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배려하지 않은 논리는 시민에게 외면당했고, 논리로 무장하지 못한 결론은 금세 뒤집혔다. (프롤로그) - P6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이 아들과 생물학적 혈연관계가 없음을 알면서도 친자관계를 유지하여 왔다. 아들은 원고와 혈연관계가 없다는 사정을 알고도 원고와 친자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까지 자신의 생부가 누구인지 알고 있지 않다. 여전히 원고를 자신의 아버지로 생각하며 원고가 자신의 아버지로 남아 주기를 바라면서 이 사건 청구를 다투고 있다." 가족의 기준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1장 인공수정) - P20
이 판결(2019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친생부인 소송에 대한 전원합의체 판결)에는 별개의견을 견제하는 다수의견 보충의견이 있다. "법률 제정 당시 입법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안이라는 이유만으로 기존 법률의 적용 또는 유추적용 여부를 세심하게 검토하지 않은 채 법 형성이 필요한 사안으로 단정하고 새로운 법리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에 맞서는 내용이 권순일 대법관이 참여한 별개의견에 있다. "법원으로서는 문제가 된 사태의 해결을 위하여 이에 관련되는 헌법 규정 및 다른 법령과의 관계, 법이 추구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가치와 사회 일반의 보편적인 법의식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가장 적합한 분쟁 해결 기준, 즉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법‘을 형성하는 과정을 거쳐 사법권을 행사하여야 한다." (1장 인공수정) - P23
권순일 대법관 이야기입니다. "가족법 분야는 사회의 기본인 가족관계를 규율합니다. 관습, 전통, 법감정을 토대로 하는 가장 보수적인 분야입니다. 따라서 가족법 해석도 문언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민법 가운데 가장 자주 개정된 분야가 가족법입니다. 헌법재판소와 법원도 적극적으로 기존 관습을 바꾸어 왔습니다. 사회·경제적 변화와 양성평등 이념 강화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의 급변과 고민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가족법이 실은 법률도 해석도 자주 바뀌었다고 합니다. (1장 인공수정) - P25.26
권순일 대법관 인터뷰. "보통은 대법관 네 명이 심리하는 소부에서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했거나, 소부에서 의견이 일치됐더라도 다른 대법관들이 이견이 있으면 전원합의체에 회부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상고를 접수해 검토한 재판연구관실에서 중요성, 사회·경제적 파장, 법리 연구 필요성 등을 감안해 전원합의체에서 심리하자고 했습니다. 특히 인공수정과 친자관계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제기되는 문제였습니다. 민법 제정 당시에는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상황이었습니다. 국회가 법률을 손보지 않는 상황에서 대법원이 공론장을 마련해 법률 개정을 촉구하고, 다른 한편 여러 분야 전문가가 의견을 밝히고 법리 논쟁을 벌이도록 해 해결 방안을 모색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다수의견도 별개의견도 상고기각이라는 결론은 같았기에, 공개 변론에서 대법관들이 자신들의 결론을 국민에게 설득하려는 목적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셈입니다. 대법관들이 질문하는 이유에는 자기 입장을 시민에게 설득하려는 것도 있습니다. (1장 인공수정) - P26
이러한 (변호사의 형사사건) 성공보수 계약은 일본과 한국에만 있다.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 유럽연합(EU) 등에서는 성공보수 계약을 하지 않거나, 못하게 했다. 독일은 연방변호사법에서 성공보수 약정을 금지한다. 성공보수는 의회가 법률로 제한하기 전에도 금지였다. 19세기 말 명예법원, 20세기 초 제국대법원이 무효라고 했다. 변호사라는 직업과 지위에서 있을 수 없는 계약이라는 이유다. 2006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성공보수 금지조항을 위헌이라고 했지만, 이때도 예외 없이 모두 막은 부분이 문제였다. 성공보수 금지 자체는 합헌이었다. 지금은 당사자가 형편이 어려워 성공보수 약정을 해야만 권리를 지킬 수 있는 경우에 예외적으로 가능하다. 미국에서는 민사사건에서만 성공보수 약정이 가능하다. 형사사건, 가사사건, 입법로비부분에서 성공보수가 금지돼 있다. 미국변호사협회(American BarAssociation. ABA) 윤리장전은 형사사건과 가사사건 성공보수를 전면 금지하고 있다. 이러한 금지를 연방법원과 주법원 판례도 받아들여 형사사건 등에서 성공보수 약정은 무효라고 본다. 가사사건에 성공보수 약정이 금지되는 이유는 이혼이나 별거를 부당하게 조장하고, 당사자 사이의 화해를 방해하거나 배우자와 자녀의 생활에 쓰여야 할 자금이 변호사에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2장 변호사들) - P36.37
권순일 대법관이 집필한 판결은 이렇다. "변호사가 위임사무의 처리에 대한 대가로 받는 보수는 수임인인 변호사와 위임인인 의뢰인 사이의 자유로운 합의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형사소송은 국가형벌권을 실현하는 절차로서 당사자의 생명, 신체의 자유, 명예 등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변호사 직무의 공공성과 윤리성이 다른 사건에서보다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따라서 형사사건에 관한 변호사의 보수는 단순히 사적 자치의 원칙에 입각한 변호사와 의뢰인 사이의 대가 수수관계로 맡겨 둘 수만은 없다. 형사사건에 관한 변호사의 보수 중에서도 의뢰인이 위임사무의 처리 결과에 따라 또는 사건 해결의 성공 정도에 따라 변호사에게 특별한 보수를 지급하기로 약속하는 이른바 ‘성공보수 약정‘은 여러가지 부작용과 문제점을 안고 있고, 형사 절차나 법조 직역 전반에 대한 신뢰성이나 공정성의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 법적 효력에 관하여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계약은 자유이지만, 국가가 관여하는 경우가 있다. 흔하게는 노동계약에 국가가 법률로 개입하고, 극단적으로 장기매매 계약은 국가가 금지한다. (2장 변호사들) - P40.41
성공보수 무효 판결은 대법원에서 나왔습니다. 고등법원까지는 무효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건 당사자들에게는 대법원 판결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성공보수 6000만 원을 받을 수 있다는 고등법원 판결이 유지됐습니다. 성공보수 무효 효력 시점을 이 판결 선고 이후로 잡았기 때문입니다. 개인분쟁을 다루는 대법원이 사회문제만 해결한 셈이 됐습니다. 이 때문에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법원이 맞춤한 사건을 고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주심 권순일 대법관이 결론을 내놓고 사건을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 물었습니다. "이 사건을 만난 것은 대법원 연구관의 상고사건 신건(新件) 검토 보고서를 받았을 때입니다. 대법관들은 신건 사건을 빠짐없이 검토합니다.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나니 먼저 도덕적 분노가 가슴에 올라왔습니다. 피의자 가족이 형사 성공보수 1억 원을 마련하려고 아파트를 처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궁박한 피의자 가족의 처지, 허위정보가 떠도는 법률시장을 생각하기에 앞서 ‘세상에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연구관 검토 의견은 사건에 특별한 법률적 쟁점이 없으므로 이대로 종료하자는 심리불속행 기각이었습니다. 그렇게 끝낼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고뇌는 판결이 선고될 때까지, 제 자신 나중에 알게 되지만 판결 선고 이후에도 계속됐습니다." (2장 변호사들) - P44.45
이(2015년 7월 한국 대법원의 형사 성공보수 무효 판결이 무효 효력 시점을 이 판결 선고 이후로 결정한 장래효 판결이며 따라서 사법적극주의의 발현이라는 비판)에 대한 권순일 대법관 설명입니다. "장래적 판례 변경을 대법원이 선택한 전례가 있습니다. 2005년 여성을 종중원으로 인정한 전원합의체 판결이 대표적입니다. 다만 장래효를 택하면서도 당해 사건에만 예외적으로 소급 적용했습니다. 이 사건은 항소심에서 형사 성공보수는 6000만 원 범위 내에서 유효하다고 판단한 것인데, 변호사가 무효로 판단된 4000만 원 부분도 받겠다고 상고한 사건입니다. 변호사의 상고이유 부분만 상고심 판단 대상이었기 때문에 당해 사건에 대한 예외적 소급효 적용 법리까지 나갈 필요는 없었습니다. 2005년 여성 종중원 사건과 장래 무효 이론 적용이 다르다고 법원을 비판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대법원 판례를 변경하면서도 신중하게 접근한 것이므로 사법자제 원칙에 충실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2장 변호사들) - P48
사법과 입법의 차이에 관해 다시 물었습니다. "법관에게는 법을 해석할 권한만 있지, 만드는 권한은 없다고들 합니다. 대법원은 법해석을 담당하는 사법기관이지만 법해석이란 법정책을 선택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법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법을 제정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법의 기능과 사명을 생각하면 사법적극주의에 서야 할 때도, 사법자제 원칙에 충실해야 할 때도 있겠지요.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 같은 학자는 실정법 해석에 공정성, 정의, 적법 절차 등과 같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가치체계와 정합성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결국 규범이 의회에서 확정되는 것인지, 아니면 법원에서 확정되는지는 법철학적으로 매우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3장 불법체류) - P72
이(2020년 7월 한국 대법원의 선거와 허위사실 공표에 관한 전원합의체 판결의 다수의견)에 대해 유죄의견은, 무죄의견이 공직선거법에 정해진 ‘공표‘의 의미를 축소해 면죄부를 줬다고 비난한다. 허위인 사실은 어찌할 수가 없으니, 나머지 구성요건인 공표에 해당하지 않는 편법을 썼다는 것이다. "‘공표‘의 범위를 제한하는 해석은 자칫 선거의 공정과 정치적 표현의 자유 사이의 균형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 이 사건 조항에서 정한 ‘공표‘는 반드시 허위사실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경우에 한정될 것은 아니고,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표현에 의하더라도 그 표현된 내용 전체의 취지에 비추어 그와 같은 허위사실의 존재를 암시하고, 이로써 후보자의 평가에 유리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을 정도의 구체성이 있으면 충분하다. ‘공표‘의 사전적 의미는 ‘여러 사람에게 널리 드러내어 알리는 것‘이고, 이 사건 조항의 문언 해석상 달리 적극적·일방적으로 허위사실을 표명할 것을 요구하지 않음이 명백하다. 다수의견은 입법적 방법이 아닌 해석을 통하여 문언의 가능한 의미를 벗어나 새로운 구성요건을 창조하자는 것으로 이는 극히 신중해야 한다." 이 사건 결론은 무죄이고, 권순일 대법관은 무죄의견에 참여했다. (4장 선거) - P83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2022년 3월 치러질 대통령 선거에 나갈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항소심대로 유죄가 확정되면 피선거권이 사라져 입후보할 수 없었습니다. 대통령선거가 20개월 정도 남은 2020년 7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판결의 결과에만 대중의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그렇지만 이 판결은 선거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중요한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결론도 첨예하게 갈렸습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에는 대법관 열두 명과 대법원장까지 열세 명이 참여합니다. 이 사건에서는 김선수 대법관이 스스로 빠졌습니다. 변호사 시절 이재명 지사 사건을 대리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무죄의견 일곱 명, 유죄의견 다섯 명인데, 대부분 사건에서 대법원장은 다수의견에 섭니다. 이런 대법원장을 제외하면 파기환송 여섯 명, 상고기각 다섯 명입니다. 공정한 선거는 어떻게 달성되는지에 관해 사법부가 어렵게 내린 결론입니다. 앞으로 선거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궁금합니다. (4장 선거) - P84.85
결국 다수의견과 반대의견이 부닥치는 지점은 ‘공표‘입니다. 토론회 발언을 두고 다수의견은 공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반대의견은 공표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물었습니다. "공직선거법 제250조는 형벌조항입니다.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따라 엄격하게 해석해야 합니다. 공표의 사전적 의미에 관해서는 다수의견과 반대의견이 다르지 않습니다. 의견이 갈리는 지점은 토론회 질의에 대한 ‘예, 아니오‘로 하는 답변이 공표에 해당하는지 여부입니다. 제250조는 ‘당선되거나 되게 할 목적으로 … 허위의 사실을 공표‘라고 구성요건을 정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당선되거나 되게 … 하기 위한 행위‘가 선거운동(제58조 제1항)인데, 선거운동 방법이 공직선거법에 정해져 있습니다. 선거벽보(제64조), 선거공보(제65조), 신문광고(제69조), 방송광고(제70조), 방송연설(제71조), 연설·대담(제79조) 등입니다. 그리고 토론은 따로 정의 규정이 있습니다(제81조 제2항). 이러한 공직선거법의 체계, 내용, 취지 등에 비추어 공표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공표란 적극적 일방적으로 알리는 때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다수의견 입장입니다. 다수의견이 문언의 의미를 벗어났다거나 새로운 구성요건을 창조하였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다수의견은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엄격해석 원칙을 지킨 것입니다." (4장 선거) - P88.89
공직선거법 제250조 허위사실공표죄를 새로운 미디어 현실에서 생각해 봅니다. 지금은 토론회를 유튜브 등을 통해 나중에 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토론회 발언은 실시간으로 또 직후에 수많은 사람이 검증합니다. 간단한 사실은 하루이틀이 못 되어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드러납니다. 물론 복잡한 사안은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이 판단합니다. 하지만 수사기관이 진실을 제대로 밝히지 않거나 뒤튼다고 의심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느 전직 대통령이 선거운동에서 공표한 허위사실은 당선해 5년 임기를 마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대법원에서 가려지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한 권순일 대법관 얘기입니다. "판결에 써 있는 대로 말하고 싶습니다. ‘선거를 전후하여 후보자 토론회에서 한 발언을 문제 삼아 고소·고발이 이어지고, 이로 인하여 수사권의 개입이 초래된다면 필연적으로 수사권 행사의 중립성에 대한 논란을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선거 결과가 최종적으로 검찰과 법원의 사법적 판단에 좌우될 위험에 처해짐으로써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로 대표자를 선출한다는 민주주의 이념이 훼손될 우려도 있다.‘ 민주공화국에서 검찰과 법원의 사법적 판단보다는 유권자인 국민 전체의 선택을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4장 선거) - P90.91
그리고 유책주의란 무엇인지 재확인한다. "제6호 이혼사유의 의미에 관하여 대법원 판례는 혼인의 본질에 상응하는 부부공동생활관계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탄되고, 혼인생활의 계속을 강제하는 것이 일방 배우자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는 경우를 말한다고 해석하여 왔다. 종래의 대법원 판례를 변경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은 그 주장이 들고 있는 여러 논거를 감안하더라도 아직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당사자가 가혹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특별한 사정이 있다면 예외를 인정할 수 있다고 한다. "대법원 판례에서 이미 허용하고 있는 것처럼 상대방 배우자도 혼인을 계속할 의사가 없어 일방의 의사에 의한 이혼 내지 축출이혼의 염려가 없는 경우는 물론, 나아가 이혼을 청구하는 배우자의 유책성을 상쇄할 정도로 상대방 배우자 및 자녀에 대한 보호와 배려가 이루어진 경우, 세월의 경과에 따라 혼인 파탄 당시 현저하였던 유책배우자의 유책성과 상대방 배우자가 받은 정신적 고통이 점차 약화되어 쌍방의 책임의 경중을 엄밀히 따지는 것이 더 이상 무의미할 정도가 된 경우 등과 같이 혼인생활의 파탄에 대한 유책성이 그 이혼 청구를 배척해야 할 정도로 남아 있지 아니한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허용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사건(2015년 9월 한국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이혼 청구는 기각됐다. (5장 이혼) - P102.103
최고 법률이론가로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 꼽힙니다. 대법관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대법원 재판연구관실 책임자입니다. 오히려 대법관은 정치적인 선발 과정을 거칩니다. 국회의 동의를 받아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출신, 학교, 성별, 경력 등을 고려합니다. 이 사건 주심인 김용덕 대법관과 그리고 권순일 대법관도 수석재판연구관 출신입니다. 김용덕 대법관은 유책주의를 파탄주의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 왔고, 신중하게 골라낸 사례가 이 사건입니다. 대법관 열두 명과 대법원장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 사건에서 대법원장은 다수의견에 서는 게 관례입니다. 결과적으로 대법원장이 결론을 주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대법관 여섯 명 대 여섯 명으로 갈리는 사건은 대법원장이 캐스팅 보트를 쥡니다. 이 사건에 대법원장이 유책주의에 서면서 결론이 정해졌습니다. 이에 대한 권순일 대법관 설명입니다. "대법원장은 원래 파탄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국민의 일상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정책을 변경할 때에는 다수의견이 압도적이 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종래 견해를 유지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논쟁이 치열한 사건에서 아슬아슬하게 관례를 변경하면 되레 논란을 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5장 이혼) - P104.105
‘배우자 있는 자는 다시 혼인하지 못한다‘는 중혼 금지 규정이 민법 제810조에 있습니다. 금지되는 혼인은 법률혼만을 가리킵니다. 법률혼을 한 사람이 다른 이와 사실혼관계를 맺는 경우 중혼이 아닙니다. (5장 이혼) - P108
다시 권순일 대법관 얘기입니다. "중혼은 일부일처제에 반하는 것인데 우리나라에는 중혼에 대한 형사적 제재가 없습니다.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허용하지 않는 이유에는 사실상 중혼인 사람이 기존 법률상 배우자를 축출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과거와 비교하면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고 지위도 높아졌습니다. 양성평등이 진전됐지요. 하지만 젊은 시절에 결혼해서 아이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고 시부모 봉양만 해 온 사람을 자기가 성공했다고 해서 축출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렇게 평생 살아온 여성으로서는 사실상 모든 걸 잃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혼인생활에서 생기는 신분(身分)이 굉장히 중요하더라고요. 자신의 존재 이유에 관한 것입니다. 남편과 성적 관계를 유지하고 그러는 차원을 넘어 집안의 며느리고 종부라는 것인데, 그런 사람을 쫓아내면 안 되지요." (5장 이혼) - P108
그런데 혼인을 계약으로 인정할 것인지를 두고 미국에서 논쟁이 있었습니다. 혼인에 따른 권리와 의무는 국가가 법률로 규정하는 것이지 당사자가 정하지 않는다는 이유입니다. 혼인은 계약(contract)이라기보다 신분(status)이라는 것입니다. 최근 들어서는 혼인을 계약으로 보면 혼인 당사자, 특히 여성 보호에 문제가 생기고 자녀에게 불리한 결과가 생길 수 있다는 점도 강조한다고 합니다. (5장 이혼) - P109
앞서 권순일 대법관 설명은 이 논의(혼인이 계약이라기보다 신분이라는 논의)를 강조한 것입니다. 얘기를 더 들어 보겠습니다.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고 헌법 제36조 제1항에 나옵니다. 국가가 보장한다는 겁니다. 법률로 보장한다는 겁니다. 대상은 혼인과 가족생활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바람이 나서 나가서 살아도 가족공동체는 유지되는 경우가 있지요. 부인이 애들 보살피고 시부모까지 모시고 있고요. 이런 경우 가족생활이 파탄 상태인가요. 오히려 국가가 보호해 줘야 하는 것은 아닌가요." (5장 이혼) - P109
구체적인 쟁점인 민법 제840조 제6호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를 제1호~제5호와 같은 유책주의 맥락으로 봐야 한다고 권순일 대법관은 설명합니다. "제6호는 제1호~제4호에 없는 경우를 포괄적으로 정한 것이지요(제5호는 ‘배우자의 생사가 3년 이상 분명하지 아니한 때‘). 법원이 구체적인 사안에서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결론을 내리도록 폭넓게 정해 둔 것이지, 유책주의를 배제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의 문제가 단순하고 명쾌하지는 않으니까 이렇게 정해 둔 것입니다. 혼인생활이 강제되면 개인 존엄과 양성평등에 위배되는 경우에 법원이 재량을 가지고 이혼 판결을 해 주라는 것이지요. 가사재판이 다른 민사재판과 똑같은 게 아니잖아요. 법원이 고도의 후견적인 측면에서 제6호를 인정하라는 취지에서 이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만일 제6호가 파탄주의 규정이라면 제1호~제4호에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유책주의 사유를 규정할 필요가 있을까요." (5장 이혼) - P110
혼인과 가족생활 문제를 법원이 후견적으로 판단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민사소송에서 당사자가 변론하지 않으면 패소합니다. 이러한 변론주의가 원칙적으로 가사소송에도 적용됩니다. 그렇지만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르지요. 상대방이 이혼재판에 나오지 않았는데 판사가 이혼 판결을 해 주지 않습니다. 법원이 재판을 좌우하는 직권주의 요소가 가사소송에 있어요. 이기고 지는 문제 이상의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사소송법의 목적을 정한 제1조를 보면 이렇습니다. ‘이 법은 인격의 존엄과 남녀평등을 기본으로 하고 가정의 평화 및 친족 간에 서로 돕는 미풍양속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가사에 관한 소송과 비송 및 조정에 대한 절차의 특례를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도덕률 성격이 강합니다. 가정이 행복해야 좋은 나라가 된다는 생각이 있지요. 그리고 제1조 뒷부분에 나오듯이 가사재판에 비송과 조정도 있습니다. 나이가 많은 부모의 후견인을 누가 해라, 아이의 친권은 누가 가져라 하면서 가정생활을 만들어 냅니다. 권리와 의무를 정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거죠. 그래서 가사재판에서 법원이 후견적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5장 이혼) - P110.111
유책주의에서 파탄주의로 판례를 변경할지는 오래된 논쟁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적잖은 대법관들이 전원합의체 심리 과정에서 입장을 바꿨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유책주의를 유지하자는 대법관이 네 명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 공개변론에서 파탄주의를 지지하는 의견서를 제출한 친족법 전문가, 사회학자들이 축출이혼이나 중혼적 사실혼 등으로 발생할 상대 배우자 보호가 미흡하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였습니다. 이후 합의 과정에서 유책주의가 다수의견이 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입니다. (후략)" (5장 이혼) - P111.112
대법관들 의견이 갈린 곳은 강력부 검사의 압수·수색을 어떻게 취소할지였다. 강력부 검사는 영장을 한 번 받아 세 번 추가 압수·수색을 했다. 제약회사 저장장치를 가져 나온 다음, 이를 대검찰청 D-NET(원격디지털공조시스템)에 복제(제1처분)하고, 다시 검사 개인 저장장치에 복제(제2처분)해, 여기에서 영장 혐의인 배임과 무관한 정보를 출력(제3처분)했다. 이러한 압수·수색 취소에서 기준을 영장으로 할지, 처분으로 할지로 의견이 갈렸다. 영장이 기준이면 판단 대상은 하나이고, 처분이 기준이면 판단 대상은 셋이다. (6장 디지털) - P117.118
앞 처분이 위법이면 뒤 처분은 당연히 위법이다. 위법이 합법을 낳지는 못한다. 뒤 처분이 위법일 때 앞 처분을 어찌할지가 문제인데, 영장 단위로 판단하는 의견은 앞 처분도 없애는 것이다. 처분별로 나눠서 판단하여야 한다는 의견은 앞 처분도 경우에 따라 유효할 수 있다는 것이다. (6장 디지털) - P118
이런 맥락에서 권순일 대법관에게 물었습니다. 다수의견은 영장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권순일 대법관은 처분마다 판단했습니다. "영장 발부가 위법하다며 취소를 요구한다면 영장에 대한 항고가 됩니다. 하지만 현행 형사소송법에는 영장항고 제도가 없습니다. 영장을 두고 반복해서 판단하는 것이 검사나 피의자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영장항고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대신 검사가 압수·수색해서 재판에 제출한 증거의 증거능력을 문제 삼습니다. 이 사건 쟁점도 검사의 처분인 압수·수색이지 판사의 판단인 영장 발부가 아닙니다. 원심 수원지방법원도 ‘각 압수 처분은 영장주의와 적법 절차 원칙에 위배되어 위법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법원 다수의견은 원심이 단계별로 취소한 것은 적절치 않다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처분이 모두 취소되어서 괜찮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재판 근거는 ‘검사의 압수에 관한 처분에 대하여 불복이 있으면 법원에 그 취소 또는 변경을 청구할 수 있다‘는 형사소송법 제417조입니다. 수사기관 처분에 대한 항고이지, 영장 재판에 대한 항고가 아닙니다. 사실 다수의견도 영장을 취소하라는 것이 아니라 영장에 따른 압수·수색을 전체적으로 취소하라는 것입니다. 언뜻 다수의견이 적법 절차를 중시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렇지 않습니다. 다수의견은 여러 처분 가운데 일부가 위법해도 전체적으로 중대하지 않으면 처분들이 모두 유효하다고 해석될 위험이 있습니다. 제가 별개의견에서 지적한 것은 올바른 법해석입니다. 결론이 정당하다고 논리적 근거 없이 이론을 만들다 보면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6장 디지털) - P127.128
대법원은 특수부 검사가 강력부 검사의 저장장치를 압수한 처분을 대법관 전원일치로 취소하면서도, 이러한 처분의 계기가 ‘우연한 발견‘이라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혐의사실과 관련된 전자정보를 적법하게 탐색하는 과정에서 별도의 범죄 혐의와 관련된 전자정보를 우연히 발견한 경우라면 법원에서 별도의 범죄 혐의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은 경우에 한하여 그러한 정보에 대하여도 적법하게 압수·수색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무제한 검색이 가능한 전자정보에서 우연한 발견은 없다고 판결한 바 있습니다. 2003년 메이저리그 야구단은 선수노조와 합의해 전체 선수의 약물 사용 여부를 검사했습니다. 양성이 5% 이상이면 이듬해부터 무작위 약물검사와 징계를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이 무렵 연방 수사당국은 금지약물 복용이 의심되는 선수 열 명의 검사 결과를 압수하는 영장을 받았습니다. 압수 과정에서 선수 전원의 검사 결과를 발견해 복제했습니다. 제9연방항소법원은 "최초 수사 대상 열 명에 대한 증거만 쓸 수 있다"고 판결하고, 전자정보 압수·수색 네 가지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우연한 발견은 더 이상 인정되지 않는다. 압수·수색 전에 증거분석 계획을 내라. 수사 담당자는 디지털포렌식에 관여하지 못한다. 영장과 무관한 정보는 폐기한다." 권순일 대법관의 얘기입니다. "저도 제9연방항소법원 판결을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다만 2021년 현재 대법원에 계속 중인 사건이 있어 언급을 피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6장 디지털) - P129.130
이제 결론에 이른다. "원심은 준강간의 특별한 행위 양태인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하였다는 점에 대한 증거가 없다고 판단하였을 따름이다. 그리고 간음으로 인하여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과연 형법 제27조에서 말하는 ‘결과의 발생이 불가능‘한 경우, 즉 ‘범죄행위의 성질상 결과 발생 또는 법익 침해의 가능성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이 사건은 미수범의 영역에서 논의할 문제가 아니다." 구성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피고인의 행위는 처벌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강간죄 불능미수에 유죄를 선고한 원심이 잘못됐다고 밝힌다. "(유죄의견은) 피고인의 행위가 검사가 공소 제기한 범죄의 구성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그 결과의 발생이 불가능한 때에 해당한다는 것과 다름없고, 이 사건처럼 검사가 공소장에 기재한 적용법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범죄의 구성요건 요소가 되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한 때에도 불능미수범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해석론은 근대 형법의 기본원칙인 죄형법정주의를 전면적으로 형해화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원심 판결에는 형법 제27조의 불능미수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 (7장 준강간 불능미수) - P143
이제 불능미수와 준강간을 결합한다. "피고인이 피해자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에 있다고 인식하고 그러한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할 의사를 가지고 간음하였으나, 실행의 착수 당시부터 피해자가 실제로는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에 있지 않았다면, 실행의 수단 또는 대상의 착오로 준강간죄의 기수에 이를 가능성이 처음부터 없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피고인이 행위 당시에 인식한 사정을 놓고 일반인이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보았을 때 정신적·신체적 사정으로 인하여 성적인 자기방어를 할 수 없는 사람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여 준강간의 결과가 발생할 위험성이 있었다면 불능미수가 성립한다."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 위험성이 있었다며 불능미수가 성립된다고 했다. 그리고 결론이다. "피고인이 준강간의 고의로 피해자를 간음하였으나, 피해자가 실제로는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에 있지 않아 실행의 수단 또는 대상의 착오로 인하여 준강간의 결과 발생이 불가능한 경우에 해당하고, 피고인이 인식한 사정을 놓고 일반인이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보았을 때 결과 발생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위험성이 인정된다. 준강간죄의 불능미수를 유죄로 인정한 원심의 결론은 정당하다." (7장 준강간 불능미수) - P145
준강간 불능미수가 가능하다는 다수의견은, 준강간 객체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는 사람이 준강간 객체라면,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을 간음한 경우 객체 착오가 됩니다. 대상을 착오한 경우 불능미수입니다. ‘불능범(제27조) 실행의 수단 또는 대상의 착오로 인하여 결과의 발생이 불가능하더라도 위험성이 있는 때에는 처벌한다.‘ 이와 달리 반대의견은 ‘사람‘이라고 봅니다. 구성요건의 객체에 관한 형법 교과서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살인죄에서 사람, 절도죄에서 재물 등과 같이 행위의 객체는 개별 범죄에 규정되어 있다.‘ 권순일 대법관 인터뷰. "형법 제32장에서 객체가 사람인 조항이 강간(제297조), 강제추행(제298조), 준강간(제299조)입니다. (다음) - P149.150
(이어서) 미성년자 또는 심신미약자로 정한 조항이 미성년자 등에 대한 간음(제302조), 13세 미만의 사람으로 정한 조항이 미성년자에 대한 간음 추행(제305조)입니다. 보충의견은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야 하므로 행위의 객체는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런 논리를 따르면 강간죄나 강제추행죄의 객체는 사람이 아니라 폭행 또는 협박을 당한 사람이라는 것이 되는데, 상식적이지도 않고 형벌조항의 문언에도 반합니다." (7장 준강간 불능미수) - P150
권순일 대법관은 이른바 성인지 감수성 판결(대법원 2018.4.12. 선고 2017두74702 판결)과 성적 자기결정권 판결(대법원 2019.6.13. 선고 2019도3341 판결)을 소부에서 주심이 되어 내렸습니다. 각각 성희롱 징계가 지나치다며 취소한 원심을 파기하고, 성매매 여성 추행을 무죄로 본 원심을 파기한 판결입니다. 앞 판결에서는 처음으로 성인지 감수성을 재판 기준으로 제시했습니다.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적인 문화와 인식, 구조 등으로 인하여 피해자가 성희롱 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부정적 반응이나 여론, 불이익한 처우 또는 그로 인한 정신적 피해 등에 노출되는 이른바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여야 한다."(다음) - P151.152
(이어서) 뒤 판결에서는 피해자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라고 했습니다. "피해자가 성매매 및 필로폰 투약에 동의하였다는 사정만을 근거로 피고인이 공소사실 기재 행위를 하였음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단정하였다면 이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심신미약의 상태에 있는 피해자가 원치 않는 성적 접촉 또는 성적 행위에 대하여 거부의사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하여 동의를 한 것으로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됨은 물론이다." 이러한 판결들을 내린 대법관이 준강간 불능미수는 왜 반대하는지 물었습니다. "성인지 감수성 판결은 기본적으로 증거법의 문제입니다. 증거력을 판단할 때에 증인과 같거나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평균인‘으로 보아 증거의 신빙성 유무를 판단하여야 하고, 남성과 여성을 가르는 성(gender)의 차이도 신중하게 감안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 - P152
(이어서) 성적 자기결정권 사건에서는 미성년자와 성매매 합의를 하였다 하여 어떤 짓을 해도 좋다는 의미로 해석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성매매 합의라는 사실만으로 모든 것이 증명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미성년자라는 사실, 나아가 피해자의 연령, 성행, 지능과 환경 등 여러 사항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7장 준강간 불능미수) - P152
불능범을 규정한 형법 제27조는 법원이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다고 합니다. 불능범 처벌 여부를 국회가 아닌 법원에 맡긴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불능범 형사처벌은 독일, 프랑스 등에서 오랫동안 논의해 온 문제이고 이론도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그러한 일은 발생하지 않겠지만 사회적 위험성이 있어 미수범으로 처벌한다는 것이지요. 위험의 의미를 두고 학설과 판례에 혼란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혹한 결과가 발생하지 않도록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의회가 불능범 조항을 형법에 규정한 이상 법원은 운영할 책무가 있습니다.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특히 충실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7장 준강간 불능미수) - P154
김재형 대법관은 (2020년 9월의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사건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노조법이 정한 설립신고서 반려사유인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하는 경우‘를 축소해서 해석합니다. 해직자는 예외라고 합니다. "‘원래 조합원이었던 근로자가 해직되더라도 조합원 자격을 유지하도록 하는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목적론적 축소가 헌법 규정과 법의 원리에 부합(한다)." (다음) - P168.169
(이어서) 이에 대한 권순일 대법관 인터뷰입니다. "형사소송이나 민사소송이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법원이 법령의 의미를 명확히 해서 사실관계에 적용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행정소송은 법치행정 확보가 목적입니다. 정부가 법에 기속되는 것이 법치행정이고, 행정청의 위법한 처분을 바로잡는 것이 행정소송입니다. 김재형 대법관 의견은 헌법 규정에 비추어 보니 법률 규정에 따른 행정청의 법집행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헌법을 고려해 법문을 넘어서거나 심지어 법문에 반하는 해석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런 판단은 헌법재판소에 위헌심사를 제청해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8장 법외노조) - P169
권순일 대법관이 참여한 다수의견은 어떤 내용일까요. 법외노조 통보 제도가 시행령에 정해져 있는데, 이 시행령이 법률에 근거를 두지 않아 위헌이고 무효라는 것입니다. 법률에 정해진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한다‘는 노동조합 개념을 정의하는 조항에 불과하며, 시행령에 있는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함을 통보하여야 한다‘가 법외노조가 되는 이유라고 합니다. "법률 규정의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한다‘는 규정은 그 자체로 법률효과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법에 의한 노동조합인지에 관한 판단 기준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법률 규정에 의하여 곧바로 법외노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이유로 한 법외노조 통보가 있을 때 비로소 법외노조가 된다." (다음) - P170
(이어서) 그래서 결론은 이렇습니다. "법외노조 통보는 적법하게 설립된 노동조합의 법적 지위를 박탈하는 중대한 침익적 처분으로서 원칙적으로 국민의 대표자인 입법자가 스스로 형식적 법률로써 규정하여야 할 사항이(다). 이 사건 시행령 조항은 법률의 위임 없이 법률이 정하지 아니한 법외노조 통보에 관하여 규정함으로써 헌법상 노동3권을 본질적으로 제한하고 있으므로 그 자체로 무효이다." (8장 법외노조) - P170.171
권순일 대법관이 가담한 다수의견은 법률에 따라 법외노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시행령에 따라 통보하면서 비로소 법외노조가 된다고 봅니다. 법외노조를 만드는 이렇게 중대한 문제가 법률에 근거하지 않아 위헌이라는 겁니다. 이와 달리 반대의견 등은, 법률 규정에 의해 법외노조가 되고 시행령에 의해 이를 알려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한 권순일 대법관 얘기입니다. "법외노조 통보가 법률 규정에 따른 효과를 알려 주는 것이라거나(김재형 대법관 별개의견), 이미 법에 의해 발생한 법적 효과와 행정관청이 같은 입장이라고 알려주는 조치(반대의견)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절차는 관념을 통보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행정소송 대상인 처분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소송도 성립하지 않아 소를 각하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별개의견은 법외노조 통보의 적법 여부를 논하고, 반대의견은 법외노조 통보가 적법하다고 합니다. 논리가 일관되지 않습니다." (8장 법외노조) - P172
역사적 맥락을 보자는 뜻인데 이 사건에서는 과거 노동조합 해산명령 제도를 가리킵니다. 이 문제에 관한 다수의견은 이렇습니다. "구 노동조합법은 노동조합 해산명령 제도를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적법하게 설립되어 활동 중인 노동조합을 행정관청이 임의로 해산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근로자의 단결권과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침해한다는 이유에서 1987. 11. 28. 폐지되었다. 그런데 불과 약 5개월 만인 1988. 4. 15. 구 노동조합법 시행령 제8조 제2항으로 법외노조 통보 제도가 새로이 도입되었고, 이 제도가 바로 이 사건 시행령 조항을 통하여 현재까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사실상 노동조합 해산명령 제도와 그 주체, 대상, 절차 및 효과 등이 모두 동일하다. (다음) - P173
(이어서) 즉 법외노조 통보 제도는 본래 법률에 규정되어 있던 것으로서 국민의 대표자인 입법자의 결단에 따라 폐지된 노동조합 해산명령 제도를 행정부가 법률상 근거 내지 위임 없이 행정입법으로 부활시킨 것이다. 이 사건 시행령 조항의 위헌성을 판단함에 있어서는 위와 같은 제도의 연혁을 마땅히 고려하여야 한다." (8장 법외노조) - P173
권순일 대법관이 설명하는 이유는, 불법행위라는 일반적인 의무를 채무불이행이라는 특별한 의무로 둔갑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법공동체 구성원의 일반적인 의무를 당사자 간의 특별한 약정 없이 계약상 의무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채무불이행 책임과 불법행위 책임을 엄격히 구별하고 있는 우리 민법의 체계에 부합하지 않는다. 통상의 임대차관계에서 임대인이 임차인의 안전을 배려하여 주거나 도난을 방지하는 등의 보호 의무까지 부담한다고 볼 수 없다고 한 대법원 판결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 - P183
(이어서) 이와 함께 채무불이행 간주는 의회의 입법을 무력화한다고 했다. 실화책임법은 민법 제765조를 끌어와 법원이 손해배상액을 줄이도록 정하고 있는데, 이는 채무불이행이 아니라 불법행위라는 의미라고 했다. "실화책임법은 실화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실화자에게 중대한 과실이 없는 경우 민법 제765조의 특례로서 손해배상 의무자에게 실화로 인한 손해배상액 경감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다수의견처럼 임대인이 실화자를 상대로 채무불이행 책임을 구할 경우 실화책임법의 입법 취지를 몰각하게 될 우려가 있다." (9장 세입자와 화재 책임) - P183
법경제학이 재판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물었습니다. "영미 보통법의 법관법 즉 판례는 오랜 기간 많은 법적 경험이 축적한 결과입니다. 법경제학으로 분석해 보면 경제이념에도 들어맞는다고 합니다. 법경제학은 대립하는 이해관계를 파악하고 조율 방법을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렇다고 법률해석 즉 법리가 아닌 사회과학적 분석으로 결론에 이르자는 것은 아닙니다. 법경제학적 분석만을 근거로 판결을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어떠한 법률해석이 사회 현실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 예측하고 논리를 세우는 데 도움을 줍니다." (9장 세입자와 화재 책임)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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