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전학파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행동경제학을 제대로 습득하기 위해서는 신고전학파의 표준이론standard theory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표준이론에 대한 이해 없이 행동경제학에 접근하려 하면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또 통상적인 학습에서보다 더 깊고 넓게 표준이론을 이해해야만 행동경제학을 제대로 습득할 수 있다. - P6

표준이론에서 효용은 소비의 결과이자 경제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기업이 시장에서 경쟁하면서 생산하여 얻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윤이지만, 이윤도 궁극적으로는 효용으로 전환된다. 경제의 종점이 소비이고 이로부터 얻은 것이 효용이므로 소비가 경제 전체를 이끌어간다. - P18.19

그러나 효용은 다양한 재화나 서비스가 소비자에게 주는 무차별적인 좋음이다. 표준이론은 비빔밥을 먹어서 좋은 것과 영화를 감상해서 좋은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무차별적일 뿐만 아니라 정체가 불명확하다는 점에서도 효용은 화폐와 유사하다. 표준이론에서 효용과 화폐는 모두 ‘흘러 다니는 그 무엇currency‘일 뿐이다.
차이가 있다면 화폐는 시장에서 흘러 다니는 데 비해 효용은 개인의 마음속에서 흘러 다닌다. 소비와 효용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표준이론은 일상적으로 재화와 자원의 거래에서 화폐가 필요하다는 점을 수시로 망각한다. 의식하는 경우에도 화폐를 근원적이고 지속적인 존재가 아니라 표피적이고 일시적인 존재로 간주한다. 이 때문에 화폐의 기능 중 지불수단(납세, 부채상환)이나 가치척도(정가표), 가치저장(퇴장, 축재)보다는 교환수단(소비재 획득)에 집중한다. - P19

재화나 생산요소의 대체가능성substitutability은 개인의 선택과 자원배분의 범위를 넓혀준다. 이 때문에 표준이론은 재화나 자원들 사이의 보완관계(와 비율)(커피와 우유)나 대체관계(와 비율)(커피와 홍차에 집착한다. 표준이론은 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을 설명하기 위해 개인의 미세한 조정과 적정화를 가능케 하는 한계대체율 등의 한계 개념을 필요로 한다. 개인들은 평균량이 아니라 여러 대안들의 마지막 한 단위로부터 얻는 효용이나 지출의 한계량을 균등화해 이익을 극대화하거나 비용을 극소화한다. 사람들이 합리적이려면 그렇게 해야 하고, 현실경제 속에서 실제로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고 표준이론은 믿고 있다. - P23.24

공간적으로뿐만 아니라 이보다 추상적이지만 시간적으로도 여러 시점들에 대해 일물일가에 준하는 현상을 상정할 수 있다. 현물現物과 선물先物이 개입되는 시장에서 사람들은 이자율이나 (그것의 역수인) 할인율을 고려하고도 차이가 있으면, 이익을 얻고 손실을 피하기 위해 시점 간의 거래를 수행한다. 결과적으로 이자율이나 할인율을 고려하면 동일한 재화의 현재가격과 미래가격도 동일해지는 경향이 있다. - P24

재화시장보다 주식시장에서 가격은 정보를 더욱 신속하게 반영한다. 내재적 가치에 비해 낮거나 높게 평가된 주식의 가격은 빠르게 상승하거나 하락한다. 따라서 주식시장에서는 누구도 ‘시장을 능가할beat the market 수 없다.‘ 이 경우에도 시장이 효율적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효율성efficiency은 유난히 정보의 반영이나 이용을 부각시킨다. - P26

표준이론이 생각하는 시장에서 사람들은 개인으로 존재하고 인식 혹은 인지하며, 행위하고, 선택한다. 개인이 행위와 분석의 단위라는 것은 개인의 자율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자율성은 개인이 스스로 선택하고 이에 대해 책임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려면 개인이 자신의 기호나 이익, 제약이나 능력, 선택대상과 선택상황, 시장의 조건 등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개인 선택의 전제이다.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 각자가 이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개인이 스스로 지니고 있는 선택의 능력과 정보를 활용해 실제로 가장 잘 선택한다. - P29

지배관계는 개인의 선호나 주관과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우열이다. 이 때문에 지배관계가 존재하면 선택의 고민이 사라진다. 지배관계는 ‘지배적 성격domination‘, ‘지배성dominance‘, ‘지배하다dominate‘, ‘지배적인dominant‘ 등으로 표현되어 게임이론과 재무이론에 등장한다. 사과 3개는 사과 2개를 지배하고, [사과 3개, 책 2권]은 [사과 3개, 책 1권]을 지배한다. 누구라도 후자가 아니라 전자를 선택한다. 재화와 재화를 구입할 수 있는 돈은 많을수록 더 낫고, 노동은 적을수록 더 낫다. 반면 [사과 3개, 책 2권]과 [사과 2개, 책 3권] 사이에는 지배관계를 설정할 수 없다.
지배관계가 성립하는 소비재 묶음들에 대해서는 누구도 무차별하다고 느끼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물론 상황이 불투명하거나 복잡하면 실제로 존재하는 지배관계가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명확히 지배적으로 우월한 대상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은 비정상이며, 비정상은 비합리성이다. 미성년자, 정신병자, 마약중독자, 금치산자가 아니더라도 계산이나 판단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수 있으므로 비합리성이 반드시 비정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정상은 반드시 비합리성이다. 결론적으로 경제학의 합리성은 지배관계의 수용을 전제한다. - P36

개인의 선호가 사람마다 다르다고 생각하므로, 경제학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선호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de gustibus non est disputandum 점을 다른 어떤 학문보다도 강하게 외친다. 이 점은 너무나 당연하여 별로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수시로 잊혀진다. 특히 한국의 경제학 교육에서는 이 점이 명확히 전달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 P40

사과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사과의 가격이 오르면 덜 수요하고 내리면 더 수요한다. 이것은 사과에 대한 사람들의 선호가 바뀌어 수요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경제학에서 선호와 기술은 일차적으로 변동하지 않는 여러 조건들ceteris paribus, other things being equal 안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가격변동에 따른 선택 혹은 수요의 변동을 선호의 변동으로 간주한다면 이는 완전한 오해이다. - P41

경제학은 선택의 자유를 금과옥조로 생각하는데, 이러한 독립성이 없다면 선택의 자유가 힘을 잃게 된다. 표준이론이 소비자주권consumer sovereignty을 내세우는 한 이 가정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 물론 독립성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다. 오랜 동안 돈이 없어 생선회를 먹어본 적이 없다면 생선회에 대한 선호나 감각을 가질 수 없다. 맛은 아는데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없어 맛을 모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심각한 소득의 제약을 겪고 있는 가난한 사람의 합리적인 선택은 원초적으로 무력해질 수 있다. - P46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서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베커G. Becker에 따르면, 개인은 자신의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인 이익과 손실을 따져 결혼이나 이혼을 결정하고 출산 여부와 출산의 횟수를 결정한다고 한다. 따라서 아기의 출산은 내구 소비재의 구입과 같은 선택이다. 아기는 반복적으로 재롱을 떨어 효용을 주고, 동시에 지속적인 양육의 수고를 필요로 한다. 이같이 오랜 기간에 걸쳐 비용과 편익을 낳는다는 점에서 아기는 냉장고와 같다. 그래서 ‘아기는 냉장고!‘라고 그는 선언했다. 다만 이런 선택에서 냉장고보다 복잡하게 아기의 ‘질‘과 ‘양‘을 고려해야 한다. - P53

가격이 정보를 처리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특정 물건이나 특정 주식으로 몰려 재화의 가격이나 주가가 상승할 때 그 물건이나 주식의 내재적인 가치가 높다는 정보를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형성된 가격은 내재적 가치를 반영한다. 이같이 가격변동의 독립성은 개인의 합리성뿐 아니라 시장의 효율적인 가격기구를 전제하고 있다. 또한 특정 재화의 가격변동이 여러 시점에서 독립적이면 여러 재화들의 가격변동들은 여달러 시점에서 당연히 독립적일 것이다. 결국 가격변동들의 독립성은 특정 재화의 가격변동이 여러 시점에서 독립적이라는 의미와 여러 재화의 가격변동들이 여러 시점에서 독립적이라는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다. - P58

표준이론은 여러 대상에 대한 여러 종류의 선택을 포괄하는 일반이론임을 자부한다. 이를 위해 선택대상을 기능적으로 파악하기보다 그저 효용을 낳는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흔히 표준이론과 이에 친화적인 선택이론은 대상들이 상호독립적인 차원들dimensions, 속성들attributes, 혹은 측면들aspects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이는 행동경제학과의 비교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선택대상이 지닌 ‘차원‘은 재화나 물체들의 구체적인 속성, 화폐, 시간, 확률 등으로 다양하다. 이들이 서로 비교 가능하고 통약된다고commensurable 보아, 서로 상충되거나 대체보완관계에 있다고 상정한다. 여러 차원들 사이에 가중치를 부여해 하나의 수량으로 합산하고, 그 결과 가장 점수가 높은 대상을 사람들은 선택한다. - P59

여기서 상식적으로 이야기하는 ‘갈등conflict과 표준이론의 ‘정신적 교환tradeoff‘을 동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가령 두 가지 종류의 자동차 중 하나는 상대적으로 연비가 좋고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수명이 길다고 하자. 이 경우 둘 사이에 지배관계를 찾을 수 없으므로 갈등이 생긴다. 그런데 갈등에 머물면 표준이론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표준이론에 도달하려면 연비의 단위(리터당 주행거리)와 수명의 단위(몇 년)를 정하고, 양자 사이에 대체비율(몇 킬로미터와 1년이 같은지)을 찾아야 한다. 수량에 대한 이런 관심 없이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고민에 머문다면 그것은 아직 경제학적인 접근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 P64

표준이론이 화폐의 전용가능성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이를 너무나 당연시하기 때문이다. 사과 열 개가 책 한권을 대신할 수 있다면, 이들의 가격에 해당되는 1만원이 다른 1만원을 대신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표준이론의 입장에서 재화와 달리 화폐는 그 자체로 일차원적이고 동질적이므로 대체를 말할 필요조차 없다. - P66

합리적 선택이론은 사람들이 선택대상 등 선택상황에 관해 충분한 정보를 지니며 이를 효율적으로 활용한다고 전제한다. 기본적으로 완전한 정보perfect information 혹은 충분한 정보가 표준이론의 전제이다. 시장경제와 이를 유지하는 제도나 체제를 통해 정보가 모든 개인들에게 동등하게 공급되고, 경제주체는 주어진 시점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를 효율적으로 처리해 의사를 결정한다. - P69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다. 어떤 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의 차이를 강조할 뿐 이 틀의 공통적인 기반이나 정체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가령 한국인은 서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데, 우리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서양인들에게는 신기한 모습이다. 신고전학파는 자신들이 절차와 관련된 불변성을 전제로 두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행동경제학과 충돌하면서 이러한 전제가 비로소 전면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각 학파들 사이의 비교는 언제나 중요하다. - P74

표준이론은 서술적인 합리성이 규범적인 합리성과 다르지 않다고 믿기 때문에 결국 규범적인 합리성에 집착한다. 이에 비해 행동이론은 양자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반박하면서 서술적인 합리성을 강조한다. 행동이론의 시각에서 표준이론은 현실의 인간이 지닌 합리성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규범적인 합리성의 기준을 제시하는 데 그친다. 사이먼H. A. Simon이 내세운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이 행동경제학에 부합된다. - P80

표준이론은 동일 수량의 이익과 손실이 동일 수량의 쾌락과 고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해 이익과 손실 사이에 이러한 비대칭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 손실회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위에서 제시한 선택들을 해명할 수 없다. 나아가 표준이론은 절차 관련 불변성을 전제하므로 서술이나 규정에 따른 선택상황의 변동과 이에 수반된 손실회피의 등장은 더더욱 인정할 수 없다. - P92

전망이론에서는 확률이 그 자체로 인식되지 않고 결정가중치로 변형된다. 특히 불가능에서 가능으로의 변화나 가능성에서 확실성으로의 변화는 확률의 변동을 넘어서는 무게를 가진다. 전반적으로 결정가중치는 극단적인 확률이 과대평가되고 중간적인 확률이 과소평가되는 것을 반영한다. 이런 차이는 지불할 돈의 액수, 즉 지불할 의사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0%에서 5%로의 확률 변동이 30%에서 35%로의 확률 변동보다 훨씬 크게 인식된다. 또한 60%에서 65%로 늘어나는 확률보다 95%에서 100%로 늘어나는 확률이 훨씬 더 크게 인식된다. 카너먼은 이를 각기 가능성효과possibility effect와 확실성효과certainty effect라고 불렀다. 0%에서 5%로 변해 비로소 가능성이 생긴 것이어서 그 확률이 과장되고, 또한 95%에서 100%로의 변동은 보수를 보장하므로 과장된다.
이런 효과들은 당연히 기대효용이론이 의존하는 기대치나 이에 근거한 의사결정에서 벗어난다. - P95

한국인들의 일상에서 나타나는 연속과 불연속은 서양의 경제학이나 사회과학과 부합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다. 기본적으로 연속적인 수량이 불연속적인 질이나 범주로 바뀌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돈이 있다‘, ‘없다‘는 표현은 강력하게 수량을 질로 전환시키고 있다. 실제로는 돈을 많이 가지고 있거나 또는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인데, 이것을 돈이 ‘있다‘, ‘없다‘로 인식한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돈이 신분이나 권력 등 질적 범주로 쉽게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듯하다. 물론 ‘유산자有産者’와 ‘무산자無産者’는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이분법을 정확히 반영한 번역어이다.
그렇다면 명예와 관련된 ‘유명有名‘이라는 말을 보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는 의미이지만 ‘이름이 있다‘고 표현한다. ‘무명無名‘은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의미인데 ‘이름이 없다‘라고 표현한다. 정도상의 차이를 종류의 차이로 바꾸어 생각하는 셈이다. 신분이나 권력이 있거나 없다는 주장은 타당하지만 이름이 있거나 없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 P98

한국 사회의 입시는 극단적인 수량화와 극단적인 질적 구분의 결합이다. 이 점에서 한국의 입시는 권력과 돈의 결합, 정치의 장과 시장의 결합과도 같다. 전국의 수없이 많은 학생들을 모두 하나의 척도에 놓고 단일한 점수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은 시장의 가격에 가까운 수량이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점수를 석차나 순서로 바꾸고, 대학이나 전공별로 합격자와 불합격자로 나누어 분류한다. 이렇게 질적으로 구분되고 나면 학생들이 대학이나 전공 사이를 이동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분류가 권력과 신분, 돈, 명예의 차등을 가져온다. - P98.99

행동경제학에 의하면 인간은 처음 등장하는 대안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자신의 이익에서 벗어나는 경우에도 초기대안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표준이론에 의하면 경제주체들은 대안이 등장하는 순서에 관계 없이 이들을 균형 있게 고려하여, 자신의 이익이나 목적에 가장 부합되는 대안을 선택한다. - P119.120

부존자원endowment은 시장이나 법률 등 합법적인 경로를 통해 각자가 소유하게 된 재화나 자원, 지위나 권리를 말한다. 이 중 각자 누리고 있는 지위나 자격은 특별히 부존자격entitlement으로 불리기도 한다. 부존자원효과endowment effect는 경제주체들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에 집착해 이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것을 뜻한다. 이는 현재 가지고 있는지 여부가 특정 재화나 자원의 평가와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준거의존성이나 손실회피경향과 통한다. - P127.128

부존자원효과는 표준이론이 신봉하는 코스 정리Coase theorem에도 위배된다. 이 정리에 의하면 부존자원이나 재산이 처음에 어떻게 분배되어 있든 사람들이 교환을 통해 최종적으로 효율적인 배분 상태를 찾아간다. 부존자원효과는 사람들이 초기의 부존 상태에 더 집착해 이후의 선택과 배분이 적정 상태에 도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므로 이 정리에서 벗어난다.
시장에서 가격이 형성되지 않는 자연환경이나 공공재(청계천 복원)에 대해 흔히 비용편익분석cost-benefit analysis을 실시해 비용 대비 편익의 비율BC ratio을 구한다. 그리고 이에 근거해 보존이나 공급 여부를 결정한다. 그런데 행동경제학의 부존자원효과는 통상적인 비용편익분석이 기존 상태에 대한 주민들의 집착을 간과해 비용을 과소평가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 P129

(뒤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행동경제학은 구성요소들의 관계나 전체가 이루는 맥락context을 중시한다. 부존자원효과도 맥락에 따라 변동한다. 재화의 사용가치가 부각되는 맥락이나 상황에서는 부존자원효과가 발생하고, 교환가치가 부각되는 맥락에서는 이 효과가 약화되거나 발생하지 않는다. 고용관계와 같은 주인-대리인 관계에서는 교환가치가 부각되거나 회사를 위해 사원이 자신의 사용가치를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 이 때문에 부존자원효과가 관계 속에 묻힐 수 있다. 이런 연구는 인간관계가 중요한 한국 경제사회에서 부존자원효과를 적용할 때 고려할 사항이다.
부존자원효과는 행동경제학의 손실회피경향뿐 아니라 소유물에 대한 자아의 연장을 강조하는 인류학적인 견해에도 부합된다. 또한 자본주의에서의 소유욕이나 애착 때문에 동일한 물건이라도 소유 여부에 따라 가치가 변한다는 사회학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그런데 이것은 상당한 소유 기간을 전제한다. 그렇지만 소유 기간이 짧더라도 부존자원효과가 발생하여, 소유 자체나 애착에 의존하는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행동경제학자들도 있다. - P134.135

물론 표준이론에 대해서 행동경제학보다도 더 비판적인 관점들도 존재한다. 비판적인 경제학과 사회학은 부존자원효과에 수반된 것보다 훨씬 더 폭넓게 선호와 부존자원의 상호의존성을 지적해왔다. 이에 따르면 동태적으로 부존자원이 선호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거꾸로 선호가 부존자원에 영향을 미친다. 나아가 선호와 소득 자체가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
구체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생선회를 먹어본 적이 별로 없으므로 생선회에 대한 선호를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있다. 혹은 생선회를 먹을 수 없으므로 생선회에 대한 선호를 미리 접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소득제약이 선호에 영향을 미친 경우이다. 여기에 생선회 대신 유럽 여행이나 대학 진학을 대입해도 상관없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는 높은 나무에 달려 있어(제약) 닿지 않는 포도를 포기하면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나는 신 포도sour grapes를 싫어한다"(선호)고 말한다. 혹은 생선회를 먹고 싶어 열심히 일하고 이것이 소득을 증대시킬 수도 있다. 이는 선호가 소득에 영향을 미친 경우이다. - P136

•전력공급
캘리포니아에서 전기회사에 대한 선택을 연구한 결과, 사람들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이미 전기를 공급받고 있는 회사로부터 다른 회사로 옮겨가지 않았다. 주민들이 두 회사로부터 전기를 공급받고 있다. 회사 A는 요금이 비싸지만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데 비해, 회사 B는 요금이 30% 싸지만 공급이 불안정하다. 이 상황에서 현재 공급받는 회사에서 다른 회사로 옮기겠는지를 물어보았다. 원래 A를 사용하던 사람들은 60.2%가 여전히 A를 선택했고, 5.7%만이 B로 바꾸겠다고 말했다. 원래 B를 사용하던 사람들은 58.3%가 여전히 B를 선택했고, 5.8%만이 A로 바꾸겠다고 말했다. - P139

이같이 표준이론은 화폐로 표시되고 화폐로 집행되는 예산을 동질적이고 유동적인 하나의 덩어리로 간주한다. 이것이 소비자 선택에서 고려되는 소득제약에 내포된 의미이다. 이 때문에 화폐를 자유자재로 전용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이처럼 표준이론에서는 재화의 대체가능성과 화폐의 전용가능성이 함께 간다. 다만 표준이론에서 대체가능성은 명시되어 있는 데 비해 전용가능성은 묵시적인 전제이다. 이것이 묵시적으로 전제되는 이유는 그에 대해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P144.145

표준이론은 개인 차원에서 재화들 사이의 부드러운 대체를 가정해 ‘정신적‘ 교환을 상정한다. 정신적 교환이 통상적인 교환의 내면화라면, 정신적 회계는 통상적인 회계의 내면화이다. 따라서 표준이론의 ‘정신적 교환‘과 행동경제학의 ‘정신적 회계‘가 대립을 이룬다. 정신적 회계뿐 아니라 경제적인 합리성을 대변하는 통상적인 회계조차 경제학에서 상정하는 합리성의 엄격한 기준에서 벗어난다(표준이론과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복식부기는 계산적이고 도구적인 합리성을 대변한다. 이것의 등장을 설명하는 일이 사회학에서는 중요한 작업이어서 Accounting for Rationality라는 제목의 논문도 등장했다. 복식부기는 중세 이후 북부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주로 발전했고, 괴테J. W. von Goethe가 극찬했으며, 베버M. Weber나 짐멜G. Simmel이 중시했다. 이는 통약commensuration을 통한 추상화와 수량화에 의존해 객관성을 앞세우고, 여러 종류의 상충들을 상징하며, 대차의 균형과 동등성을 내세운다.). 표준이론은 효용과 돈을 모두 ‘흐름‘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설정하는 항목이 상세해지고 항목 간의 전용이 제한될수록 경제학의 합리성에서는 벗어나는 것이다. - P145

패키지 여행에서는 여러 재화와 서비스들을 일괄적으로 구매하고 이에 대해 일괄적으로 지불한다. 여행경비 250만원을 한꺼번에 지출하는 고통이 50만원씩 다섯 번 지출하는 고통보다 적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항, 호텔, 기차역, 박물관, 식당 등에서 여러 차례 지불하는 것보다 이들을 다 뭉쳐 한 번 지출하는 것이 지출의 고통을 줄인다. 이것이 정신적 회계의 관점에서 패키지 여행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 P150

•신용카드의 무이자 할부
한국의 신용카드 회사들은 슈퍼마켓 등에서 구매할 때 최대 12개월까지 무이자 할부를 제공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이에 대한 이용률은 의외로 낮다. 20%가 할부를 신청했고 그것도 대부분 10개월 이하의 기간 동안 이용했다. 표준이론에 의하면 이렇게 무이자일 때는 할부를 이용하고, 그것도 최대로 장기간 이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표준이론에서 볼 때 장기간의 무이자 할부를 피하는 현상은 이변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신적 회계에 의하면 손실을 회피하기 위해 여러 번 지불하는 것보다 일시불을 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할부를 택하더라도 단기에 그쳤다는 것은 신용카드 청구서에 여러 달에 걸쳐 등장하는 지불내역에 여러 차례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 P150

• 한국의 식당에서는 식사 내역과 그것의 비용을 적은 계산서를 해당 손님의 식탁에 가져다 놓는 일이 흔하다. 그런데 많은 경우 종업원이 계산서를 식탁의 구석에, 그것도 액수가 보이지 않게 뒤집어놓고 간다. 손님은 이렇게 놓은 계산서가 흉물이나 되는 것처럼 이것도 참지 못해 완전히 눈에 띄지 않는 위치에 옮겨놓는 경우도 적지 않다. 왜 그럴까? 우리는 아직도 돈을 정면으로 대할 수 없는 것인가? 예상되는 지출의 고통이 미리부터 식사의 즐거움을 손상할까봐 식사와 지불을 공간적으로 격리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정신적 회계에 가깝다. - P152

오마카세에서 소비자 선택이 부분적으로 정지되어 있다면 이를 대신하는 다른 장치가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소비자 선택을 대신하는 장치는 무엇인가? 오마카세라는 관행에는 장인에 대한 신뢰trust가 개입되어 있다. 의사에게는 어느 정도 자신의 몸을 맡기듯이, 요리사에게 좋은 음식에 대한 선택과 제조를 맡기는 셈이다. 소비자의 정보나 상식에 의존하지 않고 장인의 전문지식이나 기술과 직업윤리에 의존하는 것이다. 일본이나 독일과 같이 장인을 존중하는 유형의 자본주의경제에서 흔히 생길 수 있는 관행이다. - P153

그런데 행동이론에 따르면, 너무 많은 대안들을 부여하거나 각각의 대안에서 너무 여러 차원이나 속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오히려 선택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소위 정보의 과부하information overload가 걸리면 ‘더 많은 것이 부족한 것More is less, 過猶不及‘이 된다. 따라서 어떤 선택상황에서는 공급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만을 제공하도록 강제하고, 소비자는 관련이 없는 정보를 가려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 - P154

• 한국의 경제학자들도 선택을 중시한다. 여러 명의 경제학자들이 함께 식사를 하러 가면, 특히 미시 분야 학자들이 많으면 식사를 고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과도하게 다양성이 늘어난다. 시간이 오래 걸려 주문을 받으러 왔던 종업원이 돌아가는 경우도 있고, 제각각의 주문에 종업원의 얼굴이 어두워지기도 한다. 과거에는 종업원이 ‘메뉴를 통일해주세요!‘라고 압박을 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 다른 사람의 결정을 따라 하면서 선택이라는 고민거리를 덜었다는 안도감을 보이는 경제학자도 있다. - P154

이스라엘의 탁아소에서 실시한 현장실험을 소개한다. 직장에 가면서 탁아소에 맡긴 아이들을 정해진 시간에 부모들이 데려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부모들이 많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탁아소에서는 지각하는 부모들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벌금을 부과하면 부모들이 지각을 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 벌금을 부과한 결과는 그 반대였다. 지각하는 부모들이 늘었고, 지각하는 부모들이 더욱 당당해졌다.
지각이 이제 상품이 되었으므로 돈만 내면 늦어도 된다고 부모들이 판단한 것으로 이 연구 결과를 해석할 수 있다. 만약 이미 지각에 대해 벌금을 받고 있었는데 이 벌금을 인상했다면 지각이 줄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처음으로 벌금이라는 가격이 부과되었으므로 반응이 반대방향으로 나타났다. 새로운 벌금의 부과가 벌금이나 가격의 통상적인 인상과 같지 않음을 보여준다. 벌금이 없을 때는 지각을 부끄러워했으나, 벌금이 부과되면서 사람들이 지각을 돈만 내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상품과 같이 취급하게 된 것이다. - P156.157

이런 결과들에 의하면 0이 개입되는 상황에서 개인들은 통상적인 효용·이윤극대화나 비용편익분석을 수행하지 않는다. 가격이 올랐는데 수요를 늘리고(탁아소의 지각), 가격이 올랐는데 공급을 줄인다(헌혈),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준이론은 0의 효용, 가격, 확률에 특별한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가격 등이 0이 되는 상황에서도 개인들이 통상적인 계산을 수행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표준이론이 재화를 위시한 경제현상의 양적인 측면에 집중해 질, 종류, 범주, 개념을 중시하지 않는 경향과 합치된다. - P158

여섯째 전제에서 드러나듯이 표준이론은 질적인 경제현상까지 수량으로 파악하는 데 반해 행동이론은 양적인 경제현상까지 질적인 존재로 파악한다. 구체적으로 표준이론은 화폐, 확률뿐 아니라 재화도 효용을 통해 동질적인 수량으로 파악한다. 이에 비해 행동이론은 재화뿐만 아니라 화폐, 확률도 범주화해 질적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표준이론이 내세우는 대체가능성과 선택의 자유, 전용가능성, 통상적인 확률이론 등에 맞서 행동이론은 선택의 고통, 정신적 회계, 그리고 의사결정가중치를 내세운다. - P169

기저율 경시의 오류base rate fallacy는 모집단에 대해 사전적으로 알려진 확률이나 비율을 무시하고 주어진 표본이나 사례에 집착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사람들이 사전적인 확률을 경시하고 사후확률에만 집착해 베이지안Bayesian 추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표본의 크기와 관계없이 모집단의 대표성을 당연시하거나 비율이나 분모를 무시하고 분자로 나타난 도수나 숫자에 집착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통계학적인 추론이 합리적인 사고의 전제이므로 이 역시 합리성의 부족으로 이해할 수 있다. - P175

대출해줄 때 초기에는 미끼로 낮은 이자teaser rate를 부과하고 나중에 많은 이자나 수수료, 그리고 미상환에 대한 과태료 등을 물리는 관행도 이와 비슷하다.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은 초기의 낮은 이자율에 집착해 나중에 이행할 많은 채무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과도한 융자와 파산의 나락에 빠져드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관행은 상품이 지닌 속성들을 은폐하는 것이고, 이런 정책이 다차원적인 가격책정multidimensional pricing이다.
표준이론은 시장에서 기업들 사이에 경쟁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런 은폐가 유지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렇지만 기업들이 서로 담합하거나 묵계하고 있다면 이런 은폐가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또한 경쟁이 있다라도 합리적 소비자들이 대체수단을 강구하지 않는 한 부대사항에 대한 은폐된 요금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 P181

규정효과는 서술이나 수사에 의존하므로 선택상황의 내용(이라는 차원)뿐 아니라 그 내용을 담거나 전달하는 형식과 외양(이라는 차원)을 중시한다. 표준이론은 선택상황의 변치 않는 내용을 강조할 뿐 그것이 담기거나 전달되는 형식을 중시하지 않는다. 행동이론은 내용만이 아니라 형식도 중시하고, 양자 모두를 질과 양의 두 가지 측면에서 강조한다.
표준이론은 수학이나 통계자료에 대한 검증에 친숙한 반면 문맥에 대한 이해나 해석은 생경하게 취급한다. 이는 표준이론이 수사나 설득과 거리를 두고 있음을 뜻한다. 경제학자는 수사나 설득이 연설이나 정치 등에 국한된 것으로 간주한다. 이에 비해 사례연구와 해석에 치중하는 (심리학과) 행동경제학은 실증경제학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 P193

행동이론이 중시하는 선택의 맥락은 소비자 등 선택주체의 편집과 인지, 선택대안들의 범위 및 구성과 배열, 선택상황에 대한 서술 방식이나 제시 방식, 선택주체와 대상들이 모여 이루는 선택의 환경이나 배경이나 분위기 등으로 결정된다. 앞서 논의한 규정효과도 맥락형성에 포함된다. 선택 이외의 행위에 대해서도 이같이 말할 수 있다. 당연히 선택과 행위의 맥락을 결정하는 요인들은 다양하여, 표준이론이 인정하는 가격·소득·선호 등 주어진 정보를 넘어선다.
맥락의 의미는 준거의 의미보다 더 다양하다. 맥락의 의미는 그야말로 맥락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이러한 어려움은 어느 정도 원초적이다. 여러 요소들이 관계를 이루거나 전체적으로 모여 개별 요소들로 환원할 수 없는 출현적인 성격을 보이는 것이 맥락이므로 이를 쉽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행동경제학에 의하면 이런 맥락에 따라 선택상황에 대한 이해가 바뀌어 선택의 결과가 달라진다. - P198

재화뿐만 아니라 어떤 의견이나 입장에서도 사람들은 중간으로 가는 경향이 있다. 회의장에서 두 가지의 극단적이고 대립되는 견해가 등장하면 다수의 사람들이 타협안으로 중간을 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들은 좋게 보면 온건파이고 나쁘게 보면 기회주의자이다. - P200

•포도주의 진열 형태
컴퓨터뿐만 아니라 포도주도 진열하는 데 따라 판매량이 달라진다. 전통적인 미시경제학자였다가 행동경제학에 관심을 갖게 된 맥패든D. McFadden은 보스턴에서 해물식당을 경영하는 친구에게 자신이 새로 익힌 이론을 알려주었다. 그는 친구의 찬사를 기대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내가 모르는 것을 좀 알려줄 수는 없겠나?" 친구는 호텔 서비스 수업을 통해 이러한 효과를 이미 알고 있었다. 이는 경제이론이 현실보다 크게 앞서갈 수 없다는 것과, 표준이론보다 행동이론이 현실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P204

신고전학파에서 중요한 숫자는 1, 2, n이다. 2가 중요한 이유는 n의 주체, 재화, 가격, 산업을 둘로 단순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동경제학에서는 3명의 경제주체나 3개의 재화 등 ‘3‘이라는 숫자가 별도의 의미를 지닌다. 대비효과 등에서 세 번째 재화는 단순히 추가적인 대안이 아니라 맥락을 형성하고 선호와 선택 전체를 변화시킨다. 두 개의 재화만으로는 이러한 대비나 맥락을 상정할 수 없다. 여기서 세 번째 재화가 나머지 (n-2) 전체를 대변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부존자원효과와 관련해 구매자나 판매자 이외에 중립적인 선택인이 별도의 역할을 지니는 것도 이에 부합된다. - P204.205

행동경제학이 강조하는 맥락 속에서의 상호의존성과 표준이론이 강조하는 대체보완이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양자는 동일하지 않다. 그리고 양자의 차이를 파악하는 것이 행동경제학을 이해하는 데는 중요하다.
먼저 표준이론이 주로 다루는 선택상황 ①에서 선택대상은 [사과 x개, 책 y권]과 같이 특정 수량의 소비재 묶음이다. 여기서는 부드러운 대체보완을 설정해 무차별곡선을 그릴 수 있다. 이 경우 대체보완은 묶음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재화들 사이에 성립한다. 이에 비해 행동경제학이 주로 맥락을 논의하는 선택상황 ②에서 선택대상은 동일 용도에 쓰이는 단일 재화, 가령 컴퓨터 [A, B, C]이다. 이 경우 [사과, 책]과 같이 여러 제품들이 함께 선택되지 않고 하나의 제품이 선택된다. 여기서 상호의존적인 것들은 한 제품의 여러 차원이나 속성들, 가령 가격이나 용량이다. 표준이론에서는 특정 수량의 재화들이 차원을 이루는 데 비해 행동경제학에서는 가격과 용량이 차원을 이룬다.
(중략) 이보다 핵심적인 차이는 맥락의 변동이 개인의 평가기준 자체를 바꾼다는 것이다. 행동경제학에서 맥락의 변동은 대비효과나 극단회피 등을 통해 차원들의 중요도나 가중치를 바꾼다. 제3의 재화가 끼어들어 가격과 용량에 대한 선호나 평가기준 자체가 새로 형성되면서 두 차원 사이의 대체비율이 변동한다. - P206.207

등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등산에 관한 지식과 정보가 많아 등산장비를 구입할 때 동일한 소득수준에서도 고려할 대안들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에 대한 정보가 풍부하여 더 많은 책들 중에서 선택할 것이다. 이같이 특정 분야에 대한 관심의 차이가 대안들의 차이를 낳을 수 있다. 통일, 원자력, 생태계 등 이보다 복잡한 문제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넓게 보면, 소득이 주어지면 이 범위 안에서 이용 가능한 모든 대안들이 주어진다는 표준이론의 가정은 비현실적일 수 있다. 오히려 소비자들은 자신의 관심과 지식에 따라 모든 대안들의 집합 중 부분집합을 자신의 선택대안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고려할 대안들의 부분집합을 찾는 단계와 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단계로 선택 과정을 나누어볼 수 있을 것이다. - P209

표준이론에 대한 행동경제학의 비판은 선호의 안정성에 집결되어 있다. 행동경제학에서 선호의 불안정성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초기대안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더 나은 대안의 거부, 출발점인 현재의 부존자원에 따라 달라지는 선호, 맥락에 따른 선호의 변동, 대상의 모든 차원들을 파악하지 않는 편중, 좋아했던 것을 싫어하고 그 반대도 성립하는 선호역전preference reversal, (나중에 설명하는 바와 같이) 단기와 장기의 선호가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쌍곡형 할인 등이 그것이다.
행동이론이 주장하는 선호의 불안정성이 심해지면 선호역전이 발생한다. 선호역전이란 대안 X와 대안 y에 대해 x보다 y를 좋아했다가, 곧 거꾸로 보다 x를 좋아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선택, 경매, 대응에 따라 결과가 바뀌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선호역전은 기대효용이론이 전제로 삼는 선호의 안정성이나 일관성으로부터 가장 극단적으로 벗어나는 경우이다. - P228.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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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니어링의 본질은 이론의 수립이나 고수에 있지 않다. 그러한 이론이나 모델을 이용해 실제 세계에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다. 엔지니어링적 지식은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이론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경우도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경험적 지식은 그 지식을 관통하는 이론이 없다 하더라도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엔지니어링이 발전해 나가는 방식은 실험과 테스트,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도 해결책을 찾기 위한 시도의 역사로 요약할 수 있다. - P275

금융에서 자신의 생존마저 위협하는 거래는 도박과 다를 바 없다. - P288

켈리John Larry Kelly, Jr. 전략은 자신에게 우위가 전혀 없는 게임은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려 준다. 가령, 내가 이길 확률이 50퍼센트라면 켈리 전략의 판돈은 0퍼센트다. 따라서 이길 확률이 49퍼센트라면 나는 게임을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게임을 하면 할수록 큰수의 법칙에 의해 내 자본금이 계속 삭감되어 언젠가는 완전히 파산하는 것이 확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로또처럼 수익의 기댓값이 판돈의 반 정도에 불과한 모든 복권은 하는 만큼 돈을 잃도록 돼 있다고 켈리 전략은 말한다. 소프Edward O. Thorp는 우리가 게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우위가 실제로는 그다지 강건한 것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켈리 전략에서 제안하는 베팅 비율보다는 일정 비율로 더 줄여 베팅하는 이른바 ‘부분 켈리 전략(fractional Kelly strategy)‘을 취하라고 말한다. - P298

블랙Fischer Black은 스스로 과학을 한다는 사실을 좋아하고 재미있어했다. 그가 생각하는 ‘과학함‘이란 처음에는 바보같이 들리는 생각을 떠올리지만 나중에는 결국 그 생각이 너무 자명함을 깨닫게 되는 과정이었다. 그는 머리를 이용해 문제 푸는 것을 즐겼다. 그에게 문제를 푸는 과정이란 한 번에 되는 것이기보다 시행착오적으로 행해지는 것이었다. - P304

그(나심 탈레브Nassim Taleb)는 리스크라는 것이 계량 가능하다는 업계의 주장이나 학계의 지적 기만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로 인해 부도난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의 전 직원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 P316

실제의 자산 가격의 변동이 블랙·숄스 모델과 같이 무한하지 않은 표준 편차를 갖고 있는 확산(diffusion) 과정이라면, 그리고 매 거래에 아무런 거래 비용(transaction cost)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동적 복제 또는 동적 헤징은 이론에서 얘기하는 대로 옵션의 거래 시점부터 만기까지 완전한 무위험 상태를 달성할 수 있다. 이는 그러한 가정하에서 수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며, 여기에는 아무런 오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는 심미적 관점에서 보면 매우 만족스럽다.
그런데 옵션 시장을 조성하는 트레이더의 입장에서 실제로 옵션 북을 운용하다 보면, 위의 말은 책이나 논문에서나 성립할 수 있는 말로,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중략) 한마디로, 현실의 동적 복제 과정이란 계속 뒷북치며 거듭 손실을 입는 그런 과정인 것이다[기술적으로 얘기하면,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그 옵션 포지션의 감마(gamma, 옵션 가격을 기초 자산 가격으로 미분한 값이며 옵션 가격의 기초 자산 가격에 대한 민감도라고 이해할 수 있는 델타delta를 기초 자산의 가격으로 미분한 값으로, 델타 헤징을 수행할 때 그 헤징으로 인해 발생하는 손익을 나타냄)가 음수일 때만 그렇다.]. - P317

탈레브는 비정형 옵션 트레이더로 일하면서, 금융 이론에서 얘기하는 변동성과 무작위성이라는 개념이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옵션 거래는 기본적으로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견해를 명시적으로, 때로는 암묵적으로 나타내는 것인데, 그 옵션의 가격을 결정하는 복잡한 수학적 이론으로 다 잡아낼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그 거래를 통해 미래를 통제하고 있다고 오인하는 경우가 많지만, 운이라고 하는 요소는 이러한 우리의 믿음이 허망한 것임을 알려 주곤 한다는 것이다. - P321

가령, 0.001퍼센트라면 어떤가? 이번엔 이 러시안룰렛을 할 마음이 생기는가? 그 정도라면 하겠다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할 수 없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좋다. 그러면 이번엔 러시안룰렛같이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상황 말고 투자라고 생각해 보자. 신용평가사들이 AAA 등급을 부여하는 채권들은 그 부도 확률이 아마 위의 0.001퍼센트 정도 될 것이다. 그래서 투자를 하고 보니, 그 기초 자산이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만든 CDO의 메저닌 트랜치로 만든 CDO2의 메저닌 트랜치로 만든 CDO3였다. 결과는? 모두 알고 있는 바와 같다.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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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경영학이나 경제학 분야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 금융은 그러한 ‘협소한‘ 분야의 지식에만 의존하기에는 너무 커져 버렸다. 금융에는 응용수학, 통계학, 물리학, 공학, IT, 심리학, 법률 등이 모두 개입된다. 학문이라 불리는 거의 모든 것이 관련된 하나의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객체로 진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 바로 파생금융이 있다. - P6

금융은 외양도 굉장히 복잡해 보이고 다양한 분야로 전개되어 있지만, 그 잔가지를 모조리 쳐 내고 제일 중요한 줄기만 남기면 결국 2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소유권‘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의 쌍으로만 존재하는 ‘예금·대출‘이다. - P20

돈을 지불하고 어떠한 물건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하는 것, 이것이 금융의 가장 기본적인 모습이다. - P21

이와 같이 소유권의 소유는 단지 소유하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며, 소유권으로 인한 손실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일종의 성숙함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간혹 이러한 성숙함을 결여한 소유권자를 만나곤 한다. - P22

파생금융과 혼동되지만 사실은 파생금융이 아닌 것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복권과 도박, 보험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그 기초 자산에 해당하는 것이 결여돼 있으므로 파생금융에 속하지 않는다. 가끔 파생금융이 로또 같은 대박이 가능한 투기적인 것이 아니냐는 얘기를 하곤 한다. 파생금융을 로또와 같은 목적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파생금융의 본질은 아니다. 감기약은 감기를 치료하라고 있는 약이지만, 감기에 걸렸다고 한 통을 통째로 먹어 버리면 당장 병원에 실려 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파생금융의 투기적 모습은 파생금융을 투기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사람들의 의도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지 그 본질은 아니다. - P29

보통 파생금융의 ‘파생‘이라는 말은 기초 자산으로부터 파생되어(derived) 나왔기 때문에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적어도 초기에는 특히 비정형 옵션 트레이더와 퀀트 사이에서는 그 가격 결정공식이 수학적으로 유도될(derived)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에 파생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파생금융의 가격을 구하는 것은 상당히 핵심적인 문제다. - P31

금융 시장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시장의 약점, 좀 더 엄밀하게는 사람들이 가진 약점들로 인해 각 기초 자산의 가격이 불합리한 수준으로 올라가거나 떨어지는 것이 다반사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보통 사람의 기준으로 이해되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손실을 입는 경우들을 보면 거의 예외 없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시장의 과거 동향을 약간만 관찰한 후(물론 당사자들은 충분히 관찰했다고 여긴다) 시장 가격이 그 상태에서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거래하다 그런 손실을 입는다는 점이다. 가격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은 거기에 수 배, 수십 배의 레버리지를 쌓아 올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하나만 잃고 끝날 것을 열을 잃고 백을 잃고 만다. - P38.39

통상적으로 파생금융의 기초 자산을 외환, 금리, 주식, 원자재, 신용의 5가지로 분류한다. 이 외에도 아직 규모 면에서 앞의 5가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다양한 기초자산에 대해 의미 있는 거래가 만들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부동산 가격, 인플레이션, 선박 운임, 자연재해, 날씨 등이다. 그 외에도 평균 수명, 비행장 소음, 경제적 지수 같은 것들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특이한 파생금융 거래도 만들어져 실제 거래되고 있다.
(중략) 탄소 배출권(certified emission reductions, CERS)은 파생금융의 가장 최근의 혁신으로 인정할 만하다. - P55

손실 총액이 3개월 전의 현물 가격 10달러와 3개월 후의 현물 가격 2달러의 차이인 8달러보다 배 이상 큼을 주목하자. 스택 헤지(stack hedging, 장기간에 걸쳐 있는 여러 만기 계약의 물량을 하나로 합쳐, 그 합친 물량에 해당하는 짧은 만기의 파생 거래를 하고, 만기가 도래하면 만료된 물량을 제외한 나머지 물량을 또 다른 짧은 만기의 파생 거래로 연장하는 식으로 헤지하는 방식)로 헤지하려고 했던 3개월 만기의 석유 매도 계약은 아마도 이 8달러의 이익을 봤을 텐데, 선물의 스택 헤지는 그보다 배가 넘는 손실을 입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이전 달의 선물이 종료되면서 새로운 달의 선물에 들어갈 때, 이번 달 현물과 새로 들어가는 선물의 가격이 상이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긴 만기의 거래를 짧은 만기의 거래로 연장해 가는 방식으로 헤지하는 것은 매우 불완전한 방식으로 가능하면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선물을 업으로 다루는 사람들은 물론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 P70.71

시장 리스크에 대한 견해를 갖고 레버리지를 일으켜 수익을 보다 언젠가 큰 손실을 보는 것은 파생금융에서 피해 갈 수 없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 P76

거래되는 기초 자산의 종류에 따라, 현물, 즉 spot의 의미가 그 즉시가 아니고 약간의 시간이 경과된 후를 나타내는 시장 관습이 있는 경우도 있다. 가령, 외환 현물 시장의 경우, 현물 거래의 의미는 2영업일 이후에 통화를 서로 교환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통화 종류에 따라서는 이것이 1영업일인 경우도 있다. 물론 외환 시장에도 그 즉시 교환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현물 거래가 있기는 하다. 이 경우 현물 거래라고 부르지 않고 금일 가치(value today) 거래라고 부른다. - P83

선물(futures, 선물의 영어명은 ‘futures‘로, 언제나 복수 형태로 사용된다. 선도의 영어명 forward‘는 단수로 사용되며, 복수의 선도 계약이 있으면 ‘forwards‘와 같이 사용될 수 있다.)은 자생적으로 오래전부터 거래되고 있던 선도를 거래소가 모방하여 내놓은 거래다. 그런데 거래 참가자가 충분하지 않으면, 즉 유동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아무리 거래소가 이러한 거래를 중개해줄 의향이 있어도 시장의 힘에 의해 그 선물은 사장될 수 있다. 따라서 거래소에서는 유동성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계약의 표준화를 추진한다. 이에 따라 거래의 기초 자산, 물량, 만기 등에 제약이 주어진다.
선도와 대비되는 선물의 가장 큰 특징은 일일 정산과 증거금이 있다는 점이다. 일일 정산(daily margining)은 선물 가격 변동에 따라 매일 장이 끝나고 나면 그 손익을 현금으로 정산하는 방식이다. - P88

선물 만기일의 선물 가격은 그 선물의 기초 자산의 현물 가격과 동일해지는데, 일반적으로 선물을 만기일까지 유지하는 것은 드물며 대개는 그 전에 반대 거래(내가 기존에 선물을 매수한 상태에서, 동일한 선물 계약에 대해 같은 수량으로 매도하면 기존 선물이 상쇄되어 취소된다. 이것이 반대 거래다. 기존에 선물을 매도한 상태라면, 이번에는 동일한 선물 계약을 매수하는 거래가 반대 거래가 된다.)를 통해 취소시키는 경우가 다반사다. - P89

외환 스와프나 통화 스와프는 외환 현물 거래와 일련의 외환 선도들의 합으로 만들 수 있다. 가령, 달러 매입·매도 외환 스와프의 경우, 달러 현물 매입과 달러 선도 매도의 두 거래를 합침으로써 만들어 낼 수 있다. 또 1년 만기에 3개월 이자 지급 주기를 갖는 달러 매도·매입 통화 스와프의 경우라면, 달러 현물 매도, 3개월 만기의 달러 선도 매입, 6개월 만기의 달러 선도 매입, 9개월 만기의 달러 선도 매입, 그리고 1년 만기의 달러 선도 매입의 5개 거래를 합침으로써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단순한 개별 파생 거래를 합쳐 보다 복잡한 파생금융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은 금융공학 혹은 스트럭처링(structuring)의 가장 기본이 되는 원리다. 참고로, 한국은행이 중국인민은행(中國人民銀行)이나 미 연준과 맺은 통화 스와프는 기술적으로 보면 그 만기가 3개월이고 현금 흐름이 초기와 만기 2번만 있기 때문에 통화 스와프가 아니라 외환 스와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P97

순수한 의미의 스와프, 즉 델타원 파생 거래에 속하는 스와프는 그 교환 조건에 아무런 전제가 붙지 않아야 한다. 전제 조건이 붙으면 이는 사실 옵션이 내재된 파생금융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용 부도 스와프는 사실 ‘신용 부도 옵션‘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한데 시장 관습상 스와프라고 부르고 있다.
신용 부도 스와프는 두 거래 당사자가 있어야 하고 신용부도 사건의 참조가 되는 채권 혹은 회사가 있어야 한다. 내가 신용 보장을 구입하려는 측이라면 그 보장(protection)을 판매하는 거래 상대 A에게 통상 5년인 만기가 되기까지 미리 약정한 금액을 통상 3개월에 한 번씩 지급한다. 그리고 만약 신용 부도 사건의 참조가 되는 채권 B에 실제로 부도가 발생할 경우, 더 이상 아무 금액을 지급할 필요 없이 그 부도로 인한 손해액을 A로부터 보상받는다. 즉 B에 부도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만기까지 약정된 금액을 계속 지불하고 A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않은 채로 계약은 종료되는 것이다. 여기서 지급하기로 되어 있는 금액을 ‘스프레드(spread)‘ 혹은 ‘프리미엄(premium)‘이라고 부르며, ‘보장 원금 대비 퍼센트‘ 형태로 표현한다. - P99.100

앞에서 보았듯이, 델타원 파생금융은 기초 자산 가격이 변동함에 따라 그 파생금융 거래 가격도 일정하게 변하는 특성이 있다. 그런데 그 파생금융 거래에 일정한 조건을 추가로 부가하고 그 조건의 만족 여부 등에 따라 지급 조건도 달라지는 계약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특정 조건을 부가해 지급·교환하는 기초 자산과 금액도 다르게 만든 파생금융 거래를 총칭해 ‘불확정적 청구권(contingency claim)‘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보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명칭이 있다. 바로 ‘옵션(option)‘이다. 이 옵션의 가격과 기초 자산 가격의 관계를 2차원 평면상에 그려보면, 델타원 파생금융에서처럼 직선으로 표현되지 않고 꺾은선 등으로 그려진다. 이 점에 착안해 ‘비선형적(nonlinear) 파생금융 거래‘라고도 한다. - P101

옵션 기법과 이론은 응용수학과 공학적 지식을 필요로 한다. 이는 자산 가격의 변동성을 감안한 모델링 결과가 물리의 열전달 방정식의 변형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당시 미국과 구소련 간의 긴장이 많이 완화되어 미국 국방 분야 일자리가 많이 줄자, 갈 곳이 없게 된 물리학 및 수학 박사들이 금전적 보상을 약속하는 월가로 몰려가 ‘퀀트(quant)‘라는 새로운 직군을 형성했다. 금융 지식은 전무하지만 방정식을 풀 수 있는 이들을 월가에서는 ‘로켓 과학자(rocket scientist)‘라고 부르기도 한다. 글자 그대로 대륙 간 탄도 미사일이나 우주선 개발 등의 업무를 하던 이들이 금융 시장에서 일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 P102

옵션은 앞의 선도와 비교해 보면 그 특징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선도는 두 거래 당사자 모두에게 의무다. 이에 반해, 옵션은 누가 사고 누가 팔았느냐에 따라 한쪽은 의무만 지고 아무 권리는 없는 반면 다른 한쪽은 의무는 없고 오직 권리만을 보유한다. 여기서, 권리는 없고 의무만 지는 쪽은 옵션 매도자이며, 의무는 없고 권리만 갖는 쪽은 옵션 매수자다. 영어로 ‘롱(long)‘과 ‘쇼트(short)‘라는 표현도 사용하는데, ‘옵션을 롱한다‘는 ‘옵션을 보유했다‘ 즉 ‘옵션 매수자‘라는 의미이고, 반대로 ‘옵션을 쇼트했다‘는 의미는 ‘옵션을 팔았다‘ 즉 ‘옵션 매도자‘라는 의미다. - P102.103

콜옵션(call option)과 풋옵션(put option)의 롱 포지션과 쇼트 포지션을 적절히 조합하면 어떤 형태의 지급 구조도 만들어 낼 수 있다. 또 앞에서 논한 선도도 보기에 따라서는 이 콜옵션과 풋옵션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만약 선도를 매수한 상태라면, 이는 콜옵션에 대한 롱 포지션과 풋옵션에 대한 쇼트 포지션을 취한 것과 전적으로 동일한 상태가 된다. 이렇게 보면, 모든 파생금융의 가장 작은 기본 구성 요소는 바로 이 콜옵션과 풋옵션이라고 할 수도 있다. - P104

아시아식 옵션(Asian option)도 있다. 아시아식 옵션의 가장 초보적인 형태는 바닐라 옵션의 행사 가격이나 만기 가격을 하나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정한 기간 동안 관찰된 가격의 평균을 내 정하는 것이다. 만기 가격이 극단적으로 튈지 염려스러울 때 또는 내가 실제로 가진 리스크에 대한 노출 시점(exposure)이 여러 날에 걸쳐 분포돼 있을 때 이러한 아시아식 옵션이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장내에서 거래되는 주식 옵션이나 원자재 옵션은 이러한 아시아식을 채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 P105

(전략), 룩백 옵션(look-back option), 사다리 옵션(ladder option), 클리케 옵션(cliquet option), 샤우트 옵션(shout option) 등은 경로 의존성(path-dependency)을 가진 옵션들이다. 경로 의존성이란 만기에 기초 자산 가격이 얼마인지 외에도 그 가격이 만기에 도달하는 동안 어떤 값을 가져왔는가에 따라, 즉 값이 변해 온 경로에 따라 옵션의 만기 지급 금액이 달라지고 영향을 받는 것을 나타낸다. - P106

교환 사채(exchangeable bond, EB)는 전환 사채(convertible bond, CB)와 비슷하나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전환 사채에서 전환 옵션 행사 시 받는 보통 주식이 전환 사채를 발행한 회사의 것이었다면, 교환 사채는 교환 옵션 행사 시 받는 보통 주식이 교환 사채를 발행한 회사의 것이 아니라 미리 지정한 별개 회사의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교환 사채는 A회사가 B회사의 보통 주식을 어떠한 이유에서건 많이 보유하고 있어 이를 토대로 좀 더 유리한 조건의 자금을 조달하고자 할 때 발행되며 그렇게 흔하지는 않다. - P108

신주 인수권부 사채(bond with warrant, BW)는 글자 그대로 신주 인수권(워런트)이 보통의 채권에 부착된 것이다. 신주 인수권이란 새로 발행되는 주식을 우선적으로 인수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전환 사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엄연한 차이가 있다. 신주 인수권부 사채는 신주 인수권을 행사하더라도 기본 채권은 사라지지 않고 만기까지 이자가 발생되는 반면, 전환 사채는 전환 옵션을 행사하고 나면 채권 자체가 완전히 소멸돼 버린다. 신주 인수권부 사채를 발행하는 이유는 전환 사채와 유사하며, 따라서 신주 인수권부 사채의 이자율도 일반 채권의 이자율보다 역시 낮다. - P108.109

콜옵션에서 옵션 보유자가 만기에 권리를 행사할지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고 그것이 가치를 갖고 있는 것처럼, 사업 주체 또한 사업을 계속할 것인가, 확장할 것인가, 축소할 것인가 등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리가 있으니 그것이 옵션이 되고 그 또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규 사업이나 벤처 비즈니스는 단계별로 투자가 집행된다. 이와 같은 상황을 묘사할 수 있는 옵션에는 복합 옵션(compound option)이나 분할 불입 옵션(installment option) 등이 있고, 이런 옵션의 가격을 구하는 방식으로 위의 실물 옵션(real option)의 가치를 구할 수 있다. - P110.111

이와 같이 변제의 우선순위 혹은 손실 부담의 우선순위를 정해 계층적으로 증권을 발행하는 것을 ‘트랜칭(tranching)‘이라고 하며, 그 개별 계층의 증권들을 ‘트랜치(tranche)‘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프랑스어 ‘트랑슈(tranche)‘에서 온 말로, ‘조각(slice)‘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트랜칭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화금융을 페이스루(pay-through)라고 한다. 특수목적법인이 그냥 ‘패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 혹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 선택적으로 지급(‘페이‘)한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 P119

이러한 페이스루 기법을 통해 기존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대차 대조표에 자산으로 잡혀 있던 많은 채권이 유동화되었고 나중에는 더 이상 유동화할 자산이 부족한 상황이 되었다. 이는 곧 실제로 존재하는 부채가 아닌 합성적인 부채, 즉 신용 부도 스와프 같은 것을 담보 자산으로 해 CDO를 발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원금의 초기 투자가 필요하지 않은 파생금융 거래를 담보 자산으로 해 발행된 CDO를 합성(synthetic) CDO라 한다. - P123

사실, 주식도 보기에 따라서는 하나의 옵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식의 소유자는 그 주식이 발행된 회사의 총자산에서 총부채를 차감한 나머지 부분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 따라서 만약 미래 현금 흐름의 현재 가치가 현재의 총부채에 미달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현재의 총부채를 넘어서는 경우에만 받게 된다. 이는 바로 콜옵션의 지급 구조와 전적으로 동일한 상황이다. 옵션은 그 옵션이 쓰인 기초 자산에 비해 레버리지가 더욱 걸려 있고 모든 변화에 더 민감하다. 이는 주식 시장의 변동이 경우에 따라 왜 그토록 이유 없이 비이성적으로 증폭되어 나타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단초다. - P128

일반 개인 투자자들이 관찰하고 거래할 수 있는 ‘거래소가 공시하는 주가‘와 이와 같은 큰손인 ‘기관들이 자기들끼리 거래하는 주가‘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렇게 별개 가격이 동시에 성립되는 것이 공정한 것인지 묻는다면 또한 대답하기 어렵다. 어떠한 의미에서는 0.4퍼센트의, 이른바 유동성을 공급해 주는 일반 개인 투자자들은 큰손을 위해 열심히 제로섬 게임을 벌이며 가격을 발견하게 해주는 실험용 쥐와 같은 입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P134

반면, 선물을 통하면 가뿐하게 단 한 번의 거래로 한국 주식 시장 전체에 대한 거래를 마무리할 수 있으니 편하기 그지없다.
혹시 한국 주식 시장 전체를 추종하는 인덱스 펀드로도 이와 유사한 효과를 거둘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인덱스 펀드는 하루에 한 번 종가로만 거래할 수 있기 때문에 낮 동안의 가격 변화에는 무방비 상태다. 게다가 원금을 100퍼센트 투자해야 하므로 레버리지가 허용되는 선물에 비해 효율성도 떨어진다. 결정적으로, 한국 주식 시장 전체에 대해 공매도를 하고 싶을 때, 현물 주식으로 하려면 제약이 많아 어려움이 크고 인덱스 펀드는 아예 공매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반면에, 선물은 아무런 제약 없이 간편하게 한 번에 매도를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마디로, 주식에 대한 선물은 한국 주식 시장 전체에 대한 매수와 공매도를 레버리지를 일으켜 손쉽게 수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도구로서 존재한다. - P136

선물은 미래의 리스크를 헤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졌다고 흔히 얘기하곤 한다. 그런데 주식 선물이라면 거의 동화에 가까운 이야기다. 선물이 먼저 개발되어 적용된 기초 자산인 농산물의 경우는 그 계절적 요인에 따라 3개월씩의 만기가 의미가 있었다. 각 농산물이 주로 생산되는 달이나 수입되는 달 등이 중요하므로 3개월 만기로 해 선물을 거래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초기에는 거래소에서 얼마나 많은 수의 만기를 가진 선물을 거래해야 하는지 실험해 보기도 했다. 그 결과, 경제적인 의미가 없는 만기들은 아무리 거래소가 취급하려고 해도 시장 참가자가 없어 결국은 사장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런데 주식의 경우는 경제적으로 특별히 의미가 있는 미래 시점이나 계절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선물이 현물에 가까운 대용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오직 최근월물 한 가지만 거래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미래의 리스크에 대한 개념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 P138

선물·옵션에 뛰어들려거든 주식보다 레버리지가 많이 걸려 있는 것이 선물, 선물보다 레버리지가 많이 걸려 있는 것이 옵션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식하는 것이 필수다. 레버리지는 양날의 검과 같다. 내가 전망한 것이 맞아떨어진다면 하루아침에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지만, 반대로 틀리게 전망했다면 순식간에 자기 자본금을 잃고 시장을 떠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의 ‘보조 정리(lemma)‘라 할 만한 것이 나온다. 진짜로 큰 부는 주식 시장이 아닌 선물·옵션 시장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부가 선물·옵션 시장에 참가하는 모두에게 가능한 것은 아니다. - P145

9.11 이후 한국 선물·옵션 시장에는 일종의 학습 효과가 생겼다. 보통의 악재 수준이 아니라 초대형 재앙 수준의 일이 벌어져 주가가 폭락하면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고 옵션을 매입하는 투기 거래자들이 대량 양산된 것이다. 이 시점부터 한국 선물·옵션 시장은 급팽창했고, 한탕을 노리는 투기 거래자들이 활개 치는 곳으로 변질되었다. - P157

워런트는 아무리 잘 봐줘야 레버리지가 엄청나게 걸린 투기적 파생금융 거래다. 마치 새로운 첨단 금융 거래인 양 마케팅하고 거래를 진작시키려는 등의 모습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워런트는 2005년 12월부터 거래가 허용되었다. 이는 수입을 늘리려는 증권사와 거래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단적으로 얘기하면, 워런트를 통해 꾸준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유동성 공급자인 증권사뿐이다. 거래소도 워런트 거래에서 수수료 수입을 얻는다. 하지만 개인 투기 거래자가 워런트로 돈 버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매우 힘든 일이다. 유동성 공급자가 그 내재 변동성을 임의로 조정하거나 호가 고시에서 약탈적 전략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거래소는 워런트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는 홍콩을 하나의 롤 모델로 여기는 듯하다. 홍콩 사람들은 먹는 것과 도박에 대한 관심이 유별나다. 워런트가 홍콩에서 인기가 있는 건 도박의 하나로서 수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도박을 장려하는 사회치고 오래가는 곳은 없었다. 적어도 역사는 그랬다. - P163

주가 연계 증권(equity linked security, ELS)의 핵심은 주식에 대한 비정형 옵션을 거래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점이다. 증권사는 개인 투자자에게 주가 연계 증권을 팔면서 받은 원금을 일부는 원금이 보장되는 자산인 예금이나 채권 등을 매입하는 데 쓰고, 나머지는 투자은행과 비정형 옵션이 내재된 스와프 계약을 맺는 데 쓴다. 증권사는 그렇게 확보한 비정형 옵션의 성과에서 일부를 차감한 뒤 만기에 개인 투자자에게 지급하는 것이다. 증권이라는 형태를 빌려 제공될 뿐 제작이나 관련 리스크 관리 등은 모두 해외 투자은행의 손으로 이루어진다. 단적으로 말하면, 국내 증권사는 여기에서도 브로커 역할을 하면서 수수료를 떼어 가고 있을 뿐 파생금융과 관련한 투자은행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없다(국내 증권사 한두 군데에서 직접 비정형 옵션을 제작하고 리스크 관리도 직접 수행하려 하고 있기는 하다. 브로커로서 돈을 버는 데만 익숙한 증권사들은 이런 리스크를 잘 지려고 하지 않는다.). - P167

수출 대금이 달러로 발생하므로 대부분의 국내 수출 기업은 달러를 팔아야 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달러·원 환율을 가능한 한 높이려는 유인을 가진다. 하지만 선도를 통해서는 도저히 손익 분기점을 맞출 수없고, 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있다 환율이 더 떨어지면 더 큰 손실을 기록할 것이 뻔하니, 대부분 키코(KIKO, 녹인Knock-In·녹아웃Knock-Out 환 선도의 알파벳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것으로, 환 리스크 헤지 목적의 파생 거래)의 950~1000원의 행사 환율이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나은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 P175

이렇게 헤지하고자 하는 대상 자산의 가치와 선도의 원금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 대상 자산의 해외 통화상 가치가 떨어짐과 동시에 해외 통화·원의 환율이 급격히 상승하는 일이 벌어지면 해외 자산의 잔존 가치를 능가하는 손실이 환 선도로부터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2008년 환 헤지형 해외 펀드에 돈을 넣은 개인 투자자들이 겪어야 했던 일이다. 가령, 해외 주식의 잔존 가치가 현지 통화로 40퍼센트에 불과한 상황에서, 환 선도의 원금은 초기의 100퍼센트 원금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환율이 초기보다 40퍼센트 이상 올라가면 그대로 원금을 넘어서는 손실이 발생한다. - P184

여기서 잠깐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내재 변동성(implied volatility, 자산 가격의 지속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특정 모델, 즉 블랙·숄스 공식을 통해 역으로 구한 것)은 앞의 델타원 파생금융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오직 옵션에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델타원 파생금융은 내재 변동성이 높은지 낮은지에 상관없이 가격이 결정될 수 있음을 이미 살펴보았다. 반면, 옵션 가격은 다른 변수도 물론 영향을 미치지만 가장 결정적으로 내재 변동성의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투기 목적의 거래에서 델타원 파생금융과 옵션의 쓰임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델타원 파생금융은 그 기초 자산의 방향성, 즉 기초 자산의 가격이 오를 것인가 내릴 것인가에 대한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일차적인 도구다. 이에 비해 옵션은 기초 자산의 방향성도 관련되지만 그보다는 미래의 불확실성이라는 측면에 대한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일차적인 도구로 작용한다. - P212

그래서 투자은행들은 깨끗하게 변동성만으로 수익이 판가름 날 수 있는 새로운 파생금융 거래를 개발하게 되었다. 바로 분산 스와프(variance swap)와 변동 스와프(volatility swap)다. 그 이름이 의미하는 그대로 분산과 변동성에 대한 델타원 스와프 거래다. 여기서 분산은 변동성, 즉 ‘수익률 변동량 분포의 표준 편차의 제곱‘이다. 미리 정해 놓은 실현된 분산 혹은 실현된 변동성을 계산하는 식으로 그 값을 구하고, 이를 거래 시점에 미리 정해 놓은 고정된 분산 혹은 변동성과 비교해 그 차이를 주고받는 구조로 되어 있다.
가령, 변동성 스와프를 A가 매수한다고 하고 그 시점의 변동성의 행사 가격을 연 10퍼센트로 B와 합의했다. 만기 시점까지 실현된 변동성을 계산했을 때, 그 값이 연 12퍼센트이면 2퍼센트만큼의 차이에 미리 정한 원금을 곱해 B가 A에게 지불하고, 반대로 그 값이 연 9퍼센트이면 1퍼센트만큼의 차이에 원금을 곱한 것을 A가 B에게 지불하는 구조인 것이다. 이러한 만기 정산 방식은 앞의 선도 계약과 전혀 다를 바가 없음에 주목하자. - P214

그러나 블랙·숄스 모델과 국지적 변동성(local volatility) 모델로 실제 옵션 시장을 조성하다 보니, 이 모델들이 그다지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초 자산 가격이나 내재 변동성 값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여러 원인으로 변하는데 이를 감안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만들어진 것이 이른바 확률적 변동성(stochastic volatility) 모델이다. 이는 내재 변동성이 하나의 예측 가능한 값이라는 무모한 가정을 버리고, 이 내재 변동성 자체에 불확실성 혹은 변동성이있다고 가정한 것이다. 그래서 기초 자산 가격에 변동성이라는 개념을 주입시킨 것과 동일한 수학적 방식으로 내재 변동성이 그 자체의 변동성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내재 변동성의 불확실성은 그래서 ‘변동성의 변동성(volatility of volatility)‘이라고도 불린다. - P217

그럼, 투자은행의 옵션 트레이더가 실제 하는 일이 무엇일까? 한 올의 말총에 매단 칼 아래에 앉아야 했던 다모클레스(Damokles)처럼, 미래의 불확실성이라고 하는 칼을 머리 위에 둔 채 끊임없이 동적 복제에 의해 자신의 포지션을 헤지해 나가는 존재인 것이다. 먼 훗날의 일은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스스로를 변화시켜 나가며 가까운 미래의 불확실성과 싸우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무리 현재는 무위험 상태 비슷하게 만들어 놓았다 하더라도 잠시 후면 다시 위험 상태에 빠질 수도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계속 동적 복제에 의해 조정해 나간다.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렸다고 생각되면 다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마주해야 하는 시시포스, 예상 못 한 점프가 한 번 발생하면 날개를 잃고 떨어질 일만 남게 된 이카로스…… 이것이 옵션 트레이더의 운명이다. - P218.219

만약 이 보험 회사가 처음 생긴 신생 회사여서 (가령, 과거 데이터를 보니 평균적으로 1퍼센트가 사고 나고 그때의 평균적인 손실 금액이 1천만 원인) 이 보험 계약 외에는 다른 계약이 전혀 없는 상태라면 50만 원의 보험료를 덥석 받고 보험 계약을 맺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보험회사의 자본금이 500만원에 불과하다면 더더욱 그렇다. 아무리 확률이 낮다 하더라도 그 한 번의 손실이 큰 손실이고 이를 통제할 만한 다른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보험 계약을 파는 것은 위험하다(카지노에서 최대로 돈을 걸 수 있는 금액에 제한을 두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적용하는 법규가 다를 뿐, 사실 보험 회사와 카지노는 사업 모델이 꽤 유사하고 리스크 관리 수단도 그 근본은 동일하다.). - P223

다각화(diversification)란 사물들 간에 불완전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을 이용해 그 변동 가능성을 통제하는 방식이다. 통계학적 용어로 얘기하자면, 큰수의 법칙에 힘입어 표본 평균의 표준 오차(standard error of the sample mean)가 표본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 제곱근의 역수에 비례해 줄어드는 것을 말한다. 1개의 보험 계약을 다루면 그 리스크를 통제할 방법이 없지만, 유사한 보험 계약을 천 건, 만 건, 십만 건 이상 동시에 다루다 보면 그 특이성(idiosyncrasy)은 없어지고 (과거 데이터와 같이) 안정적인 1퍼센트의 손해율과 1천만 원의 손실 금액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험 계리를 하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이 다각화의 힘을 믿는 것처럼 보인다. 명백하게 얘기하지는 않지만 모든 리스크는 다 특이성만 있고 시스템적인(systematic) 리스크는 없다고까지 믿는 경향이 종종 있다. - P223.224

이처럼 계리적 모델로 가격을 정한 대상은 그 가정이 급격하게 변하면 전혀 손을 쓰지 못한 채 그냥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다. 다각화를 통해 그 특이성을 잡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특이성의 성격 자체가 바뀌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채로 손실을 입어야 하는 것이 계리적 방식이다. - P229

투자은행이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33년 미국의 글래스·스티걸 법안(Glass-Steagall Act)이 계기가 되었다. 이 법안은 1929년 미국 대공황에 대응해 마련된 것이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자금을 조달하는 창구 역할을 하던 미 주식 시장이 대폭락하자 미 정부는 자국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 자체가 완전히 훼손될 것을 우려했다. 이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 예금을 기반으로 하는 상업은행과 자기 자본 투자를 감행하는 투자은행을 분리하도록 했다.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투자은행은 망하더라도 상업은행은 망하는 일이 없게 한 것이다. - P237

자본 시장(capital market)은 회사의 투자에 관련된 자본을 공급해 주는 곳으로, 은행의 단기 대출과 예금으로 대변되는 자금 시장(money market)과 대비된다. 회사 자본은 크게 보아 주식 지분(equity)과 부채(debt)로 나뉜다. 그래서 투자은행의 자본 시장 부문은 주식 발행 시장(equity capital market, ECM)과 채권 발행 시장(debt capital market, DCM)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자본 시장이 원활하게 기능하려면 기존의 상업은행과 머천트 뱅크(merchant bank) 외에 실제로 이 자본 시장에 자본을 빌려 줄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하다. 그 역할을 담당할 기관, 즉 연·기금과 보험사가 정책적으로 육성되었다. - P239

이 자본 시장 대리와 기업 재무 자문이라는 두 역할을 합쳐 영어로 ‘인베스트먼트 뱅킹(investment banking)‘이라고 부른다. 우리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투자금융‘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적절할 듯싶다.
이 인베스트먼트 뱅킹과 투자은행이라는 말이 서로 비슷하다 보니 혼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심지어는 금융업계에 있는 사람들조차 이를 정확히 구별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 둘은 서로 바꿔 쓸 수 없는 말이다. 투자은행은 회사나 기관을 지칭하는 단어인 반면, 인베스트먼트 뱅킹은 자본 시장에서의 주식과 채권 발행을 도와주고 기업 재무 문제에 대해 자문해 주는 업무를 지칭하는 단어다. 즉 모건스탠리는 투자은행이고, 기업 인수·합병 자문은 인베스트먼트 뱅킹의 한 분야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베스트먼트 뱅킹은 투자은행이 수행하는 주요 비즈니스 중 하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투자은행이 인베스트먼트 뱅킹만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 P241

파생금융이 거래되는 시장은 발행 시장과 유통 시장의 엄격한 구별이 없고 하나의 시장으로 존재하는 것이 특징이다. 투자은행의 시장 부문이 헤지나 투기 또는 투자 목적의 파생금융 거래를 공급하고 나면, 그 거래로부터 발생하는 리스크를 헤지하기 위해 은행 간 거래 시장에서 다른 거래를 일으키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의 파생금융 거래를 수행하려면 투자은행의 여러 기능과 부문이 개입해야 한다. 현대 투자은행에서 근무하는 전체 직원의 80퍼센트 이상은 어떤 식으로든 파생금융에 관련된 일을 하기 위해 선발된다. - P244

상업은행의 배경을 갖고 있지 않은 독립 투자은행은 미국 금융 산업의 전유물이었다. 이들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까지 미국 금융계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미국 밖에서는 이러한 독립적 투자은행이 매우 예외적인 존재였는데, 비미국계 독립 투자은행으로 최근까지 활동하고 있는 곳으로는 로스차일드나 지금은 JP모건의 영국 사업부에 흡수된 캐즈노브 정도가 유일한 예일 것이다.
배타적 명성과 학벌, 가문적 혈통을 중시하는 미국 독립 투자은행의 투자금융 부문의 서열은 쉽사리 바뀔 수 없는 것이었다. 조금씩 변동은 있을지언정 큰 틀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유대계인 골드만삭스와 앵글로·색슨계인 모건스탠리가 항상 서열 1, 2위를 다투었고, 브로커에서 출발해 굉장히 공격적인 문화를 갖고 있던 메릴린치, 유대계 자본으로 골드만삭스보다도 역사가 오래다는 자부심이 남달랐던 리먼브러더스, 집안은 좋지 않지만 영민하고 공격적인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것으로 유명했던 베어스턴스가 각각 3~5번째였다. 이 서열이 워낙 강고했기 때문에 투자은행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 같은 회사가 눈을 돌리지 않는 영역에 진출할 필요가 있었다. 채권에 특화해 이름을 높인 샐러먼브러더스와 파생금융 거래에 특화해 이름을 높인 뱅커스트러스트가 그 예다. 둘은 앞서 얘기했듯이 1998년의 금융 위기하에 각각 상업은행인 씨티그룹과 도이체방크에 흡수되었다. - P247

이 그룹(3그룹 투자은행들)에 속하는 투자은행은 꽤 많다. 물론 좁은 비즈니스 영역만을 놓고 보면 앞에서 언급한 다섯 군데 투자은행보다 더 출중한 기량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우선 제일 먼저 프랑스 투자은행들이다. 프랑스에는 대형 유니버설 은행이 세 군데 있다. BNP파리바, 소시에테제네랄, 크레디아그리콜이다. 프랑스는 수학에 관한 한 언제나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해 왔고,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École normale supérieure)와 에콜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로 대변되는 엘리트 교육 기관이 있어 파생금융이 필요로 하는 고급수학적 자원이 풍부하며 엔지니어링의 사회적 기반과 문화를 갖고 있다. 이러한 배경이 있기에 위의 세 프랑스 유니버설은행은 파생금융 분야에서 굉장히 세련된 실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특히 그 기술적 역량만큼은 어느 투자은행에 뒤지지 않는 영향을 미쳤다.
파생금융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들을 ‘금융공학자‘나 ‘엔지니어‘라고 부르는데, 이는 얕잡아 보는 것이라기보다는 존경과 자부심을 담은 표현이다. 특히 소시에테제네랄은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주식 파생금융을 선두에서 혁신해 나간 투자은행이었다. BNP파리바와 소시에테제네랄에 비해 크레디아그리콜은 규모나 무게 면에서 가벼운 느낌이 없지 않다. - P254.255

거래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견해를 갖고 투자 혹은 투기 거래를 한다고 했을 때 그다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견해를 어떠한 방식으로 표출할 것인가이다. 가령, 우리나라 주식 시장이 상승할 것으로 전망한다면, 일반적인 자산운용사라면 그냥 한국을 대표하는 주식을 비율대로 사거나 그중 일부를 선별해 사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물론 한국 주식 시장이 상승할 것이라는 견해를 표현하는 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것이 최선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같은 견해를 갖더라도 현물 주식 외의 선물이나 옵션 혹은 구조화 거래를 통해 그 견해를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리서치를 통한 투자 및 거래 아이디어를 갖게 되면, 그다음에는 구조화 문제가 대두되고 그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할 때 파생금융 기법이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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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그들(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소위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을 대상화하기 위해 ‘퀄리아‘Qualia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빨갛게 잘 익은 사과를 볼 때 ‘빨갛다‘라고 느끼는 색은 사과가 가진 고유의 속성이 아닐까 본능적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한 지금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됐다. 이 빨강은 사과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사람의 시신경으로 700nm의 빛을 받아 뇌의 후두부까지 전달되고 느끼는 개개인의 ‘주관적인 어떤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뇌과학자들은 사과의 빨간색뿐 아니라 소리, 냄새, 촉감, 의도, 생각 등도 역시 뇌가 감지하는 주관적인 어떤 것인 ‘퀄리아‘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일률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의 주관적인 신호, 나아가 일종의 ‘환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류영준) - P23

고대 이집트의 벽화나 도자기를 보면 밝은 얼굴로 파란 꽃다발을 든 사람들이 꽃향기를 맡는 장면도 있는데, 이 꽃은 바로 이집트파란수련Blue Egyptian water lily이다. 그들은 이 꽃이나 씨를 찧어 수면제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류영준) - P25

의학서적인 《히포크라테스 전집》에서도 아편을 ‘고통의 구원자‘라 불렀다. (류영준) - P25

위험에 대처하고 먹이를 얻으려면, 즉 움직여야 ‘생존‘할 수 있었고 움직이려면 뇌가 있어야 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자주 인용되는 생물의 예가 바로 우리가 횟집에서 맛나게 먹는 멍게다. 멍게가 유생일 때는 바다를 헤엄치며 유영 생활을 하다가 돌에 부착 돌기가 붙어 정착이 끝나게 되면 뇌가 없어지기 시작한다. 이를 두고 미국의 신경과학자 로돌프 이나스Rodolfo R. Llinas는 "뇌는 운동이 내면화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류영준) - P27

이를 두고 독일의 동물학자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은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그 유명한 말을 남겼다. 뇌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뇌에는 입에만 들어오면 뭐든지 물어버리는 악어의 뇌, 엄마와 눈빛을 맞추고 교감하며 젖을 먹고 자라는 포유류의 감정의 뇌, 도구를 사용하고 소통하는 영장류의 뇌까지 어느 지점을 나눌 수 없는 연속적인 뇌가 동시에 한 사람의 뇌에 존재하며 서로 작용한다. 변연계limbic system에서 불쑥 생기는 ‘화‘를 대뇌가 주체할 수 없어 폭력 사태가 발생하고, 불에 데거나 목숨이 위태로운 경험을 했던 장소와 물건만 봐도 그때 기억이 되살아나 회피하게 되는 해마hippocampus의 기억력이 우리를 괴롭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기능을 탓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생존‘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생존에 필요한 뇌가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류영준) - P28

과학자들은 뇌라는 장기가 스스로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 우리가 의식하지 않아도 숨을 쉬게 하고 심장을 뛰게 하는 곳이 ‘연수‘와 ‘뇌교‘라는 사실, 편도체에서 감정이 생긴다는 사실, 기억을 만들어내는 곳이 해마라는 사실 등 많은 것을 알아냈다. 또 뇌의 어느 부위를 자극하면 냄새를 맡는 것처럼 느끼게 할 수 있는지, 손가락을 굽히게 하는지 점점 더 정확하게 알아내고 있다. (류영준) - P33

이제 인간은 그간 향정신성 물질을 포함한 천연물로만 신경을 조절하던 것에서 뇌에 전극을 넣어 증상이 있을 때마다 전기 스위치를 눌러 치료하자는 것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뇌심부자극술deep brain stimulation technique이다. (류영준) - P34

뇌심부자극술은 전신마취를 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뇌는 감각신경이 없기 때문에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통증을 느끼는 피부와 두개골만 부분마취를 하고 시술할 수 있다. 오히려 깨어 있는 환자와 시술 중 대화를 통해 정확한 위치를 확인해 전극을 삽입할 수 있다. (류영준) - P35

뇌심부자극술에 대한 이론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억제이론이다. 뇌의 특정 부위에 있는 뇌심부핵을 고주파로 자극하면 해당 부위의 기능이 억제되어 파괴술과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가정이다. 두 번째는 전기 자극을 주면 해당 부위의 출력이 증가하고 신경활성도가 증가한다는 가정이다. 왜 이렇게 상반된 가설이 존재할까? 아쉽게도 아직 명확한 답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뇌심부자극술의 정확한 기전은 지금도 완전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아니, 기전도 모르면서 치료를 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론적 근거가 불분명해도 사람에게 적용해 효과가 좋으면 시행해온 것이 임상의학의 역사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인지까지 알고 시행하면 더욱 좋겠지만 효과가 좋으면 시행하는 것이 최선책이라 생각해온 임상의학의 발전 과정처럼 뇌심부자극술 역시 그렇게 발전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극의 위치를 뇌심부핵 주변에 있는 신경경로의 활성화로 옮겨가고 있다. (류영준) - P38.39

목표지점에 전극이 도달하기 위해 탐침이 대뇌를 뚫고 들어간다. 이때 뇌에 있는 신경섬유는 아래에서 위로 퍼지는 부채살 모양이기 때문에 결을 따라 들어가면 다른 신경섬유를 끊지 않고 시술할 수 있다. 만약 탐침이 섬유 트랙에 90°로 들어간다면 신경섬유를 모두 망가뜨려 많은 뇌기능이 파괴될 것이다.
또 하나의 걱정거리는 혈관이다. 탐침이 혈관을 터트리면 피바다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술하기 전에 자기공명영상(이하 MRI)을 이용해 진입 방향에 산재된 중요 혈관을 확인하여 이를 피해갈 수 있게 미리 준비한다. (류영준) - P39.40

뇌를 자극하여 조절하는 기술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이 ‘침습적‘이라는 단어다. 칼로 피부를 절개하고 두개골에 톱질을 하여 뼈의 일부 제거한 후 기구를 뇌 실질 안으로 직접 넣는다면, 그것은 침습적 기술이다. 다시 말해 ‘침습적‘이란 말이 사용되면 어떤 방법으로든 시술 또는 수술이 동반되는 것이다. (류영준) - P41

인간이 전기를 이용해 머리를 자극한 일은 과학이 발전한 근대 이후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기원후 43년 로마의 의학자 스크리보니우스 라르구스Scribonius Largus가 쓴 책 《약제의 조합》Decompositione Medicamentorum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두통을 치료하기 위해 머리에 전기가오리(연안의 해저에 살며 홍어와 비슷하게 생긴 물고기로 우리나라에서도 발견된다. 등 쪽은 (+)극, 배 쪽은 (-)극으로 전류를 발생하고 8-400V의 전압으로 감전시켜 물고기를 사냥한다. 종류는 다양한데 큰 가오리는 어른을 넘어뜨릴 정도로 힘이 세다.)를 대거나 머리를 전기가오리가 담긴 수조에 넣었다는 기록이 있다. (류영준) - P43

일례로 2008년 6월 인도 법원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판결이 있었는데, 살인 사건의 증거로 뇌 스캔을 인용해 피의자의 뇌가 살인자만이 가질 수 있는 범죄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가졌다는 점을 근거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양지현) - P60

예를 들면, 평상시의 대화를 녹음한 음성도 그것이 건강 상태를 진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되는 경우에는 의료정보에 해당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특정 정당의 정치인에 대한 대상자의 반응을 파악하기 위해 측정한 뇌파 또는 뇌 영상은 민감한 정치성향 정보에 해당할 수 있다. 결국 뇌 신호를 기록하거나 응용하는 생활 반경이 넓어질수록 이 데이터의 성격은 더욱 가변적이고 다양해질 것으로 예측된다. (양지현) - P65

한편 미국 학자인 션Francis X. Shen은 개인을 개념적으로 ‘정신적 기능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mind reading과 ‘뇌 조직 그 자체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brain reading으로 세분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그리고 뇌 영상 기술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으로 인해 개인의 정신적 프라이버시mental privacy가 침해될 우려가 다소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형사소송 절차에서 MRI를 이용해 피의자에게 어떤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요청할 때 나타나는 반응을 확인한다면,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자기부죄거부권 제한 여부가 문제될 수 있다. 그는 검사 대상자가 응답하지 않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데이터를 분석하는 목적이 그의 마음을 추론하기 위한 것이라면 진술 증거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양지현) - P71

하지만 모든 종류의 침습적 자극 기술들은 끊임없이 신경을 자극하기 위해 몸의 어딘가를 잘라 전극들과 배터리를 몸속에 심어야 한다. 물론 모든 기기들은 몸 안에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은 환자가 전자 기계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눈치챌 수 없다. 그러나 환자가 공항에서 검색받을 때 금속탐지기는 몸속 기계의 존재를 쉽게 밝혀낸다. 인공 심장박동기를 단 심장질환 환자처럼 침습적 뇌 자극을 받은 환자도 금속탐지기가 유독 자신에게만 경고음을 울리는 이유를 일일이 해명하기 싫으면 번거로운 사전 절차들을 밟아야 한다. 침습적 뇌 자극은 환자와 장애인이 일상에서 어떤 불편함 없이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매끄럽고 흠 없는 기술‘이 아니다. (최신우) - P84.85

그런데 인류가 수백만 년 동안 진화하면서 인간의 인지기능은 외부 환경의 압박과 다른 기능들의 성장과 충돌하며 일정한 수준에서 더 이상의 발달을 멈추고 자연선택되었다. 자연선택된 인지기능은 다른 인지기능들과 서로 균형을 이룬 채 일정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를 인지기능들 간의 절충cognitive trade-off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비침습적 뇌 자극을 계속 사용한다면 특정한 인지기능은 강해지겠지만 다른 기능들이 약해지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비침습적 뇌 자극이 어떤 인지기능과 다른 기능들 사이의 균형을 깨뜨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신우) - P96

지금까지의 실험들은 ‘공정‘이 그저 선의가 아니라 상호 견제와 균형으로 달성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또 단지 뇌의 특정 부위를 활발히 자극하는 것만으로는 ‘전반적인 공정 능력의 향상‘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왜냐하면 오른쪽 배외측 전전두피질은 공정한 행동을 하도록 이해타산적인 계산을 하는 데 영향을 줄 뿐이지 무조건적이고 자발적으로 공정하게 행동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최신우) - P107

또 신경조절술의 안전성과 윤리적 정당성을 침습성에 따라 구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침습적 시술법은 효과는 크나 부작용이나 처치의 위험 또한 크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정당화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반면, 비침습적 시술법은 효과도 크지 않으나 부작용이나 위험 또한 크지 않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침습성은 신경조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것이지 사용하는 기법의 차이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환자는 물론 연구 대상자 및 일반 대중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대표적인 비침습 신경조절술인 경두개직류전기자극술은 약한 강도의 전기를 사용하는 경우지만 두 전극 사이에 전류 회로가 형성되고 이 전류 회로를 통해 활성화하고자 하는 조직 외 주변 조직이 모두 전기 자극을 어느 정도 받게 되므로 비침습적이라고 부르는 데 문제가 있다. 머리뼈를 절개하는지 또는 뇌실질에 전극을 삽입하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모든 종류의 신경조절술은 위험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경험적 연구 결과에 근거해 신경조절술의 위험 수준을 평가해야 하며 윤리적 평가 또한 이루어져야 한다. (유상호) - P139

신경과학의 대중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이유는 199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일종의 붐을 이루고 있는 신경과학 연구가 전형적인 거대과학big science의 양상을 띠며 대부분의 나라에서 정부의 강력한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언론도 일방향으로 기술을 설명하거나 정보를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것은 기술이 사회에 대해 높은 규정력을 가지는오늘날 새로운 기술emerging technology이 등장할 때마다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뒤이은 냉전 시기에 주로 나타난 거대과학의 특징은 이전까지 과학자 개인들이 연구 주제를 정하고 독자적으로 연구를 수행한 것과 달리 정부나 군부 그리고 기업 등의 조직이 연구를 주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쟁과 냉전이라는 급박한 전시와 준準전시 상황에서 과학과 기술이 국가에 의해 동원된 맥락에서 크게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전쟁기에 이루어진 원자폭탄 제조 계획인 맨해튼프로젝트, 최초의 전자식 컴퓨터인 에니악ENIAC, 전후 1950년대와 60년대 미국과 소련의 냉전 대리전 양상으로 뜨겁게 치달은 우주 경쟁 과정에서 이루어진 아폴로계획 등이 그 대표적 사례다. (김동광) - P20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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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적이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는 모든 방법과 절차 또는 접근법은 현상학적 이론에 익숙해야만 가능해진다. 이것은 필수적인 요구사항이다. 그러나 비철학적 맥락에서 생활세계, 지향성, 공감, 선반성적 경험, 지평, 역사성, 살 등과 같은 핵심적인 현상학적 개념을 적절하고도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에포케와 환원의 수행에 엄격하게 집착하는 것과 이를 고수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생산적인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후자의 절차들은 명시적인 철학적 초점과 의도를 가지기 때문이다. - P206

스티븐 크로웰Steven Crowell은 언젠가 현상학의 미래 전망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재능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이 매우 옳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는 철학적 현상학과 응용현상학 두 경우 모두에서 참이다. 그런데 나는 또한 현상학의 미래가, 유감스럽게도 여러 시점마다 현상학의 역사를 괴롭혀 온 일종의 종파주의적 진지전에 휘말리는 대신, 현상학적 과제에 공통적인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강화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공통의 강점보다는 내적 차이를 부각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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