‘공표‘의 범위를 제한하는 해석은 자칫 선거의 공정과 정치적 표현의 자유 사이의 균형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 이 사건 조항에서 정한 ‘공표‘는 반드시 허위사실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경우에 한정될 것은 아니고,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표현에 의하더라도 그 표현된 내용 전체의 취지에 비추어 그와 같은 허위사실의 존재를 암시하고, 이로써 후보자의 평가에 유리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을 정도의 구체성이 있으면 충분하다. ‘공표‘의 사전적 의미는 ‘여러 사람에게 널리 드러내어 알리는 것‘이고, 이 사건 조항의 문언 해석상 달리 적극적·일방적으로 허위사실을 표명할 것을 요구하지 않음이 명백하다. 다수의견은 입법적 방법이 아닌 해석을 통하여 문언의 가능한 의미를 벗어나 새로운 구성요건을 창조하자는 것으로 이는 극히 신중해야 한다." 이 사건 결론은 무죄이고, 권순일 대법관은 무죄의견에 참여했다. (4장 선거) - P83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2022년 3월 치러질 대통령 선거에 나갈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항소심대로 유죄가 확정되면 피선거권이 사라져 입후보할 수 없었습니다. 대통령선거가 20개월 정도 남은 2020년 7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판결의 결과에만 대중의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그렇지만 이 판결은 선거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중요한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결론도 첨예하게 갈렸습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에는 대법관 열두 명과 대법원장까지 열세 명이 참여합니다. 이 사건에서는 김선수 대법관이 스스로 빠졌습니다. 변호사 시절 이재명 지사 사건을 대리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무죄의견 일곱 명, 유죄의견 다섯 명인데, 대부분 사건에서 대법원장은 다수의견에 섭니다. 이런 대법원장을 제외하면 파기환송 여섯 명, 상고기각 다섯 명입니다. 공정한 선거는 어떻게 달성되는지에 관해 사법부가 어렵게 내린 결론입니다. 앞으로 선거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궁금합니다. (4장 선거) - P84.85

결국 다수의견과 반대의견이 부닥치는 지점은 ‘공표‘입니다. 토론회 발언을 두고 다수의견은 공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반대의견은 공표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물었습니다. "공직선거법 제250조는 형벌조항입니다.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따라 엄격하게 해석해야 합니다. 공표의 사전적 의미에 관해서는 다수의견과 반대의견이 다르지 않습니다. 의견이 갈리는 지점은 토론회 질의에 대한 ‘예, 아니오‘로 하는 답변이 공표에 해당하는지 여부입니다. 제250조는 ‘당선되거나 되게 할 목적으로 … 허위의 사실을 공표‘라고 구성요건을 정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당선되거나 되게 … 하기 위한 행위‘가 선거운동(제58조 제1항)인데, 선거운동 방법이 공직선거법에 정해져 있습니다. 선거벽보(제64조), 선거공보(제65조), 신문광고(제69조), 방송광고(제70조), 방송연설(제71조), 연설·대담(제79조) 등입니다. 그리고 토론은 따로 정의 규정이 있습니다(제81조 제2항). 이러한 공직선거법의 체계, 내용, 취지 등에 비추어 공표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공표란 적극적 일방적으로 알리는 때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다수의견 입장입니다. 다수의견이 문언의 의미를 벗어났다거나 새로운 구성요건을 창조하였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다수의견은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엄격해석 원칙을 지킨 것입니다." (4장 선거) - P88.89

공직선거법 제250조 허위사실공표죄를 새로운 미디어 현실에서 생각해 봅니다. 지금은 토론회를 유튜브 등을 통해 나중에 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토론회 발언은 실시간으로 또 직후에 수많은 사람이 검증합니다. 간단한 사실은 하루이틀이 못 되어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드러납니다. 물론 복잡한 사안은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이 판단합니다. 하지만 수사기관이 진실을 제대로 밝히지 않거나 뒤튼다고 의심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느 전직 대통령이 선거운동에서 공표한 허위사실은 당선해 5년 임기를 마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대법원에서 가려지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한 권순일 대법관 얘기입니다. "판결에 써 있는 대로 말하고 싶습니다. ‘선거를 전후하여 후보자 토론회에서 한 발언을 문제 삼아 고소·고발이 이어지고, 이로 인하여 수사권의 개입이 초래된다면 필연적으로 수사권 행사의 중립성에 대한 논란을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선거 결과가 최종적으로 검찰과 법원의 사법적 판단에 좌우될 위험에 처해짐으로써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로 대표자를 선출한다는 민주주의 이념이 훼손될 우려도 있다.‘ 민주공화국에서 검찰과 법원의 사법적 판단보다는 유권자인 국민 전체의 선택을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4장 선거) - P90.91

그리고 유책주의란 무엇인지 재확인한다. "제6호 이혼사유의 의미에 관하여 대법원 판례는 혼인의 본질에 상응하는 부부공동생활관계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탄되고, 혼인생활의 계속을 강제하는 것이 일방 배우자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는 경우를 말한다고 해석하여 왔다. 종래의 대법원 판례를 변경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은 그 주장이 들고 있는 여러 논거를 감안하더라도 아직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당사자가 가혹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특별한 사정이 있다면 예외를 인정할 수 있다고 한다. "대법원 판례에서 이미 허용하고 있는 것처럼 상대방 배우자도 혼인을 계속할 의사가 없어 일방의 의사에 의한 이혼 내지 축출이혼의 염려가 없는 경우는 물론, 나아가 이혼을 청구하는 배우자의 유책성을 상쇄할 정도로 상대방 배우자 및 자녀에 대한 보호와 배려가 이루어진 경우, 세월의 경과에 따라 혼인 파탄 당시 현저하였던 유책배우자의 유책성과 상대방 배우자가 받은 정신적 고통이 점차 약화되어 쌍방의 책임의 경중을 엄밀히 따지는 것이 더 이상 무의미할 정도가 된 경우 등과 같이 혼인생활의 파탄에 대한 유책성이 그 이혼 청구를 배척해야 할 정도로 남아 있지 아니한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허용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사건(2015년 9월 한국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이혼 청구는 기각됐다. (5장 이혼) - P102.103

최고 법률이론가로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 꼽힙니다. 대법관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대법원 재판연구관실 책임자입니다. 오히려 대법관은 정치적인 선발 과정을 거칩니다. 국회의 동의를 받아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출신, 학교, 성별, 경력 등을 고려합니다. 이 사건 주심인 김용덕 대법관과 그리고 권순일 대법관도 수석재판연구관 출신입니다. 김용덕 대법관은 유책주의를 파탄주의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 왔고, 신중하게 골라낸 사례가 이 사건입니다. 대법관 열두 명과 대법원장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 사건에서 대법원장은 다수의견에 서는 게 관례입니다. 결과적으로 대법원장이 결론을 주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대법관 여섯 명 대 여섯 명으로 갈리는 사건은 대법원장이 캐스팅 보트를 쥡니다. 이 사건에 대법원장이 유책주의에 서면서 결론이 정해졌습니다. 이에 대한 권순일 대법관 설명입니다. "대법원장은 원래 파탄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국민의 일상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정책을 변경할 때에는 다수의견이 압도적이 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종래 견해를 유지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논쟁이 치열한 사건에서 아슬아슬하게 관례를 변경하면 되레 논란을 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5장 이혼) - P104.105

‘배우자 있는 자는 다시 혼인하지 못한다‘는 중혼 금지 규정이 민법 제810조에 있습니다. 금지되는 혼인은 법률혼만을 가리킵니다. 법률혼을 한 사람이 다른 이와 사실혼관계를 맺는 경우 중혼이 아닙니다. (5장 이혼) - P108

다시 권순일 대법관 얘기입니다. "중혼은 일부일처제에 반하는 것인데 우리나라에는 중혼에 대한 형사적 제재가 없습니다.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허용하지 않는 이유에는 사실상 중혼인 사람이 기존 법률상 배우자를 축출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과거와 비교하면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고 지위도 높아졌습니다. 양성평등이 진전됐지요. 하지만 젊은 시절에 결혼해서 아이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고 시부모 봉양만 해 온 사람을 자기가 성공했다고 해서 축출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렇게 평생 살아온 여성으로서는 사실상 모든 걸 잃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혼인생활에서 생기는 신분(身分)이 굉장히 중요하더라고요. 자신의 존재 이유에 관한 것입니다. 남편과 성적 관계를 유지하고 그러는 차원을 넘어 집안의 며느리고 종부라는 것인데, 그런 사람을 쫓아내면 안 되지요." (5장 이혼) - P108

그런데 혼인을 계약으로 인정할 것인지를 두고 미국에서 논쟁이 있었습니다. 혼인에 따른 권리와 의무는 국가가 법률로 규정하는 것이지 당사자가 정하지 않는다는 이유입니다. 혼인은 계약(contract)이라기보다 신분(status)이라는 것입니다. 최근 들어서는 혼인을 계약으로 보면 혼인 당사자, 특히 여성 보호에 문제가 생기고 자녀에게 불리한 결과가 생길 수 있다는 점도 강조한다고 합니다. (5장 이혼) - P109

앞서 권순일 대법관 설명은 이 논의(혼인이 계약이라기보다 신분이라는 논의)를 강조한 것입니다. 얘기를 더 들어 보겠습니다.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고 헌법 제36조 제1항에 나옵니다. 국가가 보장한다는 겁니다. 법률로 보장한다는 겁니다. 대상은 혼인과 가족생활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바람이 나서 나가서 살아도 가족공동체는 유지되는 경우가 있지요. 부인이 애들 보살피고 시부모까지 모시고 있고요. 이런 경우 가족생활이 파탄 상태인가요. 오히려 국가가 보호해 줘야 하는 것은 아닌가요." (5장 이혼) - P109

구체적인 쟁점인 민법 제840조 제6호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를 제1호~제5호와 같은 유책주의 맥락으로 봐야 한다고 권순일 대법관은 설명합니다. "제6호는 제1호~제4호에 없는 경우를 포괄적으로 정한 것이지요(제5호는 ‘배우자의 생사가 3년 이상 분명하지 아니한 때‘). 법원이 구체적인 사안에서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결론을 내리도록 폭넓게 정해 둔 것이지, 유책주의를 배제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의 문제가 단순하고 명쾌하지는 않으니까 이렇게 정해 둔 것입니다. 혼인생활이 강제되면 개인 존엄과 양성평등에 위배되는 경우에 법원이 재량을 가지고 이혼 판결을 해 주라는 것이지요. 가사재판이 다른 민사재판과 똑같은 게 아니잖아요. 법원이 고도의 후견적인 측면에서 제6호를 인정하라는 취지에서 이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만일 제6호가 파탄주의 규정이라면 제1호~제4호에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유책주의 사유를 규정할 필요가 있을까요." (5장 이혼) - P110

혼인과 가족생활 문제를 법원이 후견적으로 판단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민사소송에서 당사자가 변론하지 않으면 패소합니다. 이러한 변론주의가 원칙적으로 가사소송에도 적용됩니다. 그렇지만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르지요. 상대방이 이혼재판에 나오지 않았는데 판사가 이혼 판결을 해 주지 않습니다. 법원이 재판을 좌우하는 직권주의 요소가 가사소송에 있어요. 이기고 지는 문제 이상의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사소송법의 목적을 정한 제1조를 보면 이렇습니다. ‘이 법은 인격의 존엄과 남녀평등을 기본으로 하고 가정의 평화 및 친족 간에 서로 돕는 미풍양속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가사에 관한 소송과 비송 및 조정에 대한 절차의 특례를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도덕률 성격이 강합니다. 가정이 행복해야 좋은 나라가 된다는 생각이 있지요. 그리고 제1조 뒷부분에 나오듯이 가사재판에 비송과 조정도 있습니다. 나이가 많은 부모의 후견인을 누가 해라, 아이의 친권은 누가 가져라 하면서 가정생활을 만들어 냅니다. 권리와 의무를 정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거죠. 그래서 가사재판에서 법원이 후견적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5장 이혼) - P110.111

유책주의에서 파탄주의로 판례를 변경할지는 오래된 논쟁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적잖은 대법관들이 전원합의체 심리 과정에서 입장을 바꿨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유책주의를 유지하자는 대법관이 네 명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 공개변론에서 파탄주의를 지지하는 의견서를 제출한 친족법 전문가, 사회학자들이 축출이혼이나 중혼적 사실혼 등으로 발생할 상대 배우자 보호가 미흡하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였습니다. 이후 합의 과정에서 유책주의가 다수의견이 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입니다. (후략)" (5장 이혼) - P111.112

대법관들 의견이 갈린 곳은 강력부 검사의 압수·수색을 어떻게 취소할지였다. 강력부 검사는 영장을 한 번 받아 세 번 추가 압수·수색을 했다. 제약회사 저장장치를 가져 나온 다음, 이를 대검찰청 D-NET(원격디지털공조시스템)에 복제(제1처분)하고, 다시 검사 개인 저장장치에 복제(제2처분)해, 여기에서 영장 혐의인 배임과 무관한 정보를 출력(제3처분)했다. 이러한 압수·수색 취소에서 기준을 영장으로 할지, 처분으로 할지로 의견이 갈렸다. 영장이 기준이면 판단 대상은 하나이고, 처분이 기준이면 판단 대상은 셋이다. (6장 디지털) - P117.118

앞 처분이 위법이면 뒤 처분은 당연히 위법이다. 위법이 합법을 낳지는 못한다. 뒤 처분이 위법일 때 앞 처분을 어찌할지가 문제인데, 영장 단위로 판단하는 의견은 앞 처분도 없애는 것이다. 처분별로 나눠서 판단하여야 한다는 의견은 앞 처분도 경우에 따라 유효할 수 있다는 것이다. (6장 디지털) - P118

이런 맥락에서 권순일 대법관에게 물었습니다. 다수의견은 영장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권순일 대법관은 처분마다 판단했습니다. "영장 발부가 위법하다며 취소를 요구한다면 영장에 대한 항고가 됩니다. 하지만 현행 형사소송법에는 영장항고 제도가 없습니다. 영장을 두고 반복해서 판단하는 것이 검사나 피의자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영장항고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대신 검사가 압수·수색해서 재판에 제출한 증거의 증거능력을 문제 삼습니다. 이 사건 쟁점도 검사의 처분인 압수·수색이지 판사의 판단인 영장 발부가 아닙니다. 원심 수원지방법원도 ‘각 압수 처분은 영장주의와 적법 절차 원칙에 위배되어 위법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법원 다수의견은 원심이 단계별로 취소한 것은 적절치 않다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처분이 모두 취소되어서 괜찮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재판 근거는 ‘검사의 압수에 관한 처분에 대하여 불복이 있으면 법원에 그 취소 또는 변경을 청구할 수 있다‘는 형사소송법 제417조입니다. 수사기관 처분에 대한 항고이지, 영장 재판에 대한 항고가 아닙니다. 사실 다수의견도 영장을 취소하라는 것이 아니라 영장에 따른 압수·수색을 전체적으로 취소하라는 것입니다. 언뜻 다수의견이 적법 절차를 중시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렇지 않습니다. 다수의견은 여러 처분 가운데 일부가 위법해도 전체적으로 중대하지 않으면 처분들이 모두 유효하다고 해석될 위험이 있습니다. 제가 별개의견에서 지적한 것은 올바른 법해석입니다. 결론이 정당하다고 논리적 근거 없이 이론을 만들다 보면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6장 디지털) - P127.128

대법원은 특수부 검사가 강력부 검사의 저장장치를 압수한 처분을 대법관 전원일치로 취소하면서도, 이러한 처분의 계기가 ‘우연한 발견‘이라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혐의사실과 관련된 전자정보를 적법하게 탐색하는 과정에서 별도의 범죄 혐의와 관련된 전자정보를 우연히 발견한 경우라면 법원에서 별도의 범죄 혐의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은 경우에 한하여 그러한 정보에 대하여도 적법하게 압수·수색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무제한 검색이 가능한 전자정보에서 우연한 발견은 없다고 판결한 바 있습니다. 2003년 메이저리그 야구단은 선수노조와 합의해 전체 선수의 약물 사용 여부를 검사했습니다. 양성이 5% 이상이면 이듬해부터 무작위 약물검사와 징계를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이 무렵 연방 수사당국은 금지약물 복용이 의심되는 선수 열 명의 검사 결과를 압수하는 영장을 받았습니다. 압수 과정에서 선수 전원의 검사 결과를 발견해 복제했습니다. 제9연방항소법원은 "최초 수사 대상 열 명에 대한 증거만 쓸 수 있다"고 판결하고, 전자정보 압수·수색 네 가지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우연한 발견은 더 이상 인정되지 않는다. 압수·수색 전에 증거분석 계획을 내라. 수사 담당자는 디지털포렌식에 관여하지 못한다. 영장과 무관한 정보는 폐기한다." 권순일 대법관의 얘기입니다. "저도 제9연방항소법원 판결을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다만 2021년 현재 대법원에 계속 중인 사건이 있어 언급을 피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6장 디지털) - P129.130

이제 결론에 이른다. "원심은 준강간의 특별한 행위 양태인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하였다는 점에 대한 증거가 없다고 판단하였을 따름이다. 그리고 간음으로 인하여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과연 형법 제27조에서 말하는 ‘결과의 발생이 불가능‘한 경우, 즉 ‘범죄행위의 성질상 결과 발생 또는 법익 침해의 가능성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이 사건은 미수범의 영역에서 논의할 문제가 아니다." 구성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피고인의 행위는 처벌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강간죄 불능미수에 유죄를 선고한 원심이 잘못됐다고 밝힌다. "(유죄의견은) 피고인의 행위가 검사가 공소 제기한 범죄의 구성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그 결과의 발생이 불가능한 때에 해당한다는 것과 다름없고, 이 사건처럼 검사가 공소장에 기재한 적용법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범죄의 구성요건 요소가 되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한 때에도 불능미수범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해석론은 근대 형법의 기본원칙인 죄형법정주의를 전면적으로 형해화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원심 판결에는 형법 제27조의 불능미수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 (7장 준강간 불능미수) - P143

이제 불능미수와 준강간을 결합한다. "피고인이 피해자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에 있다고 인식하고 그러한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할 의사를 가지고 간음하였으나, 실행의 착수 당시부터 피해자가 실제로는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에 있지 않았다면, 실행의 수단 또는 대상의 착오로 준강간죄의 기수에 이를 가능성이 처음부터 없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피고인이 행위 당시에 인식한 사정을 놓고 일반인이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보았을 때 정신적·신체적 사정으로 인하여 성적인 자기방어를 할 수 없는 사람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여 준강간의 결과가 발생할 위험성이 있었다면 불능미수가 성립한다."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 위험성이 있었다며 불능미수가 성립된다고 했다. 그리고 결론이다. "피고인이 준강간의 고의로 피해자를 간음하였으나, 피해자가 실제로는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에 있지 않아 실행의 수단 또는 대상의 착오로 인하여 준강간의 결과 발생이 불가능한 경우에 해당하고, 피고인이 인식한 사정을 놓고 일반인이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보았을 때 결과 발생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위험성이 인정된다. 준강간죄의 불능미수를 유죄로 인정한 원심의 결론은 정당하다." (7장 준강간 불능미수) - P145

준강간 불능미수가 가능하다는 다수의견은, 준강간 객체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는 사람이 준강간 객체라면,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을 간음한 경우 객체 착오가 됩니다. 대상을 착오한 경우 불능미수입니다. ‘불능범(제27조) 실행의 수단 또는 대상의 착오로 인하여 결과의 발생이 불가능하더라도 위험성이 있는 때에는 처벌한다.‘ 이와 달리 반대의견은 ‘사람‘이라고 봅니다. 구성요건의 객체에 관한 형법 교과서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살인죄에서 사람, 절도죄에서 재물 등과 같이 행위의 객체는 개별 범죄에 규정되어 있다.‘ 권순일 대법관 인터뷰. "형법 제32장에서 객체가 사람인 조항이 강간(제297조), 강제추행(제298조), 준강간(제299조)입니다. (다음) - P149.150

(이어서) 미성년자 또는 심신미약자로 정한 조항이 미성년자 등에 대한 간음(제302조), 13세 미만의 사람으로 정한 조항이 미성년자에 대한 간음 추행(제305조)입니다. 보충의견은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야 하므로 행위의 객체는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런 논리를 따르면 강간죄나 강제추행죄의 객체는 사람이 아니라 폭행 또는 협박을 당한 사람이라는 것이 되는데, 상식적이지도 않고 형벌조항의 문언에도 반합니다." (7장 준강간 불능미수) - P150

권순일 대법관은 이른바 성인지 감수성 판결(대법원 2018.4.12. 선고 2017두74702 판결)과 성적 자기결정권 판결(대법원 2019.6.13. 선고 2019도3341 판결)을 소부에서 주심이 되어 내렸습니다. 각각 성희롱 징계가 지나치다며 취소한 원심을 파기하고, 성매매 여성 추행을 무죄로 본 원심을 파기한 판결입니다. 앞 판결에서는 처음으로 성인지 감수성을 재판 기준으로 제시했습니다.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적인 문화와 인식, 구조 등으로 인하여 피해자가 성희롱 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부정적 반응이나 여론, 불이익한 처우 또는 그로 인한 정신적 피해 등에 노출되는 이른바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여야 한다."(다음) - P151.152

(이어서) 뒤 판결에서는 피해자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라고 했습니다. "피해자가 성매매 및 필로폰 투약에 동의하였다는 사정만을 근거로 피고인이 공소사실 기재 행위를 하였음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단정하였다면 이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심신미약의 상태에 있는 피해자가 원치 않는 성적 접촉 또는 성적 행위에 대하여 거부의사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하여 동의를 한 것으로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됨은 물론이다." 이러한 판결들을 내린 대법관이 준강간 불능미수는 왜 반대하는지 물었습니다. "성인지 감수성 판결은 기본적으로 증거법의 문제입니다. 증거력을 판단할 때에 증인과 같거나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평균인‘으로 보아 증거의 신빙성 유무를 판단하여야 하고, 남성과 여성을 가르는 성(gender)의 차이도 신중하게 감안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 - P152

(이어서) 성적 자기결정권 사건에서는 미성년자와 성매매 합의를 하였다 하여 어떤 짓을 해도 좋다는 의미로 해석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성매매 합의라는 사실만으로 모든 것이 증명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미성년자라는 사실, 나아가 피해자의 연령, 성행, 지능과 환경 등 여러 사항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7장 준강간 불능미수) - P152

불능범을 규정한 형법 제27조는 법원이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다고 합니다. 불능범 처벌 여부를 국회가 아닌 법원에 맡긴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불능범 형사처벌은 독일, 프랑스 등에서 오랫동안 논의해 온 문제이고 이론도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그러한 일은 발생하지 않겠지만 사회적 위험성이 있어 미수범으로 처벌한다는 것이지요. 위험의 의미를 두고 학설과 판례에 혼란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혹한 결과가 발생하지 않도록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의회가 불능범 조항을 형법에 규정한 이상 법원은 운영할 책무가 있습니다.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특히 충실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7장 준강간 불능미수) - P154

김재형 대법관은 (2020년 9월의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사건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노조법이 정한 설립신고서 반려사유인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하는 경우‘를 축소해서 해석합니다. 해직자는 예외라고 합니다. "‘원래 조합원이었던 근로자가 해직되더라도 조합원 자격을 유지하도록 하는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목적론적 축소가 헌법 규정과 법의 원리에 부합(한다)." (다음) - P168.169

(이어서) 이에 대한 권순일 대법관 인터뷰입니다. "형사소송이나 민사소송이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법원이 법령의 의미를 명확히 해서 사실관계에 적용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행정소송은 법치행정 확보가 목적입니다. 정부가 법에 기속되는 것이 법치행정이고, 행정청의 위법한 처분을 바로잡는 것이 행정소송입니다. 김재형 대법관 의견은 헌법 규정에 비추어 보니 법률 규정에 따른 행정청의 법집행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헌법을 고려해 법문을 넘어서거나 심지어 법문에 반하는 해석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런 판단은 헌법재판소에 위헌심사를 제청해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8장 법외노조) - P169

권순일 대법관이 참여한 다수의견은 어떤 내용일까요. 법외노조 통보 제도가 시행령에 정해져 있는데, 이 시행령이 법률에 근거를 두지 않아 위헌이고 무효라는 것입니다. 법률에 정해진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한다‘는 노동조합 개념을 정의하는 조항에 불과하며, 시행령에 있는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함을 통보하여야 한다‘가 법외노조가 되는 이유라고 합니다. "법률 규정의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한다‘는 규정은 그 자체로 법률효과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법에 의한 노동조합인지에 관한 판단 기준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법률 규정에 의하여 곧바로 법외노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이유로 한 법외노조 통보가 있을 때 비로소 법외노조가 된다." (다음) - P170

(이어서) 그래서 결론은 이렇습니다. "법외노조 통보는 적법하게 설립된 노동조합의 법적 지위를 박탈하는 중대한 침익적 처분으로서 원칙적으로 국민의 대표자인 입법자가 스스로 형식적 법률로써 규정하여야 할 사항이(다). 이 사건 시행령 조항은 법률의 위임 없이 법률이 정하지 아니한 법외노조 통보에 관하여 규정함으로써 헌법상 노동3권을 본질적으로 제한하고 있으므로 그 자체로 무효이다." (8장 법외노조) - P170.171

권순일 대법관이 가담한 다수의견은 법률에 따라 법외노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시행령에 따라 통보하면서 비로소 법외노조가 된다고 봅니다. 법외노조를 만드는 이렇게 중대한 문제가 법률에 근거하지 않아 위헌이라는 겁니다. 이와 달리 반대의견 등은, 법률 규정에 의해 법외노조가 되고 시행령에 의해 이를 알려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한 권순일 대법관 얘기입니다. "법외노조 통보가 법률 규정에 따른 효과를 알려 주는 것이라거나(김재형 대법관 별개의견), 이미 법에 의해 발생한 법적 효과와 행정관청이 같은 입장이라고 알려주는 조치(반대의견)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절차는 관념을 통보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행정소송 대상인 처분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소송도 성립하지 않아 소를 각하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별개의견은 법외노조 통보의 적법 여부를 논하고, 반대의견은 법외노조 통보가 적법하다고 합니다. 논리가 일관되지 않습니다." (8장 법외노조) - P172

역사적 맥락을 보자는 뜻인데 이 사건에서는 과거 노동조합 해산명령 제도를 가리킵니다. 이 문제에 관한 다수의견은 이렇습니다. "구 노동조합법은 노동조합 해산명령 제도를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적법하게 설립되어 활동 중인 노동조합을 행정관청이 임의로 해산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근로자의 단결권과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침해한다는 이유에서 1987. 11. 28. 폐지되었다. 그런데 불과 약 5개월 만인 1988. 4. 15. 구 노동조합법 시행령 제8조 제2항으로 법외노조 통보 제도가 새로이 도입되었고, 이 제도가 바로 이 사건 시행령 조항을 통하여 현재까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사실상 노동조합 해산명령 제도와 그 주체, 대상, 절차 및 효과 등이 모두 동일하다. (다음) - P173

(이어서) 즉 법외노조 통보 제도는 본래 법률에 규정되어 있던 것으로서 국민의 대표자인 입법자의 결단에 따라 폐지된 노동조합 해산명령 제도를 행정부가 법률상 근거 내지 위임 없이 행정입법으로 부활시킨 것이다. 이 사건 시행령 조항의 위헌성을 판단함에 있어서는 위와 같은 제도의 연혁을 마땅히 고려하여야 한다." (8장 법외노조) - P173

권순일 대법관이 설명하는 이유는, 불법행위라는 일반적인 의무를 채무불이행이라는 특별한 의무로 둔갑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법공동체 구성원의 일반적인 의무를 당사자 간의 특별한 약정 없이 계약상 의무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채무불이행 책임과 불법행위 책임을 엄격히 구별하고 있는 우리 민법의 체계에 부합하지 않는다. 통상의 임대차관계에서 임대인이 임차인의 안전을 배려하여 주거나 도난을 방지하는 등의 보호 의무까지 부담한다고 볼 수 없다고 한 대법원 판결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 - P183

(이어서) 이와 함께 채무불이행 간주는 의회의 입법을 무력화한다고 했다. 실화책임법은 민법 제765조를 끌어와 법원이 손해배상액을 줄이도록 정하고 있는데, 이는 채무불이행이 아니라 불법행위라는 의미라고 했다. "실화책임법은 실화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실화자에게 중대한 과실이 없는 경우 민법 제765조의 특례로서 손해배상 의무자에게 실화로 인한 손해배상액 경감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다수의견처럼 임대인이 실화자를 상대로 채무불이행 책임을 구할 경우 실화책임법의 입법 취지를 몰각하게 될 우려가 있다." (9장 세입자와 화재 책임) - P183

법경제학이 재판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물었습니다. "영미 보통법의 법관법 즉 판례는 오랜 기간 많은 법적 경험이 축적한 결과입니다. 법경제학으로 분석해 보면 경제이념에도 들어맞는다고 합니다. 법경제학은 대립하는 이해관계를 파악하고 조율 방법을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렇다고 법률해석 즉 법리가 아닌 사회과학적 분석으로 결론에 이르자는 것은 아닙니다. 법경제학적 분석만을 근거로 판결을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어떠한 법률해석이 사회 현실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 예측하고 논리를 세우는 데 도움을 줍니다." (9장 세입자와 화재 책임)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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